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습
쟁준
텅, 하고 농구공이 체육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사선으로 튀어 오른 농구공을 흰 손이 잡아챈다. 전조도 없이 휙 던진 슛이 매끄럽게 림을 통과했다. 깔끔한 포물선의 궤적을 눈으로 좇은 성준수가 터벅터벅 걸어 들어왔다. 조명이 비추는 실내, 가장 외곽에 그려진 하얀 선을 넘어서면 환한 불빛이 머리카락 위로 쏟아진다. 빛 아래 있는 그를 본다. 성준수가 입을 열었다.
“재유.”
돌아보지 않고도 그 목소리를 짐작할 수 있다. 진재유가 고개를 돌렸다. 준수 왔나. 입꼬리에 걸친 웃음은 오늘따라 미끈한 질감을 띤다. 진재유는 용건을 묻는 대신 그물을 지나 떨어져 통통 굴러온 공을 주워들었다. 밤의 체육관 안에 성준수가 있다는 사실은 조금도 어색하지 않다. 대회가 끝나고 나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았다. 가까워지는 발소리를 등지고 몸을 돌린 진재유가 손에 들린 공을 던졌다. 아, 조금 삐끗했다. 주황색 궤적이 림을 향해 날아가는가 싶더니, 백보드를 맞고 퉁 튕겨 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성준수가 공을 회수했다. 곧바로 날리는 대신 잠깐 멈춰 선 그가 제자리에서 공을 두어 번 드리블했다. 무언가 말을 꺼내려는 듯했으나 잠깐의 간격 사이로 끼어든 진재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얘기는 잘 했나?”
“……어.”
성준수가 눈을 깜박인다. 빽빽한 속눈썹이 눈가로 얕게 그림자를 드리웠다가 다시 들린다. 새삼스럽게도 화려하게 생긴 얼굴이다 싶었다. 진재유의 시선이 익숙한 뺨의 윤곽을 타고 미끄러진다. 성준수의 손 안에서 농구공이 빙그르르 돌았다. 여즉 정돈된 언어가 익숙지 않아 말끝을 잇는 데 시간이 걸리나 싶었다. 진재유가 걸음을 옮긴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감독님과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캐묻는 대신 가벼운 손짓을 했다. 사인을 인식한 성준수가 공을 패스한다. 이번에는 깔끔하게 그물을 통과한 농구공이 다시 퉁, 퉁 소리를 내며 굴러왔다.
“아이스크림 사러 갈래?”
숙소에 다 떨어졌던데. 영 서투른 화제 전환에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점마들은 겨울에 무신 아이스크림을 이래 잘 처뭇노. 다 같이 감기 걸리는 거 아이가. 후배들이 들었으면 겨울에 먹는 아이스크림이 진짜 아이스크림이라느니 뭐라느니 헛소리를 한참 늘어놓았을 법했다. 목소리의 공백을 뒤로 하고 진재유가 읏차, 소리를 내며 공을 주워 정리하러 갔다. 흰 선의 곁에 선 성준수가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면 진재유가 웃었다. 잘 웃지 않는 하얀 얼굴에 조금 느슨한 기운이 돌았다. 이내 체육관의 불이 꺼진다.
해가 일찍 진 밤거리를 걸어가면서는 별말이 오가지 않았다. 가로등을 피하듯 삐죽하게 길어진 두 그림자가 나란히 늘어졌다. 성준수는 조용했고 진재유는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다. 감독님과 나눈 이야기를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내일이 준향대의 입시 결과 발표날이었으니까. 지상고의 주장은 답잖게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대신 평소처럼 밥을 먹고 러닝을 뛰고, 공을 던지고 쌍욕을 날렸지만 어른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라도 보였나 보다. 진재유는 성준수의 약한 모습을 모르지 않았으나 다만 같은 시간을 보내온 대가로 나이 많은 이들의 시선만은 따라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유달리 아쉬울 건 없었지만 가끔은……. 골똘히 생각하던 진재유가 우뚝 멈춰 섰다. “재유?” 같이 멈칫한 성준수의 목소리에 그가 고개를 흔들었다. 암것도 아이다. 공연히 성준수를 앞질러 두어 걸음을 빠르게 걸어가자 등 뒤에서는 가벼운 웃음소리가 들렸다. 같이 가. 따라붙는 목소리는 평소와 같아서, 진재유는 내심 가라앉으려던 속을 모른 체 했다.
