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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유켄, 사랑은 늘 위태로운

커미션 4000자 / BL 2차

커미션 by 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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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짱이 잘못한 건 없는데. 야치루는 아마 두 팔이 있었다면 팔짱을 끼고, 눈을 부릅뜬 채 자라키의 편을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검으로 돌아간 지금, 그렇게 할 수는 없다. 가만히 형태를 유지하며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최선이었다.

쿠로츠치는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스스로를 숨길 줄 모르는 남자였다. 발을 탁탁 소리가 나도록 바닥에 굴리면서 저보다 큰 남자, 자라키를 훌쩍 노려보고 있었다. 마음에 안 드는 걸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근육으로 된 뇌로 본인의 말을 이해나 할 수 있겠느냐며 비꼬는 게 전부였다. 하여간 애정을 줄 준비도, 받을 준비도 되지 않은 남자인 게 티가 난다.

저는 그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떤 마음인지 궁금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켄짱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저는 궁금했고, 궁금해 해야 했다. 안 그래도 제게 관심이 많은 사신이 어떻게 저렇게 싫고 짜증난다는 티를 팍팍 내면서 서 있을 수 있을까?

그는 가끔 저를 가지고, 그러니까 켄짱의 검인 저를 가지고 실험을 하자는 말을 많이 하곤 했다. 제 주인(이제는 이런 호칭이 맞겠지?)은 대부분 거절을 했고, 질척이게 들러붙는 것이 귀찮아질 때쯤 딱 한 번 알았다고 했다. 그래도 그의 부탁을 다 거절할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제가 본인이 과학자라고 말하는 남자의 손에 붙잡혀 있는 걸 보면 영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늘 그랬지만, 이 형태가 되고 나니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는지 더 잘 느낄 수가 있었다.

지금 이 감정은 혼란이었다. 제 마음으로 천천히 스며드는 느낌이 불안이나 괴로움과는 달랐다. 그는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 됐는지 제대로 파악을 못한 것 같았다. 그건 당연한 일이다. 쿠로츠치 마유리는 말을 잘 하지 않았다. 특히 본인의 감정이 어떤지에 대해서. 그를 탓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켄짱도 마찬가지니까.

그러니까 지금 서로 약속에 늦어서 30분을 늦게 만난 건에 대해서 이런 위태로운 분위기나 풍기고 있는 것이다.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그만인 것을. 켄짱은 길도 잘 못 찾는데, 30분만 늦은 게 어디야. 게다가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것도 아니잖아! 하고 말을 한다면,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자네가 늦을 걸 아는데 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어야 하지?

흥. 잘난 척은. 켄짱, 무시해버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넘실거렸고 약간의 고민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혼란이 제게 닿았다. 흠. 이럴 때는 그냥 무시해버리는 게 제일인데, 켄짱은 유독 저 남자에게만 자주 흔들렸다. 쿠로츠치 마유리가 무슨 짓을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남자를 볼 때마다 켄짱의 울렁거리는 감정과 흔들리는 심장을 자주 느낄 수 있었다.

그래, 그럼 이번만 봐주자, 켄짱. 야치루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차피 이제 입이 없어서 속으로만 중얼거릴 수밖에 없다. 그는 제 뜻을 알았는지 잠시 인상을 찡그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보통 이런 상황이 있으면 11번대 대원들은 아, 대장님 또 늦으셨습니까? 길을 잃으셨습니까? 하고 말하면서 알아서 넘겨버리고는 한다. 그러니까 말 그대로 늦은 것에 대한 사과를 해본 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 적 없는 것을 시도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쉽사리 입을 열 수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그는 하기로 마음을 먹은 것 같았다. 그러나 이 불안감, 그가 받아줄지 아닐지 모르겠다는 이 불안한 느낌은 제 몸을 차게 식도록 만들었다.

“자라키 켄파치, 할 말은 없나?”

“무슨 말.”

“아니, 지금 30분이나 늦어놓고 할 말이 없어?”

“너도 늦었잖아.”

“하아..”

하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잖아. 저는 자라키의 마음을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고, 연결되어 있는 사이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은 것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켄짱은 누군가의 눈치를 보거나 그 사신(혹은 사람)을 깊게 신경 쓰는 편은 아니었다. 내가 불편해? 그런데 어쩌라고. 딱 이런 식으로 구는 이였다. 그러니까 지금 이토록 쿠로츠치 마유리를 신경 쓴다는 것은 그에게 잘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있다는 뜻인데, 이럴 때를 대비해서 우리끼리 표현이라도 정해놓을 걸 그랬다. 싸우자고 말하는 거 말고.

자라키는 마음에 드는 사신이나 사람을 발견하면 무조건 싸움을 걸었다. 검으로 정정당당하게 보는 승부였다. 그 과정에서 서로가 더욱 친해지고 잘 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유일하게, 아니, 제가 검으로 돌아온 이후부터는 마구 싸움을 걸 지 않았다. 그것은 그만큼 마음에 드는 상대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어쩌면 지금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서 지금 앞에 서 있는 쿠로츠치 마유리 같은 경우, 그를 볼 때마다 켄짱의 울렁이는 감정이 스며드는데, 글쎄, 이것에 이름을 붙이기가 어려웠다.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이게 모두에게 그러는 것도 아니고, 꼭 괴상하게 분장을 한 저 남자만 보면 그런 느낌을 느꼈다.

아마 스스로도 알고 있을 것이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더 툴툴거리고 할 말도 쉽게 못하고 머리로는 잘 아는데 말로는 절대 나오지 않는 그것을 혓바닥으로 뭉개고 짓이겨 녹이고 있을 뿐이었다.

