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법해적 파르페

봄을 맞으러 가자, 이 세계의 끝으로

합법해적 파르페 파르아이파르 기후 재난 아포칼립스AU

원작 배경과 전혀 관련 없는 기후 재난 아포칼립스AU입니다. 소꿉친구 시절 파르페, 아이스의 관계성을 기반으로 한 2차 창작입니다.

눈 오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지만 그런 분위기는 전혀 느껴지지 않는 크리스마스 기념글...


세상이 새하얬다. 온통 하얀 세상이 살아남은 이들을 반겼다. 축복을 빙자한 위협. 허리까지 쌓인 눈은 단순히 근처를 정찰하는 것조차 힘들게 했다. 파르페는 제설기로 눈을 밀어내며 하염없이 걸었다. 살을 에는 추위는 방한복마저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무서울 정도로 깊게 쌓인 눈 속에서도 끄떡없이 성큼성큼 걸어가는 파르페와 다르게 아메리의 걸음은 점점 무거워졌다. 거친 숨소리가 설원 한 구석을 울렸다.

그의 곁에서 몸을 웅크린 채 걷던 아메리는 앞서가던 파르페의 팔을 붙잡곤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의 손끝을 따라가자 아직 상태가 양호해 보이는 오두막이 한 채 있었다.

 

“파르페. 저기서 좀 쉬다 가지 않을래?”

“여기 더 있다간 얼어 죽게 생겼습니다. 빨리 끝내고 갑시다.”

“난 힘들어 죽게 생겼다구…….”

 

파르페는 정말 체력도 좋지……. 아메리가 불만스러운 투로 중얼거렸다. 점점 느려지는 걸음. 멀어지는 인기척. 뒤를 돌아본 파르페의 눈에 길바닥에 주저앉으려 하는 아메리가 보였다. 파르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아메리는 부러 우는 시늉을 했다. 훌쩍, 훌쩍. 나 너무 힘들어. 다행히도 아메리에게는 파르페의 좁아진 미간이 보이지 않았다. 방한복 덕이었다. 파르페는 축 늘어진 아메리를 들쳐 업고 오두막으로 향했다. 온통 흰 세상. 어느 흔적도 남지 않은 순백의 도시에 두 사람이 지나간 길만이 이어졌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눈으로 인해 지붕은 반쯤 내려앉고, 외벽은 썩어 흩어졌다. 겨우 안으로 발을 들인 아메리는 방한복 모자를 살짝 끌어내렸다. 입김이 아지랑이 흩날리듯 허공을 메웠다. 오두막 내부는 생각보다 깔끔했다. 생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 오싹했지만 말이다. 아메리는 매의 눈으로 쉴 곳을 찾았다. 그러나 파르페가 조금 빨랐다. 삭아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소파가 풀썩 쓰러졌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양새였지만, 그래도 꽤나 푹신푹신했다. 파르페 역시도 마스크를 살짝 내린 채 숨을 내쉬었다. 찬 공기가 폐에 가득 들어차는 느낌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메리 역시도 그의 근처에 앉아 숨을 골랐다.

 

“휴. 좀 살 것 같다.”

 

잠시 소파에서 휴식을 취하던 아메리는 소파에 푹 눌러앉아 주위를 살폈다. 아메리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었다. 썩어서 덜렁거리는 찬장 문. 아메리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 찬장을 살폈다. 뒤이어 돌아온 그의 손에는 아직 상태가 양호해 보이는 보존식품이 두어 개 있었다. 통조림이었다. 보기에는 끔찍하지만 배를 채우는 용도로는 나쁘지 않은 것들. 아메리는 씩 웃으면서 파르페에게 한 봉지를 건넸다.

 

“…… 맛없어 보입니다.”

“다 살려고 먹는 거지.”

 

파르페는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조용히 통조림을 뜯었다. 어쨌든 먹어야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방치된 지 꽤 지난 집일 텐데 식량이 남아있다니. 행운이었다. 벙커에서 가져온 식량이 몇 있었지만 최대한 아끼는 편이 좋았다. 생각보다 맛도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군요. 그렇지? 역시 나는 눈썰미가 좋다니까. 다른 이들이 보면 상했을지도 모르는 음식은 먹으면 안 된다고 잔소리를 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그들은 개의치 않고 행동했다.