“여행이라도 가까.”
뜬금없이 내뱉은 소리에 성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졸업 여행. 그런 거 로망 있는 아들도 있다 카든데. 고작 가로등 불빛에 눈이 부시기라도 한 것처럼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눈가에 댄 진재유의 낯은 드리운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 니 합격 발표 끝나고 나믄. 덧붙은 말이 어쩐지 살짝 머쓱한 기색이라 성준수가 소리 없는 웃음을 삼켰다. 어. 가고 싶은 곳 있어, 재유? 조금 늦게 돌아온 반문에 진재유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인데…….
“그럼…… 바다 갈까.”
붉은 신호등이 켜진 횡단보도 앞에 멈추어 서며 성준수가 말했다. 대학 가면 자주 못 보게 될 테니까. 부산 바다. 부산에 살면서도 바다에 제대로 몇 번 가 보지 않은 사람치곤 뻔뻔스러운 말이었다. 진재유는 신경 쓰지 않는 대신 한 가지를 물었다. 그라모 쫌 멀리 가도 괘않긋나. 신호등의 빨간 불빛을 가만 응시하는 낯을 한 번 바라본 성준수가 대답했다. 안 괜찮을 게 뭐 있어. 명쾌한 목소리였다.
“아, 장바구니 안 들고 왔다.”
“맞나.”
“어.”
그냥 비닐봉다리 하나 사 가지 뭐. 훤하게 불빛을 쏟아내던 마트 입구 앞에 서자 자동문이 열렸다. 공태성이 얼마 전부터 장 보러 갈 때 애용하기 시작한 웬 꽃무늬 장바구니를 떠올린 진재유가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로 웃었다. 금마도 참 취향 희한하지 않드나. 문 가까운 곳에 상자째로 쌓여 있는 과일들을 구경하던 성준수가 인상을 팍 구겼다. 그 새끼 취향이래? 아무거나 주워 온 게 아니고? 어, 마음에 들어가 가져왔다 카대. 공태성이 마음에 든다고 했던 포인트는 아마 꽃무늬가 아니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진재유는 두리번거리는 성준수를 끌어 아이스크림 코너로 향했다. 그 바람에 냅다 팔짱을 끼워진 성준수가 훅 줄어든 거리감에 황당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내 성준수도 수긍한 듯 자세를 은근히 구부정하게 낮추길래 옆구리를 팍 찔렀다. 아. 하나도 아프지 않다기엔 꽤 강력한 일격이었던지 성준수가 휘청이는 시늉을 했다. 뻘짓 말고 퍼뜩 이리 온나. 진재유가 아이스크림이 가득 찬 냉동고 위를 툭툭 두드렸다. 이건 김다가 좋아하는 거, 저게 상호가 말했던 신상, 사는 김에 희차이 몫도 좀 챙기고……. 옆에서 고개를 기울여 안을 들여다보던 성준수가 문득 물었다. 통으로도 하나 사 갈까. 와. 새끼들 질리도록 처먹으라고. 냉장고 자리는 남긋나? 잠시 조용하던 성준수가 고개를 저었다. 부정보다는 잘 모르겠단 소리에 가까워 보여 진재유는 구석에 있던 둥근 통 하나를 가리켰다. 저게 맛있다드라. 성준수는 누가 그러더냐고 되묻지 않고 냉동고를 열어 아이스크림 통을 집어 들었다.
“다른 살 건 없나?”
