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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ㄹㄷㅋ/호백호] 여름이 지나도 매미는 울 예정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 바지 옆으로 내렸다. 바지는 새로이 빨았고 재킷은 몸에 제일 잘 맞는 것이다. 사흘 전 다듬은 머리카락은 슬슬 손에 익어 깔끔이 손질 가능했고, 피부도 여드름 하나 없이 말끔했다. 호열은 방 한가운데에 서서 거울 속 멋쟁이를 바라봤다. 또래 중에서, 아니 그 외의 나이대여도 첫인상에서 그를 싫다고 여길 이는 적으리라. 정말로, 호열은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평소에는 그랬다.

“…하아.”

멋쟁이의 단정한 눈썹이 구부러졌다. 목은 앞으로 툭 내밀어지고 다리는 삐딱하게 옆으로 삐져나왔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바로 시비를 걸 것같이 못마땅한 안색이다. 세상에 온갖 불만은 다 가진 표정. 아니, 정확히 말하면 불만 다섯 술에… 슬픔 한 꼬집도 들어간 표정. 이 슬픔은 그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만약 호열이 지금 제 감정을 표현하자면 ‘착잡하다’라고 정의할 테다.

그래, 호열은 착잡했다.

자신의 모든 게 불만스러워질 만큼.


고등학교 이 학년 양호열, 절찬리 짝사랑 중.

푸르른 녹음이 짖어대는 맴맴 소리가 눈치 없이 심기를 건드린다. 짝짓기가 한창이다. 나무껍질을 장식한 수많은 사랑. 방정맞은 저것처럼 호열의 사랑도 한창이다. 땅 아래 얌전히 자기만 하던 그것은 최근 꿈틀꿈틀 기지개를 켜더니 기어이 세상에 나와 요란한 울음을 뽐내었다. 무시하기 힘들 정도로 울어 젖히며 호열을 한없이 심란하게 했다.

풋풋한 청춘의 사랑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아름다움의 기준은 무엇인가. 사랑이 다 아름답기만 할까? 적어도 호열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제 사랑이 세간의 기준으로 썩 아름답지 않다는 인식쯤은 제대로 있었다. 뭐가 어떻길래 아름답지 않냐 하면 호열의 울음통, 털이 덥수룩한 유인원 조상이 대대로 내려준 짝짓기 발신기가 호열의 대에서 맛이 가버려 엉뚱한 방향으로 작동해서 그렇다. 엉뚱한 방향이 어디냐 하면 암컷이 아닌 개체, 같은 수컷이 그 수신처다. 돌연변이 매미인 호열은 다른 의미로 세상의 돌연변이인 한 남자에게 제대로 반했다.

이런 미친. 속수무책으로 매미 소리를 듣던 호열은 제 상념의 흐름을 깨닫고 인상을 구겼다. 뜨뜻한 앞니로 물렁한 아랫입술을 눌렀다. 이젠 숨 쉬듯 강백호 생각이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속삭임이라도 본인은 들을 수 있다. 가슴을 맴맴 돌며 호열을 메아리 속에 갇히게 했다.

양호열은 강백호가 좋았다. 더는 모른 체 할 수 없을 만큼. 결국 제 마음과 마주해야 할 만큼.

매미 소리가 한층 짙어졌다. 머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호열과 다른 결로 돌연변이인 강백호는 짝짓기 발신기만큼은 제대로 작동했다. 너무 자주 작동한 건 문제일까. 허나 그것도 이제 과거의 일이다. 중학 시절 오십 번을 채운 고백 공격은 고등학교로 들어가고 나서는 속도를 늦추더니 딱 한 번만 발동되고 그대로 멈췄다. 넘치는 혈기가 다른 방향으로 넘어가서 그렇겠지. 이 학년 백호는 농구와 사랑에 빠졌다. 이 사랑은 외로운 일방향이 아닌 눈치다.

어쨌든, 여기서 짚어야 하는 점은 강백호는 여자를 좋아한다. 남자에게 고백한 적? 있겠냐? 그나마 비슷한 상황이라면 강백호가 양호열의 집에 놀러 갔다가 이불 밑 시디플레이어를 그대로 깔아뭉갰을 때겠다. 남보다 몇 배는 큰 엉덩이가 내려앉았는데 시디플레이어가 무사할 리 없었다.

