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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보콜] 사랑이라 함은,

용인된 탐욕이다.

엘소드 by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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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디에는 역겨움이 사랑인 줄로만 알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식도가 따끔거리고. 목구멍이 간질거려서 무엇이든 뱉어내고 싶고, 뱃속에 다지류가 기어다니는 감각. 따스함이 들불처럼 번져, 몸안을 태워버릴 듯한 감각이 드는 것. 그럼에도, 사랑을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고. 보이드 콜러는, 확신한다.

눈을 깜빡이는 행위는 무의미하다. 구태여 인간의 형상을, 형태를 갖출 이유도 없다. 공허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이 덧없는 것.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 그저 존재하고, 사라지고. 무한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할 뿐인 것들을 지켜보는 자리. 그곳에 나를 올린 건 너이지 않나.

호르디에는 아크라브를 바라본다. 그가 눈치채고, 자신이 있는 곳에 오기를. 드물게 어리광이 부리고 싶어졌다. 아니, 투정일까? 호르디에를 변화시키는 것은, 늘 아크라브 뿐이었기에. 아크라브는 이것이 변화임을 알지만, 명명은 하지 못한다.

“호르.”

“…”

마주보는 시선은, 흐린 동시에 빛이 난다. 선명하고, 순수한 감정으로. 그는 빛나고 있었다. 저걸 볼 때마다, 나쁘지 않아서. 눈을 마주하고, 가만히 바라본다. 아크라브는 호르디에와, 그가 자신을 위해 남겨준 조각이 자신의 눈을 마주본다는 행위의 의미를 안다. 네가, 날 부르고 있구나. 틈 속으로 자신의 몸을 던져넣는 것은 순간이다. 자신의 신이 자신을 찾는다는데, 그 외에 무엇이 중요할까.

“보고 싶었어, 호르.”

“… 그래?”

“그럼. 나는 늘, 언제나. 너를 보고 싶어하는걸.”

둥둥 떠다니는 몸은 유일한 손님을 위해 형태를 갖춘다. 빙글, 아크라브의 주위를 돌며 꼬리로 그 몸을 가볍게 감싼다. 조심스러운 손길로 꼬리를 쓰다듬는 아크라브는, 기쁨보다는… 아, 그래. 황홀해 보였다. 비늘의 방향대로 쓸어 보다가, 서늘한 몸체에 제 뺨을 부빈다. 미지근한 온도가 전염된다. 자신만이, 오직 자신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변화다.

“아크라브.”

“응, 호르.”

“아크.”

“응. 나 여기 있어, 호르.”

“일리세오.”

“… 나의 신.”

황홀이다. 몸을 바르르, 떨며 흐리던 눈이 선명해진다. 오직 하나밖에 바라볼 것이 없는데, 더이상 초점이 흐릴 이유가 없지 않던가. 활짝 웃는 얼굴을 관찰하던 호르디에는, 아크라브의 얼굴을 따라해본다. 어색하지만, 얼굴이 경련하지는 않는다.

“웃는… 거야?”

“네가 웃으니까. 왜, 내가 웃으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너무, 좋아서. 기뻐서 그랬어. 아아… 여전히 아름답구나.”

“여전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꼬리의 끝이 살랑인다. 이 작은 몸짓이 태풍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안다. 하지만, 그게 뭐 어때서? 그 태풍에서 자신은 벗어나 있을 텐데. 제 신을 끌어안고, 그가 만들어내는 재앙을 유흥 삼아서 그와 영원히, 단 둘이. 존재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호르디에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요구하지 않는 한. 배가 부르다. 아니, 배가 고프다. 그의 애정을 알지만, 더. 더, 많이. 증명받고 싶다. 닿고 싶다. 너에게.

아크라브는 자신의 신에게 팔을 벌려본다. 이해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게 어린 아이를 닮았다.

“안겨줘. 내 품에.”

“왜 네가 오지 않고?”

“네가 나를 선택해줬으면 해서.”

“너 말고 선택할 것도 없는데?”

“그 점까지, 알고 있어.”

누구보다, 잘.

일리세오는 호르디에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확신한다. 일리세오는 보이드 콜러가 자신을 특별히 여김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다. 부족해. 더. 더, 많은 것을 그에게 내어주어야 해. 조금이라도, 그에게 무언가를 내어달라 빌기 위해서는 자신의 전부를 거는 게 마땅하지 않겠는가. 자신에게 안긴, 자신의 품에 기꺼이 뛰어든 사랑을 향해 속삭인다. 일평생 뱉어보지 않은, 그의 신을. 그 이름을. 불경을 저지른다.

“콜러.”

“… 왜 그래, 아크?”

