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 your hands
쟁준
며칠 내도록 골머리를 썩였던 출장이 결국엔 끝났다. 오래 앓던 사랑니를 빼 버린 듯 후련하고도 미묘하게 찝찝한 기분이 남았다. 오늘은 쉬고 내일 출근해요. 역에서 헤어지며 상사는 인사말의 끄트머리에 그렇게 건조하게 덧붙였다. 평소처럼 생색내며 말하기에는 그도 진이 다 빠진 모양이었다. 진재유는 대답 대신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아침 기차를 타고 올라온 서울,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의 공기가 차가웠다.
시간이 애매해 아침 식사를 걸렀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 지금은 지나치게 익숙했다. 새벽같이 출근해선 빈속에 커피를 붓는 일이 허다한데 아침 좀 거른다고 큰일이 나겠나. 가시지 않은 졸음기와 허기가 뒤섞여 머리가 몽롱했다.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냉장고가 텅 비어 있을 테니 들어가는 길에 장도 봐 가야 한다. 캐리어 끌고 마트 들어가기 번거로운데. 대충 사고 가서 좀 자야지. 자고 일어나서……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 희게 비워진 머리로 환승을 찍고 개찰구를 통과했다. 아니 근데 이번 달 교통비 실화가. 요금 미쳤네.
집 근처 역까지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겠다. 지하철에 실려 꾸벅꾸벅 졸다가 깨서 보니 내릴 역 바로 전 역이었다. 직장인의 본능 같은 게 작동한 모양이다. 귀소본능, 뭐 그런 거……. 캐리어 바퀴가 드르륵 끌리는 소리를 배경음악처럼 들으며 비척비척 걷다 보면 익숙한 단지의 풍경이 펼쳐졌다. 이게 바로 역세권이 중요한 이유다. 환승 한 번 더 했으면 내는 그냥 기절했다. 듣는 사람도 없는데 중얼거린 진재유가 단지 입구를 지나 마트가 있는 골목 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드르르륵, 길게 끄시는 소리가 어영부영 멎었다.
오래 잊고 지냈다. 사람의 뒷모습에 익숙해진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준수?”
엉겁결에 튀어나온 이름을 뱉으며 그 순간 진재유는 후회를 느꼈다. 단지 입구에서 허리를 조금 숙이고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앞에 서 있던 어린아이의 시선이 같이 꽂혀 들었다. 큰 손이 훨씬 조그마한 손을 부드럽게 잡고 있었다. 아이를 익숙하게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를 들었다. 낮은 목소리. 그가 꿈에서나 겨우 그리워했던.
“어, 재유.”
당혹인가? 떠름함인가? 돌아보는 얼굴은 여전히 희었다. 진재유는 그 안에서 부정적인 감정을 한 톨이라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하얗고 담담한 낯이었다. 눈꺼풀이 천천히 감겼다 뜨이기를 몇 번, 그리고 성준수가 매끄럽게 웃어 보였다. 꼭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 같았다.
“오랜만이네. 여기 살아?”
코트를 떠난 진재유와 성준수의, 십 년을 훌쩍 넘은 공백 후의 재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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