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성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5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첫 문장은 유명해서 많은 이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쇼타로는 이 소설의 백미는 첫 문장이 아닌 마지막 문장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넘어지지 않으려 발끝에 힘을 주고 올려다본 순간, 하늘의 은하수가 솨아 소리를 내며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것 같았다.'

허무함이 키워드라고 할 수 있는 소설에서 끝엔 결국 희망을 안겨주고 있었으니까. 이 허무하고 고독하던 삶에서 사라지고 싶어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달렸더니, 자신을 숨겨줄 사람을 만날 거라고 누가 생각했겠는가.

그럼, 그 사람을 자신의 은하수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쇼타로는 곤히 잠든 성찬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숨기는 방법도 영악하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지도 않고 오히려 영악하기만 한 자신을 숨겨준다고 고백했다.

그래, 이상한 고백. 너는 모를 것이다. 자신과 있으면 행복은커녕 불행할 거라고. 그러니까, 네가 힘껏 숨겨줄 수 있는 한계는 결국엔 모스크바까지라고. 나도 그만큼만 욕심을 내보겠다고. 그러니까 남은 기간 동안 꼭 나를 숨겨 달라고. 이 세계에서 지워진 것처럼. 존재조차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 세계에서 우리만 서로를 알고 있는 것처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그러니 내 뒤에 숨어요.'

쇼타로는 새벽 내내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기 전까진 그냥, 이상한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으려고 했다. 그 눈빛. 진심이 절절하게 담긴. 제발 제 뒤에 숨어 달라고 오히려 자신에게 애원하는 것 같은 눈빛. 아무리 생각해도 반칙 아닌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다.

쇼타로는 무작정 원망을 뱉고 싶었다. 이미 늦었다고. 지금 자신한테 이런 인간 하나 선물로 준다고 사르르 녹을 것 같냐고. 원망을 삼킨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자신이 알 수 없는 원망을 뱉어도, 정성찬은 묵묵히 다 받아줄 인간이었다. 왜냐하면, 그 애는 나를 위해 울어줬으니까. 너무 서글프게 울었으니까.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 쇼타로는 그 촉감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어리석은 다정함도.

오전, 열차의 속력이 점차 느려지더니 이름 모를 역에 다시 정차한다. 쇼타로는 시간을 확인한다. 한 시간 밀린 시차.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아주 천천히 과거로 가고 있었다. 아주 많은 시간을 들여서, 겨우 일곱 시간의 과거로 가는 열차. 쇼타로는 열차에서 내려 담배를 입에 문다. 뿌연 연기에 눈이 아픈 것 같기도 하다.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처럼, 두 눈을 천천히 깜박인다.

"타로 형."

"...아, 찬영. 잘 잤어?"

"밤새웠어요. 이제 다음 시즌 봐야 해요."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누가 봐도 졸린 목소리다. 아마 열차에 오르면 찬영은 곯아떨어질 것이다. 예상되는 일에 쇼타로는 조용히 웃었다.  찬영은 왜 웃어요? 고개를 기울이곤, 코트에서 빳빳한 종이를 건넨다. 이게 뭐야? 라고 묻기 전에, 쇼타로는 청첩장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3개월 후의 날짜. 이땐 봄이겠구나. 장소는 뉴욕이었다. 타로 형, 시간 괜찮으면 와줘요. 찬영은 머쓱하게 웃었다. 3개월 후의 약속. 봄의 약속. 과연 지킬 수 있을까?

못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성찬한테 주는 건 어때? 거절이 담긴 쇼타로의 말에도 찬영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남은 청첩장이 하나밖에 없어요. 성찬이 형이랑 같이 와요. 응? 거절이 담긴 말에도 찬영은 헤헤 웃으며 담백한 애정공세를 붓는다. 흑심은 담기지 않고, 그저 사람이 좋은 애정공세.

애석하게도 쇼타로는 거절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거절은 남들의 마음에 흉을 내는 거니까. 어떻게 보면, 찬영은 이미 영악하게 굴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쇼타로는 확답하는 대신, 노력해 볼게. 아주 작은 긍정을 담기로 한다.

"근데......."

"응?"

"남자랑 결혼해요, 저."

괜찮아요? 헤실헤실 웃고 있던 애는 어디 가고, 이번엔 슬쩍 눈치를 본다. 아, 남자구나. 쇼타로는 청첩장을 다시 한번 확인한다. 뭐, 그게 큰 문제인가 싶다. 하나코의 연인은 자신을 사랑했고, 같은 공연에 올랐던 놈은 자신의 허벅지까지 움켜쥐었는데. 그렇게 따지면, 쇼타로는 나 꽤 헤픈 놈인데 가도 돼? 라고 물어보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절대 할 수 없는 질문이겠지만.