 

“그나저나 파르페. 너는 왜 남길 택한 거야?”

“그게 무슨 질문입니까?”

“그냥 궁금해서.”

 

파르페는 통조림을 대충 입에 욱여넣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이 정면을 향했다. 아메리의 눈빛이 파르페를 빤히 응시했다. ‘왜 남길 선택했냐’ 라. 역시나 얼마 전의 동면 프로젝트에 관해 묻는 게 분명했다. 조금씩 떠오르는 과거. 파르페는 잠시 앉아 과거를 떠올렸다.

언젠가부터 눈이 녹지 않기 시작했다. 비가 내려야 할 시기에 눈만이 펑펑 쏟아져 대지를 하얗게 뒤덮였다. 세상이 얼어붙었다. 인위적으로 치우고 없애보아도 계속하여 자라나듯 불어나는 눈을 감당할 수 없어진 사람들은 지상을 포기했다. 인간들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았다. 이 막대한 추위와 눈 속에서 살아갈 곳이 필요했다. 그렇게 살아남은 인간들은 지하로 향했다. 아래로, 더 아래로. 그들은 지하 벙커에 모여 새로운 사회를 만들었다.

파르페 역시도 벙커로 온 이들 중 하나였다. 다른 용도로 쓰이다가 이상 기후가 발견되면서 조금씩 개조되기 시작한 벙커는 꽤나 넓었다. 살아가기 위한 기본적인 기능은 갖춰진 상태. 각자 생활할 수 있는 방도 있었고, 식사도 제공되었다. 벙커에서 생활하며 바깥으로 나가는 자는 단 두 부류뿐이었다. 현재 벌어지는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나오는 연구원, 그리고 추가로 지상을 탐색하는 탐색조. 탐색조는 주로 연구와는 별개로 지상의 상태를 확인하고 필요한 자원을 탐색했다.

벙커 속 인간들은 바깥 공기를 그리워하면서도 벙커를 나서고 싶지 않아 했다. 바깥의 추위는 살벌했다. 살을 에는 듯한 바람과 온몸을 뒤덮는 눈덩이. 실제로 돌아오지 못한 탐색조도 있었다. 지상을 탐색하는 행위 자체에 회의감을 느끼는 자들도 있었다. 어차피 지상은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는 장소가 되어버렸다는 주장. 그러나 꾸준히 바깥을 살피고 돌아오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에게 위안이 되는 모양이었다. 모두들 벙커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이전의 평화로운 삶을 원했다.

파르페는 탐색조에 자원했다. 벙커 속에 갇혀있는 건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지하에 묶여있는 건 딱 질색이었으며,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도 썩 유쾌하지 않았다. 차라리 얼어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바깥 공기를 맡으며 살고 싶었다. 다른 이들은 파르페를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상관없었다. 타인에게 이해받기 위해 살아가는 삶은 지루했다.

그렇게 인간은 수년을 벙커 속에서 보냈다. 많은 자들이 지상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그럼에도 탐색조는 꾸준히 땅 위로 올라왔다. 사람들의 이상과 꿈, 혹은 자신을 위하여. 아직 세상은 잘못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바깥 세상을 향한 갈망. 벙커 속이라도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위한 행위. 파르페는 탐색조를 그만두지 않았다. 파르페는 한결같이 제 신념을 유지했다.

 

아메리는 파르페가 벙커에 온 뒤 두 번째로 배정받은 룸메이트였다. 아메리는 싹싹하고 명랑했으며, 종종 이상한 농담을 하고는 했지만 좋은 친구였다. 아메리 역시도 탐색조였다. 가까우면서도 먼 사이. 아메리는 종종 파르페에게 이것저것 묻고는 했지만, 전부 가벼운 화제뿐이었다. 어떤 케이크를 좋아하냐, 어떤 색깔을 좋아하냐, 와 같은. 그러나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시작부터 무거운 주제가 가슴을 짓눌렀다. 폭설이 오는 바람에 처진 분위기가 새로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평소와 다른 목소리, 대화 주제.

 

“사실 나도 그냥 동면이나 들어갈까 싶었거든.”

“그랬군요.”

“그래. 그런데 이렇게 죽나 저렇게 죽나 어차피 죽을 운명이라면 발버둥이라도 쳐보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남았어. 꽁꽁 얼어서 내가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상태로 여생을 보내고 싶지는 않더라고.”