진재유가 계산대 앞에서 괜히 잠깐 미적거렸다. 성준수가 그들을 힐끗이던 점원에게 카드를 건넸다. 폐장이 가까운 마트 특유의 무관심한 분위기 속에서도 어떻게 봐도 운동하는 남자 고등학생 둘은 눈에 띄었다. 사실 그보다 눈에 띄는 건 저 얼굴일 거다. 하얗고 이목구비 뚜렷하고, 어지간히 귀찮은 일 많겠다 싶을 만치 곱상하게 생긴. 진재유는 의식적으로 눈을 옮겨 점원 쪽을 보며 그들이 들고 온 아이스크림 더미를 앞으로 조금 밀어놓았다. 그런데 저 카드, 어딘지 친숙한 모양인데. 진재유가 무심코 입을 열었다. 그거 감독님 카드 아이가? 어, 맞는데. 아까 받아왔어. 하이고마…… 니 그거 들고 통 아이스크림 사자 이칸 기가. ……아. 뒤늦게 박 터지는 소리를 내는 성준수 뒤를 지나쳐 나온 진재유가 비닐봉지에 아이스크림을 담았다. 다 넣고 보니 통은 넣을 자리가 마땅찮아 성준수가 대충 옆구리에 꼈다. 마트를 빠져나오는 발길 앞으로 그림자가 길었다. 슬슬 시려 오는 손을 걸치고 있던 패딩 주머니에 대강 꽂고선 걸음을 옮긴다. 부러 보폭을 맞추려 애쓰지 않아도 걷는 속도는 일정하게 엇비슷했다. 손목에서 달랑이는 아이스크림 봉지의 무게가 허벅지를 툭툭 스쳤다. 겨울에 무슨 아이스크림을 이렇게, 어쩌고 하며 옆에서 투덜대는 소리가 아까 제가 한 말과 비슷하게 들려 진재유는 조금 웃었다. 성준수가 고개를 슬쩍 돌려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준수.”
“어.”
“니 내한테 할 말 없나.”
어투는 가벼웠다. 규칙적으로 바스락이는 기척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진재유는 알았다. 짧게 숨을 멈췄다 곧 아무렇지 않다는 듯 도로 내쉬는 성준수의 호흡을. 성준수는 잠깐 말이 없었다. 눈가와 뺨의 언저리를 맴돌던 시선은 앞으로 이어지는 보도블록을 향했다. 뭐, 그동안 고마웠다? 애매하게 올라간 말끝이 영 어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해 곧 잔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 웃지 마. 성준수가 툭 치는 몸짓에 굴하지 않고 진재유는 비실비실 웃었다. 이 순 엎드려 절 받기고만. 웃지 말라니까. 그러다 성준수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이어 자연스러운 척 흘러나온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덜 어색했고 그래서인지 별로 웃기지가 않았다. 재유. 넌 나한테 할 말 없어? 부슬거리던 웃음소리가 멎었다. 진재유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있지. 있는데 지금은 안 할 기다.”
그게 뭐야, 성준수는 짧은 불평을 툭 던져놓으면서도 해야 할 말을 당장 내놓으라 성가시게 굴지는 않았다.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제대로 듣고 싶을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가로등과 신호등, 지나는 차의 전조등과 간판 따위가 뒤섞여 어지러운 밤거리의 불빛 속에서 진재유가 눈을 깜박였다. 규칙적으로 들리던 비닐 스치는 소리가 잠깐 끊어졌다가 다시 이어진다. 성준수가 스치듯 물었다. 그럼 언제 해 줄 건데? 진재유가 고개를 가볍게 흔든다. 그야 내도 모르지. 그건 또 뭐야. 실없는 소리를 틱틱 중얼대며 숙소의 문을 열었다. 환한 빛이 그들에게로 쏟아졌다.
언젠가부터 그에게 고백하는 상상을 했다.
진재유는 내 쫌 피곤해가, 하고 묻지도 않은 변명을 주워섬기며 일찍 자리에 누웠다.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해치우고 남은 것들은 냉동실에 어떻게든 욱여넣은 뒤 각자의 자리로 흩어진 다음이었다. 씻고 머리만 대강 말린 채 곧바로 누워버리자, 흔치 않은 모습에 후배들이 한 번씩 기웃거리다 가만 눈을 감은 진재유만 보고 소득 없이 돌아갔다. 성준수는 또 체육관에 갔는지 뭘 하는지, 숙소에선 보이지 않았다. 햄 전화 받으러 나가는 것 같든데요. 엥? 뭐임? 희차이 니는 이 시간에, 뭔 일 있나? 잘게 떠드는 목소리가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곧 썰물이 빠져나가듯 멀어졌다.
