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라히라, 바라던 거짓
커미션 3500자 / BL 2차
이번에는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히라코는 눈을 뜨자마자 가장 처음으로 떠올린 말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다행히 옆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 텅 빈 방에 저 혼자 남겨두고 다 나가 있다고 생각을 하니 약간 짜증이 나다가도 그들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생각하면 뭐, 나쁘지 않았다.
몸속에 자리 잡은 호로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버거운 존재였다. 그를 제 아래로 뭉개지 못한 게 아니다. 한 번 무릎을 꿇었으면 쿨하게 인정할 줄도 알아야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기어오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짜증날 뿐이다. 그래서인지 호로화를 유지하는 시간이 쉽게 길어지지 않았다. 우라하라는 그걸 완벽하게 잡지 못했다고 하는 거라며 정곡을 찔렀다.
그는 몸을 잘 썼다. 유연하고 동작이 가벼우면서 공격은 묵직했다. 친한 친구 덕분에 뒷배로 이번대 분대장 자리에 있었던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속으로 혀를 쯧 하고 찼다. 하긴, 그 시호인 요루이치가 호락호락한 성격은 아니지. 친분이 있다고 중요한 자리에 아무 사신이나 올릴 여자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가 몸을 잘 쓴다는 건 현세에 오고 나서 알았다. 나는 그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았다. 그렇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나 다시 느낄 때마다 입안이 씁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우라하라가 몸을 잘 쓴다는 게 이번대 출신이라서 잘한다 하는 수준이 아니라는 걸, 몸속에 호로가 들어앉은 다음에 알게 되었다. 그는 우리와 훈련을 해주었다. 본인도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갑자기 쫓기는 신세가 되었으니.
최근 표정도 어둡고 혼자 조용하게 생각하는 시간이 늘어나는 게, 이것저것 숨기는 것도 많아 보이던데. 말로 하지 않고 운동을 해서 푸는 김에 호로화 훈련을 도와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문제는 그거였다.
용케 호로에게 먹히지 않은 것까지는 괜찮았으나 그는 제 약점을 잘 알았다. 당연하다. 제 안에 들어앉은 호로 또한 저니까 저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아는 것이다. 새하얀 자신은 자꾸만 과거의 어느 모습을 끌어와 눈앞에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는 진실이었고 대부분은 거짓이었다. 정확하게는 제가 바라고 있던 거짓이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건, 가면이 반으로 갈라졌던 순간이 전보다 빨랐던 건, 제 안에 들어앉은 호로가 끌어간 곳에 우라하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벙하게 대장복을 걸친 그는 웃고 있었고 다정했으며 귀여웠고 상냥했다. 멍하니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어도 시간 가는 줄 모를 만큼 잘생기기도 했다. 평소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저는 바보가 아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사신들을 곁에 두고 흘려보냈겠는가. 그는 제게 쉽게 흘러갈 어느 누군가가 아니었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건 사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았다. 언제나 느꼈다. 스쳐가면서 인사를 할 때, 장난을 칠 때, 진지하게 말할 때, 저를 보고 히죽 웃을 때, 가슴에 콱 박혀오는 무언가를 굳이 한 마디로 표현해보자면, 그래, 사랑이다. 저는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른 사신을 마음에 품은 그를 사랑했다. 그 모습이 사랑스럽다고 하면 미친 것인가. 그러면 아마도 저는 미쳤나보다. 그리고 제 안에 있는 호로는 그 사실을 잘 알았다.
땅을 짚고 상체를 일으키자 어깨가 미칠 것처럼 아파왔다. 맞다. 호로화를 길게 이어가는 훈련을 하다가 우라하라가 저를 공중에서 바닥으로 내리 찍었다. 그때 다리가 올라왔던 부분이 정확하게 오른쪽 어깨였다. 아이고, 아파 죽것네, 망할 자슥 같으니.
웅얼거리며 손바닥으로 어깨를 감쌌다. 아, 원래 이렇게 예민하게 느끼는 사신은 아니지만 우습게도 그의 영압이 옅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어깨 위를 쓰다듬었다. 이미 한 번 거절당한 마음이었다. 더 이상 품고 있는 게 의미가 없다는 걸 안다. 하지만 어디 먼지 털어내는 것처럼 털어낼 수 있는 게 감정이던가. 그냥, 곱씹고 사는 거지. 지울 수 없는 걸 잘 아니까.
‘제가 귀찮은 건 싫어해서요.’ 그것은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밤에 술을 한 잔 걸치고 이불이 구겨지도록 뒹굴고 욱신거리는 허리통증을 느끼면서 밀려오는 잠기운을 이기지 못할 때, 그는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거웠던 눈꺼풀이 순간 번쩍 떠질 뻔했으나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감았다. 심장이 꽉 조여 왔다.
