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차탐차] 외전 3 - 차검사와 배변호사의 사건일지

위증의 차검사 [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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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 클 때는 뭐하고 그렇게 콩알만하냐고, 그렇게 놀려먹을 땐 재밌었지만 물먹은, 아니 술먹은 콩알의 무게는 발걸음마다 그 콩알 하나 만큼 정도씩 무거워지고 있었다. 을지로를 지나 명동, 때가 때이니 만큼 늦은시간에도 오며가며 재잘대는 사람들 틈바구니를 지나치느라, 지나가겠다 연신 꾸벅여댄 목덜미는 뻐근하고 타미의 허벅지를 받쳐든 팔엔 힘줄이 돋았다. 울퉁불퉁 지랄맞은 길바닥에, 미친놈들이 쳐먹었음 치우기나 하든가 나뒹구는 쓰레기를 피해다닐 적엔 사람 많은데만 벗어나자 했는데 그걸 지나고 나니 남산터널 입구가 저 멀리 어둑했다.

ㅎㅎ 미친.. 미친것.

그러고보니 보름이네. 추석에 걸맞지 않는 이 뜨듯하고 미적지근하며 습기가 가득해 불쾌해 죽겠는 공기중에도 달빛 만큼은 휘영청 밝았다.

남산터널. 이 길을 못해도 백번은 지나 다녔을텐데, 도보가 없단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문명친화적, 기술집약적, 현대의 이기이자 발전의 아이콘 어쩌고는 뚜벅이 앞에선 그냥 그림의 떡이자 통곡의 벽일 뿐이었다. 다시는. 다시는 어디가서 남는게 체력이란 개소리는 하지 않을테다. 체력 빼면 시체라 큰소리 땅땅치다 그냥 시체가 되고 말았다. 아니지. 지금 시체는 사치지. 좀비지 좀비.

그 좀비는 끝없는 산길을 굽이굽이 오르고 또 오르는 중이었다. 허벅지가 터질 것 같고 입에서 단내가 펄펄 나는 것은 어뜨케 참아보겠는데, 달빛이 이렇게 환한대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더럽게 울창한 늦여름의 산길은 정말, 정말정말 진짜로 어두웠다. 이마를 타고 내려와 턱 밑에서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 소리마저 들릴만큼 고요하고, 어거지로 내딪는 발끝이 안보일만큼 캄캄한 길에서 현은 온몸이 땀에 쩔어 녹아 스러질 것 같은 동시에 등골이 쭈뼛쭈뼛 솟는 진귀한 경험을 했다. 등짝에 매달려 말 한마디 안 걸어주는 타미가 서운했던 것 같은데, 지금 만큼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얘가 진짜 겁대가리가 없기는 진짜 없긴 해.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고 걸어, 턱이 얼얼하고 이빨이 몽창 빠져버릴 것 같을 쯤 돌입한 내리막 구간에선 가경에게 잘 보이겠다고 신고 간 가죽로퍼의 앞코가 뚫리는 것이 아닐까를 걱정했다. 혹은 점점 굽어지는 상체가 접혀서 타미가 쏟아지는게 아닐까…아 어쩌면 그건 내면의 욕망일지도.

- 타미

- ..

- 있잖아. 잠깐만 화내지 말구 내 말 좀 들어봐요.

- ..

- 내가 타미한테 굳이 가경선배랑 만난다 얘기하지 않은건. 난 절대로-


- 피고는 피고의 여자친구 차현을 정말 사랑합니까?

익숙한 구도의 낯익은 법정 앞, 주로 민사건을 맡다보니 법복을 입은 모습이 어쩐지 낯선 송판사의 질문에 타미는 자연스럽게 옆을 돌아보다 움찔 몸을 긴장시켰다. 옆에 앉은 이는 자신이 아닌 송가경을 바라보다가 굳은 얼굴로 준비해 온 종잇장을 팔락이고 있었다. 그럼 피고는 누가..?

