키스 온 더 크림, 곧 따뜻한 커피에 녹아들 크림을 위하여

자극은 신선해야만 효과를 발휘한다.

강한 자극이라 할지라도 여러 번 반복되다 보면, 어느새 익숙해져 충격이 아닌 일정 패턴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처음 접했을 때 충격적이었더라도 반복되면 그것은 일상이 된다. 사람의 신경은 몇 번이고 되풀이되는 자극에 무뎌지도록 만들어져 있다. 주어진 자극이 경험으로 바뀌어 기억 속에 쌓이고 쌓여 굳어지는 것이다. 항상 모든 일들이 새롭게 다가오면 좋을 텐데, 그러면 매일매일 새 인생을 사는 기분이 들어 일상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소중하게 느껴질 텐데. 과거의 암울한 경험들이 망각을 뚫고 신선함을 주는 건 사양이지만, 지금 태평하게 잠들어 있는 눈앞의 남자에 한해서는 잠시만이라도 이러한 궤변이 적용되기를 바라며 카베는 숨을 들이쉬었다.

“알하이탐 서기관님, 급한 건입니다. 이 안건의 수리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

“야.”

“………….”

틀렸다.

일할 때 그나마 자주 듣겠거니 싶은 말로 자극하려 했지만 꿈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부러 목소리도 낮게 깔았는데.

오늘은 월요일이고 서기관은 아카데미아로 일하러 가야 한다. 이 녀석이 제시간에 일어나서 출근을 제대로 하든 말든, 엄밀히 따지면 카베와 하등 상관없는 일이긴 하지만 서기관의 부재로 인해 아카데미아의 여러 구성원이 겪을 불편을 상상하니 이 일이 마치 자신의 의무인 양 무게감이 느껴졌다. 반드시 알하이탐을 깨워서 아침까지 먹여 아카데미아로 보내고야 말겠다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명감이 가슴속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같이 사는 죄로 두고 볼 수 없을 뿐이다. 그저 그뿐이다.

아직은 제법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준비를 시작하면 카베가 만들어놓은 아침 식사와 함께 따뜻한 모닝커피도 즐길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이 녀석이 아침 식사를 하든 말든 카베가 알 바는 아니지만, 늦잠을 자다가 아침을 거르고 나가버리면 기껏 만든 요리를 테이블에 홀로 앉아 쓸쓸하게 먹어야 한다. 맞은편의 빈자리에 놓인 1인분의, 비워지지 않은 채 그대로인 접시를 바라보면서 말이다.

홀로 식탁에 앉는 일이 쓸쓸하다고, 언제부터 이런 식으로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을까. 이 집에 들어와 살기 전에는 잘 몰랐던 것 같은데. 부탁받지 않았는데도 굳이 이른 시간에 일어나 두 사람분의 식사를 준비하고 커피를 내리고, 실내에 점점 아침의 햇빛이 들어차면 그 온기를 타고 퍼지는 커피 향을 따라 알하이탐이 잠들어 있는 방으로 향한다.

이 집에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에는 들어오기를 주저했지만, 한 번 발을 들이고 나니 전에 품었던 온갖 망설임은 어디로 갔는지 당연하다는 듯 드나들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때나 문을 벌컥벌컥 열지는 않는다. 알하이탐에게도 사생활이 있을 테니까──라기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받고 싶어 하지 않을 때 굳이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다. 어차피 같이 살고 있으니 일과를 어떻게 보내는지 잘 알지만, 원래 이 집에 혼자 살았을 그를 존중해주고 싶었다. 얹혀사는 입장이기도 하고.