 

별안간 아메리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후드를 살짝 비집고 나온 금빛 머리칼. 파르페는 아메리를 힐긋 바라보더니 턱을 괴었다. 운명은 얄궂다. 모든 이들의 삶을 앗아간 것. 저항하는 것으로 쫓아버릴 수 있는 존재라면 좋으련만. 파르페는 조용히 눈을 끔뻑였다.

 

“아메리가 웬일로 멋진 이야기를 하는군요.”

“나 그래도 진지할 땐 진지하거든?”

 

퉁명스러운 어투가 돌아왔다. 사뭇 진지해진 분위기가 그들을 감쌌다. 운명이 최대한 나쁜 쪽으로 정해져있다면 저항하는 게 사람이던가. 적어도 파르페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메리의 말을 두어 번 곱씹었다.

동면이라……. 아메리가 언급한 ‘동면’은 1년 전에 실행한 프로젝트의 일부였다. 사람의 힘으로는 현재의 세상을 돌려놓을 수 없다는 주장을 중심으로 뭉친 이들은 지상을 돌려놓는 대신 동면장치를 만들었다. 물론 그들의 주장도 완벽하지 않았다. 부정적인 시각으로 보는 이들도 꽤 있었는데, 파르페도 그 중 하나였다. 줄지어 깊은 잠에 빠지자는 계획에 동참하는 이들이 꼭 죽으러 가는 것처럼 보였다.

 

“너도 네 이야기 좀 해봐. 궁금해 죽겠어.”

“평소에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 거 말고!”

“얼른 탐색하고 갑시다. 이러다가 얼어 죽은 시체로 발견되면 큰일입니다. 농땡이 피우다가 죽은 탐색조로 기억될 거라고요.”

 

소파가 불쾌한 마찰음을 냈다. 파르페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한복을 다시 갖춰 입었다. 제 이야기라. 비밀은 없었다. 그저 썩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기에 꺼내기 힘들 뿐이었다. 파르페는 아메리의 원성을 뒤로 하고 오두막 문을 열어젖혔다. 쏟아지는 눈. 다시금 펼쳐지는 순백의 세상이 보는 이로 하여금 눈을 멀게 했다. 시야를 전부 가릴 정도로 강한 폭설이 어둠보다 주위를 더 어둡게 했다.

 

 

 

 

 

파르페! 화관 엮어줄까?

화관? 어떻게 엮는 건데?

자, 봐봐. 여길 이렇게 잡고…….

 

아이스는 꽃을 좋아했다. 어릴 때엔 꼭 꽃밭에 나가 이상한 화관이나 반지 따위를 만들어오고는 했다. 꽃밭에 털썩 주저앉아 책을 읽거나 기이한 꽃부리를 모으곤 했던 괴짜. 파르페는 아이스를 위해 예쁜 꽃을 모아두었다. 다정한 이에게 예쁜 풍경을 선물하고 싶었다. 투명하게 빛을 내는 꽃잎이 달빛을 머금어 반짝였다. 달이 빛나는 밤. 유독 아름다웠던 자. 파르페는 아이스의 웃음을 보고 싶었다.

아이스를 위해 화관을 엮어주었을 때, 완벽하지 않은 형태지만 아이스는 누구보다 좋아해주었다. 향기 나는 꽃을 머리에 쓰고 있으면 벌이나 나비 따위가 아이스에게 몰려들었다. 꽃, 나비, 그리고 사랑스러운 아이. 그림 같은 한 풍경이었다. 파르페의 머리에도 예쁜 화관이 하나 올라왔다. 아이스는 파르페에게 손을 내밀었다. 꽃밭에서 함께 춤을 추자. 아이스의 다정한 한마디가 귀를 울렸다.

 

 

 

 

벙커에서 조경 따위는 사치였다. 파르페가 조경 대신 선택한 건 채소나 과일을 심는 일이었다. 과일 나무는 과실을 맺기 전 꽃을 피우고는 했다. 자연이 사라진 지금은 의미 없는 번식 기능. 파르페는 종종 몰래 꽃나무 가지를 잘라와 방 한 구석에 장식해두었다. 금방 시든다는 점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파르페는 텃밭을 최대한 아름답게 꾸몄다. 얼어붙은 세상, 멈춰버린 지하 세계 속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란 힘든 일이다. 파르페는 사소한 아름다움을 캐냈다. 흑백으로 점철된 세계 속에서.

