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탐차] 외전 2 - 차검사와 배변호사의 사건일지
위증의 차검사
아무래도 멀쩡하게 생긴 애가, 옷차림도 멀쩡하게 잘 차려입고 호텔 로비 근처에서 질질 짜고 있으면, 원하든 원치않든 꽤나 이목을 모으기 마련이다. 게다가 겉모습으로만 치자면, 남의 눈에 눈물 깨나 뽑을 것 같은 상인 애가 저렇게 서러워 죽겠는 표정을 하고 있으면 더욱이나. 맘 같아선 이 모든 드라마에서 모르는척 거리를 띄우고, 안락한 집으로 복귀해 조용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가경은 피로한 발걸음을 어렵게 떼어냈다. 아무래도 현에겐 쉽사리 약해지는 맘도 있겠지만은, 저 애의 요령없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헛짓거리에 AS를 해줄 수 있을법한 사람이 본인 뿐이란 자각 때문이 컸다. 남보다 혹독하게 사춘기를 치루던 현을 사람 하나 키운다치고 물심양면으로 서포트를 했던 정이 있어 그의 편을 들어주고 싶다지만, 이 사안의 백이면 백가지 심증과 물증을 모조리 검토해보아도 명명백백한 피의자를 어떻게 구제해야 할까.
술을 마실 생각으로 왔으니, 차도 없이 뚜벅이로 근처 벤치에 현을 앉힌 가경은 잠자코 쫓아가서 싹싹 빌지 않고 멀뚱히 뭐하고 앉았느냔 소리를 목구멍으로 쑤셔넣고 홀로 편의점을 들렀다. 배타미가 몇 기였더라. 기억을 되새김질하며 음료 몇가지를 천천히 고르다 내다본 바깥 풍경에 고개를 푹 수그리고 휴대폰을 만지작대는 현이 있었다. 정말 손 많이 간다. 15살의 연애도, 25살의 연애도 모르는척 대충은 알고 있었지만 35살의 연애에 훈수를 두게 될 줄은 차마 몰랐다. 여태 만나던 별의별 양아치, 폭주족, 오늘만 사는 하루살이들로 조마조마할 땐, 후배이자 법조계에선 이름 깨나 떨치는 배타미가 선녀 같았는데. 그랬음 좀 더 잘해줄걸 그랬나. 아니 근데 내가 무슨 망나니 아들 장가보낸 시어머니도 아니고..
- 현아
현의 앞에 쪼그리고 앉아 수그러진 상체 앞으로 고개를 넣어 눈을 맞추자, 급하게 눈을 슥슥 문지러 닦으며 멋적게 미소 비슷한걸 지어보려는 하얀 얼굴이 여기저기 불긋했다. 봉투를 부스럭거리며 열어 단지 우유를 건내자, 감사합니다. 꾸벅 인사하는 목소리도 여전히 잠겨있고. 그걸 뺨에 가만히 대고 다리를 앞뒤로 흔들며 자꾸만 도로 자세가 낮아지는 현의 옆에 앉아, 격려하듯 허벅지를 톡톡 두드렸다. 담배 한대 펴도 되니. 아직 감정이 위아래로 격한 것 같은 애한테 무슨 말부터 꺼내봐야 되는지를 골라보느라 딱히 의미없는 동의를 구하자 고개를 주억이다 이쪽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시선이 마주쳤다.
- 저도 펴봐도 돼요?
- 아니
- ..나도 성인인데
- 너 담배 가르쳤다 소리까지 듣고싶진 않은데
시무룩해져가지곤 그걸 뭐 배워야 아나..꿍얼대는게, 속상함이 평소의 어려움을 극복하게 했는가보다. 매번 바짝 긴장을 하고 있더니만, 내앞에서 담배 피겠단 소릴 다하고.
- 타미가 뭐래
- 연락하지 말래요..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 무슨 생각
- ..
- 그래서 어떡할건데?
- 근데요. 근데 저는. 언니 근데 제가 그렇게 잘못했어요? 오늘 진짜 본가 간 것도 맞고. 언니두. 언니도 저랑 가족이잖아요. 아니 그리고 자기가 그렇게 맨날 막 송가겨-엉..!