일리세오의 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상대가 원하는 것과 별개로 자신의 전부를 내어주는 것. 그 중에서 호르디에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기껍게 그에게 내어주는 것. 자신의 애정을 증명하기 위해 전부를 드러내는 게, 그의 사랑이다. 뒤틀리다 못해 헤집어진 속내도, 지독하게 눌어붙은 욕망도. 진득하게 입을 벌려 뚝. 뚝 흐르고 마는 탐욕도. 어쩌면 그가 싫어할 영역까지 전부 내어주고서도, 감히 안주하지 못한다.

“키스해도, 될까?”

그래서 그는, 불안이 곧 사랑이었다. 호르디에는 좋은 짝이었다. 언제나, 그의 전부를 내어주게 하니까. 자신을 영원히 헤집고, 뒤집어서. 자신의 전부를 까뒤집고서도 그를 갈구하게 만들기에. 바들거리는 손끝부터, 힘이 들어가 단단해진 팔까지. 온전히 제 신을 끌어안은 채, 일리세오는 기다린다. 시선이 마주하고, 그 입이 열릴 때를.

“기다려.”

말을 잘 듣지만, 결국 그는 짐승이다. 짐승에게 내리는 첫 가르침의 내용은 늘 뻔하지 않은가. 콜러는 툭, 허공을 가볍게 발끝으로 튕긴다. 일리세오를 내려다 보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고. 부드럽게 그의 몸을 제 꼬리로 감싸다가 그 끝을 세워 간지럽히며… 결국에는, 입을 겹친다. 허락이다. 그를 자신이 온전히 지배하고 있음을 알지만, 가끔은. 그처럼, 답잖게 증명을 원하는 순간도 온다.

일리세오는 눈을 부드럽게 휘며, 입술을 가볍게 우물거린다. 부드럽고, 서늘한 몸. 가장 그의 취향에 맞는 몸이, 품에 안겨있다 아니, 반대다. 그의 몸이 취향인 게 아니라, 일리세오의 모든 취향이 보이드 콜러라는 말이 옳았다. 둘은 온전히 마주한다. 맞닿는다. 틈 없이 붙어서, 사랑을 속삭인다. 소리가 되지 못한 말은 입모양으로 전해진다.

제 주인이 간지러움을 느껴 물러서기 전에 혀를 내밀어, 그 입술을 두드린다. 조심스러운 몸짓이다. 당연히 허락해줄 것을 알면서 굳이, 굳이. 다시금 증명받고자 한다. 증명받는 순간이 너무나 좋아서. 그가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이 달아서. 콜러는 그것이 자신의 말 한 마디면 사라질 버릇임을 안다. 그 말을 내어주지 않는 건, 그냥… 귀여워서. 자신에게 매달려오는 것이 퍽 사랑하기 적당해서. 가여워한 적은 없었다. 늘 자신의 사랑을 받는 이가, 가여울 것이 어디 있다고. 콜러는 눈을 내리감고, 길을 열어준다. 그에게는 언제나 열려있던 곳이다.

이물질이 침입하는 감각은 언제나 익숙해지질 않는다. 완전하던 공허가, 인간에게 침범당한다. 침입자는 부드럽게 유영하며 그에게 동참할 것을 유혹한다. 나와 함께해달라고, 간원한다. 신은 자비롭게 그 요청을 받아들인다. 파고든 혀에 제 혀를 얽어내고, 혀끝으로 여린 살을 간지럽힌다. 인간과 다르게, 공허는 돌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부드럽게. 그 혀를 온전히 받아내고 자신의 안으로 파고들도록 길을 열어준다. 목이 간질거린다. 감정을 토해내고만 싶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 몸이지만, 사고가 짧게 끊어진다. 원했다. 무엇을?

아.

호르디에는 일리세오의 목을 감싸안는다. 제 쪽으로 더욱 당기고, 그 몸에 매달리듯 꼬리며 팔을 얽어낸다. 도망치지 못해. 넌 내 신도니까. 내 것이니까. 도망쳐선 안돼. 그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혹은 자신 역시 같은 마음이라 애가 닳았는지. 일리세오는 콜러를 마주안는다. 그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설에 제 설을 얽고. 뱉어내는 모든 것이 당신에게로 향할 것을 알면서, 끝없는 사랑을 약속한다. 뱉어낸다. 전해낸다. 그렇게, 자신의 전부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내가 네 곁에 있어. 나는 지금 너와 완전히 이어져 있어…

이대로라면, 죽어도.

“일리세오.”

“… 으응. 후. 조금은, 숨이 차네.”

“넌 인간이니까. 당연하지.”