쇼타로는 뺨을 긁적이며 그게 무슨 문제가 돼? 작게 속삭인다. 그냥 사랑만 해도 좋은 세상인데, 성별이 무슨 상관일까. 많이 사랑해? 쇼타로의 말에 찬영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람과 있으면... 사는 게 재미있어요.

열차가 출발한다. 쇼타로는 찬영의 청첩장을 읽고 또 읽었다. 살고 싶어지는 사랑이라. 로미오와 줄리엣도 사랑으로 목숨을 끊었고, 그 많은 미디어에서도 사랑의 맹세는 죽음이었는데, 찬영의 사랑은 살고 싶어지는 사랑이었다. 그것도 사랑이구나. 그래, 비극만이 답은 아니구나. 쇼타로는 청첩장을 주머니 속에 넣어두곤 잠든 성찬을 바라본다. 뺨이 눌린 상태로 누가 업어 가도 모를 것처럼 자는 사람.

창문으로 햇빛이 들어오자 성찬의 미간이 좁혀진다. 그리고 떠지는 두 눈. 성찬은 아주 자연스럽게 쇼타로를 찾는다. 우리는 여전히 서로에게 낯선데,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이처럼. 잘 잤어요? 성찬의 말에 쇼타로는 고백한다. 나 밤새웠어. 잘 잤다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지만, 굳이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성찬은 굳이 왜 못 잤냐고 묻지 않는다. 정답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처럼.

열차 안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간다. 성찬은 아직 이반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절반도 읽지 못했다. 활자보다 그에게 시선이 먼저 닿는다. 활자는 언제든지 읽을 수 있으나, 쇼타로는 영영 못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성찬은 자리를 옮겨 익숙하게 쇼타로의 옆에 앉는다. 손 잡을래요. 뻔뻔한 요구와 함께 익숙하게 마주 잡히는 두 손.

"있지, 찬영이 삼 개월 뒤에 결혼한대."

"어디서요?"

"뉴욕."

나 대신 다녀와줘. 좋은 사람 만나서 같이 가도 좋고. 쇼타로는 일부러 성찬의 마음에 흉을 내기로 한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을, 고르고 골라서. 타인에겐 상처 한번 내고 싶지 않아서 등신같이 굴어도, 이 세상에 단 한 명 정도한테는, 원망이든 사랑이든 비뚤어진 감정 하나는 품게 만들고 싶었다. 많은 사람은 자신을 오오사키 가문의 장남으로 생각하겠지만, 정성찬한테는 인간 오오사키 쇼타로로 남을 테니까.

침묵이 이어진다. 쇼타로는 성찬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졌다. 그리고 한 가지를 깨닫는다. 상처를 받는 것보다, 내는 것이 더 아프다는 사실을.

"타로, 나 봐요."

"...안 아파?"

아파요, 아파 죽겠어. 투덜거리는 기색 하나 없이 평온한 말이 이어진다. 형이 원하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나 좀 봐. 성찬의 말엔 기묘한 힘이 깃들어 있었다. 달래는 것에 재주가 있는 걸까. 아님, 어쩌면 자신이 더 아파하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서로의 시선이 닿는다. 정성찬은 오오사키 쇼타로와 타인처럼 행복한 날을 보내는 것을 소망할 것이고, 오오사키 쇼타로는 정성찬과 이 세계에서 사라지는 것을 소망하고 있었다. 전제는 같지만 결과는 다른 감정.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는 말 따윈 하지 않는다. 우린 만나면 안 됐어.

또 한 번의 아픈 말.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는 만났으니까. 과거를 바꿀 순 없는 노릇이다. 성찬은 쇼타로의 뺨을 감싸 쥔다. 다정함 속에 칼을 숨긴 사람. 그 칼로 자신만을 찌르다가, 이제 겨우 타인을 찌른다. 하지만 그마저도 타인을 위해서 찌르는 것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내가 바라는 건 딱 하나예요. 성찬은 작게 속삭인다. 열차에서 내리고 나서도, 행복해야 해요.

쇼타로는 열심히 사라질 수도, 아님 언젠가 가문에 굴복하고 다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때도 행복함을 잊지 않길 바랐다. 평생 행복한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건 평범한 사람도 불가능한 일이니까. 그저, 아주 가끔 행복함을 느꼈으면. 이렇게 불행한 얼굴을 하지 않았으면. 오늘의 슬픔이 미래엔 하나의 지워지는 추억으로 남았으면.

