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타브] 추상과 직설 1

현대 AU 화가 아스타리온 / 에세이스트&조각가 타브(테레즈)

무한화서 by 미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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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봄은 매번 늦었다. 해가 지는 시간이 점점 밀려날 때 즈음, 길가에 종종 튤립이 보였고 지루하도록 천천히 날이 따뜻해졌다. 영화제가 열리는 시기도 이즈음이었다. 제네벨, 아니 섀도하트와 함께 될 수 있는 한 많은 영화를 보는 게 나의 소소한 전통이었다. 배우이자 감독인 그에게는 필수적인 일이었고 나 또한 작업에 영감을 받을 수 있으니 매년 수확이 컸다. 올해의 작품 중, 함부르크의 예술가를 소개하는 다큐멘터리가 있었다. 세 명의 예술가들이 건조하고 담담한 어조로 본인의 작품을 설명했다. 이런 지루한 소재가 어떻게 영화제까지 오게 됐나, 그건 그들이 똑같은 작품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아주 다른 배경을 가진 이들 셋이 하나의 추상적인 작품을 자신만의 작품으로 소개했다. 소재를 누가 설명하고 소유하느냐에 따라 작품이 변화하는 걸 담은 영화였다.

섀도하트는 크게 감명을 받았는지 보고 나오는 길에 답지 않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좋았어, 소재의 소유라... 우리도 할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

'우리'라는 말에 흥미가 생겼다. 그와 일을 할 기회는 학생 이후로 없었기에 반가운 말이었다.

"예술가들과 작가들이 타인의 작품 중 하나를 보고 그에 기반해 새로운 작품을 만드는 거야. 그리고 상대가 만든 작품을 처음 보고 그게 자신의 작품인 것처럼 설명하기. 재밌지 않겠어?"

"어, 딱 네가 좋아할 것 같은 소재네."

섀도하트는 가볍게 으쓱였다.

"그래서 한다면 넌 누구와 작업하고 싶어?"

"나는... 아스타리온 안쿠닌."

"안쿠닌? 의외네, 그런 느낌의 추상을 네가 좋아했던가?"

"취향을 넘어서는 재능이 있지."

섀도하트는 공감하지 않는 기색이었지만 난 아스타리온의 작품에서 감정을 끌어내는 힘이 보였다. 그가 의도한 감정과 다른 것이 끌어내지는 것 같아 더 흥미로웠고.

'안녕.'

새벽 네 시 즈음에 핸드폰의 스크린이 반짝였다. 아스타리온에게 온 인스타그램 디엠이었다. 석고가 묻은 손으로 핸드폰을 잡아들었다.

'섀도하트한테서 말 전해 들었나 보네.'

핸드폰을 다시 내려두려다 바로 온 답장이 보였다.

'응, 네가 나를 골랐다면서?'

'어, 네 작품들이 좋아서. 넌 하기로 한 거야?'

이번엔 꽤 기다렸지만 답장이 오지 않았다. 작업을 마무리하고 잠이 들 무렵까지도 잠잠했다. 다음 날 점심 즈음에 확인해보니 디엠이 두 개 와있었다.

'응, 우리 미리 만날래? 작품 얘기 좀 하게.' 6:47 am

'그냥 다들 만날 때 보자.' 8:12 am

어쩐지 작게 웃음이 났다.

'난 너 만나보고 싶은데, 안 되나?'

아니어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입력하는 동안 답장이 왔다.

'내일 바빠?'

아스타리온의 작업실 근처 카페는 생각보다 한적했다. 일찍 도착해 책을 읽기 시작한 지 한참, 약속 시간이 삼십 분 쯤 지났을 때 아스타리온이 앞자리에 앉았다.

"의외네? 시는 전혀 안 읽을 것 같았는데."

아스타리온은 오랜 지인을 만난 것처럼 친근한 표정을 지었다. 날씨보다 얇은 셔츠와 바지, 모두 그에게 맞춘 것처럼 어울렸지만 그보다도 그의 얼굴에 눈이 갔다. 햇살에 눈이 부시게 빛나는 은색 머리칼, 깎아내린 듯 한 콧대와 입가의 연한 선들까지. 내 작품이 아름다움을 목표로 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런 작품들을 무색하게 만드는 이가 눈앞에 있다.

"당신 작품이랑 어울리지 않아?"

아스타리온은 크게 웃었다.

"랭보라니. 그래, 멀진 않네."