 

“파르페는 텃밭 관리도 잘하네.”

“원래 꽃을 키웠습니다.”

“정말? 네가?”

“믿기 싫으면 믿지 마십쇼.”

“에이, 당연히 믿지! 파르페가 얼마나 다정하고 섬세한데.”

 

아메리가 뻔뻔하게 파르페의 어깨를 두드렸다. 아메리는 파르페의 텃밭을 보고 이런 이야기를 했다. 파르페의 텃밭은 밭이 아닌 정원 같다고. 예쁜 것을 전부 모아둔 것 같다고. 사랑이 넘치는 공간이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했다. 파르페의 사랑이 보여! 열심히 키웠으니 이렇게 예쁜 거겠지?

의문이 떠올랐다. 사랑, 사랑이라. 세상이 무너졌으면 좋겠다. 파르페는 세상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사랑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운명은 얄궂고, 불행이 즐비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위해 꽃을 심었던 건 일말의 미련일까, 혹은 사랑일까. 파르페는 씨앗을 땅 아래에 묻으면서 생각했다. 매장과 같은 행위가 새로운 생명을 틔워낸다. 이 작은 생명에게 느껴지는 애정은 진짜 사랑일까?

꽃에게 말을 걸었던 적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전과 같은 세상이 돌아올까요. 솔직히 난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당신은 모르겠죠. 어차피 곧 시들어서 열매를 맺을 운명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마저도 새로운 생명으로 이어지겠죠. 세상은 참 이상합니다.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꽃은 그저 그 자리에서 가만히 파르페를 응시했다. 꽃을 가꾸고, 그에게 말을 거는 행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파르페는 정성을 다했다.

파르페가 텃밭을 가꾸는 이유. 단순했다. 그저 아름답기에. 그리고 아름다운 풍경을 같이 보고 싶은 자가 있기에. 세상이 멸망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던 파르페는 역설적으로 세상을 사랑했다. 다정한 마음이 이 작은 공간을 정화했다. 아메리에게 꽃을 선물할 수 있기에, 다른 이들에게 잠시나마 행복을 줄 수 있기에 즐거웠다.

그러나 역시,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꽃을 함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꽃을 정말 좋아했던 제 파트너. 어쩌면 파르페가 보고 싶어 하는 건 아름다운 풍경이 아닌 그 풍경을 같이 보고 느낄 사람일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이곳에 없었다. 이름은 아이스인 주제에 봄이 되어야 돌아올 운명. 그리고 봄은…… 자취를 감추었다. 봄은 어설프게 흉내 낸 꽃밭 따위엔 관심이 없었다. 진짜 온기가 필요했다.

 

자, 봐봐. 여길 이렇게 잡고…….

 

누군가의 목소리가 귀에 아른거리는 듯했다. 이제 화관 정도는 능숙하게 만들 수 있었다. 꽃 반지나 목걸이 따위도 마찬가지였다. 아이스는 청소년이 되었을 즈음에도 종종 꽃을 엮었다. 시간이 지나도 아름다움은 변하지 않으니까. 조금 유치하지? 그렇게 말하면서 풀과 꽃으로 만든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던 열다섯의 아이스. 천진난만하게 웃는 그 애의 모습. 달을 머금은 청록색 머리칼. 화사하게 웃는 네가 꽃보다 더 예뻤다고, 차마 말할 순 없었다.

제가 꽃을 좋아했던가. 모르겠다. 정말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행동인지, 그저 아이스와 함께하면서 생긴 습관인지.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홀로 남은 화관이 조금은 처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이후에 방에 돌아온 아메리가 호들갑을 떨며 화관을 매만졌다. 파르페! 이거 내가 써도 돼? 마음대로 하십쇼. 아메리는 화관을 머리에 쓴 뒤 경쾌하게 방을 나섰다. 역시 아름다움은 불변이었다. 꽃을 함께 감상할 이가 사라졌을 뿐.

여전히 바깥엔 눈이 내렸다. 평생 녹지 않는, 온 세상을 휘감을 새하얀 눈이.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풍경이 잡아먹을 듯 세상을 뒤덮었다. 파르페는 회색조의 벙커 속에서 가짜 생명을 품에 안고 봄이 오길 기다렸다.