- 피고 배타미는 질문에 대답하세요

나야..? 당황해 주변을 마구 둘러보다가, 피고인. 음역대가 푹 떨어져 낮아진 가경의 목소리에 본능이 감지하는 위협을 느끼고 등줄기를 바짝 세웠다.

- 네..네!! 네에…

- 아까부터 피고인 계속 대답을 회피하는데, 제대로 답변하세요. 사랑합니까.

판사가 요구하는 대답을 타미는 명확히 알고 있었다. 머리로 알고 있는 대답이 입밖으로 잘 나오지 않은지가 오래된듯, 얼른 입을 열어보려던 입술이 바싹 말라 달라붙었다. 법정이 이토록 넓고 뜨거웠었나. 송글송글 맺힌 땀이 눈썹을 간지럽혔다.

사랑합니까. 사랑합니까. 사랑합니까…

무심코 돌아본 옆, 미간이 좁아져 한껏 초조한 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답변하지 마세요 타미.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 질문은 제가 답변해도 되겠습니까

- 알겠습니다 변호인. 답변하세요.

- 피고인 배타미는 그동안 차현과의 관계에서 늘 차현을 배려하고 좋을 때도 슬플 때도, 항상 옆에 있어주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증거를 제출합니다.

법정 앞에 비춰진 대형 스크린엔, 현의 심상치 않은 목소릴 듣고 가디건 차림으로 차키를 챙기던 자신이, 변호사들이 밉다며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도록 눈물을 참는 현의 어깨를 안고 있던 모습이 영상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이런 표정이었구나 나는. 속상해하는 현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눈시울이 붉어져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생했노라 떨리는 목소리를 내는 자신이 생소했다. 피의자를 줘패고 윽박을 지르면 질렀지, 누구 앞에서도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현의 진짜 모습. 부드럽고 섬세하며 다정한 그의 얼굴은 그렇지만 익숙한 것이었다.

관자놀이를 굽혀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무심하게 그를 지켜보던 가경의 눈이 현을 향했다. 무감정하고 차가운, 절제된 듯한 가경의 표정과 어딘지 당황한듯 숨길 수 없는 초조함이 섞여 시선이 불안정한 현의 표정이 교차되었다.

- 변호인의 증거는 피고의 사랑을 증명하기 충분치 않습니다. 원고측 입장에서 바라본 관계의 불평등과 관심의 차이를 정량적 지표로 제시합니다.

원고가 판사와 동일하단건 차처하더라도, 현과 나눈 대화, 통화목록, 메시지와, 주고받은(에서 받은쪽이 압도적으로 높은) 쪽지들이 주르륵 숫자가 되어 법정 앞에 나란히 나란히 줄을 맞추는 모습은 꽤나 신기한 장면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준비한거지. 송판사는 정말이지 철두철미하다. 초능력자 같애. 작고 귀여운 몸집을 어떻게든 부풀려보려 현쪽에 비해 띄엄띄엄 줄을 맞춰 서서 웅성대는 자기쪽의 숫자들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렇게까지 차이가 나던가. 첨부되어 있는 이미지들 마저 이쪽은 단조롭고 현상을 비추고 있는 반면, 현쪽은 파랗고 해사하고 다양했다. 꼭 지같이.

- 판사님 이의있습니다. 정량적 지표는 감정을 증명하지 않습니다!

벌떡 일어난 현의 손이 피고석 테이블을 짚었다. 하얗게 질린 손등이 그 속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아 속이 울렁였다. 가만히 손등을 쓰다듬자, 이쪽으로 고갤 돌려 내려다보는 눈빛에서 미안함과 곤란함이 마구잡이로 흔들거렸다.

- 기각합니다. 변호인 감정을 정량화하기 어렵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이 관계에서 발생한 불균형을 부정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할게 아니라면 변론에 신중하세요. 피고에게 페널티를 부여합니다.

땅땅- 망치가 나무를 때리는 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튀어나온 송판사 모양의 헝겁 인형들이 손난로를 질질질 밀고와 타미 앞에 옹기종기 세팅을 했다. 미친..? 그와 동시에 안그래도 덥고 불쾌했던 공기가 순식간에 온도가 치솟아, 가슴골에 흐르는 땀방울이 명치께를 적셨다.

