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새온
중세?AU
바닥에 피 한 움큼 뱉어낸다. 신이 있노라면, 혹은 그것이 악마일지라도 제발 이 세상에서 절 붙들어주세요. 얼룩진 바닥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성호 한 번 긋고 지독한 문양 하나 그린다. 살갗이 타오르는 듯한데 또 막상 아픔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려지는 대로 피가 굳어 모양이 잡히고 거대한 진이 만들어진다.
세상이 망한 것과 다름 없었다. 인간에게 있어 자신의 세상은 고작해야 주변에 몇 남지 않은 인간관계 정도인데, 그 인간관계가 모조리 황제에게 몰살당한다면 나약한 인간은 남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세상에 도래하기 시작한 악마의 힘을 빌려 다시 태어난다는 흑마법사들의 이야기를 멀리서 종종 들었다. 마을 사람들이 쉬쉬하더래도, 같은 마을에서 살아가는 입장으로는 그 이야기를 무시하고 지나갈 수는 없었다. 이미 피로 온 몸을 물들인 황제가, 폭군이 하는 말에 구속당하고 무참히 죽어가는 가족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피로 머리를 물들였다며, 악의적인 꼴이 아니냐며 붉은 머리를 죽이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이만치도 가당찮은 소리를 듣고도 황제에게 무릎을 꿇고 그 자리에서 진흙으로 머리를 감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고. 죽느냐 사느냐의 말도 안 되는 문제를 이리 눈앞에 들이밀었다고. 부당해 죽을 것만 같은 이 세상에 황제를 따르느니 차라리 악마를 불러 저 자신이 흑마법사가 되어 황제를 죽이겠노라. 혁명군보다 앞서 그 황제의 목을 쥐고 칼을 눈앞으로 치켜들어 한 번에 그것을 죽이겠노라. 그 누구도 의심할 수 없게 대광장에서 황제를 무릎 꿇게 만들고 단두대에 목을 치게 만들겠다.
이것은 분노였고, 입 안에 잔뜩 고인 핏물과 여기저기 얻어맞아 시뻘겋게 달아오른 몸은 점점 붓기로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옷자락에 스쳐 자국이 지워지려 한다면 다시 입 안에 고여가는 피를 뱉어 선명하게 문양을 그린다.
이 세상에 분노하게 해주세요.
이 나라의 황제를 죽일 수 있도록 해주세요.
제가 그것을 한숨에 죽여 삼켜버릴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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