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여진빛 - LAST REPORT
1.
아담한 골목을 지나 다세대 주택 사이로 난 작은길. 빛은 애매하게 벅찬 오르막을 오르느라 가빠진 숨을 고르며 코트 안을 뒤적였다. 밤갈색 차분한 톤으로, 작은 창이 계산대 정면을 비추어 보이는 카페입구는 여진이 직접 골라 달아준 것이었다. 원래 달려있던 유리문은 닦기만 번거롭고 무슨 무슨 '감성'과 맞지 않는다나.
코딱지만한 10평 남짓의 카페에 쓸데없이 종류가 다양한 등을 하나하나 켜놓고, 커피 머신의 전원을 올리자 웅웅대는 낮은 기계음이 공간을 채웠다. 상황실 무전 소리도, 결재를 재촉하며 울려대던 전자음에서도 멀어진 지금에서야, 빛은 창문 밖의 풍경이 같아보여도 매일매일 다르다는걸, 그리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본인이 그런쪽으로는 도무지 센스가 없다는 것도.
별수없이 대충 일주일쯤은 더 울궈먹어도 좋을듯한, 여진이 만들어준 플레이리스트를 재생시켜 두고 작은 원두통을 채웠다. 포터필터를 비우고 한 번 더 물을 내리자 에스프레소 머신에서 뿜어져 나온 스팀이 차가운 공기를 덥혔다.
내부를 한 번 환기할 겸 문을 열어두고, 드립을 내린 더운 커피잔을 손에 쥔 채 카페 앞 낮은 턱에 걸터앉아 불을 당겼다. 비슷하게 반복되는 일상이 불현듯 들고오는 과거의 기억들은 여전히 머릿속에서 그 감상이 들쑥날쑥 했으나, 커피향 만큼은 그럴듯 했다. 단장님 커피 좋아하시잖아요. 그따위 이유같지도 이유를 근거로 카페 한 번 해보셔라 할 때는 진짜 미친놈인가 싶었는데, 다른건 다 후회가 막심해도 손수 내린 커피를 홀짝이는 한적한 주택가의 오전은..
그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었는데.
- 단장님!!
- 뭐야
- 뭐야라뇨 진짜 섭섭하게. 바쁜 출근길 시간 쪼개가며 애인 얼굴 한 번 보고 가겠다고 왔더니!
- 여기가 왜 니 출근길이야.
- 심지어 돌아서 가야되는데도! 진짜 감동이다 그죠?
- 쓸데없는 할거면 너 들어가서 과일이나 썰어놔.
출근이 늦어가지궁..눈웃음을 친 여진은 자연스럽게 넘겨받은 커피잔을 한모금 넘기고는,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입김으로 빛의 담배연기를 상쇄시켰다. 뜨끈한 잔을 감싸서 손을 덥히고 있는 여진에게 인상을 찌푸린 빛은 또 한 번, 코트 자락을 뒤적여 핫팩을 꺼내 쥐어주었다. 너 장갑 또 잃어버렸니. 킁. 코를 먹은 여진의 얼굴이 바보같이 헤실- 풀어졌다.
- 따듯하게 좀 입고다녀. 코는 빨개가지고 뭐 좋다고 웃고 있어
- 당근 단장님이죵~ 저 오늘 외근 들렀다 좀 일찍 정리할거 같아요. 이리 올게요. 같이 퇴근해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는 빛의 손에 반쯤 온기를 잃은 잔이 돌아왔다. 조심해. 매번 질리도록 하는 당부건만, 매번 그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여진도 노상 한결같았다. 그럴게요. 손을 휘저으며 내리막을 뛰듯이 발자국 소릴 크게 울리며 내려가는 걸음이 키만 멀대같이 커가지고 안정감이라고는 없어 저도 모르게 잔을 꽈악 움켜쥐었다.
- 조심하라구우!!
오후 내, 드문드문 옷깃을 세우고 들락인 몇명의 레귤러를 제외하고는 한적하더니만 작은 창으로 보이는 골목엔 굵은 눈발이 치기 시작했다. 다섯시를 이제 막 넘긴 길이 한밤처럼 어둡고, 하얀 눈송이들은 중력을 거스르다 천천히 길을 덮었다. 머잖아 가로등 불빛이 점등하자 주황의 빛을 반사시키는 티끌이 꽤나 포근한 분위기를 연출해냈다.
딸랑-
- 안녕, 하세요..! 라스트? 리포트? 맞죠.