원래 성격대로라면 시치미를 뚝 떼었겠지만 물건의 주인이 제 절친이었기에, 강백호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다 결국 이실직고했다. 호열은 친히 미안하다고 다 해결될 거면 법이 왜 있고 경찰이 왜 있냐고 답했다. 아르바이트하는 입장에서 진상 손님의 단골 대사를 자신이 읊은 게 자괴감 들 수도 있으나, 전날 강백호가 재채기하다가 자기 만화책을 찢어먹은 것까지 합해 호열 안 심연의 괴물을 깨우고 말았다. 거대 엉덩이 괴물과 청소년 노동자의 감정 혹사가 만든 괴물이 서로를 열심히 물어뜯었다(적어도 호열은 백호의 엉덩이를 정말로 물었다. 두껍더라.).

아무튼 그때가 강백호와 고백과 남자가 조화롭게 섞인 때다. 긴장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고 얼굴이 발그레 붉어진 건 열 뻗쳐서 그런 것뿐인 상황. 서로를 좋아하기는 하는데, 그건 순 우정의 호감으로서다. 아차, 나는 걜 다른 식으로도 좋아하지. 어쨌든 강백호는 자신과 다르다.

이제 호열이 고백하면 강백호와 남자와 고백이 조화롭게 섞인 다른 예시가 생겨난다. 백호 녀석 고백 받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 적 있으니 기뻐하지 않을까. 사랑에 절여진 머리가 낙관적인 의견을 내었다.

되겠냐? 당연히 싫어하지.

당연히.

암만 호열이 백호의 친구라고 해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오히려 더 싫어하지는 않을까 걱정해야 할 판이다. 친구라서 잘 해줬더니 대뜸 고백으로 갚다니.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했는데 김칫국을 장독대째로 마시다니. 그 장독대로 뒤통수를 쩍 내리치다니. 백호의 여섯 번째 고백을 받은 어느 여자아이처럼 와앙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를 일이다.

조금도 좋아하지 않을 거야. 앞날이 훤히 보여. 친구인 관계나마 유지하려면 호열은 제 마음을 영원히 불문율에 부쳐야 한다. 이것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나마 백호보다는 입을 잘 다물 자신이 있는 호열이다. 지금까지 대견하게 해냈다. 현상 유지만 하면 되는데 괜히 나댈 필요 없다.

백호의 친구인 게 좋았다. 자신의 친구가 자랑스럽고 그의 친구인 게 기뻤다. 두 사람이 친구일 때 호열은 무엇 하나 빠뜨릴 거 없이 모든 게 좋았다. 즐거웠다.

그 쉬운 게 왜 점점 어려워지는지.


의식하게 된 건 조금 예전의 쌈박질 때. 시비 건 놈들을 흠씬 혼내주고 조금 떨어진 골목길에서 한숨 돌린 날. 네모난 깡통 위에 쉬고 있던 호열은 맞은편의 발에 문득 눈길이 갔다. 양말을 생략해 맨발목이 드러나는 발 한 쌍. 발끝으로 톡톡 두드리자 발의 주인인 강백호가 고개 들었다. 호열이 하는 짓을 지켜보고는 물었다.

“뭐 하냐.”

“그냥.”

정말로 별생각 없이 움직인 거라 호열이 실실 웃었다. 백호가 호열을 떼놓을 심산으로 다리를 크게 휘저었다. 재미가 붙은 호열은 끈덕지게 따라붙었다. 밑창과 밑창이 맞닿았다.

“발도 작은 게.”

백호는 그대로 굽혔던 무릎을 펴 호열을 밀어냈다. 깡통이 지렛대처럼 움직여 호열의 등이 벽에 닿았다. 호열은 두 손으로 깡통을 잡아 몸을 도로 앞으로 휙 숙였다.

“네 발이 큰 거거든.”

“호열이 발이 작긴 하지.”

둘의 실 없는 장난을 구경하던 구식이 한마디 얹었다. 호열은 제 발을 내려다봤다. 안 작은데. 침묵을 읽었는지 백호군단이 슬금슬금 몰려와 발을 한 짝씩 앞으로 내밀었다.

“우리 중에서는 제일 작잖아?”

“용팔이하고 비슷한데?”

“내가 더 크거든? 자, 봐봐.”

아닌 게 아니라 진짜 손가락 한 마디쯤의 차이가 있었다. 거의 같은 크기라고 믿어왔기에 이건 제법 충격이었다. 키는 내가 더 큰데! 호열의 억울한 외침에 대남이 꿈 깨라는 듯 발로 용팔과 호열을 번갈아 가리켰다.

“면적을 봐라, 면적을. 옷 사이즈는 나나 쟤나 비슷해. 근수로 따져도 일단 네가 제일 작지.”

