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지에서 모르는 사람을 따라가면 안 되는 이유3

집밥 현대환생AU 정말 마지막

가내 타브 설정이 많습니다(이름, 체형 등)

커튼 사이로 어제와 다른 강한 햇살이 방 안을 가득 채울 즈음에야 이리엘은 한참을 밍기적거리다가 옷을 챙겨 입었다. 아스타리온이 보낸 메세지에는 해가 거의 질 즈음의 시간이 적혀 있었지만, 하루를 그것 하나로 채우기에는 너무 아쉬운 날이었다. 옅은 아이보리 색의 코트를 걸치고 나온 밖은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남아있었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흔한 여행자의 걸음과는 다른 길로 향했고 그 끝은 도서관이었다. 책을 읽으러 온 사람이 반, 오래 된 도서관이라는 이유로 구경을 온 사람이 남은 절반이었고 이리엘은 교집합에 속한 인물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며 찾아낸 것과 비교될 만큼 먼지가 쌓인 책을 꺼내들며 애써 재채기를 참았다.

창백한 피부와 유독 날카로운 송곳니, 붉은 눈까지. 한 가지라면 별 것 아닌 특징이었지만 둘이라면 우연으로, 셋이라면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었다. 뱀파이어라는 사실이 예전만큼 대단하게 받아들여지는 시대는 아니었다. 도시를 이동하기 쉬워졌다는 이유로 다른 종족을 더욱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그저 흔하지 않은 일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 되었다. 그러나 길을 걷다가 마주친 사람 중 하나가 뱀파이어일 가능성은 벼락을 맞는 것만큼 낮은 확률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춰봤던 오래된 책을 덮으며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원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고 그럴 듯하게 꾸며놓은 도시괴담을 모아놓은 것에 불과했다.

저녁을 같이 할 예정은 아니라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나오면 만나기로 한 시간보다 시계바늘이 앞서 있었다. 도서관으로 돌아가자니 이미 문을 닫았고 다른 곳을 들릴 그 정도의 여유는 없을 것 같았다. 달리 할 일이 남지도 않아 가볍게 걸으며 약속 장소로 향하는 길에는 지도가 함께했다. 길을 세 번은 잃어도 찾아 갈 수 있는 시간이었지만 굳이 고생을 사서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검은 코트를 입은 아스타리온이 눈을 들어 다가오는 인영을 확인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로에게 왜 먼저 왔냐는 이야기를 할 것까지는 없었다. 어차피 이 특이한 만남에 사소한 것들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스타리온이 손목에 찬 시계를 확인하며 잠시 걷자고 제안하면 이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스타리온이 나란히 걸으며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펜으로 그린 것처럼 뻗은 콧대는 옆에서 바라보았을 때 더욱 도드라졌다. 길어진 햇빛을 받은 눈빛이 유독 붉게 빛나 겨우 고개를 돌리자 문득 책에서 읽은 내용 중 하나가 떠올랐다. 상대를 현혹시키기 위해 아름다운 외모를 갖는 경우가 많다. 그 문장에 누구보다 어울리는 사람이 지금 눈 앞에 있었다.

“있잖아, 아스타리온.”

“왜, 자기야?”

“어… 아냐. 별 거 아냐.”

돌아온 시선은 피처럼 붉은색이었다. 오히려 확실한 색깔에 물어보는 것을 포기하고 고개를 흔들자 아스타리온이 웃으며 해가 거의 넘어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어찌나 솔직한지, 눈에서 시선을 떼질 못하는 작은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다 보일 지경이었다. 이미 확신이나 다름없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직접 묻지는 않았으니 아스타리온은 먼저 말문을 터보기로 했다. 어차피 손등이 스칠 정도로 가까이 서 있는 사람에게는 그 어떤 정보도 없었다.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말하는 정도는 이미 몇백 년을 살아온 존재라는 것에 비하면 별 것 아니었다.

“저녁에 만나서 다행이야. 아무리 자유를 찾았다고 해도 오늘처럼 햇빛이 강한 날은 뱀파이어에게 좋지 않거든.”

말을 꺼내면서 아스타리온은 오른손에 낀 반지를 매만졌다. 절대 잊을 수 없는 짧은 여행 끝에 얻어낸 자유였다. 한 번도 빼지 않았던 반지는 이제 신체의 일부나 다름없이 인식되었으나 저보다 더 열성적이었던 얼굴이 옆에 있으면 자꾸 손이 갔다. 그리움이거나, 혹은 반가움일지도 몰랐다.

