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판14] 우리 집

[헤르히카] 대면

해야했던 일과 해버린 일

모험록 by 기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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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월의 종언 : 6.0

89 던전 차용 (내용상 딱히 던전 자체가 상관은 없지만?)

- 처음부터 끝까지 오타쿠 심장을 강타한 이 캐를 한번이라도 쓰지 않으면 성불 못할 것 같아서 쓰는 날조망상글

- 공포 2,600자

남자는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에테르가 결정화된 파편들이 날아다니고 채 형태를 이루지 않은 영혼들이 떠다니고 있었다. 남자는 살아생전의 관찰력과 명석하던 두뇌로 빠르게 이곳이 어딘지를 깨달았다. 별의 바다. 육신이 죽음을 맞이하고 혼이 에테르 계로 갈 때 거친다는 장소.

에테르에 덧씌워진 것들-기억 등-이 씻겨져나가며 그 혼을 정화한다는 주장을 하던 사람이 있던 것이 기억이 났다. 그렇지 않고서야 남자는 제 앞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그리 선명히 떠오를 수 없었다.

자신들과는 달리 생겼다며 메테이온과 같이 사역마라 여겼던 사람. 새하얀 백발을 그러모아 묶은 머리를 따라 흐르는 새하얀 베일. 또렷하게 앞을 관철하던 백안. 아모로티안들의 신체와도 같은 묵빛 로브가 아닌 처음보는 양식을 흐트러짐 없이 채워 맞춰입은 모습.

여자가 들고있던 창 끝이 자신을 향했던 것을 기억한다. 지킬 것이 있어 도망치는 남자를 네 명의 추격자가 쫓는다. 사냥감을 쫓는 포식자처럼 여자는 그들과 함께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곧장 달려왔다. 단 한 번의 후회도 하지 않고 단 한 번의 주저함도 없이 창이 휘둘러지고 남자를 무릎 꿇렸다.

"너였구나..."

남자는 사무국장을 막기 위해 마법을 쐈었고 그것을 막으려던 여자를 하늘 위에서 떨어뜨렸다. 그 때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겠노라 뱉었다. 그리고 그 직후 여자는 흰 빛의 조언자와 함께 하늘을 가로질러 돌아갔다. 에메트셀크가 여자를 향해 무언가를 말하고 그 말을 들은 여자는 단 한 번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그의 진명을 내뱉으며 손을 뻗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여자는 사라졌고 남자는 기억을 잃고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제 앞에 선 여자는 단 한 마디도 내뱉지 않은채 그 때와 같은 모습으로 남자를 내려다본다. 머리를 따라 흐르는 베일. 상체를 불편하게 죌 것 같은 옷. 새하얀 여자를 닮은 새하얀 창. 아무런 감정도 없는 그 시선을 받고 있자니 메테이온이 떠오른다. 아, 저 눈을 어디서 봤는지 이제서야 기억했다. 저건 감정을 없앤 사람의 눈이다. 세계에 지나치게 노출된 나머지 일말의 감정조차 가지지 못하게 된 사람의 눈. 그제서야 입가에 웃음이 흐른다. 남자는 여자에게 어떠한 감흥도 주지 못했음을 알았다.

여자는 아모로티안들을 잘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말했다. '그' 아젬의 사역마치고도 언어와 행동양식의 수위가 굉장히 높아 당시엔 신선했지만 별의 바다로 와 모든 것이 씻겨나가서야 깨달았다. 여자는 사랑스러운 것을 보고 웃으며 친절한 것에 친절을 주고 슬퍼하는 것을 위했다. 생명의 연소에 탄식해주었고 타인의 고민을 들어주었으며 불의에 분노하고 재앙에 맞섰다.

여자는 다른 시대를 사는 영웅이었다. 그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쳐버린 자신과는 다르게. 비로소 영혼의 끝에서 남자는 여자에게 말을 건다.