“대남이 너 그런 말 하면서 왜 저번에 티셔츠 안 빌려줬냐?”

“취소. 네가 더 크다. 옷 늘어나면 책임질 거냐. 그리고 그건 나 같은 미남이 입어야 예쁜 옷이야.”

너 이 자식! 용팔이 팔을 뻗어 대남에게 달려들었다. 옥신각신 싸우는 소리를 배경으로 삼으며 호열은 눈앞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래, 뭐, 작긴 하지. 여기서는. 그래도 유별나게 작은 편은 아니다. 학교만 가도 자기만 하거나 더 작은 남자애는 쉽게 보인다. 아마 자신은 작은 남자 중에서 평균을 담당하지 않을까.

아직까지 불편한 것도 없고. 좀 전에 쓰러뜨린 놈들도 저보다 크니 딱히 싸우는 데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뭐, 그럼 됐네. 호열은 빠르게 고민을 끝냈다. 고민까지도 아니었다. 자기보다 더 작은 여자아이도 잘만 사는데 이게 뭐가 대수인가? 부채꼴로 발을 까닥이며 생각에 잠겨있자, 어느샌가 유별나게 큰 발이 가까이 왔다. 조금 전 호열이 그랬던 것처럼 발바닥을 붙이며 서로의 크기를 비교했다.

어이, 쪼꼬미. 하찮은 도발에 호열이 웃었다. 쪼꼬미 아니거든. 헹, 패배를 인정하시지. 네가 너무 커서 모르나 본데, 나만 한 남자 많단다. 그런가? 백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가끔 보면 여자애만큼 작은 거 같던데.”

호열의 다리가 뚝 굳었다. 아니 그래도 난 남자애 사이에서나 작지, 여자애까지 포함하면 작은 편이 아닌데. 어마어마하게 큰 녀석 눈에는 다 작아 보이나. 이건 좀 자존심 상한다. 호열은 남는 발로 백호의 바지에 꾹 발 도장을 찍어줬다.

뭐야! 백호가 질겁하는 사이 호열이 서둘러 튀었다. 몇 걸음도 안 되어 강백호가 양팔을 든 채로 쫓아왔다. 새로 터진 개판에 구식은 안전지대로 이동하고, 대남과 용팔도 싸움을 멈춰 구식 곁으로 갔다. 호열이 데워둔 깡통에 앉아 강 건너 불구경에 빠졌다.

그날 바로 양호열이 시름에 잠긴 건 아니다. 그 일은 일종의 초석이었다. 환경만 갖추면 금세 갈라질 단단한 씨앗. 호열은 있는 줄도 모른 씨앗을 머리에 품고 다니다 언젠가의 체육관에서 싹을 틔웠다.

왜 그날따라 여자애들에게 시선이 가고, 왜 제 발에 시선이 갔을까? 체육관 입구에서 구경하는 아이와 내부에서 구호를 외치는 아이. 호열은 바쁘게 공을 주고받는 남자애들과 여자애들의 체격을 비교했다. 왜 그날따라 농구부 남자가 그리도 커 보였는지. 벽에 기대면서 짝다리를 짚었다. 밑창에 흰 자갈이 끼였다. 떨어지지 않을 걸 알면서도 신발 옆면을 바닥에 툭툭 부딪혔다. 박자에 맞춰 생각이 정처 없이 튀었다.

확실히 키가 크니까 움직임이 시원시원하군. 툭툭. 저런 몸으로 살면 세상이 어떻게 보일까. 툭툭. 백호 눈에는 다 고만고만한 크기로 보인댔지. 툭툭. 백호는 조그만 여자애를 좋아하는데. 툭툭. 나도 백호 눈에는 작은데…

툭. 발끝이 지면에서 수직으로 멈췄다. 옆으로 휘어진 척추가 바로 세워졌다. 뭐지? 호열은 팔짱을 풀어 주변을 급히 둘러봤다. 누가 심장을 콱 밟은 것 같다. 방금 뭐지 시발? 호열은 이 당황스러움에 동의해줄 아무나를 찾았으나 이건 내면의 소리였으며 누가 들으면 큰일 날 소리였다.

체육관에서 굉음이 터졌다. 백호가 연습 중 개인행동으로 덩크슛을 꽂아 넣었다. 일 학년은 감탄하고 이 학년은 덤덤했다. 삼 학년은 매섭게 다그쳤다. 강백호 너 똑바로 안 해? 송태섭의 불호령에도 백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넣었으면 칭찬 좀 해줘!

