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나루미츠] 진담

NRMT by 정의


     볼썽사납다. 애처로울 정도로 힘을 주어 닫혀 있는 눈도, 꿈틀거리는 입매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는 팔도. 돌발 상황으로 인한 한순간의 정적에 위화감을 느꼈던 것이 무색하게, 정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아 오히려 더 놀랍다. 점점 술렁거리기 시작하는 장내의 소란이 아무것도 없었던 공간을 따라 비쩍 마른 수건에 물 스미듯 찬찬히 번지기 시작한다. 정말, 정도를 모르고 끝도 없이 곤란한 남자다. 미츠루기 레이지의 평가는 제법 건조하고, 지나치게 공정하다.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하는 수군거림과는 대비될 정도로 순진하지만 평상의 나루호도보다 훨씬 화려한 색채가 눈앞에서 번진다. 아득하기만 한 기분에 잠시 과거로 내달리기 시작하는 기억을 구태여 거절하진 않는다. 

* * *

「 미이츠루기이. 」 

     나루호도 류이치에게는 고약한 술 버릇이 있었다. 십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고 나서야 알게 된 친구의 술 버릇은, 가히 봐줄 만도 못할 정도로 엉크러져 있어 처음에는 이게 무슨 부류의 장난인지 고민하는 시간을 가졌다. 시선을 마주하거나, 호흡이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음에도 수화기의 너머로 풍겨오는 목소리 사이에 눅눅하게 엉겨 붙은 알코올이 절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겠지만 코 끝에 확 풍기는 것 같아 미간을 굽혔다. 분명, 직접 바라보고 있으면 '그렇게 인상을 찌푸릴 필요는 없는데…….' 라고 말하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을 것이다. 상상에 그쳐야 할 표정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아, 손을 뻗어 이마를 짚는다. 지금 시간은 새벽 두시 삼십분. 창밖을 바라보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어둑어둑하다. 상대가 누구라 하더라도, 충분히 불만을 토로할 수 있는 시간이다.

" 추론해 보도록 하지. 네 방의 시계가 망가져 있는 모양이군. "

「 감시 카메라를 달아둔 건가? 언제? 마지막으로 방 청소를 했을 때 그런 건 없었는데. 」

" 사람이 하는 농담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버릇은 고치는 게 좋다고 누누이 이야기했을 텐데, 변호인. "

「 곧 죽어도 농담이라고는 뱉어내지도 않을 것 같은 검사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이 퍼지면,

아마 매스컴부터 뒤집혀버리고 말걸. 」 

시답잖은 공방이 오고 간다. 꼭, 입안에서 작은 사탕을 굴리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말들이다.  법정 속 서로의 앞이 아니었기 때문에, 큰 소리로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 시계의 분침은 2분 만큼 더 기울어진다. 이런 시간에 라면 절대로 연락을 할 리가 없는 나루호도가 걸었던 전화였던 만큼, 무슨 사건에 연류되어 걸려온 게 아닐까 생각했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잊고 있었던 피로감이 밀려들어, 자각하지 못한 감정이 조금 실린 어조로 뱉어낸다. 당장 급한 일이 아니라면, 다시 전화하도록. 지금은 이만 끊겠다. 지금에야 진탕 취한 것 같았으니, 내일 날이 밝고 나서야 제정신이 된 그가 자진해서 사과를 하든 잊고 있었던 용건을 꺼내어 오든 할 수 있도록 내밀어 주는 건 최후의 보루에 가깝다. 으음. 뒤늦게 생각을 짜내려 드는 것처럼 짤막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그에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럼. 마지막에 가까운 이야기를 뱉어내며 수화기에서 귀를 떼어내려는 순간,

