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뿐인 토가사쿠

비를 피할 뿐인 토가사쿠

토가사쿠

빗방울이 사정없이 창을 두들겼다. 달려온 길이 멀지 않은데도 두 사람은 이미 홀딱 젖어있었다. 좁은 현관에 들어서자 사람 사는 곳 같지 않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가 두 사람을 맞았다. 사쿠라가 먼저 신발을 벗고 안에 들어섰다.

“잠깐……. 기다려 봐, 수건 줄 테니까.”

식기 하나 없는 주방을 힐끔 본 토가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뒤쪽의 신발장도 사용하지 않는 것 같고, 으레 있어야 할 가스레인지도 안 보였다. 사쿠라가 당당히 문을 열지 않았으면 빈집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바닥에 남은 물 자국에 눈길이 갔다. 저것이 지금 이곳에 남겨진 유일한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감은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현관에 나란히 서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겨우 수습한 뒤 들어간 방안은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이불만 덩그러니 놓인 방은 상상보다도 훨씬 황량했다. 토가메는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표정을 갈무리했다. 멋쩍은 듯하면서도 대충 아무 데나 앉으라고 퉁명스럽게 말하는 저 애에게 토가메가 할 수 있는 배려란 그런 거였다.

사쿠라는 물을 먹어 잔뜩 무거워진 제 교복과 토가메의 스카잔를 행거에 걸었다. 저것만큼은 수건으로 수습되지 않았다. 최대한 물을 짜냈으니 빨리 마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헤어드라이어조차 없는 집에서 내어줄 수 있는 건 저 조그만 행거와 옷걸이가 전부였다.

킁, 코 먹는 소리가 났다. 이제는 비 맞으면 감기에 걸릴 계절이다. 토가메는 너라도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사쿠라 역시 거기에는 동의했으나, 저 혼자 그럴 수는 없었다. 비만 피하게 해주려던 거라면 우산을 주고 바로 보냈어도 될 일이다. 하지만 사쿠라는 토가메를 집안에 들였고, 적어도 비가 그칠 때까지는 그가 추위에 떨지 않도록 해줄 요량이 있었다. 저 폭우 속에 친구를 혼자 돌려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너도 좀 쉬다 가지 그러냐……? 쑥스러움에 말이 짧아졌지만, 토가메는 용케 생략된 말을 눈치챘다. 그럼 부탁 좀 할게에. 선선히 웃으며 대답하니 사쿠라의 얼굴이 벌게졌다. 빗소리가 시끄러운 게 그치려면 아직 한참 더 있어야 할 것 같았다.

“네가 먼저 씻어.”

“사쿠라가 집주인이잖아아. 집주인이 먼저지.”

“보통 이런 건 손님이 먼저 아니냐?”

“집주인이 먼저라고 생각하는데에?”

어쨌거나 계속 젖은 몸으로 있을 순 없다. 번갈아 가며 씻기로 한 두 사람은 서로 상대에게 우선권을 넘기려 애썼다. 집주인이 먼저, 손님이 먼저라는 피장파장인 논리를 둔 입씨름이 한참 이어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공방이 마무리된 것은 사쿠라가 느닷없이 재채기했기 때문이었다. 엣취! 짧고 간결한 소리에 말소리가 뚝 끊겼다. 아차 싶었으나 반응은 토가메 쪽이 조금 더 빨랐다. 추워 보이는데에, 사쿠라. 먼저 씻어야지 않을까아? 나른한 목소리에 담긴 묵직한 압박을 이기지 못하고 사쿠라는 수건과 옷가지를 챙겨 욕실로 들어가야 했다.