장소는 어쩐지 겨울 바다의 앞이다. 성준수의 생김새는 차가운 계절과 유독 잘 어울렸다. 그래서 그런가 농구 코트 밖의 그를 상상해 볼 때면 풍경은 자주 겨울이었다. 바람이 세차게 불어 짧은 머리카락을 흩어놓았고 꽁꽁 싸맨 목도리에 가려 단정한 입매는 잘 보이지 않았다. 진재유는 멋없이 롱패딩에 두 손을 주머니에다 집어넣고 무리에서 동떨어진 펭귄처럼 서 있었다. 귓전을 요란하게 울리던 바람 소리가 어느 정도 멎어들 즈음 그가 입을 연다. 재유. 진재유는 패스를 끊고 농구공을 쳐내는 순간처럼 심장이 급하게 뛰는 것을 느낀다. 겨울 바닷가의 찬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낯은 차분하고 침착했음에도. 한 발 앞질러 말을 꺼낸다. 내 니를 좋아한다. 사실 니도 알고 있었제. 말끝이 초라하게 느껴져 진재유는 웃는다. 마주 선 성준수의 표정은 매번 알 수 없게 흐리기만 했다. 거절의 말은 수백 번의 고백을 받아 봤을 사람답게 담담하고 간결하다. 미안, 재유. 지금은 농구에 집중하고 싶어서. 몇 번을 상상해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문장. 진재유는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미안. 미안타. 니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는 것도 아인데 그양, 욕심 쫌 부리봤다. 니 서울 가믄 이거도 끝이니까는. 변명이 길어져 혀를 안 아프게 한 번 깨물었다. 입이 괜히 방정이다. 방정. 그리고 돌아선다. 고작 그런 상상이다.
“재유. 자?”
돌아오지 않는 답 대신 낮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재유햄 아까 피곤하다 카대요. 멀리서 대신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수마에 반쯤 몸을 맡긴 채로 진재유는 눈을 뜨지 않는다. 문간을 턱 짚고 안쪽을 들여다보던 그림자가 훌쩍 멀어졌다. 조심스럽게 닫는다고 닫은 문이 끼이이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 에이, 씨바거. 너머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멀어지는 발소리. 가나. 그래, 내 이만 내버려도. 니 생각하느라 잠도 못 자서야 쓰긋나. 잠깐 수면 위로 떠오르나 싶었던 의식이 도로 가라앉았다.
문을 닫고 돌아선 성준수가 터벅터벅 걸어가 앉았다. 이어폰 꽂고 경기 영상이라도 볼까 싶어 핸드폰을 켜는데 기상호가 옆을 기웃거렸다. 뭐야. 햄요. 라면 안 드실래예. 니네 방금 아이스크림 처먹지 않았냐? 다은햄이 그걸론 간에 기별도 안 간다고……. 봉인됐던 허기만 풀려났다 안 해요. 또 이상한 표정을 짓는 기상호를 잠깐 보다가 성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일어난 기상호가 공태성이 있는 쪽으로 쪼르르 옮겨갔다. 태성햄! 준수햄 거도예! 아이씨 물 다 넣었는데 추가를 하고 그러소서 전하는. 아이씨? 뒤질라고. 성준수가 살기 없이 으르렁거렸다. 사이에 낀 기상호가 실없이 히죽였다. 또 속으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대충 오타쿠 같은 생각이겠지. 님! 그렇게 웃지 마셈! 바보 같아 보임! 너무하다며 잉잉 우는 기상호를 무시하고 성준수는 이만 그들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알고리즘에 뜬 영상을 아무거나 눌러 틀었다. 작은 화면 안에 익숙한 코트가 비치고 농구공이 튀었다. 이내 잡생각이 말끔히 사라졌다.
진재유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어슴푸레 밝아오는 빛도 없이 새카만 밤중. 한두 시나 되었을까. 어중간한 시간에 잠들었더니 결국 새벽에 깨고 말았나. 그런 생각을 하며 눈이 어둠에 익기를 기다리려는데 상체를 조금 일으켰더니 곁에서 으응, 하고 잠투정을 부리는 소리가 났다. 진재유는 눈을 열심히 깜박였다. 뭐고? 평소라면 옆자리에서 정자세로 잠들었을 성준수가 무슨 일인지 제 옆까지 굴러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웬일로 정희찬이 숙소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던가. 성준수의 입시 결과가 발표되는 순간에 저만 빠져 있기가 내키지 않았나 보다. 좁은 숙소에는 자리가 빠듯하니 준수와 저 옆에 낑겨 자게 된 거고. 대강의 사정을 짐작하기는 했지만 그와 허리께에 달라붙은 온기는 별개의 문제였다. 바디필로우를 껴안듯 진재유의 몸 위로 한쪽 팔을 턱하니 두른 성준수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끌어안은 손을 풀어내려 하니 따뜻한 걸 뺏기기 싫은지 잠든 채로도 인상을 썼다. 별수 없이 도로 누운 진재유가 잠이 덜 깬 머리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준수…… 니 안 불편하나.”