「 좋아해, 미츠루기. 」

퇴각을 모르는 변호인은 그만 이 순간 가장 고약한 방법을 사용해 미츠루기 레이지를 조금도 움직일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영원히 깨버릴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지기만 하던 침묵이 지속되는 동안 아무런 이야기도 뱉어 내지 않고 한참 기다려준 건 나루호도의 쪽이었지만, 분침이 정확하게 5분을 넘겼을 무렵 먼저 '엄청 늦었으니까,' 라는 운을 떼어 내며 전화를 끊어버린 것도 그의 손이었다. 무슨 셈인지 알지 못해 한참이나 끊겨버린 수화기를 들고 멍청하게 서 있었던 것이 바로 어젯밤의 일이다. 어떻게, 어떤 표정으로, 어떤 상태로 다시 침대로 걸어가 누웠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애초에, 제대로 잠을 잤는지조차 의뭉스럽다. 뜬 눈으로 보낸 건지, 조금은 잠들었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집무실에 앉아서, 울리지도 않는 휴대전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식사를 하러 가겠다며 복작거리기 시작하는 집무실의 바깥에서부터 찾아드는 소음이 침전되어 있던 정신을 깨워버린다. 조금의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이러다가, 하루 종일 모든 시간을 버리게 될 것 같았다. 변호인의 일상을 하나부터 끝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막 점심시간을 넘어가고 있는 이 시점에까지 잠들어있을 리가 없어 먼저 휴대전화의 화면에 불을 밝혔다.

수신 대기음이 두 번인가 세 번쯤 울리기 시작할 무렵, 시끄럽기만 하던 소음이 가라앉고 전화기의 너머에서 조용한 공간이 가져다주는 안정감이 전달된다. 으으음. 역시 예상했던 대로 깨어는 있었던 모양이었으나, 역시 어제의 주사에 걸맞은 숙취가 찾아온 모양인지 영 성해 보이지 않는 목소리가 뒤따라 나온다. 뭐야.

「 혹시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재판 일정이 잡혀 있었나? 」

" 유감스럽게도, 그렇지는 않군. "

「 이런 시간부터 네가 전화를 걸 리는 없다고 생각, …… 아니. 지금은 충분히 눈 뜨고 움직일 시간이군.

그래서, 무슨 일이야? 먼저. 」

어떤 위화감을 느끼게 된 경위 따위는 누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진심으로 의아해하는 음량이 되려 자신을 놀리기 위해 고도의 섬세함으로 설계된 계획은 아닌지 순간적으로 의심해 보았으나 저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에는 한 점 흔들림이 없어 보인다. 결국, 진실을 알기 위해 한 발자국 먼저 나서야 하는 쪽은 누구도 아닌 미츠루기 레이지의 몫이었다. 몇 번이나 입 밖으로 꺼내들기 힘들어 입이나 몇 번 벙긋거렸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는 나루호도가 어쩌면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해 기다리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순간적인 판단이 끌어내는 답변은 아마,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리라는 가정 하에 그가 바라던 질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 …… 한 가지만 물어보도록 하지. 어제, 네가 누구에게 연락을 했는지 기억하나? "

짧은 침묵. 미츠루기 레이지는, 그 시간 사이에서 몇 가지의 가능성을 놓아둔다. 자신의 반응을 재기 위함이거나,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 급작스레 전화를 걸어온 자신에게 어떤 변명을 늘어두어야 할지 생각하고 있거나. 혹은, 정말 기억하지 못해 어제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모든 가정 속에서 다가오는 '사과'는 절대 미츠루기가 늘어두었던 선택지의 범주에 없었다. 저기, 있잖아.

「 그러고 보니까, 그렇네. 어쩐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까 전화기의 배터리가 거의 죽으려 들더군.

내가 간밤에 뭘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이것저것 만져보고 있다가……. 너한테 전화를 했다는 건 알고 있었어.

뭐, 그래도 어젯밤에 뭔가 이상한 말이라도 했으면 네가 아침부터 연락을 했을 텐데.

점심쯤 되는 지금까지 특별한 연락이 없었으니까. 」

아무 일도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멋쩍은 웃음과 함께, 따라 떨어지는 목소리가 제법 선명하다. 지나치게 청량해서, 정말 아무 일도 없었는데 자신만이 과민하게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닐까. 미츠루기 레이지는, 일순간 그렇게 생각한다.