이리엘에 얼떨결에 아스타리온과 눈을 마주쳤다. 내가 입으로 생각하는 걸 꺼냈던가? 자유를 찾았다는 말에 아침부터 종일 이어지던 생각에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빠져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뱀파이어라면 햇빛 아래 설 수 없을 텐데, 아스타리온은 노을이 지는 지금도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쩌면 햇살이 내리쬐는 하늘이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이라서 무의식이 지워낸 정보일지도 몰랐다. 아스타리온은 머릿속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니 정리하자면, 아스타리온이 뱀파이어가 맞았고 다행스럽게도 어떠한 목적이 있지는 않다고 하는 말에 순간 서늘했던 목을 쓸어 만졌다.

“그렇게 보지 말고 솔직하게 말해도 돼. 뱀파이어랑 나란히 있는 상황이 흔한 건 아니잖아?”

“아니, 오래 전부터 여기서는 보기 어려워졌다고 해서…”

“확인해볼래?”

아스타리온이 길을 가로막으며 마주보고 서자 새삼스럽게 체격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키스라도 할 것처럼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와, 혀로 송곳니를 핥으며 벌어지는 입술을 보며 이리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어주었다. 손가락을 살짝 입에 머금으면 예상한 온도와 다른 서늘함에 잠시 몸을 떨었고, 그대로 송곳니가 살갗을 찢었다. 피가 흐르는 방향이 바뀐 것 같은 느낌과 차갑고 날카로운 아픔이 잠시 손끝에 머물렀다. 손가락을 타고 피가 흐를 틈도 없이 말캉한 살덩이가 액체가 지나간 자리를 핥았고, 그리 깊지 않은 상처에서는 머지 않아 피가 멈췄다. 바람이 불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도 비릿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지는 것 같이 어지러웠다.

짧은 시간이 지나고 아스타리온이 상처 위로 가볍게 입을 맞췄다. 누가 본다면 연인끼리 사이가 좋다며 웃고 지나갈 손키스와 같은 모양이었다. 의심할 여지도 없는 뱀파이어가 조용히 환호하듯 웃음을 터트렸다. 마치 이보다 좋은 것은 없을 것 같다는 투로 바라보는 눈빛에 의문이 들어 이리엘이 입을 열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아무리 사람이 없다고는 해도 골목 한복판에서 뱀파이어에게 피를 준 사람이 되었으니 괜한 걱정이 들었다.

“그런데 아무 사람 피나 마셔도 되는 거야?”

“이건 ‘마신’ 게 아니라 ‘맛본’ 거지. 정말로… 맛있는 피였어, 자기.”

입맛을 다시며 끌어올려진 입꼬리가 온 마음을 다해 만족스러움을 표하고 있어 이렇다 할 대꾸를 하지 못한 채 다시 아스타리온을 따라 걸었다. 아직 손끝에 남은 감각은 이가 박혀있는 것처럼 생생했다. 괜히 손을 등 뒤로 숨기며 쥐었다 펴기를 몇 번, 흐르던 피가 멈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다시 확인하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잠깐의 이벤트를 제외하면 크게 다르지 않은 만남이었다. 나란히 걷다가, 해가 완전히 지면 아스타리온이 이끌어 어제와 다른 바에 앉아 나란히 이야기를 하고, 가끔 손이 스치면 이리엘은 혼자 놀라 헛기침을 하고는 했다. 아스타리온은 근처에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이제서야 꺼냈고, 그 덕에 주변은 손바닥 안이라고 말하며 턱을 괴고 웃었다. 이어서 자세히 말하지는 않았으나 이리엘은 자신이 하는 운동에 대해 슬쩍 언급했고 아스타리온이 흥미로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정말 데이트 아닌가? 부드럽게 위로 올라가는 입술를 보고 있으면 데이트와 같은 그런 만남과 다르지 않을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마주보고 앉아 웃음을 터트리고 가끔 눈살을 찌푸리며 농담을 받아치기를 한참이었다. 해가 완전히 지평선 뒤로 떨어진 뒤에야 두 사람이 거의 문을 닫기 직전의 바를 빠져나왔다. 순간 튀어나오지 않은 말에 그대로 대화가 멈추고 각자 생각에 잠겨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가로등이 고장난 것처럼 깜빡거렸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웃음 속에서 이리엘은 여행 계획을 바꾸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러니 지금이 두 사람 모두가 예감하는 마지막이었다. 분명 흔들렸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더 많은 것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등을 떠밀었고 오랜 소원과 잠깐 만난 인연을 맞바꾸기에는 고민할 시간이 부족했다. 인사를 건네려는 이리엘에게 아스타리온이 몸을 기울이며 한 걸음을 좁혔다. 다가오는 걸음에 옅은 풀향의 공기가 밀려들었다. 이리엘은 처음으로 향수에 대해 무지하다는 사실에 아쉬움을 느꼈다.

“정말 여기 남지 않을 생각이야? 분명 돌아오게 될 텐데, 원한다면 내기라도 할 수 있어.”