- 아니, 선고도 전에 이러는게 어딨어요! 무죄추정의 법칙은 어따 팽겨쳐두고-


- 이런 미친…!

- 어?

어리버리하고 주눅이 잔뜩 든 목소리를 듣자마자 현실로 돌아온 타미는 자연스레 몸을 움직이려다 휘청이며 억눌린 비명소리를 내는 현에 의해 이 펄펄끓는 열기의 근원을 꺠달았다. 얘 지금 뭐하는거지로 시작된 자각은 욱신거리는 머리와 젖은 옷자락, 그리고 거기서 올라오는 진한 알콜 내음으로 소환되는 메스꺼움 등으로 치환되었다. 사위는 어둡고, 습기를 머금은 미적지근한 공기에선 물비린내가 풍겼다.

- 내려줘

- 왜에.. 집까지 업고가라며. 그럼 데려다줘두 된댔자나

- 됐고. 내리라고.

- 싫어….. 타미 나랑 화해할래! 나랑 주글래!!

- 이 개또라이가 진짜!!

아악!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강하게 머리채를 쥐어뜯기는 바람에 외마디 비명을 지른 현이 힘이 풀려 비틀거리는 틈을 타 등을 밀치며 바닥으로 추락하듯 떨어졌다. 앞섭이 다 젖어, 바닥을 짚은 손을 탁탁 털어내는 몸짓만으로도 가벼운 한기에 체온을 빼앗겨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 어디서 그딴 그지같은건 배워와서 싸가지없게 으름장이야

- 너무해

- 내가? 지금 내가 너무해?

- 나…! 나도! 진짜!

- 진짜 뭐! 뭐!! 너 진짜 사람을 왜 이렇게! 난감하게 만들어! 내가 너한테..하 진짜. 넌 정말. 너땜에 진짜 열받아 죽겠는데! 미안하기까지 해야돼?!!!

바락바락 악을 쓰는 타미 목소리가 한새벽 쌩하니 지나치는 차소리에 섞여 귓가에 웅웅거렸다. 새카맣게 어두워 흐름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한강과, 라이트를 켜고 세차게 지나가는 차도 사이의 좁은 틈바구니에서 둘은 말없이 한참을 서로를 응시했다.

- 하. 차현. 오늘은 그냥 가. 헤어지자거나 그런거 아니야. 그냥 오늘은.. 지금은 너랑 얘기하고 싶지 않아.

- …

- 고집부리지 말고 가라구. 사과 받았고, 알겠고, 너랑 할 얘기가 많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고 짜증나서 미루고 싶으니까 그만 가줘.

강바람에 휩쓸려 자꾸만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살살 달래보는 말에도, 한 손으로 난간을 잡은 채로 어두운 강을 내려다보는 현에게선 대꾸가 없었다. 왜저래 불안하게. 지금 여기서 2차로 쌈박질을 다시하기엔 도무지 여력이 없어,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넣고 입을 달싹이고 있는 현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타미. 지친듯 갈라져 나오는 부름이 시끄러운 엔진소음 때문에 갸냘프게 사그라졌다.

- 왜. 나 지금 너랑 싸우자는거 아니야. 진짜 집에 가고 싶어서 그래

- …나 다리가 안움직여요

- ?

뭔소리야 얘는. 떨어지듯 등에서 내리며 거리를 뒀던 짧은 길을 터벅터벅 걸었다. 강바람이 부서지며 얼굴을 때렸다. 강바람. 강바람..? 불현듯 서있는 곳을 어림짐작하며 머릿속으로 지도를 그렸다. 아닌데? 그럴리가 없는 곳에 핀이 꽃힌 주변을 빙 360도 돌다가, 저 멀리 어둑한 하늘의 밝은 달빛이 비치는 곳 삐죽 솟은 남산 타워에 시선이 머물렀다.