아스타리온은 그의 작품 같았다. 재밌고 신랄했으며 대화를 끌어내 갔다. 그는 어이없도록 완벽했다. 꼭 무대에 오른 배우 같았다. 주제 넘게도 그 모습이 피곤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떤 그림을 좋아해? 렘브란트나 카르바지오라고 하면 정말 일어날 거야."

"내가 그럴 거 같아?"

"아니, 자기는... 오키프 같아."

"...넌 세잔 같아."

그날 결국 작품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나의 작품은 오키프와 멀었고 그의 작품은 세잔에서 멀었다. 우리가 작품 말고 우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스타리온은 대화 중에도 작품에서도 항상 상징적으로 감정을 묘사하는데, 그의 무한한 재능에 걸맞게 형편 없었다. 그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수없는 추상의 벽으로 가려서 꼭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듯했다. 자체가 수수께끼였다. 풀리고 싶은 마음을 숨길 수 없는 수수께끼.

대화하는 내내 들켰다는 기분이 들었는데 무엇을 들켰는지는 모르겠다. 내 작품은 누가 보더라도 건조한데 오키프라, 호감인지 조롱인지 모르겠다. 어느 쪽이든 난 그가 재밌었다.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들리는 소문과 달랐다. 카자도어의 날개를 벗어난 유일한 제자. 버려졌다는 소문은 그의 작품들만을 알 때도 어불성설인 게 분명했다. 그는 항상 약에 취해있어 제대로 된 작품은커녕 말도 횡설수설한다는 얘기는 이제 출처가 분명하고.

해가 저물어갈 때 즈음이 돼서야 카페를 나섰다. 아스타리온은 미세하지만 후련한 표정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러길 바란 탓에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지만. 내가 작별 인사로 할 말을 고를 때 그가 나를 자신의 작업실로 초대했다.

아스타리온의 작업실은 화려했다. 장식과 가구 모두 한눈에 봐도 가격대가 있었지만 그보다 눈길을 끈 건 작업 재료들이었다. 유화물감이 한 벽을 채울 듯 가득했고 대형 캔버스가 켜켜이 쌓여있었다. 작업실 곳곳을 자랑스레 설명하는 아스타리온을 따라 구경하다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네가 작업 중인 작품들은 어딨어?"

아스타리온은 멈칫 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게 보고 싶어? 내 훌륭한 작품들은 여기 있잖아."

아스타리온이 완성작들로 가득한 벽을 가리켰다.

"그보다 어떻게 작업하는지 궁금해서. 싫으면 괜찮아, 그런 작가들 많기도 하고."

아스타리온은 고민에 빠진 듯 조용했다. 그를 기다리는 동안 아스타리온이 가리킨 작품들을 돌아봤다. 크기가 주는 기백을 이용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작은 작품들도 항상 매력적이었다. 세밀한 디테일에서 그는 조금 더 뜻을 분명히 표현할 줄 아는 듯했다. 한창 그림을 보고 있자 아스타리온이 한숨 쉬며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렇게 보고 싶으면 이쪽으로 와봐."

작업실 안쪽에 작은 문이 있었다. 원래 옷장으로 쓰는 작은 공간으로 보였다.

"원래 이런 건 아무한테나 안 보여주는 거 알지? 영광으로 생각해, 자기."

김 빠진 웃음소리가 나왔다. 아스타리온은 미완성 작품들 중 또 한참 고르고 고르더니 작은 캔버스를 하나 꺼냈다.

"가장 최근에 시작한 작품이야. 전이랑 좀 다르게 시도해보려고 하는데... 음, 아직은 확신이 안 서."

그가 건넨 그림은 집착적일 정도로 촘촘한 선들이 가득했다. 압도적이며 간절했고 힘이 있었지만 구걸하고 있었다. 직설적이었다.

"자기, 괜찮아? 왜 꼭..."

그제야 눈물이 고이고 있단 걸 알았다. 이 작품으로 감히 그를 알 것만 같았고 그의 작품에 왜 그렇게까지 끌렸는지 이해했다. 그가 보여주고 끌어내려는 감정들, 대부분 끝없는 슬픔과 분노인 그것들은 전부 용기를 기반하고 있었다. 이 작품은 연약해서 그 용기가 마침내 두드러졌다. 경이로운 재능이었다.

"...아스타리온, 내가 널 꽤 좋아할 거 같아."

그건 진심이었고 어느 정도 약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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