생각을 끊어내는 것은 콜러의 단호한 부름이다. 마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벌이라는 듯 얽었던 팔을 풀어내고, 콜러는 몸을 뒤로 물린다. 일리세오는 아쉬움에 콜러를 바라보지만, 흥. 하고 고개를 돌리는 몸짓은 여실한 투정을 나타낸다. 느리게 숨을 고르고 나니, 다시 꼬리가 몸을 감싸온다.

“오늘 일정 있어?”

“으응… 그다지. 내부 행사라던가, 쓰잘데기 없는 것들은 뭐가 있던 것도 같은데… 그런 것들보단 네가 더 중요하니까.”

“뭐, 그럴 것 같았지만.”

흐음. 고민하는 시늉은 난감함과는 거리가 있었다. 콜러는 어떻게 하는 게 더 재미있을까, 하는 고민 중일 뿐이었다. 재미를 느끼는 주체의 구별이야말로 무의미했다. 둘 중 하나가 즐거우면, 나머지 하나도 즐거워지는 것이 그들의 관계였으니까.

일리세오의 맹목적인 눈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든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신의 선택이다. 무엇이든 달갑지 않을 이유따위는 없었다. 하지만, 콜러는 이제 대부분의 자극에 무뎌졌다. 한 층 유리되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신이니까. 더는 그 세계에 속한 것이 아니니 당연한 이야기지.

“내 껍데기 말이야.”

“응?”

“만족해?”

“나는 언제나 만족하고 있는걸. 모든 순간, 네 곁에서.”

환하게 웃는 일리세오의 얼굴은 분명 거짓은 아니었다. 거짓이 아니라는 게, 반드시 진실이라는 것은 아니었다. 콜러는, 자신이 잠시 미뤄둔 이야기를 꺼낼 때가 됐음을 직감했다. 미뤄둔 이유도 별 것 아니었다. 일리세오의 애정이 좋아서. 그 세계에서 일리세오를 제외하곤, 의미 있는 것이 없어서. 더 이상 자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 뿐이라서.

“갑자기 그건 왜? 네 육체잖아. 소중한.”

“그거, 날 그 세계에 묶어두려던 수단이었잖아. 언제나 나와 함께하고 싶어서. 아니야?”

“후자는 맞아. 하지만, 전자는…”

“뭐, 네 의도가 아니었어도 상관 없어. 결론적으로 내가 네 곁에 묶인 건 사실이니까.”

짐승에게 사슬을 채운 것과 다르지 않은 행위지만, 콜러는 화가 난 것이 아니었다. 일리세오의 부탁이었으니까.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진실이니까. 그런데, 그 사슬을 다른 것들이 이용하려 드는 건 다른 이야기가 시작된다. 분노는 아니지만, 즐거운 감정은 아닌 것이 콜러 안에 넘실거린다. 일리세오로 진정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것이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터지기 전에 뱉어내는 게, 콜러의 최선이다. 감정에는 미숙했으니 이것이 최선인지 차악인지는 모른다.

“내가 둘이 되면 어떨 것 같아, 아크?”

“온전히, 절반으로?”

“흠… 아마도? 어쩌면 둘 다 온전하게. 일지도 모르고.”

“같은 곳에 존재해?”

“응. 그렇겠지.”

수수께끼같은 문답도 싫진 않았다. 그냥, 힌트를 던지는 것이다. 어린 신도가 자신이 던진 조각들을 보고, 그 끝의 신에게 도달하도록. 빵 조각을 흘리는 셈이다.

“둘 다 진짜야?”

“아니. 하나는 가짜야. 복제본일 뿐이지. 그것에도 너와 함께한 기억부터,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있다고 가정하면… 너는 어떻게 할래?”

이것은 시험이다. 자신의 신도를 향한 시험. 네가 나를 부인한다면, 나는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너를 박제해버리겠지. 나를 가장 사랑하던 너로.

가짜에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난 너만 있으면 돼, 호르. 이 말은, 난 네가 필요하다는 거야. 진실된, 너. 오롯하고, 진실되었으며. 온전한, 너만이. 나에게 의미를 가져.”

“그 답에 가식은 없어야 할 거야, 아크.”

“나는 언제나 너에게 진심만을 바쳐왔는걸.”

그 의심이, 피어난 시험이. 사랑을 단단히 만들 지어니, 일리세오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그를 부정할 리가 없지 않는가. 활짝 웃는 얼굴은, 해맑음보다는 진득한 것이 뚝, 뚝. 떨어졌다. 휘어진 눈꼬리에서는 애정이, 꺾여 올라간 입꼬리에서는 집착이. 그렇게 뒤섞인 사랑이. 그의 신을 향해 쏟아진다. 내 사랑을 의심해줘. 내 사랑을 시험해. 그렇게, 당신이. 그대가 받는 사랑이, 나의 신앙이. 온전해지기를.