가장 좋은 추억으로 남고 싶은 것도, 성찬은 포기한다. 가장 좋은 추억은 미래에 따로 만들면 되니까. 오오사키 쇼타로의 가장 좋은 추억은 자신이 아니면 좋겠다. 이 추억은 자신이 가져가면 되니까. 원래 추억은 한 사람만 가져도 영원히 남는 것이니. 그래서 성찬은 이번에도 감히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기로 한다.

그의 눈부신 금발, 웃을 때 올라가는 광대, 말랑한 뺨, 부드러운 다정함, 기다란 속눈썹, 담배 냄새와 섞인 묵직하고도 포근한 향. 짝사랑으로 남기기에 충분하다. 우리는 이 열차에서 서로를 짝사랑한 것이다. 열렬히.

​​

열차번호 007의 열애사

DAY.5

저녁, 아니 어쩌면 밤. 잠이 오지 않는다는 핑계로 쇼타로는 보드카 반병을 비웠다. 식당 칸에서 객실 칸으로 걸어갈 때도 발이 엉켜서 성찬의 도움이 필요했다. 타인에게, 그것도 정성찬에게 상처를 줬다는 사실이 죽고 싶을 만큼 괴로웠다. 덜컹, 덜컹, 기차가 흔들린다. 기차가 빨라서 토할 것 같아.... 쇼타로는 겨우 말을 뱉는다. 취기 때문이 아니다. 그냥, 기차가 왜 이렇게 빠른 걸까. 원망 섞인 말이었다.

​취해서 말도 엉키고, 제대로 된 한국어도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성찬아, 있지. 내가 원하는 게, 네가 행복한 거야.... 제발 발음이 어눌해서 그가 못 듣길 바라는 마음과 달리 뚫린 입은 멈추지 않는다. 너무 많은 걸 마음속에 묻어뒀다고 항의라도 하는 것처럼 쏟아진다.

분명 쇼타로는 모스크바의 작은 호텔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유서 한 장도 없는, 깔끔한 죽음. 그런데 열차에서 만난 이방인은 자꾸 자신의 행복을 바라고 있었다. 스스로의 욕심을 죽이면서까지. 분명 죽는 것보다 사는 게 더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는데 고작 이 며칠이 자꾸 자신을 살게 한다. 살고 싶게 만든다. 그러니까, 이건 반칙이잖아. 성찬은 쇼타로의 주정을 묵묵하게 듣고 있을 뿐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 어쩌면 생애 가장 사랑한 얼굴. 흔히 미디어에서 말하는 인생의 사랑.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면서도, 아주 가끔 울게 만드는 그런 사랑.

"타로, 이기적으로 굴어도 돼요."

"......."

"배려도 하지 말고, 자신만 생각해요."

나는 다 괜찮으니까. 성찬의 큼지막한 손이 쇼타로의 뒷목에 한번, 그리고 뜨거운 뺨에 닿는다. 차갑다. 아니, 높은 알코올 덕에 자신이 불타고 있을 수도 있었다. 이미 충분히 이기적으로 굴고 있는데, 여기서 더 이기적으로 어떻게 굴지. 정성찬은 사랑에 빠지면 위험해지는 타입이구나. 쇼타로는 쓴웃음이 저절로 새어 나온다. 그러면 버릇 나빠져....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웃지 않았다. 사뭇 진지한 얼굴로 답한다. 당신은 괜찮아. 버릇이 나빠져서 최악의 상황으로 떨어져도, 괜찮아요.

정성찬은 모를 것이다. 제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에 자신이 얼마나 웃고 우는지. 분명 지금 자신을 해부하면 심장은 물에 흠뻑 빠져서 축축할 것이다. 피 대신 눈물로 가득 찼을 수도 있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아무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이건 모두 네 탓이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랑에 덜컥 빠진 네 탓이고, 너를 데리고 아무도 없는 이 세계에서 살고 싶다는 욕심을 내는 자신의 탓이다.

열차가 속력을 천천히 낮춘다. 창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가로등만 깜박 켜진, 아무도 없는 정차역. 문이 열린다. 모두가 잠든 시간, 쇼타로는 성찬의 옷깃을 감싸 쥔다.

"우리 나갈까?"

항상 북적이는 세상과 달리 고요하다. 지금 몇 시지?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굳이 시간을 확인하지 않는다.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요. 술에 취한 짝사랑의 상대를 걱정할 뿐이다.