「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전화를 걸 정도라면 말이야,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거지. 미안. 혹시, 내가 무슨 이야기라도……. 」

" …… 아니. 별일은 없었다. 꽤 심각하게 취해 있었던 것 같아, 그저 안부차 연락했던 것뿐이네. "

아직까지는 다행스럽게 살아있는 모양이니, 이만 끊도록 하지. 제 딴에는 담백하게 굴었다고 생각했는데. 돌이켜보면 조금은 날이 서 있는 데다가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선언의 끝에도, 무언가 붙잡는다거나 아쉬움을 전하는 목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 바쁠 시간이지. 그래. 다음에 기회가 되면 그쪽으로 들릴 테니까. 그럼. 끊겨버린 전화기를 다시 한번 들고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는다. 간밤의 기억이 조금 희미하게 바래진다. 어쩌면, 어젯밤 명확하게 느껴졌던 공백의 그 순간만큼은 자신의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는 거짓이 아닐까 미츠루기는 짚어본다. 그렇다면 왜 그런 말을 '들은'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자신이 그 바보 같은 변호인에게 듣고 싶었던 이야기였기 때문인가. 하나둘씩 파고들면 들수록, 오히려 모든 것들이 진상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것 같았다. 호흡을 집어삼키며, 미츠루기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오늘 밤만큼은 일찍 잠자리에 들어, 머리를 말끔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 * *

     결과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세워 두었던 모든 계획이 어그러지는 것만 같은 건 그저 기분 탓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버린다. 미츠루기 레이지는, 돌아가지도 않으려 드는 머리를 제대로 붙잡기 위해 협탁의 위에 고개를 얹었으나 오히려 거대하기만 한 이 땅이 반쯤 핑글 돌아가버리는 것만 같아 그만 눈을 감는다. 어쩌면, 지구가 거대하고 둥글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나 중력이 일상생활에 작용하고 있음을 알아차린 누군가의 하루도 이런 모양이었을지 모르겠다. 깊은 고뇌, 끓어오르는 생각, 그리고, 조금의 수면 부족.

' 그날 ' 을 기점으로 꼭 몇 날 며칠 동안 새벽의 같은 시간에 울리기 시작하는 벨 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으면 허전함을 느낄 것만 같았다. 언제는 이번에야말로 잠을 자야겠다 다짐하며 무음 모드로 돌려 두었음에도, 그 시간에 맞춰 멋대로 깨버리는 몸이 미츠루기 레이지의 의사를 배반해버리는 순간 자신에게도 무언가 이상이 생겼음을 인정해버리고 만다. 상황에 관한 빠른 파악과 수렴은 긍정적이다. 그런 것들이, 이 -극악무도하기 짝이 없는- 상황을 타파해 내는 데 최종적으로 도움이 될지에 관해서라면 장담할 수는 없었겠지만.

꼭 어떤 용건이 있기 때문에 걸려오는 전화가 아니었으므로 언제나 한결같은 어조로 쓸데없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전화를 끊기 직전에 자신의 마음에 관해 고백해 온다. 좋아해, 미츠루기. 최대한 상황을 따라 이해해 보기 위해 노력해 본다. 첫째. 그는, 지난 시간 동안 자신에게 존재하던 십오 년간의 공백과 덧붙여 자신이 말도 않고 떠났던 일 년의 여행에 관해 일종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다. 둘째. 그렇기 때문에, 밤마다 전화를 거는 행위로 자신이 아직까지 이곳에 있음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셋째. 한참 종잇장에 수려하게 적어 내려가던 마음속 펜대가 멈춰 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이런 시간에 평소에는 자주 마시지도 않던 술에 진탕 취해 자신에게 연락을 할 필요가 있었나? 세 번째 가정의 위로 검은 선을 덧씌워 좍좍 그어버린다. 무언가, 중요한 분기를 두고 같은 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놓쳐서는 안 될 진실. 결정적인 증거. 교묘하고 노련하기 짝이 없는 변호인이라고 하더라도,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을……. 무언가.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냐 묻는다면, 정확하게 그렇다며 답을 내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늦은 저녁. 아니, 그보다는 밤. 대체 이게 무슨 관경이냐며 오고 가는 동안 온갖 구석에 눈길을 주는 저 변호인이 조금 정신 사납게 느껴지고야 있었지만 그 정도는 무시할 수 있었다. 제 지갑 사정으로는 감당할 수조차 없을 것만 같다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나루호도 류이치의 손목을 잡아당기며 비교적 저층에 놓여 있던 룸을 향해 걸어간다. 미츠루기 레이지에게 있어서 이 건물은, 멀리 나가야 할 일이 있거나 늦은 시간까지 조사해야 할 일이 생길 경우 집으로 돌아가기 힘들 때 이용하곤 했던 거점에 가깝다. 그래. 그러니까, 이번 일도 '일'에 가깝다. 다시 한번 곱씹었다.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자신을 이용하여 직접 부딪힌다. 무엇이 되었든, 술이나 한 잔 마시자며 불러 내었던 나루호도 류이치로서는 절대 예상하지 못했던 선택지라고 생각한다. 