바람을 끝으로, 시야가 암전된다. 알 수 없는 빛이다. 눈이 부셔서, 질끈 감아버리면 몸을 받쳐주는 무형의 힘이 있다. 일리세오는 저의 신과 함께하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 무엇도…


일리세오가 눈을 뜬 곳은, 그에게 익숙한 공간이다. 비커와 플라스크, 약품을 보관하기 위한 갈색 유리 통이 선반에 가득한. 틈 속이 아닌, 틈의 밖에선 가장 오래 머물곤 하는, 실험실이다. 교단의 실험실에 오지 않은지도 꽤 되었지, 아마.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아크라브님, 37번 실험실에서의 호출입니다.”

“… 왜?”

“실험체의 통제 목적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약물 및 처치를 위한 재료는 준비되어 있습니다.”

“갈게.”

의자에 걸쳐둔 실험용 가운을 입고, 발을 옮긴다. 휴게실은 보통 20번대의 끝자락에 있으므로, 윗층으로 이동해야 할 테다. 의식을 찾은지 얼마 되지 않았어도 발은 답을 아는 것처럼 익숙하게 움직인다. 37번이라면, 실험의 성공이 가장 높다고 점쳐지는 개체가 자리하는 곳이다. 이번 담당자는 누구지? 아크라브는 눈을 가늘게 뜨며 명패를 샅샅이 살핀다.

실험체 분류 코드, S-01-412.

담당자 명, 아페 트라운, 크리스, 루크 맥캐넌, 렉시아 리움, 마리아 랙, 윌 파시안, 로스트, 존 도.

끝없이 이어지는 취소선 끝은 빈 자리다. 그곳에, 누군가의 이름을 적으면 된다는 듯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관리가 엉성하군. 한 마디정도 해야겠어. 그런 생각으로, 아크라브는 자신의 카드를 인식시키고 안으로 들어선다. 실험자는 없고, 실험체만 있다. 얼마나 관리가 헤이해진 건지. 소리에 힉. 하고 숨을 들이키는 어린 것이 존재한다.

“괜찮아. 난 널 해치지 않으니까. 이런, 울었니? 잠시만…”

아크라브가 손수건을 찾는 동안, 실험체는 사슬 소리를 내며 이동한다. 족쇄 탓이겠지. 깨끗한 손수건을 꺼내, 실험체의 얼굴을 닦아주려는 순간. 아크라브는 당황한다. 실험체가 자신에게 다가와 있어서? 아니다. 보기 드물게 새하얀 머리카락이라서?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눈이, 자신의 신과 같아서. 아크라브는 손수건을 든 채 굳는다. 실험체는 조심스럽게 아크라브에게 손을 뻗는다. 실험체가, 입을 연다.

“아크.”

“… 호르?”


아크라브는 퍼뜩, 눈을 뜬다. 눈꺼풀이 경련하고, 손끝이 떨린다. 품안에는 익숙한 먹빛이 보인다. 연인이다. 제 연인과 이어진 줄. 이곳이, 틈의 밖임을 보여주는 증거. 덜덜 떨리는 건, 손끝만이 아니었던 탓인지 호르디에를 깨워버렸다.

“왜 그래?”

“… 아. 아무 것도, 아니야. 잠깐… 악몽을 꿨나봐. 괜찮아, 별 거 아니야. 더 잘까? 아직 새벽이야.”

“… 네가 일어나 있는데, 굳이 내가 이 몸을 떠날 이유는 없는걸. 잘 거야?”

“으응… 그래야지. 몸을 망치지 않으려면.”

“눈을 감아, 일리세오.”

평온 속에 자리한 애정이, 아크라브의 눈을 감게 만든다. 그 위로 미적지근한 손이 어둠을 만들어낸다. 시야가 가려지고, 호르디에의 작은 흥얼거림과 함께. 느린, 입맞춤이 얹어진다. 아랫입술을 감싸듯, 품안에서 고개만 든 채로 입술을 겹친다. 틈 너머에서 보내는, 꿈을 향한 인도다.

“잘 자. 부디, 현실같은 꿈을 꾸길.”


아크라브는 기시감을 느낀다. 여긴, 아. 그래. 내 연구실이다. 익숙한 설비에 책상 위를 보면, 실험일지가 한가득이다. 또 보고서를 작성하다가 잠들었나. 마른 세수를 하고, 언젠가 걸친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어둔다. 새 커피를 내리고, 호르디에를 찾아 고개를 돌린다. 본채에 있으려나. 실험실을 집과 함께 만들자는 건 둘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잠시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호르.”