고개를 조금 틀어 소곤소곤 말을 건네 보았지만, 곤히 잠든 상대에게서 들려오는 대답은 없다. 하긴 불편하면 알아서 깼겠지. 좋은 게 좋은 거라 넘긴 진재유는 괜히 자꾸만 의식되는 타인의 신체와 그 온도를 신경 쓰지 않으려 애쓰며 눈을 감았다. 니 내랑 바다 가도 괘않긋나. 잠들기 전부터 입 안에서 맴도는 말을 눌러 삼켰다. 내는 이래 맘이 어지러운데, 점마는. 치미는 감정을 꾹 내리누른다. 깨자마자 복잡해졌던 머릿속이 지우개로 박박 지워낸 듯 하얗게 정리되고 나면, 다행히 다시 잠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진재유의 호흡이 고르게 변하고 한참 뒤, 슬그머니 성준수가 가늘게 눈을 떴다.
속이 약간 불편하기는 했다. 싫다는 사람을 억지로 끌어안아 온기를 빼앗고 있는 느낌이라. 평소에 잠버릇이 심한 편은 아니었지만 끌어안을 게 있으면 또 마다치 않는 습성이 얼결에 진재유를 봉변 맞게 만들었다. 이름이 불렸을 때 정신이 들긴 했지만, 모른 체 하고 자는 척을 계속했다. 다행히 진재유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역시 이 온도를 쉽게 놓아줄 마음은 들지 않는다. 같은 36.5도를 가진 사람인데 얘는 왜 이렇게 따뜻하지. 혈액 순환이 잘 되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다가 진재유의 잠긴 목소리에 생각이 미쳤다. 다른 사람 목소리를 듣고 설레 본 적이 없는데. 비식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고 눈을 곱게 감은 성준수가 잠결인 척 진재유 쪽으로 고개를 파묻어 파고들었다. 아, 라면 냄새는 다 빠졌으려나. 새끼들 춥다고 환기 안 한 건 아니겠지. 정작 진재유는 라면이고 뭐고 의식하지도 못했는데 그랬다.
말끔한 낯으로 일어난 성준수는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 러닝을 갔다 와서 밥을 먹고, 학교에 가서는 뒷자리에 앉아 좀 자다가 수능 끝난 3학년 수업이 일찍 파하는 바람에 일찍 깼다. 재유네도 별반 다르지 않겠지. 같이 체육관 갔다가…… 점심 뭐 먹지? 2학년부터는 급식이 나올 테니 3학년들끼리 식사를 해결해야 했다. 정확히는 3학년 둘이서. 거의 텅 빈 가방을 대강 챙겨 든 성준수가 교실 뒷문을 빠져나왔다. 재유랑 밥 한두 번 먹는 것도 아니고, 웬 놈의 가슴이 이딴 일에까지 설레고 염병을, 씨바거…….
진재유의 반은 매번 종례가 늦었다. 4교시도 다 채우지 않고 애들을 내보내는 시기에도 그랬다. 입시의 끝을 맞이하여 미쳐버린 3학년들을 두고 뭐 그렇게 할 잔소리가 많은지. 뒷문 근처의 복도 구석을 차지하고 선 커다란 남자애를 지나가는 사람마다 한 번씩 쳐다보고 갔다. 스쳐 지나가는 시선들에 익숙한 성준수가 물끄러미 뒷문 옆 창문이나 응시했다. 진재유의 자리도 교실 뒤편이라, 이래저래 가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꾸벅꾸벅 졸 때면 얼핏 움직이는 머리통이 보였던 것 같은데. 오늘은 멀쩡히 깨어 있나 보네. 시답잖은 생각을 이어 나가고 있을 때 왁 이는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뒷문이 쾅 열렸다. 마, 살살 쫌 열어라. 문 다 부서지긋다. 타박하는 말마디와 오늘은 뭘 할지를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들이 뒤엉켰다. 거의 덩어리가 되어 굴러가듯 멀어지는 동급생 무리를 한 번 쳐다보지도 않은 성준수가 뒷문 옆으로 툭 손을 얹었다.
“재유.”
“준수 왔나.”
