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렌

note by ㅇㅇ

빠각, 날카로운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A가 반으로 깨진 씨디를 들고 있었다. 보란듯이 씨디를 내미는 걸 자세히 보니 과연 B 밴드의 디스크였다. A는 씨디 잔해를 떨어트리고 옆에 쌓여 있던 음반들도 와르르 바닥으로 쏟았다. 그리고 더럽고 지저분하고 묵직한 워커로 그것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씨디가 깨지는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요란하고 시끄러운 소리였다. 나는 눈앞에 걸려 있던 헤드셋을 썼다. 낡긴 했지만 품질은 좋은 것이었는지 소음이 순식간에 희미해졌다.

A를 처음 만났을 때도 저런 식으로 패악을 부렸다. A를 만난 날 그가 반으로 빠갠 B 밴드의 씨디는 내가 꽤 즐겨듣던 것이었는데, 남의 차를 얻어탄 주제에 허락도 없이 카오디오를 꾹꾹 눌러보더니 노래가 흘러나오자마자 욕을 지껄였다. 그리고 오디오를 부술 기세여서 바로 음악을 껐더니 그가 씨디를 꺼내 자기가 가장 싫어하는 밴드라고 구시렁대며 씨디를 부수고 창밖으로 던졌다.

얼간이처럼 굴긴 싫었지만 나는 망한 세상에서도 슈퍼카를 훔치는 대신 물려받은 낡은 차를 몰고 망가진 도로를 따라 주행하는 사람이었다. A는 그런 나를 총알 한 발로 멈춰세운 무뢰배였고. 그가 보란듯이 총을 내보이지 않았다면, 내가 그의 위협 사격에 겁을 먹고 차를 세우지 않았다면 불쾌하고 이질적인 동행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를 태웠고 우리는 며칠째 함께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내가 원래 가려던 곳을 가라고 했다. 글로브박스를 뒤져 얼마 없는 씨디 중에서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음악을 틀고, 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부서진 도로가 아니라 내 운전 실력에 욕을 퍼부으며 줄담배를 피고, 대시보드에 냄새나는 신발을 함부로 올려놓으면서. 군인의 것처럼 목이 길고 검은 워커는 광이 나지 않았고 검은 액체와 더덕더덕 붙어있는 이물질로 앞코가 더러웠다. 그게 뭔지 알 것 같아서 발을 내려놓으라고 말 할 수 없었다. 무례하고 두려운 히치하이커와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기에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A는 좀이 쑤셨는지 이따금 자기 얘기를 지껄이곤 했다.

내가 훔쳐보는 것을 눈치챘는지 워커에 대한 자랑(첫 전리품이며 워커와 함께 얻은 총은 버렸지만, 신발은 무슨 가죽으로 만든 건지 몰라도 피도 안 먹고 까지거나 닳지 않는데다 적절히 무거워서 아주 좋다는)이나 내가 그를 무시하고 달렸을 때 차 뒤쪽에다가 쏜 총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 자신의 음식 취향과 형 이야기.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별로 듣고 싶지 않았다. 산 사람보다 죽은 사람이 많은 세상이었고 사연 없는 생존자는 없었기에 무용한 화제였다. 그래서 나는 고른 길을 찾아 운전에 신경쓰는 척 하면서 그의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차라리 워커 자랑이 나았다.

A의 형은 사이렌이 울리고 대피령이 나올 때도 B 밴드를 듣고 있었다. 패닉에 빠져 짐을 마구잡이로 챙겼더니 나중에 확인해 봤을 때 B 밴드의 음반도 섞여 있었다고 했다. 쓸모 없는 짐은 조금이라도 줄이는 게 합리적이었지만 그는 어딘가에서 라디오 기능이 있는 씨디 플레이어까지 구해왔다. 당장 부숴버리고 싶었지만 라디오 때문에 참았다. 라디오를 틀지 않으면 형은 계속해서 B 밴드의 노래를 들었다. A까지 가사를 외워버릴 때까지 계속. 노래를 듣고 있지만 날카로운 사이렌이 환청으로 들렸다. 안 그래도 이상한 정신이 망가져버렸는지 어느 날 그것을 박살냈더니 형은 어딘가에서 용케 또 다른 씨디 플레이어와 똑같은 음반을 구했다.

간판은 떨어지고 매대는 빈 상점 구석에서 B 밴드의 노래가 큰 소리로 흘러 나왔다. 들을 사람은 귀가 달렸는지 구분할 수도 없을만큼 머리가 뭉개져 피를 쏟고 있었다. A는 형을 어떻게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뒤통수가 갑자기 앞으로 팍 쏠렸다. 고개를 돌리자 내 머리를 때린 A가 인상을 쓰고 뻐끔뻐끔 뭐라 말하고 있었다. 나가자는 얘기 같았다. 헤드셋을 벗고 아무 씨디를 골라들었는데, A와 내 주머니에 든 약간의 식료품보다 많았다. 하기사 식량이 아니라 구닥다리 디스크나 챙기는 사람이 있을까.

당연한 듯이 차에 함께 올라타 새로 얻은 씨디 중 하나를 골라 카오디오에 넣었다. 경쾌한 음악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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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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