 

 

 

 

명패엔 여섯 글자가 적혀있었다. 파르페. 아이스. 파르페는 기뻤다. 아이스와 함께 방을 쓸 수 있다. 지하 벙커는 답답했지만 아이스와 함께 있으면 숨통이 트였다. 아이스는 그런 친구였다. 세상이 내일 무너지더라도 사랑할 친구. 방 문을 열면 아이스가 침대에 앉아 파르페를 반겼다. 파르페는 아이스의 다리였다. 아이스가 넘나들지 못하는 지상과 지하 세계를 연결해주는 사다리. 파르페는 탐색을 다녀온 뒤 겪은 일을 아이스에게 전했다.

즐거웠다. 가끔 이곳이 벙커 속이고 이 세계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살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잊을 만큼. 정말로 ‘살아있는’ 기분이었다. 파르페는 아이스와 함께하는 시간을 사랑했다. 이 시기, 이 분위기, 그와 함께 느꼈던 감정을.

 

나도 요즘 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

연구?

응. 연구. 지하에 가만히 있는 건 무료하잖아.

 

내 손으로 세상을 재건한다면? 상상만 해도 기분 좋잖아. 아이스가 두 손을 한 번 부딪혀 박수 소리를 짝, 내더니 활짝 웃었다. 파르페가 탐색을 나설 때마다 연구 일을 도운 모양이었다. 아이스는 이전부터 영특한 편이었다. 하늘만큼 큰 꿈과 바다 같은 다정함을 가진 아이. 분명 아이스가 연구 일에 참여한다면 많은 도움이 되겠지. 파르페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스와 다시 지상으로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파르페. 나는 가끔 봄이 그리워.

…….

봄이 돌아올 때, 우리 같이 봄을 맞자. 분명 할 수 있을 거야.

 

맑고 단단한, 언제나 나를 생각해주며, 늘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는 나의 친구. 내가 가장 사랑하는 이. 아이스가 내민 손은 따스했다. 맞잡은 손끝으로 온기가 흘러왔다. 창가에 달빛이 스민 듯한 착각이 일었다. 빛나는 달빛이 일렀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뜨고, 벙커 속에도 해가 떠오를 것이라고. 그리고 그 아침을 한 사람과 맞이하고 싶었다. 아이스는 나직하게 말했다. 너 역시도 봄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아마도 네가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일 거야.

 

 

 

 

 

파르페는 종종 동면실 근처를 지났다.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동면을 택했다. 동면실을 지날 때면 오싹한 기분이 몸 전체를 잠식했다.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진 사람들. 동면실이 아닌 공동묘지를 지나는 기분이었다. 과연 모두가 깨어나서 기쁜 내일을 마주할 날이 올까. 고민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다른 곳보다 조금 서늘한 온도가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단단히 잠긴 문 너머로 느껴지는 한기. 바깥도, 벙커도, 동면실 안도 여전히 겨울이다. 세상의 구원 따위 바란 적 없었다. 나는 그저……. 파르페는 동면실을 지나 성큼성큼 걸었다.

파르페. 너도 동면에 들어갈 거야? 선택의 기로에 선 아이스가 물었다. 사실은, 조금 고민했다. 어쩌면 아이스와 함께 눈을 감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함께 눈을 감고, 새로운 세상에서 다시 눈을 뜨는 것……. 정말 이상적인 미래였다. 하지만 이상은 이상일 뿐이었다. 바람이 그대로 이루어질 리 없었다. 이내 파르페는 고개를 저었다. 정체 모를 캡슐 기계에 몸을 맡기고 싶지는 않았다. 새로운 세계는 스스로 개척해야만 했다. 너라면 그렇게 이야기할 줄 알았어. 아이스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미안해. 아이스. 네가 눈을 감는 순간에 함께하지 못해서. 아이스의 입술이 달싹였다. 무언가 이야기하려는 듯한 모습. 파르페. 사실 말야…….

어떤 선택이 옳았을까. 후회해도 소용없었다. 이미 아이스와의 시간은 어긋나기 시작했다. 갓난아이처럼 캡슐 속에 잠든 아이스. 그리고 현실세계에 남은 저 자신. 동면실 벽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너와 나. 돌아갈 수 있을까. 여러 번 머리를 뒤덮는 의문. 절대 해소할 수 없는 궁금증이었다.