문을 연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노크는 하지만 대답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평일 아침마다 카베가 알하이탐을 깨우기 위해 침실의 문을 두드린 다음 조심스레 문을 열면 그는 어김없이 침구에 파묻혀 잠든 모습이다. 아침의 빛이 커피 색으로 잠긴 어둑한 방의 고요함을 깨뜨리는 일은 없다. 다가가는 한 걸음마다 따뜻한 커피에 떨어뜨린 크림을 휘저으며 나아가는 것처럼 묵직하다. 폭신한 아침의 빛이 눅진하게 몸에 휘감겨 피어오른 나른함이 다시 몸을 채울 때쯤 침대 앞에 도착한다. 그대로 시선을 아래로 내리면 규칙적으로 작게 오르내리는 윤곽이 보이고, 천으로 뒤덮인 다소 투박한 선의 테두리를 타고 올라가면 세상 모르고 잠든 알하이탐의 얼굴이 있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하게 굴며 잘 깨는 주제에, 아침에 깨우러 오면 꼭 이렇게 곤히 잠든 얼굴이다. 같이 살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혼자 알아서 일어나 준비를 했던 것 같은데, 카베가 깨우러 오는 일상이 반복되자 알하이탐은 점차 아침에 나태해져갔다. 아침 식사를 준비해놓고 제시간에 깨워줄 누군가가 있다는 데서 안심하고 자는 것 같았다. 알아서 잡일을 하겠다고 나선 건 카베 쪽이었지만, 은근슬쩍 이런 식으로 일을 늘리는 것 같아 약이 올랐다. 그러나 마음속 한구석에서 퍼져가는 온기가 기분 좋았다. 사소한 데서 의지하는 걸 보면 역시 후배답다. 해가 중천에 떠올라 한낮일 때의 빈틈없는 모습만 봐서는 상상하기 힘든 태도이다. 그 서기관이 매일 아침마다 잠투정을 하리라고 누가 상상하겠는가.

수면하기 좋도록 편안하게 가라앉은 이 방 안에 단둘이라는 건 함께한 몇 년을 거쳐 무의식에 새겨져 있다. 업무차 찾아온 아카데미아의 학자를 가장하는 방법도 효과가 없을 법하다.

무슨 말을 하든 잠들어 있는 알하이탐에게 카베의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의식의 밑바닥에 차곡차곡 쌓여 솜처럼 폭신하게 덮어주고 있다, 아마도──그렇게 놔둘 수 없지.

밤새 수면에 잠식된 몸을 곧바로 일으키기는 힘들어도 카베의 목소리는 그의 귀를 통해 스며들고 있을 것이다. 카베는 목을 가다듬었다. “흠, 흐음” 하고 작게 목을 두어 차례 울린 다음 결심을 굳히고 입을 연다.

“알하이탐, 역시 전에 제출한 사표를 지금 승인해주기는 곤란한 상황이야.”

“………….”

“그러니 현자가 되어주었으면 해.”

“………….”

창피를 감수하고 어린 소녀의 목소리까지 흉내 내어 나긋나긋하게 말해보았으나 눈뜰 기색은 없다. 너무 달랐나? 역시 다 큰 성인 남성으로서 쿠라 쿠사나리 데비를 연기하기에는 역부족이었나 보다. ‘현자’라는 단어에 곧바로 반응해서 벌떡 일어나 반박할 줄 알았는데……. 발상 자체는 괜찮았지만 단잠에서 깰 정도로 충격적이지는 않은 모양이다. 잠깐이었으나 어린 소녀의 목소리를 연기했다는 카베 본인의 자괴감까지 더해져, 방금 한 일은 머릿속에서 완벽히 지우기로 했다.

고개를 좌우로 휙휙 젓고서 카베는 어떻게 해야 알하이탐을 깨울 수 있을지 다시금 고민에 빠졌다──사실은 알고 있다. 어떤 방법을 써야 곧바로 눈을 뜨고 몸을 일으킬지. 알지만, 방금 써먹었던 쿠라 쿠사나리 데비 흉내보다 몇 배는 더한 후폭풍이 밀어닥칠 행위였기에 할지 말지 결단을 내리는 데 시간이 필요했다. 그렇게까지 해서 깨워야 할까, 하지만 잠깐의 수치를 견디고 나서 ‘장난이었다’라는 말로 웃어넘긴다 치면 그런 대로 무난한 아침을 맞기에 아직 늦지 않은 시간이다.