빗소리와는 다른 방향의 물소리를 들으며 토가메는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어도 젖은 옷까진 어찌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는 이불이 닿지 않는 곳에 앉아 가만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그 흔한 책걸상이나 탁자는커녕 베개조차 보이지 않았다. 삭막한 풍경 속에선 사쿠라는 이런 곳에서 지내고 있구나, 하는 감상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쿠라가 욕실에서 나오며 토가메를 불렀다. 한층 편안한 차림새가 된 사쿠라는 토가메에게 여벌 옷을 내어주겠다며 그를 욕실에 밀어 넣었다. 더 반항할 이유가 없어 토가메는 얌전히 사쿠라가 떠미는 대로 밀렸다.

남자애들이 씻는 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토가메는 적당히 몸을 씻은 뒤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아마 지금쯤이면 사쿠라가 입을만한 옷을 찾아 문 앞에 뒀을 것이다. 원래 얻어 입을 생각은 없었지만 찝찝하고 축축한 옷을 입고 있는 것보다야 나을 거다. 애초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기껏 씻은 이유가 없어지기도 하니까. 토가메는 손을 내밀 수 있을 정도로만 살짝 문을 열어젖혔다.

“토가메.”

그리고 다소 당황한 사쿠라와 마주했다. 토가메는 순간 놀라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눈만 동그랗게 떴다. 토가메가 놀랐다는 사실을 사쿠라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다만 그는 토가메의 반응을 살피며 제 뒤통수를 긁적였다.

“미안한데, 실은…….”

그제야 복도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가져다준다던 옷가지는 보이지 않고 사쿠라는 빈손이었다. 문 옆에 놓인 것도 마른 수건이 전부고 옷 같은 건 없었다. 물론 온천까지 같이 들어간 사이에 맨몸이 무슨 대수냐만, 그래도 기분상 남의 집에 나체로 있고 싶진 않았던 토가메가 사쿠라를 봤다. 난감한 얼굴이 불길한 상상을 심어줬다.

“내가 옷을 다 뒤져봤는데……. 너한테 맞을만한 게 없거든?”

상상이 아니라 현실 같기도 하고.

“……그냥 저거 덮고 있으면 안 되냐?”

사쿠라가 안쪽을 가리켰다. 토가메는 고개만 살짝 내민 채로 그가 가리킨 것을 봤다. 이불 더미였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저거? 저거. ……. 마냥 벗고 있을 수도 없어 토가메는 집주인의 의견을 따라야 했다.

 

 ☂ 

 

변명하자면 사쿠라도 정말 노력했다.

토가메가 욕실에 들어간 이후 그는 자신이 가진 옷을 전부 꺼냈다. 토가메는 덩치도 키도 저보다 훨씬 크니까 널널한 옷을 줘야겠지. 정사이즈를 주면 제대로 들어가지도 않을 거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쿠라가 가진 옷은 똑같은 디자인의 무지 티셔츠와 딱 들러붙는 스키니가 전부였다. 척 보기에도 토가메에게 맞을 법한 옷은 하나도, 정말 단 한 벌도 없었다. 당장 잠옷과 외출복의 구분조차 모호한데 다른 옷이 있으리라 기대한 것부터 잘못이다. 사쿠라는 복잡한 표정으로 욕실 쪽을 바라봤다. 비를 닮은 물소리가 저 안쪽에서 쏟아지고 있었다.

억지로 작은 옷을 입혔다가 옷이 찢어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옷도 옷이고 사과할 일이 생기면 괜히 어색해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토가메를 발가벗긴 채로 둘 수도 없다. 걱정을 떠나서 일단 도의적, 시각적으로 좀 그렇다. 길지 않은 생각 끝에 사쿠라는 어떻게든 토가메의 몸을 감쌀 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수건으로 온몸을 돌돌 싸매는 건 솔직히 꼴이 웃기다. 게다가 한두 개로 커버될 몸집도 아니니 패스. 이 살림살이 하나 제대로 없는 집에서 수건 외에 몸을 덮을 만한 건 사쿠라의 옷가지와 이불 정도였다. 옷가지는 이미 두 사람을 위해 기각된 선택지고, 남은 건……. 이불. 그래, 이불뿐이었다.