카운터 가장 가까운 쪽 테이블에 앉아, 슬렁슬렁 넘기던 책 위에 냅킨을 끼우며 고개를 들었다. 네. 들어오세요. 책은 이제 막 흥미로운 지점으로 들어온 참이었고, 뮤지션이 꿈이라는 등장인물이 작곡했다는 Green river를, 종종 흥얼거리곤 하는 플리 곡 중 하나쯤으로 제멋대로 정해놓고 무드에 젖었던지라 아쉬운 손 끝이 책등 위를 머뭇댔다.
- 와..뱅쇼가. 이거 알콜이 좀 있겠죠?
쪼금? 손가락 사이를 좁혀보이는 빛에게, 허탈한 헛웃음을 지으며 긴 생머리를 넘긴 손님은 ‘아우 좀 아쉽다아’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혼잣말을 흘리곤 메뉴판 앞을 서성였다. 다림질이 빳빳한 셔츠에 색이 짙은 자켓. 그리고 라인이 들어간 롱코트는 핏은 좋았으나 보온의 기능보단 그 스타일에 좀 더 비중이 실린 차림새였다. 딱 대기업 중간관리자에서 임원 쯤이 어울리는 손님의 자연스러운, 그리고 그렇게 하려면 아마도 2배는 더 공을 들여야 했을 메이크업은 빛에게 하여금 어떤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 커피를 마셔야겠다. 그죠?
- ..아무래도 카페니까요
자기 말이 재미있다는 듯, 크고 동그란 눈이 접히며, 그니까아- 하는 추임새 뒤로, 이런 날씨에는 뜨끈하게 정종이라도 한도쿠리 데우면 참 좋은데. 웃음기 섞인 조근조근한 한탄이 따라붙었다. 빛은 이 이름 모를, 얼굴도 처음보는 손님이 단숨에 마음에 들었다. 그러고보니 어쩐지 나잇대도 비슷한 것 같은게 은근한 친근감이 돌아, 카운터 바깥쪽으로 몸을 기댔다.
- 뱅쇼, 알콜 빼고 드릴까요?
- 그게 돼요?
- 차가지고 오셨나요?
- 아뇨, 그건 아닌데
- 그럼 돼요.
장난스레 능청을 부리는 빛의 눈을 마주 바라보는 까만 동공이 어리둥절했다가 일시에 스르륵 풀렸다. 아이 진짜 뭐야 사장님- 한손으로 입가를 매만지고, 다른 손으로 어깨를 가볍게 미는 손짓이 이쪽에서도 자연스러운 호감 -마치 아파트 5일장에서 너무 비싸다 실갱이를 벌일 때, 뒤에서 ‘그래 쪼끔 비싸네. 천원 깎아주면 딱 좋겠네’ 하는 류의 동지애 같은- 이 돌아온 것 같아 내심 기분이 좋았다.
- 사장님 땜에 여기 단골되겠어요. 진짜 거절할 수가 없는 제안이긴한데, 오늘은 커피 마실게요. 아무래도, 카페니까?
그렇지만 커피는 하나도 모른다는 손님에게 빛은 눈오는 오후의 느긋한 시간을 할애하기로 했다. 드립과 콜드브루, 에스프레소의 차이는 뭔지, 케냐니 과테말라니 하는 기본적인 원두부터 나름대로 공을 들인 블렌딩 종류들도 차근차근. 그러는 동안 몇 번쯤 흘깃댄 창에는 베일같은 눈커튼이 사선으로 반쯤을 덮어 시야를 가렸다. 빛의 시선이 그쪽을 향할 때 마다, 같이 고개를 돌리며 어깨 뒷편을 확인하는 손님은 아무래도 오늘의 마지막 손님이 될 모양이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준비해뒀던 미드나잇 블렌드의 원두를 열자, 진한 시나몬과 와인의 향이 카운터를 떠돌았다. 잔잔하게 흐르던 음악이 ‘About time’으로 이제 막 넘어간 참이었다. 조금전까지 머릿속으로 그리던. 유난할 정도로 아귀가 맞는 겨울의 초저녁이라, 부재한 사람의 안위가 슬그머니 걱정스러웠다. 차를 가지고 퇴근하려나. 여기 오르막길 좀 위험할 것 같은데. 적당한 양의 원두를 갈아 필터를 채우고 물을 덮히는 준비과정이 이제는 워낙 몸에 익은 나머지, 떠오르는 잡생각은 괜스레 불안한 것이라 뚝 끊긴 스몰토크를 미쳐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 이 책 재밌죠? 회사에서 이걸로 무슨 이벤트를 하라고 난리를 쳐서 진짜 꼴도보기 싫었는데, 솔직히 재미는 있더라.
- 네?