- 야

- 어..? 아니 잠깐 있으면, 되는데. 타미 진짜 갈거에요? 나 진짜 오면서 많이 생각-

- 오면서?? 너 어떻게 왔어. 너 진짜 설마 걸어왔다고는 하지마라 너. 너- 너 진짜 죽여버릴거야

거러-와앗서어- 두 손으로 난간을 붙들더니만, 대답과 동시에 주저 앉으며 잔뜩 물기를 머금은 목소리에 서러움이 한가득 담기다 못해 흘러넘쳐 강밑으로 쏟아져버렸다. 이 멍청한 바보새끼가 진짜. 뛰듯이 다가가 쪼그려 앉았다가 무릎을 꿇듯이 무너졌다가 털퍼덕 주저앉아 다리사이에 얼굴을 집어넣고 어깨를 들썩이는 미친애의 셔츠위를 덥썩 쥐어잡았다. 축축하다 못해 물기가 손끝에 서리는게 자세히 보니 앉은 자리에도 습기가 퍼지고 있었다.

- 야!

- 야!!! 너!! 바보야?!!!!

타미-가아- 바하아보야아- 한쪽팔을 무릎 위에 대고 다른쪽을 기대듯 올려 눈가를 거칠게 쓸면서 뱉는 웅얼거림에, 자기가 얼마나 좋아하는데 왜 그렇게 못되게 구느냐, 송판사님한테 타미 자랑 엄청했는데 넌 진짜 못됐다, 그런 헛소리들이 두서없이 뭉그러졌다. 미친놈아 미친놈아!!! 등짝을 갈길때마다 어찌나 젖었는지 맨살이 닿는 소리가 정말이지 어이가 없어 웃음도 안나왔다. 일어나! 팔을 잡아 일으키려는데, 도무지 다리에 힘이 안들어가는듯 휘청이는걸 같이 허우적대느라 난간에 머리를 갖다 박았다.

깡- 청아한 소리를 듣고는 눈이 똥그레져 괜찮냐며 손바닥을 가져다대고 호호 불고 있던 등신같은 애인이 온통 젖어 엉망진창이 된 셔츠자락을 끌어다 이마에 묻은 먼지를 닦아주었다. 물티슈마냥 싹 닦이는게 황당해서 웃음이 터졌다. 야 넌 정말. 터져나왔던 헛웃음으로 눈이 마주친 순간 폭발적인 웃음이 터져 그 애의 셔츠 멱살을 움켜쥐었다. 정말 못살겠다 너때문에. 붙들린채 흔드는데로 흔들흔들 앞뒤로 움직이는 행사장 풍선 같은 어리둥절한 모습 때문에 연쇄적이고 폭풍같은 폭소가 터져나왔다.

젖은 낙엽더미마냥 앉은 자리에서 꼼지랄만 댈 뿐 도무지 엉덩일 못 떼는 현의 옆에 주저앉았다. 등에 닿는 딱딱한 쇠의 차가운 기운이 달가워, 눈치 보듯 흘끗거리는 현의 눈알을 찌르는대신 뺨을 폭 찔러보았다. 말랑하고 뜨듯한 뺨이 패였다가 도로 차올랐다. 이 무식하고 요령없는 무대뽀를 정말로 사랑하는지, 그에 대한 대답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표현도, 행동도, 사과도, 그리고 감수성도 과하게 풍부한 현의 젖은 옆얼굴을 보고 있는 지금이라면.

- 차현아

- 웅

- 집에가자

- ..같이?

- 다녀와서 보자며.

- 으응

- 너 다리 안움직인다고?

- 쫌있음 괜찮아져

- 택시 부르지 뭐. 쭉 누워있어. 계속 누워있도록 해. 집에가서 봅시다 차검사.

- 타미 너 무서워

응 그래야지. 너 땜에 난 꿈속에서도 송판사에게 무간지옥형을 받았다 돌아왔으니. 배터리가 5%도 남지 않은 휴대폰 화면을 켜고 택시앱을 눌러 들ㅇ어갔다. 차현의 체력도 휴대폰도 방전인데, 야간할증이 잔뜩 붙은 택시비는 만땅이었다.

연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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