양호열은 그런 강백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뒷걸음질 쳐 체육관에서 멀어졌다. 진동이 너무 심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귓가가, 심장이 계속 쿵쿵거렸다.

엿가락 같은 사지를 이끌어 집으로 돌아간 양호열은 불 꺼진 방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질렀다.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허구한 날 붙어 다니다가 이게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 못 하는 천치가 돼버렸나. 강백호 좋지. 멋지지. 내가 좋아하는 것 중 가장 좋아하는 애지. 하지만 그런 방향은 아니야! 난 여자가 좋…

최초의 기억부터 일 초 전의 기억까지. 양호열의 짧고 긴 인생이 눈앞에 좌르륵 펼쳐졌다. 여자가 남자보다는 좋긴 했다. 남자는 시끄럽고 더럽고 생각 짧은 탈모 원숭이니까. 대부분의 남자가 그렇고 대부분의 여자는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그런 이유로만 여자를 좋아하나? 그건… 세간이 말하는 이성적 호감과는 다른데….

이런 시발. 있는지도 몰랐던 인생의 복선이 지금 이 순간 호열의 뒤통수를 깡 후려쳤다. 별이 번쩍 튀었다. 오늘 대체 몇번의 깨달음을 얻는 걸까. 오늘 아침 졸린 눈 비비며 등교한 양호열과 지금 집에 돌아온 양호열은 같은 사람이다. 그러나 같을 수 없다. 그 태평했던 아침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호열은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았다. 그날 밤 호열은 먼지가 풀풀 날리도록 이불 속에서 발광했다.

때는 봄이었다. 잠들었던 만물이 깨어나 생명력을 뿜어내는 시기. 무서운 성장을 자랑하며 주위를 에워싸는 시기. 고등학교 이 학년의 봄, 양호열은 사위를 좁혀오는 사랑의 덩굴을 쳐내느라 혼비백산했다. 눈 뜨고 나니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이러지 마. 호열은 참담했다. 난 이대로가 좋았다고. 왜 갑자기 멋대로 바꾸는데.

사랑이란 건 사람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지 호열은 봄날 내내 기분이 둥실 떠올랐다가 곤두박질치는 일을 반복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호열은 등굣길에 백호와 인사를 해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백호가 여자애와 인사를 하고, 그 얼굴이 호열을 봤을 때보다 더 밝으면 그대로 우르릉 쾅쾅 먹구름이 머리 위에 생겼다. 백호의 경기를 보러 간 날이면 호열이 목이 터져라 백호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래서 마음껏 환호성을 지르고 헤실거렸다. 그러면 해방감에 날아갈 듯이 좋았다가, 밤이 되면 반동으로 바닥에 납작 눌어붙었다.

오늘 너무 크게 소리 지른 거 같아. 구식이 눈이 묘했어. 들켰을까… 아, 내 꼴 좀 보라지. 점점 얼뜨기가 되고 있네.

그래도 백호 앞에서는 티가 안 났다고 생각했다. 강백호의 눈물 나는 짝사랑 연대기를 아는 입장에서, 자신은 백호에 비하면 의젓한 편이었다. 백호 앞이라고 호들갑 떨지도 않고, 걔 말 한마디 한마디에 휘둘리지도 않고, 얼굴이 뚫어져라 바라보는 짓도 절대 하지 않았다. 호열은 백호를 반면교사 삼아 짝사랑 중인 사람이 할 법한 짓은 철저히 참고 완벽하게 숨겼다. 말하지 않는 이상 강백호는 절대 호열의 이변을 모른다.

그렇게 믿었다.

“너 나한테 화났어?”

방과 후, 체육관으로 가는 길목. 부 활동을 하러 가는 백호를 보내고 자신은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 직전이었다. 농구 하는 거 구경하고 가라길래 대수롭지 않게 거절했더니 대뜸 목소리를 깔고 분위기를 잡지 뭔가. 상황이 어긋나는 소리가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만 같았다. 삐그덕. 뻣뻣한 목을 돌려 백호를 보니 오랫동안 불만을 참았을 때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째서? 의문이 앞섰지만 당장은 백호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호열은 천연덕스럽게 목소리를 띄웠다.

“없는데? 갑자기 무슨 소리야?”

“거짓말.”

백호는 확신 가득히 말했다. 눈을 아주 매섭게 부라렸다. 호열은 벌써 일이 조졌음을 직감했다.