마이 기다렸나. 익숙하게 일어선 진재유가 웃었다. 의자를 밀어 넣고 가방을 챙겨 나오는 폼이 저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성준수는 문득 손을 내밀어 잡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체육관 가자.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으며 짚었던 손을 거두어 가볍게 말아쥔다. 어깨에 멘 가방의 끈을 느슨하게 잡고 있던 손을 괜히 고쳐 쥐었다. 미묘한 긴장이 손바닥 안에 고이는 듯했다.
체육관에서 둘이 한참 공을 튀기다 진재유가 먼저 바닥에 드러누웠다. 입시 결과가 나오는 건 성준수인데 발표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제가 다 떨려 와서 어쩔 수가 없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게임이 제대로 될 리가 있나. 흐지부지 마무리된 원온원의 끝에 퉁퉁 튀어 오르는 공을 잡아 가볍게 던져 슛을 성공시킨 성준수가 진재유의 옆으로 와 앉았다. 밥 먹으러 갈까. 슬슬 시계가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르까. 뭐 묵고 싶은 건 있나. 성준수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가까운 데 가도 괜찮아. 그라믄. 응? 니 델고 가려던 데 있다. 인나 봐라.
그렇게 학교 앞 분식집에 들어선 성준수가 ‘이게 맞아?’ 정도의 표정으로 진재유를 한 번 쳐다봤다. 떡볶이에 순대, 튀김에 어묵까지 야무지게 주문한 진재유가 맞은편 자리에 와서 앉았다. 구깃구깃하게 몸을 구겨 앉은 성준수를 건너다보고는 ‘와. 싫나.’ 한마디 툭 던지는 통에 성준수는 일단 고개를 저었다. 수저를 꺼내고 물을 따라 오는 사이 파가 건성으로 동동 떠 있는 국물이 나왔다. 아. 진재유가 고개를 들자 혀끝을 살짝 내밀었다 집어넣은 성준수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혀 데였어. 그거를 고새 데나. 몰라. 긴장했나 봐. 영 아무 소리나 주워섬기는 표정으로 성준수가 말했다. 진재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긴장이라. 아까까지만 해도 심장이 뛰다 못해 목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는데 지금은 좀 나았다. 중학생 때까지 자주 왔던 곳에다가 그 시절과는 관계도 없는 성준수를 데려다 놓고 나니까, 웃기게도.
마히다. 그히. 근데 좀 매운 것 같은데. 맞나. 어. 금방 나온 떡볶이는 기억하던 것보다 매웠다. 임만 뭘 묵든 한결같이 잘생깃네. 평소보다 붉어진 성준수의 입술을 흘끗 본 진재유가 물잔을 비웠다. 성준수가 물병을 들어 잔을 채워 주려는 걸 고개를 저었다. 슬슬 인나자. 둘 다 먹을 만큼 먹은 참이라 별말 없이 벗어두었던 겉옷을 도로 걸쳤다.
체육관으로 바로 돌아가는 대신 근처 벤치에 주저앉아 노가리를 깠다. 시간이 애매하게 떴다. 지금쯤 발표가 났을지도 모른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발만 간간이 부산스러웠다. 뭐 해. 발장난이라도 칠 셈인가, 하고 흘깃 건너다보았던 성준수가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두드렸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하고 나면 진재유가 침을 한 번 꿀꺽 삼킨다. 성준수가 잠금을 풀고 인터넷에 들어갔다. 욕지거리가 이어지는 걸 보니 아직 결과가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재유. 가자. 먼저 일어선 성준수가 체육관 대신 숙소 쪽을 눈짓했다. 진재유는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저도 인터넷을 켜볼 생각을 했다. 성준수의 수험번호도 모르면서.
결과만 말하자면 성준수는 붙었다. 합격 결과가 뜬 창을 재차 확인한 당사자가 그제야 긴 한숨을 토했고 옆에서 화면을 훔쳐보던 진재유는 멍해졌다. 실감이 잘 안 났다. 부모님으로 시작해 이곳저곳 연락을 돌린 성준수가 전화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까지 진재유는 숙소 바닥에 멀거니 앉아있었다. 재유? 부르는 목소리에 벌떡 일어난 진재유가 냅다 그를 끌어안았다. 고생했디. 축하한다. 어? 어. 고마워. 등을 토닥이듯 두드리고 놓아주자 성준수가 머쓱한지 뒷목을 문질렀다. 영 실감이 안 나네. 내도. 한마디씩 말해놓곤 잠시 조용하다가 곧 웃음이 터졌다. 크지 않은 소리로 서로를 짚고 지탱해 가며 낄낄대고 웃었다. 그렇게 한참을.