다른 쪽은 어떤지 몰라도, 이런 상황이 오면 이들은 많이 위태로워지고는 했다. 정말 심하게는 켄짱이 넋을 놓고 지내다가 벽에 부딪혀 벽을 망가트리는 날도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해서 쿠로츠치 마유리는 괜찮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기술 개발국에서 도망친 아콘이 우리 부대에 와서 제발 저희 대장님이랑 화해 좀 해달라고 빌었던 적이 있는 걸 보니, 그도 만만치 않은 짓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어떤 짓을 하고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안 그래도 얼굴이 새하얀 남자가 더 새하얀 얼굴을 하고 와서 싹싹 비는 걸 보며 저 남자도 참 안쓰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그때의 일은 흐지부지 잘 끝났으니 망정이지.

제가 아직 참백도로 돌아가기 전이었다. 굳이 검을 들고 다니지 않아도 그와 항상 함께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때는 마음이 지금만큼 강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다만 우리는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지 못하는 것일 뿐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대로 서로 헤어져서 돌아간다면 켄짱은 또 허공만 보며 걸어다니다가 여기저기 부딪힐 것이고(만약 나약한 4번대 대원들과 부딪히면 중상을 입을 수가 있다, 그들이.) 그렇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그건 아마 12번대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지금 할 말이 없다는 건가?”

“.....”

“왜 대답이 없지?”

자라키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달싹거리면서 무슨 말을 하려다가 말고, 말을 하려다가 마는 행동을 반복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말이 무엇인지를. 떠올린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말은 무엇인지. 그러니까 싸울 때처럼, 양손으로 검을 잡으면 더 강하게 베어낼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을 떠올린 것처럼.

하지만 여전히 입술 밖으로 나오기 어려운 그 말이 빙글빙글 입안을 돌았다. 쿠로츠치도 그런 상황을 눈치 챘는지 가만히 켄짱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는 더 이상 화를 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기대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분노를 잘 드러내는 만큼 다른 감정도 표정에 잘 드러냈다. 어느 정도는 숨길 줄 알았는데 기쁨이나 호기심 같은 것은 얼굴에 그대로 써있는 수준이었다. 그게 한계에 다다랐다고 생각할 때쯤이면 그는 이를 드러내고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은 말 그대로 소름이 끼쳤으나, 켄짱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우물우물 한참을 망설이던 이는 마침내 입을 열고 답답한 것을 토해내는 것처럼 말했다.

“그러는 너도 늦었으니 나에게 할 말이 있지 않나?”

아아, 켄짱 그게 아니잖아. 손이 있었다면 이마를 탁 하는 소리가 나도록 짚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게는 손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닦달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지금 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말해놓고 본인도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우물거렸던 말이 저거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니! 아니라는 것을 저는 안다. 다른 사신들은 몰라도 저는 알고 있다.

그는 분명 사과를 하려고 했다. 그걸 애써 떠올리기까지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쉽사리 말이 나오지 않는다고 해서 방향을 아예 꺾어버리는 건 너무 당황스러운 일이잖아? 물론 우리 켄짱이라면 그럴 수도 있어. 야치루는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다. 머리가 없으니 정말로 끄덕거릴 수는 없고, 검날이 빛을 받아 반짝댔을 뿐이었다. 대체 뭘 그럴 수도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머리를 깨물어 줄 생각이었다. 아, 이제 가진 것이라고는 칼날뿐이라서 자칫하면 머리를 베어버릴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이대로 넘어갈 수는 없었다. 그때, 한동안 쿠로츠치 마유리와 만날 수가 없어서 멍을 때리던 그때의 켄짱은 뭐든 즐거워 보이는 게 없었다. 다시 그런 모습을 봐야 한다고 생각을 하면 가슴이 많이 아프니까, 그리고 저 남자가 먼저 사과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먼저 시도해보자.

등을 쓰다듬었다. 그의 등을. 언제나 제가 매달려 있던 그 자리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행동에 그도 느낌을 느꼈는지 약간 구부정하던 허리를 펴면서 한숨을 내쉰다. 그리고 거 참 귀찮아 죽겠다는 식으로 말을 툭 내뱉었다.

“미안.”

“뭐라고?”

“늦어서 미안. 됐지?”

끝에 됐지? 하는 말은 안 붙여도 됐을 텐데. 그래도, 우물쭈물이라도 그런 이야기를 한 게 어디겠냐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제 돌아올 말은 정해져 있었다. 괜찮다거나, 용서해주겠다거나, 나도 늦어서 미안하다거나..

“드디어 인정을 하는군.”

그렇다. 저런 남자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는 당당한 자세로 팔짱을 끼고, 턱을 높게 치켜든 채 당당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런 쓸데없는 일에 내 귀중한 30분을 소비하다니, 이걸 어떤 식으로 갚을 셈이지? 자네의 30분과 나의 30분은 천지 차이라는 걸 알아두도록 해. 나는 그 시간에 귀중한 실험을 하고 있고, 근육으로 찬 자네 머릿속은 오로지 싸움 생각뿐이잖아.”

켄짱의 가슴이 크게 울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고, 저 말이 거슬리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가 떠오르지 않는지 답답해 보이는 눈치였다. 말로 잘 푸는 법을 몰랐다. 그건 서로 마찬가지였다.

그도 말해놓고 앞에 서 있는 이의 반응을 살피더니, 이건 아니라고 생각을 했는지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서로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굉장히 무겁고 어두운 침묵이었다. 한 사신은 말실수를 했고, 다른 사신은 말을 엇박으로 받아쳤다. 서로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중간에 서서 제지를 해줄만한 이도 없었다. 바라보고 있는 야치루도 어떻게 해줄 수 없었다. 오로지 둘 만이 풀어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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