“너 요새 날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그러니까 그게 무슨-”

“내가 뭘 부탁하면 족족 안 된다 하고, 분명 웃긴 이야기 했는데 억지로 뚱한 표정 짓기나 하고, 내가 계속 쳐다봤는데도 무시하고 딴짓하잖아! 오늘 점심시간에 작정하고 째려봤는데 너 나만 빼고 군단 애들 다 봤어! 불만 있으면 말을 해, 이 비열한 놈아!”

명치를 얻어맞은 수준의 충격이 덮쳤다. 세상에, 호열은 숨이 멎었다. 백호가 호열더러 비열하단다. 거기에 자신이 해내온 짝사랑 티 안 내기 작전이 처음부터 하등 쓸모없는 삽질이란다. 도대체 나는 그간 어떻게 살아왔다는 말인가? 턱을 맞아도 거뜬했던 다리에 힘이 풀렸다. 강백호는 몰랐지만 지금 그는 인생 최초로 말로 사람을 팼다. 엄청 아프게. 얼굴이 핼쑥해져 주저앉은 호열에 백호가 만만찮게 놀라며 성큼 다가왔다.

“뭐야, 괜찮냐?”

백호가 호열의 얼굴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걱정하는 기색이 눈동자에 어렸다. 하지만 안 된다. 더 이상의 자극은 사양이다. 호열은 반사적으로 큼직한 손을 붙들어 막았다. 정적이 머리 위로 내려왔다. 제 손에 꽉 찬 백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굴을 안 봐도 알겠다. 지금 되게 빡친 표정 짓고 있겠지. 호열은 당면한 현실을 외면하려 주먹 쥔 그의 손만 내려다봤다.

백호의 손은 참 컸다. 자신의 손은 그에 비하면 작기만 했다. 하지만 호열의 손도 백호와 닮은 점이 있다. 적당히 투박하고 적당히 굴곡졌다. 요즘은 싸움박질을 안 해서 두 사람 다 상처가 없지만, 섬섬옥수와는 거리가 먼 손이다. 다물린 주먹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 펼쳤다. 작은 손 큰 손 상관없이 노란빛의 굳은 살이 가득하다.

이건 분명 남자의 손이다. 헷갈릴 수 없다.

“호열아?”

목소리에 서렸던 노기가 한풀 꺾였다. 고개를 드니 백호는 이제는 속상하다는 눈빛으로 호열을 보고 있다. 하늘을 향하던 손바닥을 뒤집어 호열과 손을 맞댔다.

“고민 있으면 나한테도 좀 알려줘….”

비 맞은 강아지의 표정, 어미 새의 마음을 들게 하는 표정. 안쓰러움을 절로 불러일으키던 낯이 호열 앞에 있다. 백호를 이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호열이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널뛰던 마음이 한층으로 착 가라앉았다.

이래서는 안 돼.

“백호야.”

호열이 백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나 아르바이트 간다는 거 진짜거든. 끝나고 돌아올게. 그 뒤에 같이 집 가자.”

말 그대로 손바닥 뒤집듯 달라진 태도에 백호가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이내 그 또한 결연한 눈으로 호열의 손을 쥐었다. 강단 있게 악수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시간은 벌었다. 아르바이트 마친 호열은 일단 집으로 갔다. 꾀죄죄한 몰골을 빠르게 씻어내고 삐져나온 잔머리도 간단히 정리했다. 제일 하얀 티셔츠로 갈아입은 뒤 가장 최근에 산 여름 남방을 위에 걸쳤다. 시간이 촉박한 것치고는 나름 괜찮게 꾸몄다. 호열은 그대로 스쿠터에 올라 몇 시간 전 떠났던 학교로 향했다. 여름 공기에 기껏 씻은 몸에 다시 땀이 올라왔다.

그동안 얼마나 바보같이 굴었나. 마음을 안 들킨답시고 강백호를 멀리했다. 백호가 서운해하는 줄도 모른 채. 이래서는 안 된다. 양호열은 강백호의 친구다. 언제까지고 그를 응원하고 받쳐줄 친구. 자신이 가장 원하는 모습은 그거다. 호열은 마침내 제 자리를 기억해냈다.

나무 그늘 밑 벤치에서 기다리는 백호가 보였다. 호열은 입을 크게 열었다. 백호! 백호가 벤치에서 일어나 호열 쪽으로 걸어왔다. 호열의 차림에 조금 의아해했다.

“우리 어디 놀러 가?”

“그건 아닌데, 그래도 되고. 밥부터 먹을까?”

