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브아스] Under the spreading chestnut tree

우린 그 아래에 앉았지, 너랑 나 둘이서.

드림 연성입니다. 타브의 고유 설정 및 이름이 언급됩니다. (https://pnxl.me/c1k8to)

Under the spreading chestnut tree

어느 평범한—언제나 그렇듯 굶주림과 욕망과 약간의 유혈이 함께하는— 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아스타리온이 라스의 옷소매를 슬쩍 잡아끌었다.

“달링, 오늘 시간 있어? 피 좀 나눠 주지 않을래? …슬슬 힘들어서.”

“그래. 좀 있다가 내 텐트로 와.”

아스타리온도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라스는 그의 ‘식사’에 동참하는 것을 좋아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아스타리온이 기뻐하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도 없다. 애초에 라스는 감정에 섬세한 이름 붙이는 법을 잘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유를 찾아 보자면 몸을 겹치고 있을 때 목에 닿는 차가운 날숨에 온기가 섞이고, 고요하던 그의 가슴 속에서 미약한 박동이 다시 울리기 시작하는 순간을 좋아하기 때문이 아닐까. 언데드는 살아있지도 죽어있지도 않은 상태라고들 하지만, 글쎄. 라스가 보기에 아스타리온은 분명 살아 있는 존재였다. 그에게서 생명 활동의 증거—심장이 뛴다거나 칼로 찌르면 뜨거운 피를 흘린다거나—를 찾아볼 수 있거나, 혹은 없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라스에게 그런 건 야영지 상자 안에서 썩어 가는 버섯만큼도 중요하지 않았다. 생물학 같은 건 모른다. 관심도 없다. 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 바가 아니었다. 그가 믿는 것은 오직 스스로의 직감과 판단뿐, 살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그건 살아 있는 존재다.

그래서 라스는 기쁜 마음으로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아스타리온이 그에게 피를 요구하는 것이 좋았으니까. 허기와 갈증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란 살아 있는 한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라스는 ‘살아 있는’ 아스타리온이 좋았다. 그의 굶주림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고, 타는 듯한 목마름이 사그라들어 나른한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쉬는 그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가 식사를 할 때마다 항상 피가 바닥에 줄줄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솔직히, 아까웠다. 바닥에 쏟아지지만 않았다면 전부 아스타리온의 입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을 테니까. 흙이 삼키는 것보다는 아스타리온이 삼키는 게 훨씬 나은 일이 아닌가.

고민 끝에 라스는 괜찮은 방법을 하나 생각해 냈다. 맙소사, 고민이라니. 그로서는 기념할 만한 업적이었다.


“아스타리온, 나 궁금한 게 있어. 피 마실 때 왜 항상 바닥에 눕혀 놓고 무는 거야?”

달이 뜬 밤, 라스는 약속대로 텐트를 찾아온 아스타리온에게 쭉 간직해 왔던 의문 하나를 던졌다.

“어? …어, 몰라. 왜? 그게 중요해?”

“아니, 중요한 건 아냐. 그냥…. 항상 엎드려서 마시길래. 바닥에 많이 흐르기도 하고 삼키기도 힘들 것 같아서 물어 봤어.”

예상치 못한 종류의 질문에 얻어맞은 아스타리온의 몸짓이 조금 딱딱해졌다. 그려낸 듯한 미소 너머로 당황에 가까운 표정이 어른거린다.

“…음, 이라서.”

“응?”

“처음이라고…! 젠장, 사람 피를 빨아 본 건 네가 처음이란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마셔야 하는지 잘 몰랐어. 쥐 먹던 것처럼 널 들고 마실 수는 없잖아? 그래서, 내가… 음, 꿈꿨던 대로, 어…. 아니, 상상했던 대로? 으, 아무튼. 그런데 내가 그렇게 많이 흘렸나?”

“…약간?”

.”

아스타리온은 눈썹을 치켜올린 채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음, 가벼운 불만. 말하자면, 심통이 났다… 쯤으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이제 이 정도는 안다. 물론, 대처법 역시도. 라스는 잽싸게 아스타리온의 볼에 키스하고는 삐딱한 자세로 서 있는 그를 달랑 안아올렸다.

“흘리면 아깝잖아. 네가 더 마실 수도 있는데. 안 그래?”


라스가 아스타리온을 데려간 곳은 야영지 바깥의 커다란 밤나무 아래였다. 그는 줄기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자신의 무릎 위에 아스타리온을 조심스레 올려놓고는 자세를 이리저리 바꿔 가면서 무언가를 재는 듯한 움직임을 계속했다. 이번에는 또 뭘 하려는 거지? 라스를 가만히 바라보던 아스타리온은 슬며시 밀려오는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달링, 도대체 뭘 하려는 거야? 네가 말도 없이 그러고 있으면 난 좀 불안해지거든?”

…라스로서는 그의 의심이 퍽 억울할 테지만, 어쩌겠는가. 평소의 바보짓이 불러온 결과인 것을. 

“이상한 거 아니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우리 둘 다한테 이득이 될 만한 방법 같은 거야.”

마음에 드는 자세를 찾았는지 어느 새 꿈지럭거리기를 멈춘 라스는 아스타리온의 등을 받치고 허리를 꼭 끌어안아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아, 사람의 몸이 가진 곡선이란 어쩜 이리도 서로의 빈 자리에 잘 맞는단 말인가. 그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품 속의 아스타리온에게 살며시 머리를 기댔다.