혼자 사용하기에는 넓어 보였던 방이, 한 사람 분량의 부피가 더해지면 꽤 알맞게 변해 버린다. 당장 '네가 필요한 일이다' 라거나, '오늘 밤만큼은 시간을 비워 둬라', 따위의 이야기를 해 두었으니 의도도 모르고 멋대로 푹신한 침대에 누워 감촉을 만끽하던 변호인의 침구 앞에 놓여 있던 테이블의 위에 일탈 치고는 제법 위험한 도수의 술을 얹어 둔다. 미츠루기 레이지는, 순간적으로 나루호도 류이치의 눈동자 사이에 스쳐 지나간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망설임. 상태가 좋지 않다거나, 피곤하다는 이야기를 늘어놓기도 전에 병의 마개를 뽑아내어 잔을 채운다. 거절할 도리가 없어진 변호인의 몸이 제대로 일으켜 세워져서, 침구의 끄트머리에 앉아 잔을 움켜쥐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미츠루기는 눈을 가느다랗게 떠낸다.

도합 몇 번을 기울였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정확한 것은, 수를 세기 어려울 정도로 피차 절어버려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처음에는 웃고 떠들고, 멋대로 가벼운 고민거리를 털어내며 한숨을 쉬기도 했던 나루호도의 입이 돌연 느려져있다. 두 눈으로 직접 그의 주사를 바라보는 건 처음이지만, 확실한 건 수화기 너머에서 느껴지던 분위기와 미묘하지만 차이가 존재한다. 열이 몰린 뒷목을 향해 손을 뻗어 긁적거리는 나루호도와 시선이 마주친다.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 것인지, 돌아가 버리는 눈동자가 잔을 향하는 순간 미츠루기는 입술 사이에서 뭉그러지는 언어를 집어삼킨다. 심증이라면 충분하군. 결정적인 증거를 잡아내는 순간만큼은 그 언제보다 어려울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 더 신중해져야 할 필요가 있었다. 과하게 신중한 나머지, 나루호도 류이치가 무언가의 기색을 알아차린 것은 그러니까 돌발 상황에 가깝다.

" 저기, 미츠루기. 역시, 오늘은……. 조금 많이 이상한 것 같은데. "

알코올에 절어 있긴 하지만, 역시 관찰력 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음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닿는 순간 미츠루기는 자신이 조급하게 굴었음을 깨닫는다. 만회를 하기 위해서라면 지금은 무엇을 물려야 하는가. 무슨 말을 뱉어 내어야 하는가. 그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 자신의 의도를 완벽하게 알아차린 건 아닌 것 같은데. 한 발자국만 잘못 내디뎌도, 금세 돌아서서 달려가버릴 야생 짐승을 대우하는 것보다 훨씬 까다롭게 느껴진다. 지금이 아니라면, 진실을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가 그저 멀어져 버리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일 수도 있었다. 생각이 끝에서 끝까지 닿는다. 팽팽하게 회전하던 머릿속에 열이 몰리면 몰릴수록, 혈액이 함께 돌아버린 탓인지 모든 것들이 점점 둔해진다. 최악의 상황에 봉착해버렸군. 출구를 찾을 수 없는 골목에 몰려, 결국 해소할 수 없는 무언가의 정체조차 평생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는 순간 조금의 걱정스러움이 담겨 있는 눈과 마주친다. 