"나한테 실망했어?"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나는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조차 하지 못하겠다 말했어. 그 생각은 지금도 변치 않아."

이번에도 여자는 답하지 않았다. 눈을 깜빡이며 조용히 호흡하고 있었다. 분노도 원망도 담기지 않은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꿰뚫리는 기분이 들어 남자는 시선을 내렸다. 여자가 그보다 한참 작은 탓에 애써 고개를 내리고 시선을 돌려도 여자의 발끝이 걸린다. 어디로든 도망칠 수 없다는 듯이, 그 때처럼. 별의 바다. 혼들의 끝. 남자는 이제 도망칠 수 없고 여자의 한마디는 아직 나오지 않은채다. 이곳에 남겨진 원혼들이 둘의 곁을 스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여자가 입을 연다.

"당신은 메테이온을 지키고 싶어했지."

"...어?"

"메테이온이 가지고온 생의 답을 듣고 싶어 도망쳤어. 세계로부터 메테이온을 지키기 위해."

"...그랬지."

"메테이온을 위했다면 당신은 기억을 덮어씌워선 안 됐어. 에메트셀크와 희틀로다이우스로부터 당신이 생각한 그 이상의 주장과 동의를 이끌어내지 못할거였다면 최소한 당신의 기억은 남겨뒀어야했는데. 당신은 메테이온을 위한다는 이유로 그 아이가 도망치게 내버려뒀어. 그리고 메테이온은 재앙이고 종말이 됐지."

"....."

"당신은 메테이온을 위한게 아니야. 그냥 메테이온을 위한다는 이유로 메테이온이 망가지게 둔 멍청한 사람이지."

"....."

"파다니엘의 자리에 오른건...그래, 기억을 지운 후니 내가 할 말은 없지. 굳이 내가 해줄 이야기도 없고. 사실상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것도 약간의 궤변이야."

"...그럼 왜,"

"최초의 빛의 전사인 하이델린을 만들고 나와 내 동료들을 괴롭게 만들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게 만든 그 원흉을 한번쯤 책망해 보고 싶었거든."

"....."

"그뿐이야."

여자는 말이 끝났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흔들리는 눈동자로 그녀와 제 발 끝을 번갈아서 바라보다 이내 감아버렸다. 마른 웃음이 입술새로 흘러나왔지만 굳이 갈무리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조소였을지도 모르겠다. 남자의 메마른 웃음 위로 여자는 제가 쓰러뜨렸던 남자의 얼굴을 겹친다. 끝내 패배해 끝을 맞이한 남자의 얼굴을 덧씌운다.

둘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한다. 여자는 세계가 분단되기 전 아름답다고 여겼으나 그렇지 못한 자들 속 그들을 구하려했던 자들과, 그들로 인해 탄생한 자신과 자신의 연인을. 남자는 청명히 빛나던 눈동자가 검게 불타올라 푸른 창공너머 새카만 우주로 사라지던 자신의 아이와, 그 아이들로 인해 종말을 맞아 사라져버린 스스로와 동포들을.

둘은 각자 다른 생각을 하나 같은 것을 떠올린다. 멈춰버린 사람들. 자신의 과오. 해야할 일과 해야만 했던 일. 무수히 많았던 선택들과 그 결과가 지금의 둘의 형태다.

이미 알고 있는 결과를 매번 보는건 역시 괴롭다 느끼며 그녀는 길고 긴 숨을 내쉬었다.


잡담


너무 오타쿠의 심금을 울리는 캐라 안 쓸수가 없었다.....

내가 아모로트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이중성과 사랑과 관망, 도피를 한데 묶은 캐라 오너적으로 좋아하면서도 뭐 이런놈이 다 있어? 가 절로나오던 헤르메스.....

+ 22.5.29

쓴건 5.22인데 한섭때문에 열불나서 차일피일미루다 결국 효월 다 보고 올리네 하.......헤르메스 진짜...이 양날의 캐릭터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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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페어
#Non-C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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