꼬리를 물다가, 아무래도 전화라도 좀 해볼까까지 진행된 혼자만의 생각에 빠졌던터라 살짝 늦어진 대답을 손님은 딱히 개의치 않는듯 했다.
- 사장님 읽고계시던 책이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 아. 읽어보라고 누가 주고갔는데, 괜찮네요.
- 제가요 인사팀이거든요? 여기 잡화점으로 가는 편지 그거 있죠. 그거만 똑 떼다가 고민상담 편지를 받으래나 뭐래나. 아이- 진짜 유치하고 납작해가지고 내가.
- 답장은 그럼 도둑들이 써주나요? 회장님이나 뭐.
까르르 손뼉까지 치며 웃는 손님 탓에 뿌듯해진 빛이 슬그머니 입꼬릴 올렸을 때, 천천히 드립을 내리던 커피잔도 이제 막 다 차오른 참이었다. 나 이렇게 많이 마시면 오늘 밤에 잠 못잘 것 같은데. 사장님이 좀 나눠 마셔주면 안돼요? 잠깐 시간도 떼울겸. 맞은편 의자를 발끝으로 슬그머니 밀면서 청하는 말을 굳이 거절할 명분도 없어, 앞치마 앞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홀-이라기엔 그저 카운터를 빙 돌아 나왔을 뿐이지만-로 걸어나와 엉덩일 붙였다.
- 사장님은 무슨 편지 쓸거 같아요?
- 글쎄요? 지금 뭐 그런 고민은 없어서
- 아니, 지금 말구. 소설처럼 젊은 사장님에게 지금의 사장님이 답장을 써줄 수 있다면요. 어떤 편지 썼을거 같아요?
2.
부지런히 걷는다고 걷는데, 미끄러운 보도블럭의 연석과 맨홀의 뚜껑 같은 예상치 못한 복병을 밟을 때마다 머리꼭대기까지 휘청대며 브레이크댄스를 춰대느라 여진은 손끝이 다 곱아서야 카페 앞 계단을 밟았다. 안 넘어지겠다고 용을 쓴다고 앞뒤로 꺾였던 허리가 욱신거렸다. 벌써부터 빛과 함께 이 길, 돌아오는 길에는 심지어 내리막이 될 귀갓길이 걱정스러웠다. 운동신경에 대해 논해보자면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안 좋은 연상의 애인은, 그런류의 피드백에는 발끈하는 경향이 있었다. 본인이 부심을 부릴 영역이 전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애먼 자신감을 보이는게 좀 귀엽기는 했다. 아마도 대한민국 서열 4위의 경무관을 오냐오냐해온 수많은 아첨꾼들이 만들어준 허구의 이미지겠지만. 그건 또 그거대로 귀엽기도 하고.
- 단장님!!! 눈이 진짜 엄청..
아, 왔니. 하는 짧은 인삿말에서 ‘아’와 ‘왔니’ 사이에 끼어든 감탄사는 아니고, 탄성도 아닌, 어딘가 꽤나 밀도가 빽빽했던 공기가 톡 부러지는 것 같은 그 미묘하면서도 불유쾌한 긴장감의 와해 속에 여진은 자신이 불청객이 된 것 같아 말 끝을 흐렸다. 어두운 조도의 간접조명으로도 빛의 어색한 표정에 스쳐지나간 당황과, 긴장된 어깨 같은 것들은 쉬이 읽혔다. 살림을 합친지는 한 계절을 채 못넘겼다지만, 24시간이 모자라게 붙어다닌 시절에 저 홀로 맘을 졸인 세월까지를 합산하자면 엄연히 경력직으로 인정을 받고도 남을 시간을 함께 했으니까.
덜컹- 의자를 빼는 소리와 함께 일어나 가까이로 다가온 빛이, 우산은 어쩌고 이러고 눈을 맞고 오니. 책하며 어깨부터 머리카락 위에 쌓여 얼어버린 눈송이를 털어주는 것을, 맞은편에 앉아있던 손님은 턱을 괴고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흥미로운 시선 속에 담긴 느긋한 분위기가 거슬려 위아래로 바쁜 빛의 손놀림 사이사이로 자꾸만 눈이 마주쳤다. ‘한명’ 얼핏 코트 안으로 보이는 파란색 목걸이줄을 타고 내려가 사원증을 확인하는 여진의 시선을 따라갔던 손님은 머쓱하게 웃으며 사원증을 벗어내 돌돌 말아 코트주머니 속으로 쑤셔넣었다.
- 내가 이거를 여태하고 있었네. 눈 진짜 많이 오나봐. 눈사람이 걸어들어오구 막.. 더 있다간 발이 묶일거 같아서 저도 이만 가볼게요 사장님. 말동무 고마워요. 두 분도 조심하시구요.