그래도 이불 정도면 꽤 인도적이지 않은가. 토가메처럼 덩치 큰 사람도 온몸을 가릴 수 있고 두께가 있어 추위에 떨 필요도 없다. 물론 맨몸에 이불만 대충 두르고 있으라 말하는 건 멋쩍지만, 사쿠라는 이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죄인 같은 심정으로 욕실 앞에서 토가메를 기다렸다. 결과적으로 토가메가 사쿠라의 의견을 따라주었으니 다행이었다.

물기 닦은 커다란 몸에 이불을 두르고, 담요 덮듯 어깨에 얹어 좌우로 감싸니 그럭저럭 상상한 모양새가 됐다. 두꺼운 솜이불이 아니라 움직이는 게 생각보단 쉬웠다. 둘은 나란히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남자애들 방에 흔히 있을 게임기나 잡지, 만화책 같은 건 이 집에 존재하지 않았다. 텅 빈 집에서 할 수 있는 시간 때우기는 기껏해야 창밖 구경이 고작이었다.

그게 나쁘단 건 아니다. 규칙적으로 창을 두드리는 소리는 언젠가 들었던 풀벌레 소리와 별다르지 않다. 특별한 대화 없이도 자연이 내는 백색소음을 들으며 시간을 보내는 게 꽤 괜찮은 일이란 걸 사쿠라는 알았다. 후우린의 시끌벅적함도 좋지만, 토가메의 느긋함도 좋다고. 그렇게 생각한 건 아마도 두 번째였다.

“비 언제까지 오려나아.”

“글쎄…….”

처음보단 약해졌으나 비가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옷이 다 마를 때까지는 계속 내릴 듯했다. 토가메는 수건으로 물기만 닦아낸 제 머리카락이 이불을 너무 적시는 건 아닌지 재차 확인했다. 묶을 것 없이 짧아진 머리카락은 이불은커녕 목덜미에도 닿지 않았다. 단순한 기우였다.

그때 요란스레 천둥이 쳤다. 둘은 깜짝 놀라 토끼 눈을 하고 몸을 곧추세웠다. 소리의 근원은 창밖이 아니었다. 꾸르릉,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우르륵, 하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소리가 방안에 울렸다. 소리는 누구라 따질 것도 없이 양쪽에서 모두 났다. 한참을 걸은 데다가 빗길에 뛰어오기까지 했으니 출출할 만했다. 둘은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이리저리 흐트러뜨렸다. 크흠, 헛기침한 사쿠라가 급하게 머릿속을 뒤졌으나, 집엔 마땅히 대접할 만한 음식이 없었다. 냉장고도 없이 사는 데다가 매일 끼니는 대충 편의점에서 사 오거나 포토스에 가서 때웠으니 당연한 일이다. 사쿠라가 곤란해하는 걸 눈치챘는지 토가메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사 온 빵이라도 먹을까아? 서비스로 받은 것도 있고. 꾸르륵, 소리를 애써 외면하며 사쿠라가 대답했다. 그, 그러든지. 제대로 된 그릇조차 없는 집안에서 빵은 제법 먹기 편리한 음식이었다. 롤케이크 상자에 일회용 포크를 함께 넣어준 사보텐 사장의 센스에 감사했다.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뒤 먹은 것을 정리하던 중 전등이 불길하게 깜빡였다. 어? 저게 왜 저래. 사쿠라가 전등을 살피기 위해 까치발을 들었다. 잠깐, 사쿠라. 불 켠 채로 만지면……. 사쿠라를 따라 토가메가 다가서는 순간 창밖에서 번쩍하고 빛이 났다. 그게 번개라는 걸 깨닫기도 전에 툭, 전등불이 꺼졌다. 한순간에 드리운 어둠이 집안을 삼켰다.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토가메는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토가메?”