자리에 누운 파르페는 생각했다. 눈으로 뒤덮이기 전, 평화롭던 세계를. 소중한 사람과 아름다운 풍경 아래에서 뛰놀던 순수했던 나날. 이렇게 어이없이 놓칠 줄은 몰랐던 사소한 행복이 담긴 하루하루. 빛이 들어오지 않는 벙커. 껌뻑거리는 전등만이 파르페의 시야를 메웠다. 원래 하늘이 있어야 할 자리였다.

 

“아메리. 옛날 얘기 하나 해줄까요.”

“파르페의 옛날 얘기? 궁금해! 드디어 뭐라도 말할 마음이 든 거야?”

“재미있는 이야기는 아닐 겁니다.”

“에이. 신경 쓰지 마.”

 

느릿하게 끔뻑이는 눈꺼풀. 과거를 더듬는 눈동자가 허공을 응시했다. 아메리와 룸메이트가 되기 전, 저의 짝. 계속 함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보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들었던 이. 이 이야기는 아메리에게 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파르페 자신을 위한, 그리고 제 짝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 무슨 친구?”

“이 전에 같이 방을 썼던 친구 말입니다.”

 

이 전에 방을 같이 썼던 친구. 하지만 머지않아 저를 떠난 친구. 파르페는 아이스를 떠올렸다.

아이스는 동면에 들어갔다. 약한 몸은 벙커 내 환경을 견딜 수 없었다. 갈수록 나빠지는 아이스의 상태. 아이스는 ‘어쩔 수 없이’ 동면을 택했다. 다른 이들과는 달랐다. 동면 캡슐에 들어간 이후의 상황은 알 수 없다. 이후에 무사히 깨어나 복구된 세상에서 살아가게 될지, 평생 캡슐 속에서 끝없는 꿈만을 꾸게 될지. 단지, 아이스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파르페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운명이야말로 불공평했다. 파르페는 아이스가 연구를 계속하길 바랐다. 아이스처럼 다정하고 영리한 아이라면 정말로 봄을 가져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생각을 했다. 다시 지상으로, 원래 살던 세상으로 돌아간다면 아이스도 다시 건강해질지도 모른다. 분에 넘치게 희망적인 생각이었다.

 

“동면에 들어갔습니다.”

“동면이라…….”

“몸이 안 좋았어요. 벙커 환경을 힘들어했습니다.”

 

이 몸 상태로는 더 이상 벙커 속 삶을 지속하기 힘들답니다. 그 애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어요. 연구에도 열심히 참여했단 말입니다.

파르페의 건조한 고백이 이어졌다. 아이스는 세상을 바꾸고 싶어 했다. 얼어붙은 땅을 녹이고, 진짜 세상에 꽃을 틔우고 싶어 했다. 단색조 벙커 속이 아닌 진짜 세상에. 아이스는 제 삶과 세상을 사랑했다. 비록 아름답진 못하더라도, 각자 빛낼 수 있는 인생을. 파르페는 아이스의 바람을 긍정하고 싶었다. 정의를 사랑하기에 세상을 등졌던 파르페는 끝까지 태양을 향해 손을 뻗었던 아이스를 쫓았다.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손에 쥐고 싶었다. 파르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없었다.

아메리는 더 이상 말이 없어진 파르페를 두고 먼저 자리를 떴다. 파르페는 돌아누워 다시금 생각했다. 아이스를 만나고 싶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건 단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봄을 되찾아오는 것. 세상을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돌아온 곳에서 모두와 함께 떠오르는 태양을 맞는 것.

 

 

 

 

 

이 캡슐 속에서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정말 눈을 뜨면, 눈을 떴을 때 봄을 맞을 수만 있다면. 그 봄에는 네가 있었으면 좋겠어. 파르페. 꼭 같이 봄을 맞으러 가자. 그러니까 그때 함께해줘.

 

부러 밝게 말하던 목소리를 잊을 수 없었다. 반짝이는 눈동자. 보석과 같은 두 눈이 덤덤하게 파르페를 응시했다. 잠시간 착각이 일었다. 빛을 내는 눈. 두 눈동자가 미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저 너머의 봄. 닿지 않을 머나먼 희망을. 파르페는 조용히 아이스의 손을 맞잡았다.

 

봄을 맞으러 가자.

이 세계의 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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