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아스] 여명

잘 있어, 아스타리온. 언제까지나 사랑해.


* 창백한 엘프 퀘스트 및 발더스 게이트 3의 전반적인 스포일러 주의

** 드림 연성입니다. 타브의 고유 설정 및 이름이 언급됩니다. (https://pnxl.me/c1k8to)

여명


라스가 떠났다. 아주 멀리.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소리쳐 불러도 들리지 않고, 무슨 짓을 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예정된 수순임은 알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이것은 결코 뒤집을 수 없는 명제이며, 이 간단한 한 마디에 담긴 진실은 가혹할 만큼 무겁다. …하지만 대체 무엇이 그렇게도 바쁘단 말인가?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맥동하는 심장, 그 안에 뜨거운 피를 품고 사는 사람들은 종족을 막론하고 시곗바늘 위에 올라타 치열하게 자신을 불태우다 어느 순간 툭,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

아스타리온은 라스의 무덤을 내려다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과거 그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두고 삶이라는 급류에 휩쓸려 사라지는 동안에도 아스타리온은 이렇게 그냥 서 있었다. 조용히, 무력하게.

불쾌함, 허전함, 아픔? 뭐라 콕 집어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이 영원히 떼어낼 수 없는 그림자처럼 발목을 붙들고 늘어진다. …아마 이런 걸 슬픔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지.

아스타리온은 그렇게 한참을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먼 하늘이 밝아오고 있었다. 이 저주받은 자유의 대가는 그에게 충분히 애도할 시간을 허락하지도 않는다. 그래, 시간은 언제나 그의 편이 아니었다. 다른 모든 이들이 시간의 흐름에 떠밀려 저 먼 곳으로 흘러갈 때도 그는 이 자리에 매여 있으니까. 무거운 족쇄에 묶인 것처럼, 혹은 둥둥 떠 있는 유령처럼.

정말 오랜만에, 역겨웠다.


집으로 돌아온 아스타리온은 라스가 남기고 간 짐 안에서 편지 한 장을 발견했다. 아스타리온. 간결하게 이름 하나만이 적힌 봉투. …익숙한 필체다.

그는 천천히 편지를 집어들었다. 편지에서는 희미한 먼지 냄새가 났다.

아스타리온, 내 사랑. 우리 운명이 지독하게 얽힌 그 날부터… 아니, 우리가 서로의 운명을 지독하게 얽어매기로 결정한 그 날부터, 난 언제나 네 행복을 바랐어. 어때? 나는 네게 충분한 행복이었나?

네가 잃어버린 200년, 그 아픈 기억은 내 짧은 수명으로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긴 시간이겠지만… 나는 너와 함께할 수 있어서, 너를 즐겁게 만들어 줄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 가끔 식사에 몰래 마늘을 섞거나 언더다크로 가는 낭떠러지 앞에서 네 엉덩이를 걷어차 버리고 싶었던 순간들도 제법 있었지만 어쨌든 행복했던 날들이 더 많았으니까. 그리고 감히 단언하건대, 너도 그랬을 거야. 그렇지?

있잖아, 아스타리온, 너와 함께했던 세월은 정말 아름다웠어. 더 바랄 것이 없을 정도로. 하지만… 딱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내가 네 삶에 스쳐 지나간 순간이 너무나도 짧다는 거야. 조금만 더 ‘우리’로 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젠 내게 허락된 시간을 다 써 버린 것 같네. 봐, 나는 이렇게 늙고 약하고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말았어. 하지만 너는 앞으로도 아름답겠지. …아마도, 영원히.

그러니 네게 마지막 부탁이 있어.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줘. 네 긴 삶에서 잠깐의 행복을 안겨 줬던 사람으로 나를 기억해 줘. 나는 네 덕에 분명 그랬으니까.

잘 있어, 아스타리온. 언제까지나 사랑해.

라스

…젠장.