몸을 살짝 틀어 침대 위에 걸터앉는다. 괜히 긴장한 탓에 조심조심 무게를 실었는데도 한 사람의 체중이 더 얹어진 침대에서는 끼익 소리가 났다. 어차피 깨우러 왔으니 자신의 무게로 흔들리는 침대의 진동이나 작게 울리는 소리에 알하이탐이 일어나준다면 오히려 더할 나위 없는 일인데도, 무의식중에 숨까지 죽이고 있었다. 한쪽 손을 들어 알하이탐의 어깨에 대고 흔들어본다. 힘을 주어 세게 흔들지 못했다. 막상 침대에 앉아 잠든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면 깨우기가 망설여졌다. 붙잡은 어깨에서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 손가락을 떼어내었다. 손 안의 체온을 놓을 때는 항상 이렇게 아쉬워하는 자신이 있다. 떼어낸 손이 갈 곳을 잃고──정확히는 다른 곳에 더 닿아도 좋을지 어떨지 허공에서 망설였다. 둘 사이의 거리는 가깝고 그 틈을 채운 공기도 두 사람의 체온을 머금어 따스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미끄러져 흘러내려야 할 공기가 피부에 감겨 아래로 무겁게 끌어내리는 것 같다. 딱히 잠들어 있는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거나 만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단지 따뜻한 아침의 침실은 이 남자의 나른함으로 가득 차 있고 그를 깨우려 말을 걸어봐도 일어날 기색은 없고,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덩달아 침대 위로 가라앉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나태가 옮은 것처럼.

침대에 이르는 동안 헤치고 휘저었던 공기가 피부에 남아 눅진하게 달라붙었다. 몸이 무겁다. 손끝부터 가라앉을 것만 같다. 손가락을 타고 진득하게 흘러 떨어지는 크림의 무게를 거스르지 못한 채 가라앉은 손끝이 알하이탐의 머리카락에 닿는다. 어두운 방 안에 비쳐든 아침의 빛이 손끝을 따라 흘러내려 머리카락에 맺힌다. 그것을 짓이기듯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어 쓸어 넘기자 얇은 피부 아래에서 부드럽게 빛이 녹아들었다.

몸을 굽히고 고개를 숙여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댄다. 잿빛의 머리카락 위에 가볍게 내려앉는 벌꿀 색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오는 것도 익숙하다. 카베는 소리 내지 않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숨을 들이쉬었다. 둘 사이의 틈에 고여 있는 따뜻하고 달콤한 공기를 폐에 채우고 입을 연다.

“이, 일어나, 자기야…….”

거짓말처럼 두 눈과 마주쳤다.

여태까지의 다른 노력들에 웃음이 나올 정도로 허무한 순간이었다.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시선만으로 카베를 응시하는 알하이탐의 시선은, 뭐랄까……, 당황하는 것 같기도 하고 곤혹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는 치켜 올라간 사선을 유지하며 일그러지는 일이라고는 좀처럼 없는 양눈썹이 찌푸려져 있다. 감정을 다스려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만큼, 불시에 당한 공격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나 보다. 그래서 이 방법은 항상 효과가 좋다. 자주 써먹지는 않지만.

황당하다는 눈빛을 계속 보내 오는 알하이탐이 마치 정지 화면 같아서 점점 무안해진 카베가 되는 대로 떠들기 시작한다.

“이제야 눈을 뜨네! 알아서 좀 일어날 수는 없어? 네가 애야? 이 선배님이 아침 식사를 해다 바치면서 늦잠 자는 널 수고스럽게 깨우기까지 해야겠냐고. 방금 그건 네, 네가 하도 안 일어나니까……, 어쩔 수 없었어. 얼른 일어나기나 해……. 아침은 제대로 먹어야 할 거 아냐. 이미 커피가 좀 식었을 거야. 미지근해지기 전에…….” 

알하이탐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이리저리 돌리느라 그의 팔이 움직이는 것도 미처 보지 못했다. 어색하게 주절주절 쏟아내어 끝날 줄 모르던 말은 카베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지면서 어중간하게 맺어졌다. 알하이탐의 손이 카베의 어깨를 눌러, 그야말로 순식간에 옆으로 누운 꼴이 되고 말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경악을 내비치던 눈이 어느새 풀어져 있다. 평소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말에 놀란 것도 잠시, 머리 위에서 줄줄 쏟아지는 익숙한 카베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의식에 젖어들어 다시 노곤해진 모양이다. 자신의 잔소리가 이 후배에게 조금의 타격도 줄 수 없다는 사실이 새삼 절절하게 스며들었다. 아침 다 됐으니 일어나라는 소리를 듣고도 다시 잠들다니, 뻔뻔한 데도 정도가 있지. ……안 된다. 지척에서 마주하던 눈이 다시 감기려고 한다. 지금 깨우지 않으면 아침 식사도 정시출근도 꿈의 저편으로 사라질 것이다. 카베는 손을 뻗어 알하이탐의 어깨에 대고 흔들어보았다.