아스타리온 역시 라스가 이끄는 대로 체중을 실어 안겼다. 심장 소리, 체온. 목덜미에 닿는 숨결. 따뜻했다. 이렇게 안겨 있자니 그의 존재가 제법 기껍다. 그러니 괜히 뾰족한 말을 내밀어 라스를 쿡 찔러 보는 건, 전부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기 위한 노력의 일환일 것이다.

“흠, 사심 채우려는 건 아니고?”

“글쎄. 아니라고는 못 하겠네.”

아스타리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 그게 편하지. 거래, 대가 있는 호의. 무엇을 요구할지는 뻔하니 챙길 수 있는 것을 챙기고 바라는 걸 내어 주면 그만이다.

“좋아, 달링. 네가 채우려는 사심이 뭔지 보자고. 일단 목부터 좀 축인 다음에 말이야.”

아스타리온은 과장된 투로 키득거리며 라스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윽…!”

차가운 얼음 칼날이 목을 긋는 듯한 감각에 라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스타리온과의 식사에도 꽤 익숙해졌다지만 날카로운 송곳니가 피부를 꿰뚫는 이 순간의 고통만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피가 빠져나가고 있다.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다. 아스타리온의 목울대가 꿈틀거릴 때마다 눈앞이 식어가고 손끝이 흐릿해진다. 아니, 반대인가? 잘 모르겠다. 어지러웠다. 멈춰, 그만두게 해. 본능이 머릿속을 쿵쿵 두드리며 당장 몸을 빼내라는 경고를 울려 댔다. 그러나 라스는 본능을 억누르기로 했다.

왜냐고? 답은 뻔하지 않은가. …좋아하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고, 아픈 건 아픈 거다. 생존 본능은 어떻게 억눌렀다지만 잇새로 잔뜩 짓눌린 신음이 새어나오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으, 허억….”

젠장, 아파. 라스는 자기도 모르게 품 속의 아스타리온을 콱 끌어안았다. 목덜미 근처에서 즉시 불만 가득한 항의가 흘러나왔다.

“켁, 날 쥐어짜서 터뜨리려는 건 아니지? …갈비뼈 부러진 것 같아.”

“어…? 진짜? 미안해. 아파? 괘, 괜찮아…?”

깜짝 놀란 라스는 아스타리온의 어깨를 붙들고 황급히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그가 잘못 끌어안았다가는 정말로 어디 한 군데 부러질 수도 있었으니까.

그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던 걸까? 아스타리온은 참았던 숨을 내뱉듯 세차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 저 산만한 덩치가 잔뜩 당황해서는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는 모습이라니.

“하하하하! 당연히 농담이지, 순진하기는.”

“…정말? 아픈 데 없는 거 맞지?”

“그래. 없어. 장난이었다고. 뭐, 배도 대충 채웠으니까…. 이제 원하는 걸 들어 줄게. 말해 봐, 달링. 네가 채우고 싶은 사심이라는 게 뭐였는지.”

“응? 그건 이미 채웠는데.”

“…뭐? 언제?”

“방금 전까지? 우리 계속 껴안고 있었잖아.”

“…….”

“왜? 안고 있는 거 싫어?”

“젠장, 아래의 신들이여. 네가 열심히 생각했다는 그 이득이라는 게 고작 이거야? 끌어안고 피 빨리기?”

“어…? 어, 그렇지. 이게 다야. 왜? 별로였어? 그래도 삼키기 편하지 않았어? 봐, 이렇게 하면 바닥에 흘리는 것도 없어서 많이 마실 수 있잖아.”

어이가 없었다. 이렇게 순진해 빠진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피를 나눠주는 대가로 원한다는 게 기껏해야 ‘끌어안고 있기’가 다라고? 그러면 내가 삼키기도 편하고 더 많이 마실 수 있으니까? …멍청이.

“바보 같아.”

“왜? …어디가?”

라스의 눈이 등잔만하게 커졌다. 한껏 늘어뜨린 눈썹 아래에서 녹색 눈동자가 애처롭게 흔들린다.

아스타리온은 숨을 멈춘 채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아, 젠장. 저 멍청한 표정 안에 순간적으로 얼마나 많은 것들이 스쳐지나갔는지를 이 바보도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르겠지. 자기가 지금 뭘 느끼고 있는지조차도 모르는 얼간이가 그런 복잡한 걸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니 저 풋내 나는 감정을 일깨워 주는 것도 그가 될 테고, 귓가에 속삭여야 할 말을 알려 주는 것도 그가 될 테고, 터질 듯한 마음을 끝내 털어놓고 마는 것도 역시 그가 될 터였다. 아스타리온은 기묘한 패배감과 희미한 기대감 속에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음에 든다는 소리야. 그러니까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해, 알겠어?”

사실, 패배감이라고는 하나 나쁘지는 않았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 보는 간질간질한 기분, 마지막으로 이런 마음이 들었던 때란 대체 언제였던가. 아스타리온은 라스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그의 품 안에 몸을 완전히 내맡겼다.

“……!”

라스의 몸이 잠깐 굳었다가, 부드럽게 늘어졌다가, 가볍게 두어 번 들썩였다.

“응, 그렇게 할게.”

낮게 웃는 소리가 아스타리온의 귓가를 간지럽혔다. 꽤 마음에 든다. 그의 웃음도, 오늘 밤의 바람도, 지금 이 감정도.

이따금 풀벌레가 우는 고요한 밤, 서늘한 바람의 지휘를 따라 라스의 심장이 숲의 노래에 박자를 맞춘다. 두근, 두근. 몸을 맞댄 채 깊이 파고들수록 점점 빨라져 가는 그 소리가, 아스타리온은 참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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