아니, 찬영은 지금 자고 있을까? 아침에 밤새워서 드라마 시즌을 다 봤다고 하더라구.... 성찬의 팔에 붙잡힌 상태로 쇼타로는 아주 천천히 주위를 걸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속 편하게 남의 이름을 입술에 담는 그가 여전히 얄미운 건 어쩔 수 없다. 이찬영 이름은 안 잊겠네. 성찬의 가시 돋친 말에 쇼타로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이름은 기억하지 않아도 된다고 해놓고는 다른 사람 이름 들었다고 투덜대니, 모순적이라고 할지라도 싫은 건 싫었다.

쇼타로는 고개를 들고 구멍 난 하늘을 바라보며 대꾸한다. 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살았으니까. 이 열차의 추억도 다 잊는다는 뜻이구나. 성찬은 고개를 끄덕이며 쇼타로를 마주 본다. 그래서 찬영의 결혼식도 자신보고 가라고 한 걸 수도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은 없던 세계가 되는 것이니까. 이상한 일이다. 누군가에겐 없던 세계가 되는데, 누군가에겐 영원히 보존되는 세계가 된다는 게.

"일본은 졸업식 때 두 번째 단추를 주고, 미국은 예전에 왈츠를 췄다면서요."

"아, 응. 그랬지."

"한국은 딱히 그런 게 없더라고요."

모두 바쁘게 졸업만을 보고 살아서 그런가. 낭만이 없는 거 같아. 성찬은 뺨을 긁적이며 새로운 대화 주제를 찾았다. 그가 이기적으로 구는 건 좋지만, 이기적으로 굴 때마다 침울해지는 표정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쇼타로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왈츠 스텝이라도 배워 볼래? 속삭인다. 홀린 듯 성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새벽, 알 수 없는 시간, 모두가 잠든 시간, 차장과 직원 한둘만 움직이는 텅 빈 정차역. 어떻게 보면 끝나지 않는 꿈일 수도 있었다. 쇼타로는 성찬의 허리를 붙잡고, 천천히 왈츠의 기본 스텝을 밟는다. 나 따라서 해 봐. 하나, 둘....

눈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성찬은 팔을 뻗어 쇼타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욕심 하나 더. 고개를 숙여 쇼타로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말 같지도 않는 핑계. 이렇게 추는 거 맞죠.

낭만이 없었다면 만들면 되는 것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쌓인 눈에 발자국이 옴폭 들어간다. 왈츠는 언제 배웠어요? 성찬이 묻자 쇼타로는 으음, 어렸을 때 배웠어. 대꾸한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는 결국엔 안 될 거라고 말하면서, 잊지 못한 낭만과 추억을 하나씩 만들어 주고 있었다. 

"타로."

"응."

"무조건 나보다 더 좋은 사람 만나요."

"그게 뭐람."


우린 분명 아무 사이도 아닌데, 나는 당신과 눈 오는 날에 춤을 췄잖아. 그러니까 당신은 자신보다 더, 기꺼이 함께할 사람을 만나야 했다. 여태껏 살던 답답한 지옥이 아닌, 눈이 오면 기꺼이 나가서 같이 눈사람이 될 만큼 거리를 걷고, 허리를 끌어안고 춤을 추고, 비가 쏟아지는 날엔 바지가 흠뻑 젖을 만큼 같이 달릴 수 있는 사람. 오오사키 쇼타로는 그런 사랑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이었으니.

무조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라는 말, 쇼타로에겐 사실 허상과도 가까웠다. 이런 곳에서 정성찬이라는 인간을 만난 것도 축복, 혹은 저주일 텐데. 그보다 더 좋은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할까? 오히려 자신보다 더 좋은 사람은 이 세계에 널리고 널렸을 텐데. 차마 그 말은 하지 않기로 한다. 술에 취했으니까. 나는 지금 욕심을 내고 있으니까. 이 취기로 네 손을 잡고, 이 이름도 모를 기차역을 벗어나고 싶으니까.

이상하지, 우리는 아무 사이가 아닌데.... 쇼타로는 성찬의 어깨에 쌓인 눈을 털어 주며 말을 이어 나간다. 그런데 너랑 있으면 애틋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정성찬, 정성찬, 정성찬. 그의 이름은 너무 쉬웠다. 너무 쉬워서 쉽게 외워버렸다. 과연 잊을 수 있을까? 쇼타로는 다시 한번 생존을 생각한다. 쉽게 사랑을 말하고, 서로의 약지엔 영원한 사랑의 맹세인 증표도 하나 해 보고, 평범한 연인처럼 싸워도 보고. 그리고 집에서 문을 열면, 바깥은 아무것도 없는 상상. 이렇게 눈만 가득 오고, 우리가 아닌 모든 사람이 없는 상상. 점점 불행한 표정으로 바뀌는 정성찬의 얼굴. 그리고 그걸 모르는 척 하는 빌어먹을 자신.