당황한 목소리가 여간 놀란 게 아닌 모양이다. 토가메는 손을 뻗고 싶었으나 이불을 둘러맨 채로는 무엇도 할 수 없었다. 사쿠라, 괜찮아아? 제자리에 선 채 물으면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어어, 너는?”

“나도 괜찮아. 일단…….”

어깨에 걸친 이불을 누군가 살짝 당겼다. 토가메도 몸을 감싸기 위해 반사적으로 이불을 끌었다. 어어? 뭔가 이상했다. 지금 이 집에는 자신과 사쿠라밖에 없는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이불이 홱 제 쪽으로 들리며 검은 무언가가 토가메를 덮쳤다. 어둠 속에서 시야가 뱅글 돌았다.

“어엇……?!”

“우아악!?”

쿵, 보다 묵은 소리 뒤에 애매한 아픔이 찾아왔다. 넘어진 것 같은데, 이불에 감싸인 덕에 충격이 덜한 모양이었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무언가 묵직한 것이 토가메를 눌렀다. 어쩐지 익숙한 기분이 들어 토가메는 저를 덮친 것을 보았다.

“아.”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놀란 호박琥珀빛은 평소보다 짙었으나 그만큼 더 또렷했다. 그저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까지는 모르겠지만. 토가메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쿠구궁, 이번엔 정말 천둥이 쳤다. 빗방울이 창을 두들기고, 놀란 심장이 정신없이 쿵쾅대는 소리가 들렸다. 창밖이 한 번 더 번쩍이지 않았다면 천둥소리조차 제 심장 소리로 여겼을 만큼 커다랗게.

“…….”

숨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다. 반쯤 들춰진 이불 사이로 찬 기운이 느껴졌다. 바닥을 짚으려다 실패한 하얀 손이 토가메를 붙들고 있었다. 토가메는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못했다. 백색소음으로 가득 찬 정적이 낯설게 느껴졌다.

“사쿠…….”

간신히 이름을 부르려는데 불현듯 전화벨이 울렸다. 두 사람은 화들짝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어두운 방 안에서 핸드폰 화면이 빛났다. 강한 빛에 눈을 찡그리고 보면 알 듯 모를 듯한 이름이 보였다. 니레이 아키히코. 저만치 떨어진 사쿠라가 두어 번 헛기침하고 전화를 받았다.

“……어, 니레냐?”

-여보세요? 사쿠라 씨! 괜찮으세요?!

스피커 폰도 아닌데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들렸다. 다급한 상대를 사쿠라가 무슨 일이냐며 진정시켰다. 성량이 줄어든 목소리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갑자기 이 일대가 정전돼서, 사쿠라 씨네도 그러지 않을까 하고요……. 불이 나간 게 이 집만의 일은 아닌 모양이었다. 토가메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왠지 지금 소리를 내선 안 될 것 같았다. 사쿠라가 대화를 이어갔다.

“괜찮다니까? 놀라긴 했는데 별일 없어.”

-정말 괜찮으세요? 집에 촛불이나 손전등도 없잖아요.

상대는 이 집 사정을 꽤 잘 아는 눈치였다. 하긴 동네에 정전이 났다고 걱정돼 전화까지 하는 사이니까. 토가메는 제가 아는 후우린의 얼굴들을 차분히 떠올렸다.

사실 후우린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진 않은 탓에 기억에 남는 사쿠라의 동급생은 몇 없다. 그나마 인상 깊은 게 사쿠라를 뒤쫓다 만난 셋 정도다. 니레라 불린 이름이나 얼핏 들린 억양과 말투가 살짝 익숙한 게 아마 그때 본 셋 중 하나가 통화 상대인 듯했다. 그들을 제외하면 토가메가 아는 후우린은 죄 3학년뿐이었으니까. 토가메가 그런 식으로 유추하는 동안, 핸드폰이 있으니 괜찮다 답한 사쿠라에게 ‘니레’가 말했다.