“알하이탐! 다시 자면 어떡해? 일어나라니까? 설마 너, 아까 그거 다시 듣고 싶어? 어차피 또 기막히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기나 할 거면서……. 오늘은 끝이야. 더 안 해줘! 야! 눈떠……, 일어나라고! 아침 혼자 먹기 싫단 말이야…….”

수면으로 긴장을 풀고 노곤해진 몸이라 어깨를 쥐고 앞뒤로 흔드는 카베의 노력도 나름 효과가 있었는지, 알하이탐은 눈썹을 또다시 찌푸렸다. 좋아, 이대로 조금 더 자극해서 잠에서 깨우면 아슬아슬하게──라고 생각했을 때, 카베의 몸에 묵직한 무언가가 툭 올려졌다. 점차 힘을 넣어 몸을 감싸 오는 그것은 알하이탐의 팔이었다.

“히야악──?!”

“시끄러워……. 조금만 더 자자.”

느닷없이 몸에 얹히는 이 무게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매번 이렇게 뒤집힌 비명이 새어 나온다. 뒤늦게나마 몸에 닥친 일을 파악하고 저항하려 해보았으나, 반대쪽 팔로 머리까지 감싸이자 온기가 훅 끼쳐 오는 바람에 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아직 잠에 푹 젖은 사람의 체온은 이렇게나 따뜻하고 포근하다. 묵직한 팔의 무게가 바쁜 아침의, 정확히는 바빠질 뻔했던 아침을 조용히 가라앉히는 것 같았다. 천과 피부를 통해 스며들어 의식을 무겁게 적시는 체온이 기분 좋다. 끊임없이 흐르던 시간이 멈춰간다. 의식과 함께 점점 느려지는 시간의, 거의 정체된 흐름이 달콤하다.

“……오늘…….”

바로 옆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느라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를 가다듬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말이 이어진다.

“회의가……, 있긴 한데. 안 가도 되고…….”

“……너 정말 제멋대로 일하는구나? 잘려도 모른다.”

“안 잘려.” 

카베를 끌어안은 양팔에 지그시 힘이 더 들어갔다. ‘안 잘린다’라는 대답을 듣고 작게 어깨를 들썩이며 쿡쿡 웃는 진동이 그대로 전해졌을 것이다. 카베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은 알하이탐이 나직하게 중얼거린다.

“커피…….”

“어? 커피 내리고 와서 향이 배었나 보네.” 

머리카락에다 코와 입을 파묻고서 두어 번인가 문지르고 깊게 숨을 내쉬더니, 알하이탐은 카베의 이마에 입술을 가볍게 눌렀다가 떼어냈다. 흘러나오는 목소리와 함께 머리카락 너머 이마에 닿는 호흡과 진동이 간지럽다.

“식어도……, 마실게.”

카베가 생각한 대로, 잠에 취해 몽롱한 와중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착실히 듣고 있었다. 카베는 방금 웃던 여운이 남은 얼굴 그대로 “응”이라고 대답했다.

“늦어도……, 되니까…….”

“응, 계속 말해.”

“아침……, 같이 먹고 갈게.”

“……응.” 

어깨에 대고 있던 손으로 윤곽을 타고 올라가 뺨을 감싸려 했지만 꼬옥 끌어안겨 저지당했다. 끌어안고 자는 베개가 된 기분이다. 깨우러 들어왔다가 침대에 함께 드러누워 ‘지금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듣고 있다니. 끌어안긴 탓인지 체온에 녹아 묵직해지기 시작한 의식은 알하이탐의 변명에 일리가 있다고, 정당하다고 납득하려 했다. 서기관 본인이 ‘참석할 필요 없다’라고 했으니 괜찮을 것이다. 적당히 일하는 듯 보여도 알하이탐 나름대로 고충이 있을 테고, 쌓인 피로를 풀기 위해 조금은 늦잠을 자게 내버려둬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따뜻하게 내려놓은 커피가 식을 테지만 제대로 마신다고 약속도 했다. 식은 커피를 다시 데울 수는 없지만, 뜨거운 열기가 가신 커피에서는 부드러운 시간의 맛이 난다.

부드럽게 목을 적시며 함께할 조금 늦은 아침을 꿈꾸면서 카베는 따뜻한 품속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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