“와…… 그래 고생하더니 대학을 다 가네.”
그의 입시에 함께하지 않은 사람처럼, 꼭 딴사람이 된 기분으로 진재유가 중얼거렸다. 성준수는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재차 건네진 인사가 새삼스레 마음을 녹녹하게 만들었다.
이 새끼들은 폰도 안 걷나. 성준수가 어처구니없는 투로 의문했다. 발랄하게 날아온 기상호의 카톡을 시작으로 잇단 축하 메시지가 도착했다. 끝까지 그 개같은 말투는 안 고칠 모양인지 전하, 로 시작하는 공태성의 문자까지 확인하고 답장을 보낸 성준수가 화면을 껐다. 핸드폰을 내려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농구공이 휙 날아든다. 낮의 체육관은 유독 환하고 진재유는 그 안에서 웃고 있었다. 준수, 안 올 기가? 지금 가. 성준수가 대답하며 걸음을 뗐다. 바닥에 힘차게 부딪힌 공이 튀어 올랐다.
합격은 합격이고 연습 루틴은 루틴이라, 배가 적당히 꺼지는 대로 체육관으로 돌아온 둘은 각자 연습하다 말고 뚱딴지같이 원온원에 불이 붙었다. 묘하게 들뜬 기분이 둘을 부추겼다. 드리블하는 틈에 공을 빼낸 진재유가 그대로 슛을 꽂아 넣고, 성준수가 질세라 3점 슛을 연이어 날렸다. 니 이거 사기 아이가? 뭔 슛감이 이래 좋노? 헉헉대는 숨소리 사이로 농담을 던지면 성준수가 웃음기 없는 얼굴로도 태연하게 받아쳤다. 그런 날인가 보지. 내기할걸. 실없는 소리다. 뭐 걸 게 있나? 손에 날아들어 착 감기는 공을 받아내며 진재유는 생각했다. 오른손으로 한 번 튀기고. 와, 내한테 받고 싶은 거라도 있나. 날카로운 눈으로 공을 노리던 성준수가 대답했다. 어. 있는데.
“어?”
“안 줄 것 같아서, 내가 먼저 주려고.”
“뭔데? 애초 니가 갖고 있는 거믄 내한테 받을 필요가 없지 않나.”
그런 게…… 성준수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공을 낚아챈 다음 몸을 틀며 웃는 모습이 잔상처럼 시야에 남았다. 그런 게 있어. 진재유는 그게 뭐고, 하고 투덜거리는 대신 멍해지려는 정신을 챙겨 그를 따라 뛰었다. 대회가 끝났다고 그새 마음가짐이 해이해지기라도 했는지 눈 깜박하면 저 얼굴에 홀리려 한다. 얼굴만 잘난 게 아니라 그가 들어 있는 순간들은 지상고 패트와 매트가 보는 애니메이션 속 주인공의 장면 같았다. 진재유는 그런 애니메이션은 제대로 본 적이 없지만, 아무튼 그만큼 멋질 거였다. 혹은 그보다 더,
“니 뭐…… 내 빚진 거라도 있나?”
“아니.”
성준수가 웃었다. 진재유의 움직임을 피해 레이업을 성공시킨 그가 떨어지는 농구공을 받아 들고 주저앉았다. 좀 쉬자. 진재유도 군말 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간만에 신나는 바람에 원온원 치고 좀 과하게 뛴 것 같았다. 앉은 채로 낮게 공을 몇 번 튀기다 놓아준 성준수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드러누울까, 앉아있을까 고민하던 진재유는 가만 앉아있기로 했다. 성준수가 그를 보고 있었다. 눈을 한 번 마주쳤다가 아무렇지 않은 척 눈길을 옮긴다. 조금 후에 보니 성준수의 시선은 진재유의 뒤편 어딘가 멀리에 닿아 있었다.
“뭔지는 안 알려 줄 거고?”
“응.”
“거 치사하구로.”
