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철학논고

[벤소피] 사상가 갑

순정철학논고 벤 X 소피아

덕질용 by 염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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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뜨거운 매미 울음소리가 귀를 울리는 여름이 되어도, 건조한 낙엽이 길거리에 나뒹구는 가을이 되어도, 새벽녘의 찬 공기가 얼굴을 감싸는 겨울이 되어도, 그리고 첫눈이 내리는 오늘도. 그는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며칠 간은 그의 출석을 걱정하던 몇몇 학생도, 이제는 마치 없었던 사람인 것처럼 그의 빈자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소피아를 향한 괴롭힘이 줄어들고 니체가 학교에 다시 나오기 시작했으며, 라이프니츠의 표절 사건에 불이 붙었다가 가라앉은 현재까지도 그의 책상은 차갑게 방치되어 있었다. 스피노자의 책상을 응시하던 소피아는 잠깐 망설이다가 라이프니츠에게 흰 쪽지를 건넸다.

"... 스피노자가 학교에 다시 나온다면 전해줄래?"

"네가 직접 전해줄 수 있지 않아?"

"그렇긴 한데. 나 당분간 결석할 거 같아서. 그 사이에 나올 수도 있잖아."

"결석? 왜?"

"... 자세한 건 말하기가 좀."

민망한 듯 소피아가 시선을 피하자, 라이프니츠는 의아하다는 듯한 표정을 거두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쪽지를 책상 서랍에 넣었다.

"담임 선생님께 말씀은 드렸어?"

"어어. 알고 계셔."

내일부터는 리케이온에 오지 않는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사계절이 한번 지나고 학년이 바뀌는 시기는 늘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다. 현실에서는 곧 졸업하고, 리케이온에서는 3학년이 될 시기. 소피아는 새삼스레 감성에 젖는 것 같아 옅은 웃음을 지었다. 창가에 위치한 자신의 자리에 앉은 소피아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첫 눈치고는 꽤 많은 양이 내려서, 운동장은 새하얀 눈으로 덮여 있었다. 큼지막한 눈송이가 계속 내렸고, 들뜬 학생들이 운동장 한쪽에서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 건지, 순식간에 여러 개의 눈사람이 완성되어 창밖을 장식했다. 다들 신났네.

"어?"

그 와중에 소피아의 시선을 끄는 형체가 있었다. 새까맣고 긴 머리를 낮게 묶고,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듯 얌전히 길 구석을 걷는 남학생. 소피아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커진 눈을 창 너머로 고정했다. 벤? 작게 중얼거린 소피아는 재빠르게 교실을 나가 계단을 내려가며, 마치 뭔가에 이끌리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숨이 찼고, 뿌연 입김이 나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서인식이 물은 적이 있었다. 스피노자에게 유독 신경 쓰던데, 혹시 그에게 다른 감정을 가진 적이 있냐고. 한지혜는 황당해서 헛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었다. 뭔 소리야, 이게.

"제가 괴롭힘 당해보니까 걱정이 좀 됐을 뿐이에요. 저야 대학생이고 쌍둥이 지구 사람도 아니지만, 걔한테는 현실일 테니까요. 고등학생이고. 현실 스피노자도... 음, 그랬잖아요."

떨떠름하게 말하는 한지혜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인식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거렸었다. 이미 낙제를 받은 벤이 이전에 받았을 괴롭힘은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고, 자신을 향한 괴롭힘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학교에 나오지 않게 된 벤에게 신경 쓰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알량한 연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사랑이란 거창한 감정은 더더욱 아니고, 우정이라고 칭하기조차 부끄러운 감정. 소피아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벤과 눈을 맞췄다. 다른 학생들이 잘 오지 않는 교정 구석에서 소피를 만난 게 의아한 듯했지만, 벤은 이내 표정을 풀고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소피, 오랜만이네."

"... 어.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아마. 너는?"

"나야 잘 지냈지. 이쪽은 무슨 일이야?"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학교는 왜 안 나온 거야?"

"그냥. 왜, 보고 싶었어?"

소피아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벤의 얼굴을 살폈다. 편안해 보이는 표정과 좀 더 길어진 듯한 머리, 이전과는 묘하게 달라진 분위기. 그래도 잘 지냈구나. 걱정에서 황당함으로, 황당함에서 안도로. 소피아는 치마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이미 쪽지를 라이프니츠에게 건넸던 것을 떠올렸다. 아, 재수가 없네.