옆에 놓인 가죽장갑을 주섬주섬 챙겨 끼는 손마디에 반지는 보이지 않았다. 내키질 않는 맘을 갈무리해 고개를 가볍게 까닥였다. 또오세요. 싱긋 웃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나가는 모습이, 뱃속까지 다 간파당한것 마냥 기분이 영 좋질 못했다. ‘당자영 - 한명전자’ 머릿속에 메모로 남겨둔 글씨를 한 번 더 꾹 눌러 적었다. 안으로 막 들어서며 본 찰나의 작은 몸짓이 증거사진 1이 되어 사족처럼 함께 달렸다.
- 누구에요?
- 손님이지. 누구는 누구야.
- 단장님 손님이랑 얘기 안하잖아요
- 너 이제 뭐 내 영업방식까지 훈수두니? 언제는 좋아하는 커피만 내려라, 나머진 다 제가한다. 그러더니만.
쯧. 혀를 차면서 커피잔을 쟁반 위로 올려놓고 물기 하나 없이 보송한 테이블을 훔치는 빛의 무심함에도 어딘가 균열이 있었다. 손님이 단장님 팔뚝을 왜 만져요. 그 손님이랑 무슨 얘기했는데요. 분위기는 왜 그렇게 멜랑꼴리 하고 난리냐고요. 그냥 손님이라면서 왜 그렇게 흔들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요. 왜 내가 오자마자 일어나는거에요. 꾸역꾸역 대가리를 들이미는 질문들을 꼭꼭 씹어서 도로 삼켰다. 방금 나간 손님. 빛의 나이쯤 됐을까. 이지적인 분위기와 여유로우면서도 스스럼 없는 태도는 모르는척 하고 싶어도 어째 대상이 겹쳐보였다. 애같은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자꾸 미어져 나오는 불퉁한 태도를 단속하느라 대문니로 입술살을 꼭꼭 당겨물었다.
- 뭐
- 왜요
- 뭐가 또 불만이야
- 제가 뭘요. 저 차 안가지고 왔어요. 쌓이는 눈이라 서둘러야할 것 같은데, 대충하고 그냥 내일 같이해요.
살짝 거칠어진 말투에 달그락대던 손을 멈춘 빛이 여진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둘 다 말없이 묵묵히 서있자니, 백그라운드에 깔리던 음악소리가 주인공이 되어 신경이 곤두설만치 컸다. 미간을 찌푸린채 젖은 손을 앞치마 허리께에 몇번쯤 문지른 빛이 천천히 카운터를 빙 돌아나왔다. 지척까지 도달해 노려보는걸 슬그머니 눈을 피하자, 한주임. 하는거엔 또 본능같이 몸이 움찔댔다. 그렇게 좀 부르지 말라고 볼멘소릴 하기엔 호칭을 여적 정리 못한 이쪽에서 큰소리칠 주제가 못됐다.
- 이게 어디서 짜증이야. 피곤하면 거기 좀 앉아서 기다려.
- 아니 그런게 아니라, 길 얼까봐 그러죵..
- 누가 교통계 출신 아니랄까봐,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별 걱정을 다하세요 한여진 경감님.
봐준다는 듯이 마지막 말투에 농담기가 섞인 것에 안도하는 스스로가 쫌 애처로왔다. 애초에 요따위 불평등한 관계가 만악의 근원 아니냐고요 진짜. 최빛에게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으로만 투덜투덜 해봤자, 돌아갈 길이 짧아지지도, 한명전자의 당자영씨가 애인 팔뚝을 쓰다듬은 게 사실이 아닌 것이 되지도 않을테니 아무튼지간에 영 맘이 축축 칙칙했다. 눈길을 쑤시고 온다고 신발 속에서 젖어 얼어버린 양말마냥.
그런게 있다. 10년을 넘게 알고 지내고, 그 이의 맘에 들어보겠다 도무지 안 땡기는 식사자리를 그렇게 쫓아다녀봐도 진짜 일만 아니면 꼴도보기 싫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첫 만남에 악수 한 번 했을 뿐인데 찌릿, 하고 맘이 통할 것 같단 예감이 들 때도 있다는거. 빛은 몇번쯤 얼굴을 비출 때마다, 아 사장님! 한 손을 가볍게 휘젓고 웃는 낯으로 눈인사를 보내는 자영에게 어쩐지 그런 종류의 편안함을 느꼈다. 막 퇴근했는지 지쳐보이는 얼굴로 비척비척 들어와 혼자 노트북을 켜놓고 나즈막히 욕설을 입모양으로만 뱉을 때라든가, 편한 차림새로 휘적휘적 들어와 아무거나 차가운거 하나 달라더니 불러주는 메뉴마다 그건 싫다는 황당하고 까다로운 청을 받을 때라든가. 그런 별 진상같은 구석마저도 서스럼 없이 편하고 내심 재밌는데엔, 그런게 작용한게 아닐까. 빛은 생각했다.