뭔지 모르면 줄 수도 없다이가. 장난스럽게 꾸며낸 불퉁한 목소리에도 성준수는 굴하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먼저 줄 거라니까. 뭔진 몰라도 내가 니보단 먼저 주고 말 기다. 진재유도 따라 고집을 부렸다. 몸이 쉬는 동안 머리가 바쁘게 굴러갔다. 돈 빌려가 덜 갚은 적은 없는 거 같은데. 점마가 아들처럼 애니메이션에서 이상한 거 보고 와선 따라하려는 것도 아일 기고. 진재유가 눈을 굴렸다. 뭐, 졸업할 때 교복의 두 번째 단추를 가져간다거나…… 그런 걸 주워들은 적은 있었는데 뭣하러 가져가는 건지 정확히 알지는 못해서 그쪽으로는 추측을 관뒀다. 그사이 다 쉬었는지 일어난 성준수가 손안에서 농구공을 몇 번 던져 보다가 팔을 죽 뻗었다. 유려한 포물선이 림 안으로 정확하게 떨어진다. 조금도 무너지지 않은 폼으로 멋지게 슛을 성공시키는 성준수. 마찬가지로 자리를 털고 일어선 진재유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 문득의 충동을 따라 입을 열었다.
준수. 그거 아나.
“내 니를 좋아한다.”
농구하는 모습이 좋았다. 기억 속의 처음부터 끝까지 성준수는 농구공을 놓아 버리고 있던 적이 없다. 언제나 그랬다. 둘만이 남았던 체육관에서도 조명과 환호가 쏟아지는 코트 위에서도, 성준수는 성준수였기에. 농구화를 신고 누구보다 하얗게 빛나는 얼굴로. 그가 웃었고 정신을 차려 보니 속절없이 물들어 있었다. 그런 짝사랑을 했다. 아이, 멋지게 말할라캤더니 다 말아묵었네. 진재유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늘 니 합격도 했겠다, 어, 그래도 니랑 바다 가기 전까지는 말해 둬야 할 것 같아가…… 시원찮게 덧붙이던 진재유가 눈을 깜박였다. 준수?
성준수는 그 순간에 환하게 웃는 진재유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어, 그러니까,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내가 니를 좋아한다고.”
“내가 너를.”
“아이, 내가 니를…….”
고백에 낭만이 없다. 다 깨진 분위기 속에서 진재유가 한숨을 푹 쉬었다.
“진재유가 성준수를. 좋아한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을 긴데.”
니 국어 성적 멫이고. 아씨, 성적 얘기가 여기서 갑자기 왜 나와. 굴러오는 공을 주워 들 생각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던 성준수가 인상을 팍 썼다. 그러더니 하는 말이 이랬다. 나도 너 좋아하는데. 다소 멍청한 표정이 서로를 마주 봤다. 아 썅…… 바다 가서 분위기 잡고 말하려고 했더니 다 망했어. 그 말에야 진재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니도 망하고 내도 망하고 잘됐다. 진재유가 성준수 쪽으로 걸어갔다. 발치까지 굴러온 농구공을 주워서 가만히 섰다가, 성준수에게 패스했다. 재유. 공을 받은 성준수가 그를 불렀다.
“대학 가서도 농구 계속해.”
나랑. 같이. 주황색 공을 바라보고 있던 진재유가 얼굴을 찌푸리듯 움직여 웃었다. 니는 사귀자는 말보다 그 말이 먼저 나오드나, 하고 한 소리 해 주고 싶었는데 바로 그런 점을 좋아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 진재유가 성준수를 본다. 화끈하게 달아오른 귓가를 몇 번 문지르고 욕설로 추정되는 걸 몇 마디 중얼거리던 성준수가 고개를 돌렸다. 고백을 받고 거절하기만 해봤지 제 쪽에서 해 본 적도 고백을 받아준 적도 없어서 도통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재유의 웃는 소리가 났다. 니 지금 새빨갛다. 넌 뭐 다른 줄 알아…….
“준수 니랑 연애하는 동안은 계속할 기다.”
그렇게 아마 평생을 이 사랑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 같았다. 서투른 낯의 성준수가 약간 성급하게 거리를 좁혀 오는 동시에 진재유가 손을 뻗었다. 성준수가 미끄러지듯 고개를 숙인다. 투박하고 조금 뜨거운 손이 흰 목을 감싸고 그러안는다.
퉁, 퉁. 농구공이 굴러가는 소리가 이어진 소리를 감추었다.
*
내가 먼저 주려던 거, 결국 네게 먼저 받아버렸는데.
그기 고백이가? 그러게 내 먼저 주겠다 안 했나.
맞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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