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DK, 콘크리트, 거울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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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사가 끝나면 곧바로 샤워하는 것이 그녀의 버릇이었다. 사람 무게로 묵직했던 옆자리가 순식간에 비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부산한 소리가 났다. 아마도 그녀가 옷장 문을 열고 아래에서 두 번째 서랍장에서 속옷을 꺼내는 소리일 것이다.

나는 그녀를 등지고 창밖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그녀의 1LDK짜리 오피스텔은 시가지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전면 창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이렇게 침대에 앉아 밖을 내다보면 다른 오피스텔이며 아파트며 상업 시설들이 훤히 보였다. 대부분 이곳처럼 통유리여서 불을 켜야 할 때는 사생활 보호를 위해 커튼을 닫아 놓고 살았다. 밖에서 보면 서로 분리된 커다란 정사각형 상자 속에서 각기 다른 그림자놀이가 펼쳐지는 모양새라 꽤 재미있었다. 테두리가 두꺼운 노란 배경 속에서 형태가 흐릿한 검은 덩어리들이 느릿느릿 움직이고 있었다.

“있잖아. 하나 물어봐도 돼?”

평소처럼 곧장 욕실로 가지 않고 웬일로 그녀가 말을 걸었다. 나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앉은 채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영태 씨 알지? 그 사람이랑 무슨 사이야?”

타인의 입으로 그 이름을 듣기는 오랜만이었다. 나도 모르게 긴장해 버린 까닭에 허벅지 위에 떨어뜨린 손바닥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그녀가 묻기 전과 다를 바 없이 느리게 쿵쿵대는 심장박동이 ‘차라리 잘 됐어’라고 말을 걸어왔다. 어쩌면 나는 그녀가 먼저 그 사람에 관해서 물어주기를 기대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문득 눈을 돌려 침대 머리맡에 붙어있는 베드테이블 쪽을 힐끔거렸다. 테이블 위에는 손바닥 두 개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 거울이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차가운 거울 표면 위로 그녀가 보인다. 조명을 켜지 않아 어두운 방을 배경으로 그녀의 몸은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전에 사귀었어.”

생각보다 더 담담한 어조가 나온 것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는 잠시 ‘내가 이제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것인지’ 의문을 가져 보지만 곧 그만두었다. 더 이상 감정을 나눌 수 없는 상대에게 이런 의문을 가지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시체에 숨을 쉬라고 하는 꼴이나 다름없었다.

“그럴 것 같았어.” 그녀는 그다지 놀란 목소리가 아니었다.

“눈치채고 있었어?”

“닮은 부분이 있거든.”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녀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기뻐할 때 짓는 표정이라던가, 몸을 다루는 방식이라던가. 자기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내가 그 사람의 전 여자친구라는 거.”

의문이 아니라 확신하는 어투였다. 나는 조용히 “응”하고 대답했다. 등 뒤에서 숨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숨 같기도 하고, 웃음 같기도 한 소리였다.

“알고 있었다기보다, 애초에 그래서 날 만난 거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녀와 나는 침묵 속에서 다시 각자의 시공간으로 분리되어 들어갔다. 무기질의 콘크리트가 오피스텔이라는 거대한 직사각형을 칸칸이 나누듯이 그녀와 나 사이에도 보이지 않는 벽이 세워져 있었다. 의도적으로 눈을 돌려야만 보이는 거울 속 그녀의 흰 육체만이 그녀와 내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증거였다.

“너를 사랑하면서,” 정적을 깨고 내가 말했다. 그새 목이 잠겨서 작게 헛기침해야 했다. 몇 단어를 고쳐서 앞서 했던 말을 반복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를 사랑해야만 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어. 그래서였어.”

반년 전 영태를 잃은 후, 둘이 살던 아파트 침대에 누워 헤드 수납공간에 덩그러니 놓인 영태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나는 한 가지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영태를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육체가 더 이상 이 세상에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 육체 같은 것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 그깟 무의미한 개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제 그와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 열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건 그의 존재와 더불어 사랑을 포함하여 그와 나 사이의 모든 것이 완벽히 말살되었다는 뜻이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 나는 어쩔 도리 없는 절망에 빠졌다. 한 달쯤 전 이 도시에서 우연히 그녀를, 다시 말해 영태를 사랑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만난 후에야 온몸을 짓누르는 비참함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다시 눈을 돌려 테이블 위 거울을 바라보았다. 작은 직사각형 위에 여전히 그녀가 아른거리고 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전부 솔직하게 말해도 된다고 허락하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것은 허락 같은 게 아니었다. 단언컨대 그녀에게만은 내 모든 것을 기꺼이 꺼내 보여야만 했다. 거울을 통해 서로를 보여주는 것으로 그녀와 나는 존재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그녀와 나를 이어주는 매개체로서 불완전하게나마 영태가 존재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녀와 나는, 그리고 그녀와 나와 영태는 이 순간 연결되어 있었다.

“그 사람은 이제 없으니까,” 물론 그녀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그 사람의 흔적을 사랑하면서 그 사람을 사랑하고 있는 거야.”

“…….”

“미안. 아무래도 이런 건 이상하지?”

“당연히 이상하지.”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가 즉답했다. 나는 자조 섞인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이상해서 안 될 건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이상하리만치 확고했다. 마치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 예를 들면 그녀 자신이나 그녀가 사는 세계를 향해 외치는 것만 같았다.

조금 전보다는 힘이 빠진 목소리로 그녀가 다시 한번 말했다.

“세상에서 두 명 정도는 좀 이상해도 돼.”

나는 문득 그녀가 말하는 이상한 두 명이 나와 그녀인지, 나와 영태인지, 혹은 영태와 그녀인지 그것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다른 누군가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내가 무심코 소리 내어 물을 뻔한 그때, 바닥을 가볍게 스치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더니 거울 속 그녀가 모습을 감추었다. 혼자가 된 나는 존재하지 않는 존재가 되어 입을 다물었다.

저 멀리서 물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창밖으로 보이는 상자의 수가 줄어들어 있었다. 개수를 세어보려고 손가락을 하나씩 접다가 곧 그만두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몇 분 전까지 세 사람이 누워 있던 침대를 더듬었다. 완전히 열기를 잃은 차가운 이불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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