-하지만 사쿠라 씨는 혼자 사니까 걱정될 수밖에 없다고요.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지면 어떡해요?

“아니, 정말 괜찮다고! 그리고 지금 혼자 있는 것도 아니니까…….”

-네? 사쿠라 씨, 집에 다른 사람이 있어요?

두 사람의 눈이 동시에 맞부딪혔다. 어떤 신호를 보내기도 전에 사쿠라가 대답했다.

“어어, 토가메랑 있는데.”

-토가메? 사자두련의 토가메 씨요?!

다시금 상대의 목소리가 커졌다. 사쿠라는 반사적으로 인상 쓰며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잠깐, 목소리 크다고! 짜증 아닌 짜증을 내자 목소리가 다시 작아졌다. 앗, 죄송해요. 그나저나 정말 토가메 씨랑 같이 있는 거예요? 핸드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한 의문을 품고 있었다. 하긴 사자두련이 후우린의 구역, 그것도 사쿠라의 집에 올 일은 보통 없으니까. 집에 부를 정도로 토가메와 사쿠라가 가까운 사이일 거라곤 그도 미처 생각지 못했을 거다.

‘사실 이유를 따지면 친하고 말고의 문제도 아니지…….’

토가메가 멋쩍게 제 볼을 긁적였다. 원래라면 진작 사자두련의 구역으로 돌아가 오리 옥상에서 쵸지네와 함께 빵을 나눠 먹고 있었을 텐데, 길을 잃고 날씨가 나빠지며 일이 꼬였다. 그 탓에 신세를 지게 된 셈이니 ‘니레’의 입장에선 더더욱 당황스러울 법했다. 토가메는 얌전히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셨죠? 무슨 일 있으면 꼭 전화하시고요!

“알았다니까. 어, 학교에서 봐.”

마침내 ‘니레’의 걱정 어린 말과 함께 통화가 마무리됐다. 니레 녀석, 괜한 걱정이나 하고……. 귀찮다는 듯 중얼거리는 것치고 사쿠라의 표정은 꽤 기분 좋아 보였다. 쑥스러운 사람처럼 두 뺨을 붉힌 채 입술을 삐죽이는 게, 고마우면서 그걸 바른대로 말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표현에 서투른 친구를 보며 토가메가 작게 웃었다.

“좋은 친구네에. 사쿠라를 걱정해서 전화까지 해주고.”

“어엉? 아, 뭐…….”

뒤통수를 긁적이자 머리카락이 흰 손가락에 이리저리 얽혀 흐트러졌다. 사쿠라는 그렇다는 말 대신 쑥스러워하던 얼굴 그대로 고개를 끄덕여 답했다. 아닌 척해도 결국 솔직하게 구는 건 사쿠라의 좋은 점이자 그다운 부분이다. 토가메는 그게 조금 귀엽단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사쿠라, 나랑 둘이 있는 거 말해도 돼?”

“엉? 안 될 건 또 뭐야. 사실인데.”

“아, 그것도 그렇네.”

이불 더미를 끌어당겨 자리를 만들자 사쿠라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까워졌다. 이불 아래로 삐져나온 손끝이 사쿠라와 닿을락 말락 했다. 토가메는 방금 주고받은 대화를 곱씹었다.

친구들에게 숨길 이유가 없는 가까운 사이. 사쿠라는 늘 토가메와의 관계를 당연하게 여겨준다. 자신이 토가메에게 얼마나 큰 기회와 깨달음을 주었는지도 모르면서 태연하게 말한다. 토가메를 고민을 털어놓고 의지할 수 있는 상대라 여긴다. 토가메는 그 사실에, ‘친구’라 부를 수 있는 관계에 항상 감사했다. 게다가 오늘도 결국 그런 관계가 이어져 같이 있게 된 거니까. 멋없는 꼴을 보이긴 했어도 이번 일이 싫지는 않았다.

