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LLEL WORLD
[D-6]
- 어, 형 전화도 맛있게 씹고 늦잠 잔 시현아? 잠은 잘 잔 모양이야.
- 아…. 형, 죄송해요.
시현은 기우의 목소리에서 묘한 분노를 느낀 뒤 재빨리 사과하기 시작했다. 기우가 보지 않아도 고개까지 숙여가며 손바닥을 싹싹 빌며 말이다.
- 어차피 늦은 거 여유롭게 와. 이건 진심. 어제 피곤해서 늦잠잤을 거 아니야.
- 형, 아니 사장님. 진짜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아니에요?
- 까분다.
- 근데 형. 저 오늘 어쩌면 못 갈 수도 있어요….
- 왜? 면접?
뭐, 면접이랑 비슷하겠지. 곧 만나는 사람이 대기업 회장의 아들이니까…. 차라리 일대일로 심층 면접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자.
- 네. 그거랑 비슷한 것 같아요.
- ‘같아요.’는 뭐야? 어쨌든 알겠어. 잘하고 와.
- 대신 최강준한테 대타 맡길게요.
- 알았다.
시현은 자신의 친구 강준에게 카톡을 보내놓은 뒤 서둘러 씻기 시작했다. 대충 씻고 나오니 밖에서 클락션 울리는 소리가 들려와 창밖을 확인해보니 도영이 벌써 와있었다. 뭐 저렇게 빨리와. 준비도 안 했는데…. 시현은 대충 머리를 말리며 옷을 부랴부랴 손에 잡히는대로 입었다. 마지막으로 방에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패딩을 들고서 시현은 서둘러 집 밖을 나섰다.
-
시현이 부랴부랴 내려오자 밖에서 차에 기대 담배를 피고 있던 도영이 피고 있던 담배를 끄며 시현을 맞이했다.
“저…. 오래 기다리셨나요?”
“온지 얼마 안 됐습니다. 타시죠.”
또 타라고? 내가 저 차를 또 타겠냐. 어제 일어난 사건이 있는데. 아니, 저 인간은 사람 못 태워서 죽은 귀신이 달라붙었나. 어제부터 계속 차에 타란다.
“네…? 왜요?”
“왜냐니요?”
정말 의문이라는 듯이 묻는 도영에 저 인간 진심이구나하는 생각에 웃으며 도영을 쳐다보았다.
“점심인데 점심이나 먹으면서 얘기 나누시죠.”
“넵.”
차에 타지 않기 위해 시간을 끌기 위해 머리를 굴리던 시현이 결국 기를 펼치지 못 하고 순순히 도영의 차에 올라 탔다. 시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배워온 것은 알파, 오메가의 심기는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도 특히 알파. 건드는 순간 인생이 피곤해지기 때문이다. 지금 시현의 옆에 있는 도영은 어마무시한 우성알파이다.
이미 엮일대로 엮인 상황이긴 해도 최대한 도영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시현은 최대한 맞추기 위해 노력했다. 시현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어디 따로 예약한 장소가 잇는지 도영의 차가 부드럽게 시현이 사는 빌라촌을 빠져나갔다.
도영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도영의 차에 올라타긴 했지만 시현은 지금 당장이라도 달리는 차의 창문을 깨서 탈출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근데 진짜 점심 먹으러 간다고? 시현은 예정에 없던 불편한 점심식사가 기다리고 있는 장소로 더 불편한 도영의 차를 타고 간다.
체하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집에 소화제가 있었는지 시현이 심각하게 생각했다. 집에 오면 당장 소화제를 먹어야지….
이동하는 도영의 차 안. 말 그대로 정적 그 자체다. 그 숨막히는 정적 속에서 시현은 어색하게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홀로 이겨내고 있었다. 하지만 이 끝없는 정적에 시현은 결국 창 밖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만 내뱉었다.