애초에, 수 싸움은 모두 무의미했던 것이다.

기울여드는 상체가 나루호도를 향하면, 미츠루기가 다가온 딱 그만큼 멀어져 버린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나루호도의 눈동자 속에 서려 있던 여유는 점점 사라져간다. 올바른 방향이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거리를 좁히면 좁힐수록 점점 퇴로가 사라져 버리는 나루호도가 불리해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음에도 그는 결코 제지하려 들지 않았다. 원체 거절을 못 하는 성정이라고 하더라도, 작정하고 그어진 선의 위에 발을 들여놓아도 어떠한 변동이 없음을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것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쉽다. 지나치게, 쉬운 문제였다. 몸이 침대의 헤드에 닿는 순간 멈추는 움직임에 맞춰, 두 번 정도 더 다가간다. 조금은 어둑어둑한 빛을 등지고 아래로 내려다보면, 꽤 볼만한 얼굴을 하고 있는 나루호도가 마주 올려다본다. 그러고 보니, 오늘만큼은 '그' 말을 하지 않는군. 운을 떼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하하,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네. 마치 우스갯소리에 가까운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적당히 웃으며 회피하려 든다. 어쩌면 이 순간만큼은 위험하다고 생각한 나루호도의 판단이 탁월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미츠루기는 손아귀 아래에서 빠져나가려 드는 것들을 움켜쥐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진상을 파악한 미츠루기 레이지에게 있어서 진실을 감추려 드는 피고인은 단 한 번도 적수가 될 수 없었다. 열이 올라 뜨끈뜨끈한 머리를 내려, 나루호도의 이마에 가져다 댄다. 미적지근하다. 미츠루기 레이지는, 생각한다.

" 온도가 같은 두 물체가 마주 닿으면, 서로의 온도를 잘 감지하지 못하게 된다고 하더군. 자신을 기점으로, 상단이나 하단에 있는 물체 정도는 잘 감지할 수 있는데. "

" ……. "

" 처음부터, 가정이 잘못된 추론이었기 때문에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 없었던 것뿐이라는 뜻이네. 단순히 일방적으로 뱉어내는 행동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치밀해 보였지만…….

요건은, 그래. 자네와 내가 같은 온도를 가지고 있다는 걸세. " 

잠결에 전화를 받든, 받지 않았든, 무엇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자신에게 하는 것인지에 관한 '진실'은 결국 미츠루기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밤에는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낮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양 구는 나루호도의 진실을 알고 싶어 탐구하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던 것뿐이다.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집요하게 시선을 마주하는 나루호도의 얼굴은 가히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엉망이 되어 있다. 불그스름하게 열이 올라 있던 뺨을 향해 손을 뻗어낸 미츠루기가,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멈춘다.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손등이 울긋불긋하게 비추어져 있었던 탓이다. 이쯤 되면, 모든 증거가 나열되어 있음에도 지나치게 신중히 움직일 수밖에 없다. 승리감을 만끽할 새도 없이, 손바닥 사이에 놓아두었던 것들이 환상처럼 모조리 사라져버릴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져 불안하다. 손등의 위로 새로운 손이 겹쳐 닿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았다. 반짝거린다. 자신이 등을 지고 있어 그에게 떨어지는 것은 그림자일 뿐인데도, 빛을 받고 있는 것처럼 나루호도의 눈동자는 빛나고 있었다. 미츠루기는 그렇게 생각한다. 

알고 싶었다. 결과적으로 미츠루기 레이지는 자신이 이렇게까지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이해하고 싶었다.