우리는 애틋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타로는 자신만의 사랑고백을 뱉는다. 성찬의 입술이 작게 벌어진다.

"치사한 거 알죠."

"응."

"아픈 말 다 하고, 약 주네."

"나 지금 술 취해서 그래."

내일부턴 아픈 말만 해 볼게. 쇼타로의 말에 성찬은 하,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 소리가 축축했다. 다정하게 울지 말라고 안아주고 싶다. 이 멀대같이 겁 많은 이방인에게, 우리 모든 걸 다 버리고 멀리 떠나자고 하고 싶다. 쇼타로는 수많은 열망에 휩싸인다.

"네가 싫은 거 아니야."

"알아요."

"나랑 엮이면 곤란해질 거야."

"형, 술 많이 취했구나."

아파서 쉬는 걸로 합의된 오오사키 가문의 장남이, 어디서 남몰래 연애를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좁은 세계가 뒤집어질 텐데, 그게 외국인이고, 또 남자라고 한다면 모든 화살은 성찬을 향할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그의 손을 잡고 도망만 갈 수도 없었다.

만나면 안 되는 운명이 이렇게 만났으면, 우리는 다음 생이 인연인 걸까? 쇼타로는 생각에 잠긴다. 모스크바의 호텔에서 고독하게 사라진다고 해도, 외로울 것 같지 않았다. 다음 생이라는 게 만약에 있다면. 이 감정이 사랑이 맞다면.

서로를 짝사랑하면서, 결국엔 아무 사이도 아닌 관계. 하지만 애틋해서 눈물이 날 것 같은 관계. 성찬은 어느 순간부터 사랑을 토하고 싶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하던데. 이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뭘까.

"쇼타로, 내 말 잘 들어요."

"응."

"너무 힘들면."

"......."

"나부터 버려요."

스스로를 버리지 말고, 나부터 버려요. 대신 내가 형을 평생 기억할게. 내 이름을 지워도 좋고,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 나를 버려도 좋아요.

그래, 이 빌어먹을 이방인 때문에 쇼타로는 다시금 울고 싶어졌다. 모든 순간의 말이 다 사랑고백 같아서. 차라리 사랑한다는 한 마디였다면, 웃어넘길 수 있을 텐데. 하지만 이번에도 쇼타로를 위해 울어 주는 건 성찬의 몫이었다. 울면서 뱉는 고백 하나로, 쇼타로의 세계는 무너진다.

곧 열차의 출발을 알리는 경적이 울린다. 서글프게 우는 얼굴을 볼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경적이 울리지만 그 누구도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다. 성찬아, 솔직한 마음을 말해 봐. 쇼타로는 무너진 세계를 끌어안기로 한다. 알코올이 그의 눈물에 섞여서 휘발된 것 같다. 지금이 아니면, 다신 듣지 못할 진심.

성찬은 절대, 이 마음을 고백하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럴 생각이었다. 기회가 올 거라고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애틋한 사이라고, 말하는 그가 솔직한 마음을 알려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 마음을 알면, 후회할 텐데. 분명, 또 어떠한 죄책감이 될 텐데. 자신이 쏟아낼 말이 그의 평생을 따라다닐 수도 있을 텐데. 성찬은 울음을 겨우 삼켰다. 그럼에도 그가 원하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해야 했지만, 성찬은 결국 자신도 이기적으로 굴고 있었다.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

"우리 모스크바 가지 말자."

성찬은 쇼타로의 손을 잡는다. 우리 영원히 마지막 역에서 내리지 말자. 쇼타로의 입술이 떨린다. 그래, 열차 타지 말자. 지금은 헤어지지 말자.

열차의 경적이 한 번 더 울린다. 그는 지금 사랑을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은 그 사랑에 흔들리고 있다. 자신의 견고했던 세계가 무너졌음에도 울고 있는 그가 더 이상 울지 않길 바랐다.

열차가 출발한다. 그들은 타지 않았다. 쇼타로는 성찬의 손을 잡고 무작정 달렸다. 이름 모를 역에서, 열차에 모든 짐을 놔두고. 이 찰나의 순간만큼은 자유를 얻은 것 같았다. 목적지 하나 없이 그들은 달렸다. 토해내는 사랑은 버거웠고, 모든 걸 버리고 뜀박질하는 사랑은 기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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