백호는 어지간히 호열이 걱정됐는지 그날 저녁을 자기가 샀다. 한사코 거절해도 워낙 고집불통인 녀석이라, 답례 겸 호열은 백호를 노래방에 데려가 노래도 시키고 간식도 먹였다. 백호가 노래를 부를 때엔 신나게 탬버린을 흔들고, 자신이 노래할 차례에는 어깨동무하며 목청 좋게 열창했다. 만족스레 노래방을 나왔을 때에 날은 벌써 어둑했으며 두 사람의 목도 사이좋게 잠겼다.

뒷좌석에 백호를 싣고 스쿠터를 운전하던 호열은 아까 부른 노래를 흥얼거렸다. 백호가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좀 더 있을 걸 그랬네. 호열도 마찬가지로 웃었다. 이젠 안 돼. 내일이면 목 다 쉬었을 거야. 편의점이 있는 골목에서 속도를 늦췄다. 나 음료수 살 건데, 같이 갈 사람? 나! 백호가 호열의 어깨에 올렸던 한 손을 들며 말했다.

호열은 사이다를 고르고 백호는 이온 음료를 골랐다. 편의점 옆 주차장에 자리 잡아 홀짝인 지 오 분 무렵, 스쿠터에 기댄 호열은 손에 쥔 캔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껴 마시려 했는데 벌써 거의 다 비웠다. 그래도 입은 여전히 바짝 말랐다.

“저기, 백호야.”

“엉?”

“있잖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허리를 구부정하게 쭈그리고 있던 백호가 상체를 반듯하게 폈다. 호열은 애꿎은 캔 입구를 긁어댔다. 보지 않아도 시선이 느껴졌다. 백호는 지금 자기 말에 집중하고 있다. 호열은 기대에 부응해야만 했다.

“내가 널 좋아하거든.”

“…뭐?”

백호는 아직 눈치채지 못했다. 눈을 끔뻑이고는 나도 너 좋아! 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이 발언을 서두쯤으로 여기나 보다.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라는 독촉이 들리는 듯했다. 호열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그래서 웃었다.

“아니, 그게 아니야. 그 뜻이 아니야. …나는 정말로 너를 좋아해. 네가 여자애를 좋아하듯이. 나는 그렇게 너를 좋아해. 농담 아니야.”

풀벌레 소리가 주차장에 울렸다. 바로 옆 도로에서 차가 한 대 지나갔다. 편의점과 연결된 실외기에서 날개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이곳에는 그들이 아니어도 소리를 만들어 내는 것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아무 소리도 만들지 않았다. 호열은 기다렸다. 애꿎은 캔만 만지며 백호가 말하길 기다렸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답이 돌아오지 않아서, 결국 호열이 또 입을 열었다.

“대답 안 하냐?”

백호의 어깨가 흠칫거렸다. 그의 시선은 땅을 향했다. 호열이 말을 끝낸 뒤부터 계속 저랬다. 그게 좀 열 받았다. 어차피 까일 건 알았지만 설마하니 무반응 대응이라니. 같은 거 달린 놈의 고백은 고백도 아니란 뜻인가? 급격히 기분이 상했다. 욕을 하든 때리든 표현 정도는 해달란 말이야. 없는 것처럼 취급하지 말고.

뭐 이런 간장 종지 같은 그릇이 다 있나. 지난봄 내내 맘고생 했던 게 억울해졌다. 호열은 스쿠터에서 몸을 떼 백호 앞에 우뚝 섰다. 입에 걸었던 빗장이 풀린 지금, 뭐든 말할 수 있는 심정이었다.

“그게 네 대답이야? 입 다물어서 못 들은 척하기? 그러면 내가 아 잘못 말했어, 하고 무마할 거 같아? 널 뻥 찼던 여자애들도 거절 의사는 제대로 표시했는데, 넌 그러기 겁나냐? 말하기도 싫어? 야, 나라고 너 좋아하고 싶지 않았어. 나도 작고 귀엽고 차분한 여자애를 좋아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으면 당장 그랬어! 근데 지금 이 꼴 났으니까 결판 좀 내보려는 거 아냐!”

말을 이을수록 호열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마지막 문장에서는 캔을 패대기 치기까지 했다. 내 첫 고백 망쳐줘서 겁나 고맙다, 개자식아! 악에 받친 목소리가 주차장 바닥에 철퍼덕 떨어졌다. 호열의 격노에 백호는 아연실색하며 허둥거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쥐었다 폈다 팔을 굽혔다 폈다 하며 이상한 몸짓을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 어린 목소리가 드디어 나왔다.

“미,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너, 너한테 해 줄 말이 네가 듣고 싶지 않을 말이니까…나도 거절당하면 얼마나 슬픈지 아니까… 뭐하고 해야 할 지 몰라서… 그래서….”