주름진 손으로, 예전만큼의 힘이 남지 않아 덜덜 떨렸을 그 손으로, 잉크 방울을 흘리고 획을 빗겨쓰면서도 천천히 눌러 남겼을 글자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깎아낸 말뚝이 되어 심장에 박혀든다.

“잊지 말아 줘? 빌어먹을. 지금 나보고 잊지 말라고 한 거야? 잊지 말라고?”

그는 아무 것도 잊을 수가 없다. 카자도르의 발 밑에서 보냈던 끔찍한 시간도, 라스의 곁에서 보냈던 행복한 시간도. 이 모든 것들을 잊은 채 편해지고 싶어도,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숨을 내쉬며 살아가는 한 그의 피는 자신의 기억을 결코 놓아 주지 않을 것이다.

짐짓 모른 체 끄적여둔 문장에 부아가 치민다. 너는 다 알고 있잖아. 내가 ‘잊지’ 못한다는 걸.

그러니 이건 아마도, 계속 살아 달라는 완곡한 부탁일 것이다.

“젠장, 라스, 나이를 먹더니 이런 것도 할 줄 알게 된 거야? 하지만 달링, 넌 나를 잘 알잖아. 그럼 내가 엿 처먹는 걸 지독하게 싫어하는 개자식인 것도 당연히 알겠지. 설마 내가 얌전히 네 부탁을 들어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지?”

어쩌면 진짜 기대했을지도 모르지. 너는 항상 그런 식이었으니까. 다른 사람을 믿고, 누군가를 진창에서 끌어내고 싶어하고, 내가 진창에서 걸어나오길 바라고, 나한테 잘 해 줘서 나도… 나도 잘 해주고 싶게 만들고.

…짜증나게.

늙고 약하고 하찮아져? 멍청아, 내 앞에서 너를 그렇게 깎아내리지 마. 너는 여전히 아름답고 강하고 대단한 존재니까. 네가 뭘 생각했든 너는 그 이상이란 말이야, 알아?

아스타리온은 라스가 그에게 주었던 것들을 떠올렸다. 온전히 자신의 의지로 움직일 수 있는 몸, 안전한 장소,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는 상대, 사람으로서의 삶. 그러나 그건 동시에 세상이 그에게서 빼앗아간 것들이기도 했다.

내가 원했던 게 그렇게 큰 거였나? 내가 누리길 바랐던 게 그렇게 큰 사치였냐고. 저 아래의 신들이여, 내가 거기 처박혀서 썩어 가던 200년 동안 아무도 내 말을 들어 주지 않았잖아. 아무도 나를 구해 주지 않았잖아. 나 같은 놈한테도 뭐든 하나쯤은 내려줄 수 있었잖아. 그러니까, 제발. 다음 생이라는 게 정말로 존재한다면…. 아스타리온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아 머리를 숙였다.

불멸은 저주다. 망각은 축복이다. 이 모든 기억을, 모든 고통을 두고 차원의 저편으로 도피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필멸의 운명은 그를 비껴갔으나 다행히 그는 불멸 또한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래. 사람은, 죽을 수 있다. 다만….

그러니 네게 마지막 부탁이 있어. 부디 나를 잊지 말아 줘. 네 긴 삶에서 잠깐의 행복을 안겨 줬던 사람으로 나를 기억해 줘. 나는 네 덕에 분명 그랬으니까.

젠장, 젠장. 젠장! 라스… 라스.

그는 주변에 굴러다니는 양피지를 거칠게 움켜쥐더니 펜을 들어 무언가를 휘갈겨쓰기 시작했다.

그래, 어떻게 내가 네 부탁을 거절하겠어. 우린 항상 그랬잖아. 너는 내 말을 고분고분 전부 들어줄 것처럼 굴다가도 어떻게든 나를 사람의 길 위에 도로 올려놓으려고 안달이었지. 나는 한 번도 너를 당해 낸 적이 없었고. 그러니까… 살아 볼게. 너 없이도. 내가 가질 수도 있었을 삶을 조금만 더 살아 볼게.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네가 있었던 세상을 눈에 담고, 이 마지막 여행을 끝내고 나서 돌아올게. 그 때는 날 막을 수 없을걸, 달링. 이제 네 잔소리는 나한테 안 들리니까.