그런게 그렇고 그렇다보니, 잔업 하기 싫어죽겠으니까 통성명이라도 해보잔 손님이 곧 ‘자영’이 되고, 나이 먹으니까 살려고 운동을 하는데 운동만 하면 죽겠다는 자영이 최사장님 화면발 잘받더란 말엔 서비스 쿠키가 나가고 그랬다. 여진과는 그 코없는 마술사 이름 마냥 대화에 주제로 등장할 기운만 느껴도 서로 입이 딱 다물어지던 것들이, 자영의 일부 무심하고 경계가 흐릿한 유연함 앞에선 자연스러웠다. 비슷한 구석이 많아 그런가, 그 눈오는 날에 이어 두번째로 지금 바람을 맞았노라 투덜대며 들어온 날엔 어쩐지 의기투합을 해가지고는 ‘알콜이 조금 든’ 뱅쇼를 나눠마셨다. 사실을 말하자면 만들어둔 뱅쇼 반, 원재료 반쯤의 비율로.
- 전직하셨어요? 첫직장을 오래 다니셔서 그런가, 새로운 일엔 아주 미련이 없으시네.
- ..맛만 좀 본거야
- 재고 다 털어놓고 양심도 없으셔라
퇴근해 집으로 갔다가, 아직 문을 안닫았노라는 빛의 위치보고가 어리둥절했던 여진은 ‘데ㄹ러와’ 알콜냄새 폴폴 풍기는 카톡을 보고서도 몰랐다. 현직 경찰이 감 다 죽어가지고. 저 옆골목 치킨집보다 늦은 카페 마감을 하고선, 나무 테이블에 엎드려 오른팔을 베고 나른하게 웃는 애인 보조석 문짝까지 열어주고 뒤늦게 어이가 없어했다. 아니 뭐에요. 혼자 마셨어요? 묻는 여진에게, 고개를 저어보인 빛은 술냄새 난다고 툴툴대며 창문을 살짝 내리고 벨트를 매주는 손길을 기꺼이 받았다.
딱 기분좋게 마신 빛은 입이 삐쭉 튀어나와 동그란 눈꼬리로 있는 힘을 다해 째려보는 여진이 새삼 귀여워서 자꾸 웃음이 났다. 아유 진짜 주정뱅이. 무릎을 탁 치면서 흘기는 애가, 그래서 누구랑 마셨는데요. 살짝 저어하며 묻는 질문은 못들은척 꼭대기까지 야무지게 올린 패딩 지퍼 꼭다리를 잡아당겼다. 순순히 끌려와준 솜덩어리로 손을 비집자 뜨끈한 목덜미가 한기에 움찔 몸을 떨었다. 입술이 닿고, 익숙한 여진의 체취가 들척지근한 와인향을 밀어냈다.
- 여진아 집에 안가?
물러나 대쉬보드로 몸을 돌리기 전, 옅은 미소와 떠보는듯 나즈막하게 묻는 빛의 목소리로 사건은 종결되고 여진은 묵묵히, 하지만 빠르게 시동을 걸었다. 집에 가시자잖아. 어떡해.
-
그렇다고 해서 ‘나도 친구가 있어’ 왠지 우쭐대는 빛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넘겼던 것은 아니고, 그래서 카페 문도 안닫고 별로 좋아하는 주종도 아닌 와인을 병째로 함께 비운 상대가 누구인가에 대한 것은 알아내고야 말았다. 이게 또 경찰이 천직이라, 껄쩍지근한 것은 그냥 넘어가려면 잠자리가 뒤숭숭해서. 그런 핑계로 은근슬쩍 쫌쫌따리 좀 궁금해 해볼까나, 하기 시작하자마자 알아내버렸다.
좀스럽고 음침한듯한 행동에 변명을 해보자면, 때마침 ‘한명전자’의 노조와 엮여있는 고발건이 서에 계류중이었다. 얼마전 신경을 긁어내리며 기억해두었던 이름을 사건파일에서 찾아낸 것은 우연과 노력이 뒤섞였으나, 거기까지도 아주 억지스러울 것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길 기억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으나, 아니 그 최사장님 카페. 맞죠? 하는 자영이, 인사쟁이들은 한 번 본 얼굴을 잘 잊지 않는다며 자리를 권할 땐 조금 뜨끔했더라도 포커페이스를 유지할 수 있었다.