백호의 얼굴에 땀이 쏟아졌다. 아니, 땀인지 눈물인지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얼굴이 축축해졌다. 고백 공격이 괜히 있는 말은 아니네. 저 얼굴을 보라. 방금 까인 건 양호열인데 울기 직전인 건 강백호다.

속에서 부글거리던 사이다가 김빠지듯 잠잠해졌다. 저 불그죽죽한 낯을 보고 있으려니 자동으로 심장이 차분해졌다. 고백이고 뭐고 애나 달래고 싶다. 남아있던 열기까지 한숨 안에 넣어 뱉었다. 땀에 젖은 목덜미를 쓸었다. 폼 잡는다고 시간 좀 끌었더니 그새 모기에 물린 거 같다.

“미안해할 게 뭐 있어. 네가 무슨 말 할지 뻔히 아는 마당에. 내가 그거 예상 못한 것도 아니고.”

“그래도….”

“근데 내가 듣고 싶은 말이랑 네가 해야 할 말은 똑같을 거야. 그러니까 편하게 해.”

“어?”

“거절 인사는 제대로 해야지?”

흙먼지 묻은 캔을 주웠다. 툭툭 털어 가까이 있는 쓰레기통에 넣었다. 백호도 다 마셨는지 손안의 캔을 완전히 짜부라뜨려서, 그것까지 받아 마저 버렸다. 허전한 손을 주머니에 꽂으며 백호를 올려다봤다. 백호는 우물쭈물했다.

“그동안 고백한 뒤 들었던 말 떠올려봐. 나랑 어울리는 게 있지 않아?”

“…넌 너무 커서 좀 그래?”

“말이 되냐!”

호열은 언제 화냈냐는 듯 눈까지 크게 떠 가며 박장대소했다. 배가 당길 정도로 아파 백호의 팔을 잡아 몸을 지탱했다. 어쩜 처음으로 꺼낸 말이 제일 안 어울리는 소리인지. 늘 그랬지만 예상치 못한 곳에서 웃음을 준다. 침착해지려고 노력하면서, 호열은 찔끔 맺힌 눈물 한 방울을 손가락으로 훔쳤다. 백호는 여전히 혼란스러워했다. 더 이상 괴롭히기 싫어진 호열이 넌지시 정답을 알렸다.

“그거 말고, 제일 무난한 거 있잖아. 정중하고 군더더기 없는 거. 너랑 나 사이에서, 제일 잘 어울리는 거.”

팔을 당기고 발꿈치를 살짝 들었다. 가까워진 백호와 눈을 맞췄다. 얼른 말해줘. 난 그 말을 들으러 왔어. 시선에 얽힌 마음을 읽은 백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이제 그도 제가 해야 할 말을 안다. 그것에 힘들어했다.

“정말 고맙지만-”

그럼에도 강백호는 그 말을 꺼냈다. 양호열을 위해서.

“저는 친구 사이가 좋아요. 좋아해 주신 건 정말 고맙지만, 정말, 정말로 감사하고 기쁘지만, 우리는 친구로 지내요.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진심으로 난 호열이 네가 좋은데, 진짜로 나는….”

“잘 알았습니다.”

손에 힘을 풀어 백호을 놓았다. 뒤로 물러나 가벼운 묵례를 했다. 이로써 양호열은 강백호에게 차였다. 변명할 여지 없는, 착각할 가능성 없는 완벽한 실연이다. 켜켜이 쌓아온 마음에 견고한 거절이 파고들었다. 호열은 제 안이 저며지는 감각을 오롯이 받아들였다. 미소가 입가에 퍼졌다.

“앞으로도 쭉 당신의 친구가 되겠습니다.”

어차피 차일 거, 친구로 지낼 거면서 양호열은 왜 굳이 제 마음을 꺼내 보였나. 글쎄, 무용한 것 같기는 해도 양호열에게는 이 상황이 필수적이었다. 양호열은 강백호를 좋아하는 마음을 없앨 수 없다. 숨기지도 못한다. 사랑에 빠진 내내 호열은 여자와 자신을 비교하는 멍청한 짓을 저질렀으며, 만족스러웠던 스스로가 징그러워지기도 했다. 쓸데없는 시름에 잠기느라 짝사랑 대상인 강백호를 소홀히 했다. 그것에 백호는 상처받았다. 이건 양호열이 아니다. 이런 모습은 양호열에게 필요치 않다. 그는 강백호에게 상처가 아닌 도움을 주는 존재이고 싶다.