등허리에 손이 닿는 줄 알았는데, 어느순간 온 세상이 반바퀴 정도 돌아가 버린다. 미츠루기는 불만을 터뜨리는 것을 대신해서, 눈을 몇 번 느리게 감았다 떠낸다. 파노라마처럼 번지는 모든 세상의 색감이 눈앞에서 묘한 얼굴로 색색 호흡을 뱉어내는 누군가에게 닿아 집중되어 버린다. 지나칠 정도로 비열하고, 다감하고, 걱정이 많다. 반 정도는 자신도 같을 것이라 확신한다. 본능적으로 떨어져 나오는 입술을 손끝으로 막아 세운다. 할 말을 뱉어내지 못한 나루호도의 시선이 손가락 끝에 닿는다. 그런 말은. 짧게 운을 띄우면, 지나치게 집요한 시선이 다시 되돌아온다. 저 집념만큼은, 평생을 쫓아가더라도 닿을 수 없을 것 같다. 양손이 서로 마주 잡힌다. 꼭, 포식하는 자의 모습으로 내려다보고 있으나 짐승은 눈앞에 있는 자의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깨지는 것을 각오하고 부딪혀 들었지만, 이래서야 잃는 게 훨씬 많다. 어깨너머로 쏟아지는 그림자에 잠기기 시작하며, 미츠루기는 말을 맺는다.

" 그러니까, 그런 말은. 제대로, 깨어있을 때……. 직접 전하게. "

* * *

     온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눈을 뜨는 순간, 미츠루기 레이지는 저도 모르는 새 짧게 중얼거린다. 곁을 지키고 있어야 할 온기가 없어 느껴버렸던 허탈함 따위가 움직이기 힘들 만큼 잠겨드는 관절을 따라 천천히 번지기 시작한다. 지난 몇 날 며칠을 괴롭혀왔던 수면 부족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오랫동안 잠들어 있었다. 몇 시인지 알아내기 위해 시계를 쳐다보면, 기껏 준비해 두었던 휴일의 40%는 족히 사용해버린 시간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부딪힘의 끝이 이렇게까지 허무할 줄을 알았으면, 진실을 묻어내는 행위에 조금이라도 망설임이 묻어 있었을까. 허울뿐인 상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았다고 하더라도, 같은 선택을 강행했을 것이다. 몸을 겨우 추슬러서 로비에까지 걸음을 옮긴다. 아마, 네 상징이 되어 버렸을 푸른빛 정장을 두고 도망쳐버릴 만큼이나 여유 없는 상황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건만 건물의 구석구석 네 흔적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되레 차분하고 침착하게 대응할 수 있을 줄을 알았다. 미츠루기의 눈앞에, 갑자기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무언가가 날아든다. 어지러이 코 끝을 찌르는 향이 제법 지독하다. 감각 없이 뭉쳐져있을 뿐인, 꽃다발이었다.

다발의 중간을 쥐고 있는 손끝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볼썽사납고, 애처로울 정도로 힘을 주고 있는 모양인지 덜덜 떨고 있는 그 모습이 조금은 불쌍하게 느껴진다. 마침 로비에는 투숙을 위해 올라가거나, 간밤의 시간을 뒤로 한 채 나가려 드는 조그마한 인파의 걸음이 섞여 있었으므로 온갖 시선이란 시선은 다 받아두는 상태다. 미츠루기 레이지, 자신이 눈을 뜨기 전에 해치우려 했던 모양이었으나, 원하는 대로 잘되지 않아 달려오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그가 입고 있던 복장은 이제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저 너머에서 넘어오는 색색거리는 숨결은 어젯밤 느꼈던 것과 지독하게 같은 모양이다. 묘한 감상에 젖기도 전에, 멋대로 뻗어져 나온 손끝이 다발의 중심을 잡는다. 여전히, 온기를 알 수 없는 손이었다. 숨을 고르기 위해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에서, 멋대로 뭉그러져 제대로 된 형상을 잡기조차 어려운 단어가 터져 나오기 전 미츠루기는 손을 끌어당긴다. 형형색색의 꽃다발이 머리의 위로 쏟아진다. 그 뒤에 있던, 손의 주인도 함께 끌려온다.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어, 맨바닥에 몸이 쓰러진다. 법정이었으면, 아마 오랫동안 화자 될 수밖에 없을 만큼 커다란 스캔들이다. 다행스럽게도, 이곳은 법정이 아니었다. 가까워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미츠루기는 생각한다. 여전히 반짝거린다. 그 눈에 비치고 있는 자신의 표정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질서 없이 흐드러져있는 꽃잎의 사이에서, 두 사람분의 입이 열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목소리가, 우열을 다투지 않고 동시에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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