- 담에는 같이 한 번 마셔요. 사장님이 술이 진짜 세더라.
친근하게 건내는 제안만 아니었어도.
3.
동거를 시작한 이후 첫 싸움이었다. ‘자영’이란 이름을 입에 담은 순간 부터 들불 같이 번지기 시작한 말다툼은 시작의 양상과는 몹시 다른 방향으로 제멋대로 덩치를 키워나갔다. 업무중에 우연히 알게되었을 뿐이란 변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만큼 호락호락한 사람도 아니었지만, 자기 말마따라 ‘그저 손님’ 이라면 그렇게까지 노기를 띄는 이유를 여진은 이해할 수 없었다.
급기야는, 내 인생에 너 말고 다른 사람도 있다는거, 너 그거 모르고 시작했니. 하는 빛의 말엔 아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혀서 웃음만 나왔다. 알지. 알다 마다. 내가 먼저 좋아했고, 내가 그렇게 좋다고 좋아죽겠다고 들이댔고. 그러다 그 사람이 아주 나약해진 틈을 타서 고백을 했다. 세상일이 다 영화같을 수는 없다지만, 차마 경례를 보낼 수 없던 날의 빛을, 그 무심한 표정이 무너지며 맺히던 상을 사랑이라 믿었다. 같은 맘일거라고, 그렇게 제멋대로 믿었다.
결국 서로 안봐도 될 것들까지 죄다 까발리며 상처를 주고 받은 쌈박질 끝에, 둘은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애초 취한 빛을 데리고 왔던 날, 숨가쁘게 맞이한 새벽에 즉흥적으로 세운 계획이 그랬다. 나른하게 침대에 기대 누워 여진을 바라보던 빛이 먼저 꺼낸 제안이었다. 둘이 같은 집에서는 처음으로 맞는 크리스마스니까. 경찰 생활 내도록 대체로 길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던 여진에게 다른걸 주고 싶었던 빛의 제안은,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으나 이제와 무를 수도 없었다.
그러니 찬바람이 쌩쌩부는 와중에도 어쩔 수 없이 둘만 남은 집 안에서, 여진은 소파에 앉아 시답잖은 크리스마스 특선영화 채널을 이리저리 뒤적이고 빛은 그 옆에서 티나게 부스럭대고 책장을 넘겨가며 책을 읽었다. 둘이 살기엔 쓸데없이 넓다 생각했던 집이 그렇게 답답하고 좁을 수가 없었다.
서로 포옹 한 번을 못하고 지나가는 크리스마스라니. 빛은 흘끗 훔쳐본 여진의 핸드폰 화면에 배달음식 앱이 켜진 것을 보고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연말이라는게 나이가 먹을수록 쓸쓸하고 헛헛한 법이라지만, 유독 가슴 한켠이 뻥 뚫린듯 시려운 밤이었다. 그 구멍안에 멀뚱멀뚱 놓인 못생긴 한여진 눈사람은 도대체가 아는지 모르는지.
-
김칫국을 한사발 들이키고 미리 내놨던 연차. 작고 소중한, 몇 되지도 않는..건 아니지만 아무튼 최대한 연가보상비로 땡겨다가 덕질 살림에 보태쓰려던 것을 큰맘먹고 썼던 그 연차. 애기아빠들이 진짜 경감님 너무하는거 아니냐, 애도 없으면서 이런 때는 좀 양보해줘야 되는거 아니냐 원성이 자자한 것을 못들은척 직급으로 누르고 쓴 26일 연차.
여진은 빛이 평소처럼 일어나 준비를 마치고 나가는 소리를 못들은척 꾹꾹 이불을 눌러덮고 누워 늦잠을 청해보려던 시도를 포기하고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겨울 햇살이 쨍하게 창을 뚫고 들어온 탓에, 도무지 눈이 부셔서 더 밍기작대기도 어려웠다. 암막 커튼을 하자니까는 정말.. 사람이 해뜨는 시간에는 기상을 해야 바이오리듬에 좋다는, 이럴떄면 중년의 꼰대력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빛의 주장에 밀려 달아둔 산뜻한 화이트톤의 커튼은 풍수지리에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쓸모는 영 값어치를 못했다.