"계속 안 나올 거야? 학교."

"아니. 내일부터는 나갈 거야. 소피는 학교 잘 다녔어?"

"뭐, 그럭저럭. 계속 결석하는 누가 신경 쓰이긴 하던데."

"다행이다. 걱정했는데."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거람. 나는 내일부터는 여기에 안 올 거고, 너는 몇 달간 비워뒀던 네 자리에 돌아가야 할 텐데. 며칠이나 결석했는지 다들 기억도 못 할걸. 그러게 왜...

"곧 수업 시작하지 않아? 추울 텐데 빨리 들어가 봐."

"너는 지금 안 들어가?"

"응. 내일 보자."

말문이 턱 막혔다. 내일 보자는 말에 알겠다고, 내일은 꼭 나오라는 마지막 인사가 나오지 않았다. 소피아는 열리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고 허탈하게 말했다.

"원망스럽지 않아?"

"학교가?"

"뭐든. 이런 학교도, 괴롭혔던 학생들도."

"글쎄. 어차피 모든 일은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일어나는데. 다 정해진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

벤은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그래서 더 신경 쓰였다. 한없이 해맑아 보이던 이전과 달리 차분해진 그의 모습에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소피아는 찝찝한 기분을 뒤로 하고 애써 웃었다.

"네가 괜찮다면 다행이지. 담임 선생님께 연락은 드렸어? 내일부터 진짜 학교 오는 거지?"

지금 이런 걸 물어서 뭐할 건데. 소피아는 쓴 침을 삼키며 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벤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늘을 바라보다가 소피아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뭔가를 속삭이려는 듯 얼굴을 가까이 댔다.

"사실 나 퇴학당했다."

"뭐? 진짜야?"

"농담이지 당연히."

그는 평소에 짓던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신나게 웃어 보였다. 소피가 너무 심각해 보이길래. 어제 담임 선생님이랑 통화 다 끝냈어. 나직이 이야기한 벤은 소피아의 등을 두어번 두드리고는 걱정 말라는 듯 교실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내일 같이 교무실 갈래? 보충수업 신청하러 가야 하는데."

"... 내일은 일이 좀 있어서."

속이 울렁거렸다. 어쨌든 마지막 날에 얼굴도 봤고, 내일부터는 학교도 나온다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건지. 소피아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수업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벤도 시간을 확인하고는 학교를 한 번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산뜻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쁠 텐데 어서 가. 소피, 내일 보자. 잘 지내."

"어어. 내일 학교 꼭 오는 거다!"

소피아는 뒤로 돌아 교실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내일 보자, 잘 지내. 말이 좀 이상하지 않나? 하지만 수업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신경은 온통 시간과 다리에 집중됐다. 소피아는 리케이온에서의 마지막 수업을 위해 교실에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다시 창가를 바라보았지만, 이제는 학생은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새하얀 눈사람들만이 소피아의 눈에 띄었다.

"언니 철학과 아냐? 나 이거 좀 알려줘."

"졸업한 지가 언젠데... 일단 보여줘 봐."

사촌동생은 추석에 친척 집에 와서도 공부를 하는 안타까운 고3이었다. 한지혜는 별 불만 없이 종이를 건네받았다. 와, 몇 년 만이지 이게. 지금 문제 풀 수나 있으려나? 자신을 믿을 수 없었지만 일단 지문을 눈으로 훑었다.

* 자연에서는 자연의 질서를 위반하는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모든 일은 영원한 필연성을 지닌 자연의 질서에 따라 일어난다. 신의 명령, 즉 신의 섭리는 자연의 질서일 뿐이다. 

아, 스피노자구나. 빠르게 다음 지문과 보기를 읽은 소피아는 샤프를 쥐고 몇몇 부분에 밑줄을 치며 설명을 시작했다.

"사상가 갑이 스피노자잖아. 사상가 을은..."

이제는 한때의 추억으로 남은 리케이온에서의 생활이 떠올랐다. 스피노자, 아니 벤은 학교는 다시 잘 다녔을까. 졸업은 잘 했을까. 상념은 동생의 말 덕분에 짧게 끝났다.

"언니. 나 이것도."

"어. 아... 이거 뭐더라. 잠시만."

딱 그 정도의 관심일 뿐이었다. 한지혜는 동생의 문제집을 빠르게 넘겼다.

* 2023년 고3 3월 모의고사 윤리와 사상 14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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