“모르겠어. 너는 나에 대해 어떻게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아마 너는 모를 테지. 말한다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을 거야. 다만, 하나는 대답할 수 있어. 나는 너를 알고 있고, 언제나 네게 진짜를 가지게 하고 싶었어.”

조용히 한 마디씩 단어를 골라가며 뱉는 말은 확신으로 가득했다. 어째서? 의문이 고개를 들다가도 허공을 바라보며 잠시 무거워진 얼굴에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이리엘은 그것에 제게 짓는 표정이 아니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말을 이어가던 아스타리온이 작게 험한 말을 뱉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모든 것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였다면 이리엘은 분명 돌아와 찰나에 불과한 순간들에 함께 할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우면서도 잔인한 신이 제 편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 확신과 의심은 서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처음 제 마음을 앞에 꺼내었던 날처럼 손을 내밀었다. 언제나 깊게 생각하기보다는 행동이 앞섰던 제 사랑을 떠올리며. 그리고 그 어떤 목적이 덧씌워지지 않았던 그날의 고백처럼 아스타리온은 서 있었다. 이리엘이 손을 겹치면 그 위로 더 큰 손바닥이 덮였다. 아스타리온은 웃으며 장난스럽고 다정하게 이마를 맞대었다. 부드럽게 진회색 머리카락을 넘기며 볼을 감싸는 손길에 그대로 몸을 맡긴 채 턱을 들었고,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다. 짧게 이어졌던 키스가 끝나고 이리엘은 고개를 숙인 채 들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 눈이 마주친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애써 마음을 다잡는 중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는 손길에 다시 눈을 감았다.

***

또 다시 비가 내렸다. 갑자기 내린 소나기에서 점차 빗줄기가 굵어지고, 금방 그칠 비는 아니라는 듯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렸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고요했으며 거슬리는 소음이 가득한 곳으로 돌아가 있었다. 비가 온다고 해서 꼭 외출을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굳이 나갈 이유가 없었음에도 아스타리온은 투덜거리면서 우산을 챙겨 들었다. 빗물에 옷이 젖는 건 별로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으니 제 몸을 가리고도 남을 큰 검은 우산이었다.

미술관 주변에는 비를 피하거나 일회용 우산을 쓴 관광객들이 가득했다. 빗소리에 대화가 섞여 사라지면 오히려 조용한 주변이 마음에 들어 건물로 들어가기보다는 잠시 정원을 거니는 쪽을 택했다. 들리는 건 오직 빗방울이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때리는 소리뿐이었다. 걸음을 옮기다가 아스타리온의 눈을 잡아 끈 것은 연한 파란색이었다.

그것이 누군가 입고 있는 자켓이라는 사실을 눈치 채기까지는 몇 초가 더 걸렸으며, 베이지색 우산 아래 짧은 회색 머리카락이 흔들거리는 걸 먼저 눈에 담았다.

내리는 비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졌으나 그대로 세상이 멈춘 듯 오직 한 사람이 존재했다. 오로지 비만 내릴 뿐인 하늘을 올려다 보던 사람에게 천천히, 그러나 큰 보폭으로 다가가면 시리게 푸른 눈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다. 아스타리온은 너무나도 익숙한 이름을 한 글자씩 곱씹으며 입 밖으로 뱉었다.

“이리엘.”

“나도 날 모르겠으니까 묻지 마. 그냥 너와 걸었던 길이 계속 떠올라서…”

당황하지 않은 얼굴에서는 인사보다 먼저 준비했던 것처럼 말이 이어졌다. 무어라 변명이 튀어나오기 전에 고개를 숙여 아직 말이 다 끝나지 않은 입을 막았다. 두 개의 우산 중 작은 쪽이 땅바닥에 떨어질 듯 아래를 향하는 것도 모른 채 입을 맞춘 상대의 목을 끌어 안았다. 맞닿았던 두 입술이 떨어지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아서 이리엘이 손을 들어 놀란 입을 다시 틀어막았다. 어쩌면 보채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도 잠시였다. 아스타리온은 우산을 들지 않은 손으로 이리엘의 허리를 감싸며 끌어당겼고 완전히 하나의 우산 아래 선 두 사람이 존재했다.

“돌아온 걸 환영해, 내 사랑.”

언제나 쉽지 않은 사람이었다. 분명 솔직하게 드러낸 감정을 눈에 담고 있으면서도 입으로는 언제나 상황을 고려하며 다른 말이 튀어나왔다. 다행스럽게도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기까지 소요되는 시간에 아스타리온은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이리엘이 속삭였다. “아스타리온, 네가 여기 있을 것 같았어.” 날씨가 여전히 흐리고, 당장 천둥이라도 칠 것처럼 검은 먹구름이 가득했다. 그것이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하여 오직 그들만의 세상이 있을 뿐이었다.

왜 여기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어찌저찌 3편 완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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