없애야 하는 마음이나 혼자서는 실패했다. 때문에 면구하게도 백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마음을 결딴내달라고. 오랫동안 고백하고 거부당해온 강백호, 실연에 잠겨 며칠은 울적했다가도 금세 털어내고 일어나던 그. 분명 사랑은 그런 거다. 아무리 커다랗게 부푼 마음이라도 예리한 말로 찌르면 요란하게 터져 사라진다. 호열은 사랑을 잘 몰랐지만 사랑의 순리만큼은 알았다. 줄곧 지켜봐 왔으니까.

침묵을 고수하면 양호열은 계속 이상한 양호열이 된다. 하지만 한 번 시원스레 차이면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 분명 그렇다. 가슴 속 무너지는 이 감각은 분명 사랑이 떠나가는 신호다. 호열은 차오르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그가 하지 못한 일을 이룬 백호에게 고마웠다.

“미안해. 이런 일 맡겨서.”

“나야말로 진짜 미안.”

강백호는 양호열에게 실연의 아픔을 안긴 걸 미안해했다. 그에게도 양호열은 소중한 사람이니까. 제 입으로 친구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았을 테다. 그럼에도 강백호는 양호열의 진심에 진심으로 맞섰다. 얄팍한 동정과 치켜드는 외면을 모두 참았다. 그건 호열을 욕보이게 하는 짓이므로. 이 일방향인 감정에 백호가 책임질 건 아무것도 없다. 그래도 백호는 그것을 제대로 마주하고 대응했다.

사랑에 빠질 수밖에 없는 아이다.

후, 호열이 입바람을 내었다. 의식은 이걸로 끝났다. 이로써 그의 사랑은 마침표를 찍었다. 좋아, 그럼, 우린 계속 친구야. 확정 짓는 말투에 백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면목 없는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양손으로 제 상의를 잡아 쥐었다. 백호를 계속 불편하게 둘 수는 없으니 슬슬 자리를 비켜야 한다. 호열은 스쿠터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나 집에 갈게. 여기 너희 집 근처니까 걸어갈 수 있지?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그냥 없던 일처럼 지냈으면 좋겠어. 정 불편하면… 이런, 나도 모르겠네. 뭐든 노력할게. 네가 편한 대로 하자.”

“호열아.”

떠나려는 그를 백호가 급하게 불렀다. 불안과 걱정이 섞인 얼굴로 호열에게 뜻밖의 소리를 했다.

“그, 애들한테 전화할까? 대남이나, 용팔이나, 구식이나. 너 보러 가라고.”

“걔네를? 아니, 괜찮은데. 갑자기 왜?”

“…그동안 나 차였을 때, 너희가 나 놀렸잖아. 근데 난 그게 괜찮았거든. 물론 열 받았고, 짜증도 났는데, 그래도 같이 있으니까, 혼자 있지 않고 너희랑 있어서 그래도 덜 힘들었어. 그래서.”

내가 따라가면 안 되잖아. 사그라드는 속삭임이 호열에게 당도했다. 산들바람이 불었다. 폐부로 계절의 열기가 스며들었다. 호열은 백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사위가 고요해질 때까지. 마침내 부드러운 말소리가 나왔다. …괜찮아. 혼자 있어도. 백호는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그래도…. 호열은 조금 더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괜찮아. 오히려 혼자가 더 편할 거야. 아무래도 나는 백호 너랑 조금 다른가 봐.”

백호가 더 말릴 새도 없이 스쿠터가 앞으로 나갔다. 더 이상 질질 끌기는 싫어 끝낸다는 게 줄행랑치는 모양새가 됐다. 당황하며 한 손을 뻗은 백호가 후사경으로 보였다. 호열은 부러 목소리를 띄웠다. 진짜 문제없으니까 부르지 마! 잘 들어가라!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호열도 굳이 기대하지 않았다. 호열은 골목길을 달리며 속도를 만끽했다. 집 앞에 멈추자 온몸을 감싼 찬 기운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삽시간에 흩어졌다.

시동 꺼진 스쿠터에 앉은 호열은 잠시간 그 자세로 굳었다. 이내 허리와 팔이 눈에 띄게 흐물해졌다. 힘 빠진 목덜미에 땀이 이슬처럼 맺혔다. 습기가 살갗에 가득했다. 머리 위 가로등에서 날벌레가 싸라기처럼 모여들었다.

후덥지근한 여름밤이다. 미지근한 바람이 무성한 이파리를 스쳤다. 매미 소리가 끝없이 별천장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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