빗방울이 부딪히며 유리창에 물이 맺혔다. 자동차 엔진 소리 뒤엔 어김없이 물 튀는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무작정 핸드폰 배터리를 낭비할 수는 없어 둘은 방안에 간신히 들어오는 빛에 의존해 시간을 보냈다.

그 사이 토가메에게는 문자가 왔다. 쵸지의 연락이었는데, 말도 없이 어디서 무얼 하고 있냐는 거였다. 토가메는 언제나처럼 쵸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문자보다 전화를 선호하기에 생긴 습관이었다. 그의 버릇이 익숙한 쵸지도 당연하다는 듯 전화를 받았고, 토가메는 비를 피하고 있으니 날이 개면 오리로 가겠다 말했다. 쵸지의 오케이 사인을 받고 나서 전화를 끊자 시선이 느껴졌다. 토가메 옆에 나란히 앉아있던 사쿠라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왜 그래애?”

“아니, 그냥……. 문자로 연락 왔는데 전화를 하네 싶어서.”

급한 일이 아니라면 문자 연락에는 똑같이 문자로 답하는 게 보통이니, 사쿠라의 호기심은 이해가 됐다. 아, 짧게 감탄사를 뱉은 토가메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말했다.

“문자보다 편하거드은. 평소에도 거의 전화로만 연락해.”

“어, 너도?”

사쿠라는 다짜고짜 문자 문화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자고 일어나면 학교에서 볼 텐데 왜 굳이 문자로 수다를 떠는지 모르겠다는 것부터 시작해서 자판이 쓸데없이 복잡하고, 이러쿵저러쿵. 한참 열 올리는 게 사쿠라에게 공감해주는 사람이 그간 없던 모양이다. 그조차도 사쿠라다워서 토가메는 웃음을 참고 맞장구를 쳐야 했다. 사실 전화 파로서 공감하는 부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전혀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럼 사쿠라에겐 곧바로 전화하는 게 낫겠네에. 전엔 문자가 왔으니까, 그게 불편한 줄 몰랐어어.”

생각해보면 봉화가 마을에 들이닥쳤을 때는 일일이 전화를 돌릴 여유가 없었다. 문자가 간결히 온 것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러려니 해서 전혀 몰랐다. 요즘 둘 또래에 핸드폰이 익숙지 않은 사람은 드무니까 생각지 못했단 이유도 있었다. 사쿠라가 부끄러운 듯 성냈다.

“그, 그땐 그것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 급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그리고 전화하는 게 낫겠단 건 무슨 소리야?!”

“문자는 불편하다며어? 용건 있을 때 바로 전화하는 쪽이 낫다는 거잖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얼굴이 붉어졌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표정을 보며 토가메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진정시키듯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목소리 들을 수 있으면, 좋지 않아아?”

비가 와서인지 방안에 울리는 목소리가 컸다. 왁왁하고 요란하게 굴던 행동이 멈췄다. 응? 되묻듯 고개를 기울이자, 사쿠라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둠 속에서도 뺨과 귀가 붉게 물드는 게 뻔히 보였다.

“……그게 뭐가 좋다고…….”

솔직한 낯과 달리 퉁명스러운 대답이었다. 그래도 토가메는 만족스러웠다. 싫다거나 안된다는 거절의 말이 아닌 거로 충분했다. 그는 다시 한번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오늘처럼 길 잃었을 때도 부탁할게에~”

“뭐? 아니……. 애초에 길은 잃지 마!”

언젠가 지나온 날처럼 두 사람의 목소리가 방안을 채웠다. 빈집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텅 빈 찬장도 끊이지 않는 빗소리도 지금은 상관없었다. 누구도 혼자가 아니고, 비는 때가 되면 그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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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을 살 뿐~비를 피할 뿐 편은 지인 분 리퀘로 진행되었습니다.

언제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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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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