터덜터덜 주방에 나와 라면 물이라도 좀 올려 보려던 여진은, 싱크대에 남은 빛의 흔적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손에 들린 냄비를 도로 집어넣었다. 씻으려고 드른 보일러 컨트롤러에는 이미 온수가 켜진 것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코끝이 시큰했다. 아침에 빵쪼가리 같은거 먹으면 속베린다는, 무심하게 다정한 사람의 아침행적을 혼자 떠올려보자니 뭐 때문에 이렇게 속이 상하는지. 울컥 치미는 쉬는날 아침 감성을 반쯤 덜어내고 보더라도 그만 화해를 청해야 될성 싶었다. 자존심 강한 빛이 굽히고 들어와줄걸 기대하기엔 장기전이 될 냉전이 불편하기도 하거니와, 무슨 유치원 보낸 어린애도 아닌데 빛이 혼자 아침 챙겨먹고 출근한 것만으로도 혼자 감성에 젖어 글썽이는 스스로를 위해서라도.
이딴거에 헛돈 좀 쓰지 말라고 한소리 들을게 분명 했으나, 묵직한 꽃다발을 가슴앞에 꼭 끌어안고 카페 앞엘 당도한 여진은 그래도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체면이고 뭐고 원인을 파고 들어가자면, 자기도 딱히 잘한 것 없는 이 싸움이 해가 넘어가 2년 짜리가 되는 것은 정말 원치 않는 것이었다.
딸랑-
- 어머, 여진씨?
아니 뭐. 동네에 카페가 그렇게 없나. 서울 이 노른자위 땅에도 두 걸음마다 하나씩 있는게 카펜데.
들어가자마자 돌아보는 얼굴이 하필이면 또 그 자영이라, 표정관리는 고사하고 불안정한 시선이 괜스레 빛을 피했다. 라떼 두잔이요. 시나몬 시럽 들어간거 위에 표시해뒀어요. 픽 웃었던 것 같은데, 거짓말처럼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톤으로 일회용잔 두 개를 카운터로 올리는 빛은 따로 아는척이 없었다. 누군가와 팔짱을 끼고 있던 자영이, 자연스레 컵을 나누어 들고 다시금 여진을 향해 돌아섰다. 이쪽은 ㅁㅁ씨. 그 날 왜 눈오는날, 이이가 나 바람 맞히는 바람에 내가 여기 단골 됐잖아. 첨언하는 것에 대충 고개를 주억였다. 하필이면 이런 타이밍에, 이런 모습으로, 꽃다발을 들고 어색하게 서 있는 자신과, 누군가와 팔짱을 낀채 웃고 있는 자영이 묘하게 대비되는 상황을 그저 빠르게 피하고만 싶었다.
- 한여진씨? 차나 한 잔 하고 가세요,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제 받기는 좀 늦은거 같은데.
여진을 슬쩍 보고는 카운터 안쪽으로 슥 들어가는 빛의 뒷모습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들고 있는 꽃다발은 왜이리 점점 무거워만 지는지. 비키라는듯 카운터 옆의 작은 테이블을 손 끝으로 톡톡 치는 빛의 손짓에, 잔뜩 어깨가 굳어 옆으로 물러난 여진은 엉거주춤하게 스툴에 엉덩일 붙였다.
- 늦었어요? 최사장님, 나도 크리스마스 선물 주고 가려고 들렀는데.
가방 안을 뒤적이느라 높게 들린 자영의 커피잔을 넘겨받은 이는, 지금 이게 다 무슨 사연인지 영문을 모르겠는 얼굴로 어색하게 여진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이쪽도 잘 모르겠는건 매한가진데요.. 다정한 눈매와 난감한 미소를 짓고 서있던 그는, 빛에게 엽서를 건내고 돌아오는 길에 어깨를 팡팡 내리치는 자영이 ‘내가 여기서 당신한테 세번째로 바람맞을 땐, 오기로라도 여기 데려오려고 아주 이를 갈았어. 알기나 하냐’ 혼내키는걸 머쓱하게 웃으며 고갤 끄덕였다. 앞구르기 하면서 훔쳐봐도 핑크색 기류가 완연했다. 것두 아주 아주 신상의 세상 근지러운 느낌으로.
- 고마워요 자영씨. 난 딱히 준비한 것도 없는데, 담에 두 분 장소지원 필요하시면 얘기하세요, 그걸로 갚게.
사장님은 그럼 자릴 비워주느냔 미묘한 19금 농담을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자리를 뜨고나니, 혼자 남겨진 여진은 손 안에서 바스락대는 포장지를 만지작거렸다. 아침나절 손님이 좀 있었는지, 안쪽에서 달그락대는 소리를 내는 빛은 뒷정리를 하는듯 보이질 않았다.