뭐라고 할 얘기도 없고, 상대방도 말 할 의지가 없어 보이는 이 상황 속에서 시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구경하고 있는 것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멍하니 창밖만 응시하고 잇는데 도영의 차는 어느새 도시 외곽으로 빠지고 있었다.
“어? 외곽도로?”
그동안 조용히 있던 시현이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하자 도영은 곁눈질로 시현을 힐끔거렸다.
“왜,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요…. 밥을 꽤 멀리서 먹는다 싶어서요.”
“어제 했던 말이나 어제 있었던 일 되도록이면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에서 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긴 하네요….”
하하…. 그래. 우린 애초부터 밥이 목적이 아니라 이야기가 목적인 사람들이지, 참. 진짜 밥을 먹으러 가겠냐. 내가 아직도 순수했구나. 시현은 도영의 말에 머쓱하게 웃곤 다시 찾아온 정적에 다시 창 밖만 응시할 뿐이다.
진짜 숨 막혀 죽을 것 같다.
-
한참을 달려 도영의 차가 도착한 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한 한식집이었다. 도영도 어쨌든 알파라 사람 기죽이는 고급 음식점에 올 줄 알았는데 도영이 세현을 데리고 온 곳은 음식점 치곤 건물 외벽이 생각보다 수수해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얼마나 심각하게 하려고 이렇게 외곽에 있는 곳으로 와….
도영의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시현은 긴장감이 배로 커져만 갔다.
여기는 음식값이 얼마나 하려나…. 이번 달 생활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런저런 생각에 시현의 발걸음이 무거워졌다. 차에서 내려 먼저 움직이는 도영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니 거리가 꽤 벌어졌다.
“뭐하시죠? 빨리 안 오시고.”
“아, 네!”
앞서 움직이던 도영은 자신을 뒤따라 오는 시현의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뒤를 돌아 걸음을 멈췄다. 그리곤 천천히 뒤따라오는 시현을 불렀다. 시현이 도영에게서 가까워질 때까지 도영은 그 자리에 가만히 멈춘 채 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도영을 향해 발에 힘을 주고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시현이 어느 정도 가까운 거리에 다가가자 도영은 그제서야 걸음을 옮기며 음식점 안으로 들어선다. 도영은 익숙하게 음식점 안으로 들어가 자신을 안내하는 직원에게 자신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얘기한다.
직원은 도영의 이름을 듣고서 깊이 자리하고 있는 룸으로 안내를 해주었다. 수수한 외관의 모습과는 달리 고급스러운 내부 인테리어에 시현은 자신도 모르게 넋을 놓고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어제부터 정말 별별 곳을 다 와보네.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시현은 고개를 두리번 거리며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자리를 옮기는 도영의 뒤를 따랐다. 도영은 자신의 뒤에서 신기함에 내부를 구경하는 시현을 살짝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참 호기심이 많은 베타네. 작게 입꼬리를 올렸다 내리며 자신을 안내하는 직원의 뒤를 따라갔다.
직원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곳은 조용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프라이빗 룸이었다. 간혹 티비나 영화를 보다 보면 재벌가들이나 고위 간부들이 종종 모종의 거래가 이루어지곤 했던 그런 룸 말이다. 시현은 이런 곳은 처음 오는데다가, 이런 곳에 자신이 와보리라곤 생각도 못했던 터라 낯설음에 안내 받은 방 안 내부를 힐끔힐끔 구경했다.
대박. 살다살다 이런 곳도 다 와보네. 물론 좋은 의미로 온 것이었다면 더 좋았을 것을….
직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본 시현은 그대로 눈이 뒤집어 지는 줄 알았다. 음식 가격이 기본적으로 가볍게 10만원을 그냥 넘는다. 입이 참 고급이시네…. 무슨 메뉴들이 뭐 이렇게 비싸. 내 하루 일당은 그냥 나가게 생겼네…. 오늘 여기서 한 끼를 제대로 먹으면 시현은 하루 일당은 그냥 사라지게 된다.