선을 그은 것이다. 달빛이 드리운 말간 얼굴로. 너와 이 이상의 관계는 싫다고. 나는 귀찮은 건 질색이고 이 이상은 귀찮다고. 하물며 그때는 편안하고 나름 안정된 삶을 누렸으나, 지금은 숨어서 목숨을 이어가는 것도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와 한 이불을 덮지 않은 게 벌써 몇 달이던가. 어깨뼈가 아작 나기 직전까지 맞았으면서도 드는 생각은 그딴 것뿐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옅게 남아있던 그의 영압이 콧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제 안에 자리 잡은 호로는 이 마음이 쉽게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잘 알았다. 그 점을 이용해서 가면을 쓰고 있는 제게 우라하라를 한 번 더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멍청하게 웃고 있는 얼굴도 아니고, 진지하게 정색한 얼굴도 아니었다.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모르고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그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리고 이 마음이 계속 되는 이상 듣고 싶어 할, 어쩌면 평생을 바랄지도 모르는 그 말을 천천히 꺼냈다. 사랑한다는 고백은 귀로 들어와 제 온몸을 휘감으며 힘을 빠지게 만들었다.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거짓이라는 걸 아는데도 가슴이 뛰는 게 웃겼던 것이다. 제 안의 호로는 그걸 잘 알았다. 그래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고 바로 환영을 걷어갔다.
히라코의 몸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우라하라는 하던 공격을 멈출 수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어깨를 내리 누르는 다리와 순간 반으로 갈라지는 가면과 시야에 가득 차오른 얼굴에 미소가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 절실하게 바라던 고백이 거짓으로 만들어낸 환상이라는 걸 똑똑히 마주한 순간. 그 찰나가 어찌나 길던지. 회녹색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던 그의 얼굴에 드리운 그늘. 순간 몸이 바닥으로 처박히면서 아득하게 멀어져가던 그가 안쓰러웠다. 미안하다, 아이젠 그놈을 미리 알아보고도 손 쓰지 못해서 너까지 끌어들이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가. 그는 쫓겨난 신세가 되었고 한동안 웃음을 잃었다. 걱정이 되는 마음과 달리 저를 들었다 놨다하는 호로는 거짓과 현실을 번갈아 보여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구겨진 이불이 보인다. 그리고 조금 드러난 다리에도 붕대가 칭칭 감겨있는 것을 보았다. 아무래도 떨어지면서 다른 뼈에도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회도를 쓰지 않고 붕대만 감아놓았다는 건 이제 곧 우라하라가 들어와서 제 상태를 확인하고, 저에게 의사를 물은 다음 치료를 할 거라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저는 원래대로 돌아와야 했다. 장난 잘 치고 느긋하고 제 감정을 잘 감출 줄 아는 히라코 신지로. 귀찮다는 이를 붙잡지 않는 예전의 모습으로. 그러나 한 번 들은 사랑은 자꾸만 제 귓가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거짓이라도 달콤하니 자꾸만 먹게 되었다. 부끄러워하던 모습이, 더듬더듬 고백하던 사랑이 얼어붙은 제 몸을 푹푹 녹이고 물러지게 만들었다. 제 안의 호로는 비웃었다. 그는 저에게 우냐고 물었고 저는 대답하지 않았다.
사랑에 눈물을 흘리다니, 내가 왜 그러겠냐고. 애초에 기대를 한 적이 없는 관계인 것을. 그러나 자꾸만 조여 오는 심장이 답답해서 숨이 거칠어지는 건 참을 수가 없다. 갈비뼈도 부러졌나, 왜 이렇게 아프지. 망할 놈 같으니, 하필 보여줘도 그런 거짓을 보여줘서 날 견딜 수 없게 만들어?
우라하라의 말이 맞다. 호로가 기어오르는 건 제가 제대로 누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번 무릎을 꿇게 만드는 걸로는 부족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독하게 마음을 먹고 한 번 더 무릎을 꿇려야 한다. 제 안의 호로를 조용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고 이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물러터진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의 것이라면 머리카락 한 올에도 반응을 하는 심장 가득하게 차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더 잘 숨길 수가 있을까. 이토록 넘쳐날 것이라면 약점이라도 되지 말 것을.
제 생각을 읽은 호로는 크게 웃으며 사라졌고, 저는 그를 따라 하하하 하고 웃었다. 제가 듣기에도 퍽퍽하게 마른 웃음이었다. 아, 차라리 눈물이라도 나면 좋으련만. 제가 사랑에 안절부절 하며 휘둘릴 정도로 여렸으면 좋으련만. 저는 단단하고 마르고 굳은 사신이었다.
그가 언제 올지 모른다. 그러니 웃음을 짓자. 안 그래도 영압을 읽기 어려운 사내가 지금은 숨어있느라 아주 제 흔적을 꽁꽁 지우고 있었다. 복도를 걷는 발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자, 이제 진정을 하자.
하지만 자꾸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 얼굴을, 아마도 평생을 듣고 싶어 할 그 고백을 잊을 수가 없어서, 잘못하면 그 거짓된 장면이 제 가슴까지 내려와 물들일 것 같아서 머리카락을 잡고 상체를 숙였다. 등과 어깨와 허리가 너무 아파서 머리가 띵해질 정도였다.
그러면 안 된다. 그늘졌던, 제 어깨에 가차 없이 다리를 내리꽂던 그를 생각해야 한다. 아니라고 말했다. 약간 가라앉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분명하게 밝힌 거절 의사를 곱씹고 또 곱씹으며 제 안의 호로가 만들어낸 거짓 장면을 밀어내려고 애쓴다.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바닷물에 빠져버린 것처럼 몸이 무겁고 숨이 쉬어지지 않고 어지럽다. 이곳에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비집고 들어올 틈도 없이 그의 모습이, 온통 그가 가득하다. 그래서 저는 바다 아래로 가라앉을 수밖에 없다. 조여드는 심장은 제자리를 찾을 줄 모르고 우라하라로 물든 머릿속은 맑아질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르고 굳은 제 눈은 눈물 한 방울 쏟아내는 방법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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