밖은 아직 한낮인데, 테이블 위에 놓인 크리스마스 카드는 겨울밤이었다. 눈덮인 트리 위로 산타 등에 탄 루돌프가 벨트를 붙들어 댕기고 있는 삽화가 익살스러웠다. 슬그머니 일어나 살짝, 진짜 쪼끔만 들춰보려고 조심스레 반만 뒤집은 엽서가 생각보다 너무 빼곡했다. 아직도 온기를 품은 종이에 담긴 그 기나긴 사연을 정말로 안 궁금해하고 싶은데, 쿨하지 못한 눈이 손보다 빨랐다. 빛이 여전히 밍기적대며 뒷모습조차도 보이질 않고 있는 것도 한 몫을 했고.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사장님을 만든거에요’
? 멈칫했던 여진은 조심조심 여적 들고 있던 꽃다발을 소리나지 않게 내려두곤, 까치발을 세워 카운터 안으로 몸을 돌려 들어갔다.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사장님을 만든 거에요. 다정하고 무뚝뚝한 최빛씨. 하나의 잘못된 갈림길을 택한대도 삶은 계속되고, 그 날의 선택이 반영된 그 뒤의 모든 갈래에서 매번 잘못된 갈림길을 두고 후회했던 사장님을 부정하지 말아요. 단단하고 의지가 된다던 그 분을 외롭게 하지도 말구요.
같이 걷는 길목에선 설령 길을 잘못 들었대도, 붙들고 있는 손을 꾹 잡고 가다보면 표류가 아니라 탐험이 되는거 아니겠어요? 과거의 빛 씨에게는 보낼 수 없는 응원의 마음을 현재의 사장님에게라도 보냅니다. 덕분에 저도 좋은 인연을 만났으니 종종 얼굴 비출게요. 고마워요. Merry Christmas -자영-
- 뭐가 그렇게 재밌니.
불쑥 나타나, 평소와 다름없이 무뚝뚝하게 물은 빛이 작게 잘라온 초코 케잌을 여진 앞으로 밀어주며, 이제와 어색하게 도로 뒤집어 놓은 엽서를 집어들었다.
- 이게 아주 지멋대로.. 남의 편지까지 훔쳐보고 난리야
시큰둥한 질책과 함께 대충 훑어본 엽서를 앞치마 앞으로 밀어넣은 빛은, 어깨로 툭 이마를 기대고 안겨드는 여진 덕분에 휘청, 짝다리를 짚었던 다리를 살짝 넓혔다. 아 왜이래 무거워. 말은 못되게 하면서 뒷통수를 쓰다듬는 손길은 다정했다. 솔직하지 못하시긴 진짜.
미안해요. 어깨에 대고 웅얼거리는 사과를 못들은척 습관처럼 목덜미를 파고든 차가운 손이 목 뒤를 타고내려가 뜨듯한 등을 쓰다듬었다.
- 돈이 썩아나지. 이 겨울에 생화가, 저거 몇송이야.
- 백송이
- 뻥치지마
- 진짠데요
- ..야
네? 기대고 있던 고개를 들어 본 빛의 귓가가 붉었다. 너 손님오면 어쩌려고 이래. 투덜대면서도 안겨든 여진을 떼어내지 않는 빛의 목소리가 가볍게 떨렸다. 정말이지 솔직하지 못하기는. 새삼 이 무뚝뚝하고 한결같이 요령은 없는 이 사람이 사랑스러웠다. 자꾸만 가까워지는 바람에 앞치마 주머니에서 구겨진 엽서가 바스락댔다. 손을 뒤로 돌리자 껴안는줄 알고 허리를 살짝 안으로 집어넣는 빛의 몸짓에 키득키득 웃으며 동여맨 앞치마 끈을 풀어냈다.
- 일찍 닫아요 오늘은
- …
- 저한테도 대관해주세요. 사장님은 꼭 자리 지키시구요
- 대관비 시간당 20만원이야
- 꽃 한송이에 3만원.
- 뭐? 너 저거 얼마주고 사왔어. 야. 너 미쳤어?!!
삐쭉 눈꼬리가 올라 몸을 떼어내는 빛 때문에 쿡쿡 웃음이 새어나왔다. 진짜 웃겨. 퍽퍽 등허리며 어깨를 풀썩이는 손길에 도망간답시고 몸을 뒤틀다가 그저 빛의 옷자락을 꾹 붙들었다.
며칠동안 쌓였던 시린 겨울 공기가 녹아내려 잔뜩 온기를 머금은 웃음이 마구 튀었다. 공식적인 첫 싸움이 이제 막 끝을 앞두고 있었다.
- 진짜 백송이야..?
어쩌면 그 다음이 코앞일지도 모르지만.
- 끗-
- 카테고리
- #기타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