그래. 최대한 싼 거 먹자. 그래도 가장 저렵한 건 있겠지.
메뉴판에 쓰여 잇는 가격에 지레 겁을 먹은 시현은 최대한 저렴한 가격의 메뉴가 없는지 두 눈에 불을 키고선 메뉴판을 샅샅이 살펴 보았다. 하지만 메뉴판 그 어디를 살펴 보아도 시현이 원하는 결과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며칠 가난하게 살자…. 곧 월급날이라 알바비도 들어오는데, 뭐.
도영을 힐끔 바라보니 도영은 이미 직원에게 메뉴를 말하고선 메뉴판을 건네준지 오래였다. 도영은 제 앞에 있는 베타가 메뉴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자 의문점을 가지고 입을 열었다.
“왜 그러시죠?”
“네? 아, 아뇨…. 이런 곳은 처음 와 봐서요.”
“그럼 그냥 저랑 같은 거 드시죠.”
“넵….”
시현은 도영이 알아서 잘 골라주겠지 싶어 도영에게 메뉴를 맡겼다. 말 그대로 이런 곳은 처음이라 뭘 시켜야 될지도 모를 뿐더러, 뭘 시키든 자신을 기다리는 가난엔딩이라는 결말은 똑같으니 시현은 이제 그러려니 했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도영이 시킨 메뉴가 무엇인지, 가격은 얼마나 되는지 재빠르게 스캔한 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직원에게 미소를 지으며 메뉴판을 건네주었다.
주문한 메뉴를 들은 직원은 그대로 나갔고, 직원이 나가자마자 방 안은 차에서 그랬듯 또 다시 숨 막히는 정적이 도영과 시현을 감싸고 있었다.
무슨 말이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도영은 가만히 앉아 말없이 시현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만 보고 있을 뿐이다. 잠에 취한 것이 아닌 멀쩡한 정신으로 있어서 그런지 어제와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어제는 그래도 잠기운이 있어서 살짝 풀어진 모습의 시현이었지만 오늘은 무슨 포식자 앞에 있는 초식동물같은 모습이다.
턱까지 괴며 자신을 쳐다보는 도영 덕분에 시현은 도영의 시선을 최대한 피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내 얼굴만 쳐다보지 말고.
시현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도영이 먼저 이 무거운 정적을 깨트렸다.
“현시현씨.”
“네? 아니, 근데 어제부터 궁금했는데 제 이름은 어떻게,”
아신 거죠…. 도영의 입에서 제 이름이 나오자 이제서야 이상함을 느낀 시현이 크게 놀라며 도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내 이름 알려준 적 없는 걸로 아는데?
“실례인 줄 압니다만, 현시현씨 아르바이트 기록을 좀 살펴보았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어제 기록지가 남아있었음을 알고서 그래도 되나 싶은 생각과 역시 알파는 뭐든 쉽게 아는구나 하는 생각이 시현의 머릿속에 공존했다.
“그래서 결정은 하셨나요?”
“아…. 하지 않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그 선택지는 없다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도영의 표정이 매섭게 굳어지면서 삽시간에 무서운 분위기로 바뀌어갔다. 아, 진짜 정말 이 선택지는 아니구나.
“그, 그냥!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그렇다는건 긍정적인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이겠네요?”
“아….”
뭐라고 말하지. 그냥 한다고 할까, 아니면.
“그, 일정량의 금액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싶어요.”
이게 아닌데. 자본주의의 노예는 어쩔 수 없나보다. 시현은 절망감을 가지며 도영을 불쌍하게 쳐다보니 도영이 입꼬리를 작게 말아올리며 입을 열었다.
“그건 시현씨가 원하는 금액대로 주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그 정도는 해드려야죠.”
“그렇군요….”
어차피 이렇게 엮인 거 돈이라도 받자는 생각으로 더 기울고 있던 시현이 결정을 내렸다.
“할게요. 그, 애인 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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