- 나 뭐
파바박 고개를 젓더니만, 판사님 얘기 자꾸 꺼내지 말라고 지가 그래놓고 막 화내잖아요. 투덜투덜 높아졌던 목소리가 순식간에 음량이 낮아진걸 보니, 자기가 생각해봐도 그렇게 큰소리칠 처진 아닌거 같긴 한가보다. 타미가 그렇게 화내는걸 보니 뭔가 자기가 잘못한거 같기는 한데 억울하긴 억울하다 이거지. 힐끔 눈치를 보더니, 부스럭대며 뺨에 대고 있던 바나나 우유 뚜껑을 까고 있는 현을 보다가 연기를 뱉는척 한숨을 내쉬었다.
- 현아.
- 네에?
- 그러니까 내가 가족이니까 가족모임이라고 한게 거짓말은 아니라는거야, 아니면 가족모임인건 거짓말이 맞는데 타미가 나 만나는걸 별로 안 좋아할거 같아서 배려하느라 그랬다는거야. 어느쪽이야?
- 둘 다아..쪼끔씩 섞여있는데.
- 너 고등학교 때 술마시고 오토바이 뒤에 탔다가 떨어져서 다쳤을때. 음주운전은 아니라고 나한테 변명했었지. 그때 내가 뭐라 그랬어?
- ..언니랑 다신 안보고 싶으냐고
- 그거말고
- 그러다 죽으면 이유가 중요하냐..?
- 너 지금 그러다 타미랑 헤어지면 이유가 중요하니?
조건문 ‘헤어지면’이 스위치를 건드렸는지, 반대방향으로 고갤 돌리고 눈가를 만지작대는 현의 손에 손수건을 들려주었다. 그 기집애가. 걔가 나보고. 연락도 하지. 말라구. 뚝뚝 끊어지는 서러움 가득한 웅얼거림도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주었다. 아주 그냥 좋아 죽겠는가봐. 귀여워죽겠는 사랑싸움에 주제가 자기만 아녔음 그러든가 말든가 내팽겨쳐도 됐을걸 그랬다.
- 미안하다 그래. 둘 다 섞여있음, 둘 다 잘못했다고 하고. 니가 잘못했잖아 솔직히. 술 마신것도 오토바이 탄 것도 둘 다 잘못한건데, 음주운전은 아니란 변명이 말이 안되는거랑 똑같은거야.
- 그-흐으게- 어떻게, 또가태헤, 요-오!
- 울든지 그치든지, 말을 하든지 하나만 하고. 배타미는 술 좀 하니?
- ?
- 멀리는 못갔네. 을지로에서 소주마신대. 을지로? 얜 무슨 젊은애가.
- 힙지로..요새 젊은애들 사이에-
- 갈거야 말거야.
타미 옆에서 어색하게 목례를 보내던 한검사와 나눈 짧은 메시지를 현쪽을 향해 보였다. 쿨쩍. 코먹는 소릴 내면서 휴대폰을 든 손을 움켜쥐듯 화면에 집중하는 어리바리한, 도로 열일곱이 되어버린 망충하고 손 많이 가는, 그래. 아마도 가족이나 다름없는 애의 뺨을 톡톡 손끝으로 건들였다. 차검사? 갈거면 위치는 휴대폰으로 보내줄테니까, 이 손 놓고 그만 출발하지? 화들짝 놀라 붙들었던 손목을 놔주고는 고갤 주억이는 현에게 턱짓을 해보였다.
- 가. 알아서 갈테니까. 잘 해결하고 다음에 다시 얘기해.
- 죄송해요
- 어
- 택시 부를까요..?
- 그만 좀 가볼래?
웃고는 있지만, 슬슬 말투에서 한계가 비치는 가경에게 현은 일어나 꾸벅 인사를 하곤 그대로 몸을 돌려 방향을 가늠했다. 어두운밤, 사람이 비어 조용한 서울의 도보 위를 성큼 성큼 걷다가, 조바심이 날쯤 도착한 지도위의 점을 향해. 습기가 남은 여름공기를 폐부 가득 채우며 속도를 높였다. 가로등 불빛과 드문드문 지나치는 차의 헤드라이트가 직선처럼 이어졌다.
- 타미!!
- 어어- 차검사, 아휴 다행이다. 미안해요 나 먼저 일어나도 되죠? 가야된다니까 붙잡고 놔주질 않아가지고-
- 네 죄송합니다. 제가 데리고 갈게요.
-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려요. 괜찮겠어요? 택시 불러줄까?