…잘 자, 라스. 이별이 그렇게 길지는 않을 거야.

그리하여 부칠 곳 없는 편지 한 통이 새롭게 쓰였다. 아스타리온은 편지를 정성껏 봉해 책상 위에 고이 올려두고 집을 나섰다. 이제 라스는 없다. 카자도르도 없다. 그를 얽어매던 은원은 전부 사라졌다. 그렇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스타리온은 스스로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누군가는 길다고, 또 누군가는 짧다고 말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어슴푸레한 새벽녘, 찾는 이 없던 집 문이 희미한 소리를 내며 열린다. 세월을 그대로 품고 낡아간 집 안의 풍경은 기억 속 모습에서 하나도 변한 것이 없다.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이제 이 곳에는 어떠한 온기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일까.

달빛을 받아 창백하게 빛나는 손이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집어들었다.


아스타리온은 나란히 놓인 두 개의 묘비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무성해진 풀을 치우고 세월과 비바람이 남긴 얼룩을 닦아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라스, 달링, 나 왔어. 많이 기다렸어? 아니면 내가 오지 않기를 바랐나? …네 말대로, 살아 봤어. 네가 하던 짓이랑 비슷한 일도 해 봤고, 사람 피도 안…—아니, ‘거의 안’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가끔 못된 놈들을 노리긴 했으니까. 하지만 그 자식들은 그래도 쌌다고.— 마시고 말이야. 잘 했지? 그럼… 이제 칭찬해, 어서.”

고요했다. 차가운 비석은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는다.

“…말이 없네. 그럴 줄 알았어. 흠, 어쨌든, 들어 봐, 라스. 여기까지 오면서 우리가 돌아다녔던 곳을 전부 둘러보고 왔거든? 발더스 게이트부터 우리가 처음 만났던 언덕까지 쭉? 그런데 말이야, 이제는 그림자 저주도, 노틸로이드가 추락했던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됐어. 라이스윈에는 다시 사람이 살기 시작했고. 뭐, 시간이 그만큼 지났으니 그럴 만도 하지."

물론, 내가 거기만 다녀온 건 아니지만, 다 말해 버리면 재회가 재미 없잖아? 나머지 이야기는 만나서 해 줄게. 만나러 갈 테니까…. 내가, 직접, 친절하게도 말이야. 아스타리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허리춤에서 편지 한 통과 단검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서둘러야 한다. 곧 해가 떠오를 테니까. 하늘은 이미 밝은 빛으로 완전히 물들어 있었다.

그는 가져온 편지에 불을 붙여 라스의 무덤 앞에 내려놓고는 단검을 꺼내 자신의 묘비에 글자를 새겨넣기 시작했다.

라스, 네가 없는 이 세상에서 난 충분히 살았고,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제법 많이 만났어. 네가 네 인생에 최고로 큰 행복을 안겨 줬던 사람이라는 사실도 잊지 않았지. …그것만은 절대 변하지 않더라. 그러니까, 이제는 진짜로 널 보러 갈 때가 됐어.

먼 하늘, 아직은 검푸른 물기가 남은 구름 너머로 드러난 은빛 화살이 그를 겨눈다. 아, 아침 햇살. 얼마나 오랜만에 다시 보는 태양인가. 네 미소를 닮은 빛,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 모를 온기. 걱정 마, 라스. 금방 갈 테니까. 내가 장담하는데, 눈 한번 감았다 뜨면 끝날 거야. 아마도? 

어느새 편지는 불꽃에 삼켜졌고, 묘비에는 마침표가 새겨졌다. 아스타리온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진다. …재회가 머지않았다. 

라스, 내 사랑. 많이 보고 싶어. 

아스타리온은 눈을 감고 두 팔을 벌렸다. 구름이 갈라지며 찬란한 햇살이 쏟아진다. 여명이 그를 포옹하듯 감싸안았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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