- 괜찮습니다. 들어가세요 선배님.
겉으론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고 있지만, 그 시선이 탁자 위에 기댄 팔을 거의 베고 있다 시피한 타미에게 고정된 것을 본 한검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차검만 믿고 가요. 속닥이는걸, 믿을걸 믿어라. 치사하게 도망간다 이거지. 혀가 풀리랑 말랑한 타미의 화난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고갤 끄덕여 얼른 가보셔라 통로쪽으로 길을 터주는 현에게 눈으로 인사를 건내고 그이가 사라질 때까지, 선채로 타미를 보고 있는 현과 그쪽으론 시선 한 번 돌려보지 않는 타미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 집에 가자
- 넌 니네 집으로 가
- 싫어
싫어? 하 참나. 장난치나 저 또라이가. 타미 입에서 나온 험한 소리에 움찔했던 현은, 거칠게 소주병을 낚아채 잔을 채우는 타미의 옆으로 돌아 그 손을 붙들었다. 데려다만 줄게요. 내가 잘못했어. 그제야 마주친 눈이 아주 그냥 이글이글 했다. 분노와 술기운과, 기타등등과, 그리고 그 술기운 덕택에 여과없이 드러나버린 배신감으로. 한껏 치켜올라간 눈으로 쌍욕을 퍼붓는 타미 옆에서 다 터뜨려 놓은 입술을 잘근대던 현이 한 번 더, 잘못했어요. 미안해. 진짜야. 하는 고해성사를 곧이곧대로 듣기엔 도대체 저 saeki가 용서가 안됐다. 사람을 등신천치 취급을 해도 유분수지. 그 송가경을, 굳이 자기가 알려준 둘의 데이트 장소로 데려다 히히덕 대고 있는 머리통도 이해가 가질 않았다. 멍청한 새끼면 말을 안해. 뒤지게 똑똑한게. 법정에서 만나면 그-으렇게 야무지게 이쪽 변론 방향성을 순식간에 눈치채고 시작도 전에 차단해버리는 철두철미한 새끼가. 연애할때만 이 지랄을 하는게 맞냐고.
- 너 진짜 존나 재수없어. 알어?
- 어
- 이 미친..게 진짜
- 응 내가 미친놈이고 재수없고 또라인거 그거 다 맞아요. 타미 집에 가자. 응? 데려다주고 꺼지라면 그냥 꺼질게.
- 지금 꺼져
- 타미.. 어떡하면 갈래. 내가 여기서 무릎이라도 꿇을까?
픽 소리가 나게 코웃음 친 배변호사의 개빡친 눈빛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아깐 화가 잔뜩 난 타미가 울 것 같은 얼굴로 밀치던 표정만 생각해도 눈물이 퐁퐁 났는데, 막상 그 앞에서 절절대고 빌고 있자니 그저 겨땀만 흥건했다. 당장 물어뜯을 태센데, 그러다 곧 기절할 것 같이 위태롭기도 해가지고 조바심이 나는 맘이 어쩔줄을 몰랐다.
- 야 니 무릎이 뭐. 뭐 그렇게 비싼거야? 그게 나한테 도대체 무슨 득이 되는데요 차검사님
- 타미이..그럼 뭐, 뭐할까. 내가 뭐하면 되겠어요.
- 업고가
- 머?
- 나 업고가라고. 집까지.
어이가 없어서 머허? 웃음을 흘렸다가, 쟤 저 독기 가득한 눈깔을 보니 도저히 웃을 일이 아닌거 같아 정색을 했다. 알았어 업혀. 등을 내밀고 그 앞에 몸을 구기자, 순순히 업히긴 업히는걸 보니 얘 취했구나 싶었다. 이럴애가 아닌데, 술기운에 걍 아주 개고생을 시켜서 복수라도 하고 싶었나보다. 갓 쪄낸 찹쌀떡이 휘감은듯이 뜨끈하고 흐늘거리는걸 어깰 한 번 추스리며 두 사람 몫의 가방을 목에 걸고 나가며 계산을 하는데, 그 가게를 가득 매운 눈이 죄다 이쪽을 향해 있었다. 뭐. 싹 다 뽑아줘?
타미네 집은 여기서 차로 30분. 이 모양으로 한강다릴 건널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축축한 등짝이 아린것 같았다. 그래. 해보자 어디. 까짓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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