부름에는, 늘 틈을 열어 화답해줬는데. 열리지 않는 틈에 당황하기도 잠시다. 빼꼼, 본채와 이어진 통로에서 고개를 내민 호르디에의 머리카락이. 검지 않았다. 하얀 빛이다. 조금은 흐트러진 모습의 호르디에가, 입을 열어서 말을 뱉어낸다.

“왜 그래, 아크?”

“호르, 어디에… 있었어?”

“마당에. 텃밭을 가꾸고, 잠깐 운동할 겸 뒷산에 다녀왔어. 벌써 단풍이 들었더라. 널 보여주고 싶어서,”

다가온 호르디에의 몸에서는 시원한 바람의 향과, 은은한 풀의 향. 미약한 흙냄새와, 벽난로의 따뜻한 장작이 타들어가는 냄새 같은 것들이 온통 뒤섞여서. 낯선 향이 되어버렸다. 평온과 그리움을 자극하는 향따위, 아크라브에게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이런 게 아니다. 내가, 사랑한 것은.

텅 빈, 죽음의 향이다.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부드럽고 따뜻할 손을 내치고. 아크라브는 달려나간다.

“호르. 호르! 어디에 있어? 콜러!”

나의 신. 나의 연인. 나의 사랑. 내가 만들어낸, 가장 아름다운 죄악이여.

너는 어째서, 내게 대답하지 않는가.

달리는 걸음은 숨이 벅찰 정도로 위태롭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서, 생활감이 느껴지는 오두막을 박차고 숲을. 어둠을 향해 내달린다. 춥고, 습하고. 어둑한 곳을 향해. 가장 죽음과 맞닿아있을 곳을 찾아서.

아크라브는 숨을 몰아쉰다. 호르디에가 사라졌다거나, 없다는 것은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그는 이 세계에 존재한다. 분명, 이 세계의 에는 그 역시 존재할 것이다. 다만, 무언가. 그가 날 인지하는 것을 방해하는 게 존재하겠지. 그렇다면, 그걸 해결하면 그만 아닌가?

소리내어 외치는 걸로는 부족했다. 그것보다, 큰 것이.

아. 사람을 넣어 만들었다는 종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것을 울린 건, 생명을 담은 수 십, 수 백 번의 내리침이었다. 이 산에 종은 없지만, 그의 신체보다 단단할 것은 널리도록 많았다. 그러니.

쿵. 쿵. 쿵. 쿵. 쿵. 쿵……


아크라브는 눈을 뜬다. 새하얀 백열등이 눈을 아프게 찌른다. 옅은 찡그림에, 손이 다가온다. 새하얗고, 창백한 손. 흉 하나 없는 맨손에 이어진 손목은, 주삿자국 투성이다. 정확히 정맥에만 나있는 걸 보면, 약물 투여의 의도임이 분명한 흉터다.

“일어났어, 아크? 걱정했잖아.”

“… 호르?”

“어제 또 무리라도 한 거야? 네 탐구심도 좋아하지만, 무리하진 말라고 했잖아.”

눈부심에 미간이 옅게 찡그려지자마자 빛을 가리는 배려부터, 옅은 웃음. 애정이 담긴 눈과, 상냥해 보이고자 애쓰는 목소리. 조심스럽고 느린 몸짓. 그리고, 명백한 실험체의 옷. 그 얼굴이, 눈이. 호르디에의 것만 아니었다면, 아크라브는 기꺼이 당장이라도 박차고 일어났을 테다. 자신이 방금까지 베고 있던 게 그의 무릎이건 뭐건, 호르디에가 아니라면. 그것은 아크라브에게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못했다. 눈매가 매서워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 누구야? 너.”

“글쎄…”

“허튼 짓 하지 마.”

세검이 그의 목을 향해 날아든다. 이미 주사 자국이 몇 개고 나 있는 경동맥에 날을 더욱 들이미는 건, 아크라브는 그것을 걱정하지 않음을 드러낸다. 실험체의 눈이 굴러서, 아크라브의 얼굴을 느리게 더듬는다. 입술을 달싹이다가, 피가 한 방울 흐를 때가 되어서야 소리가 새어나온다. 신음을 대신하듯, 속삭이는 듯한 어투다.

“나도, 잘 모르겠어. 아크. 나는 그냥, 눈을 떴을 때부터 이 실험실 안에 있었어. 그 이전의 마지막 기억은, 네가 날 끌어안고 달래는 거고… 사실, 여기에 있던 게 너무 오래돼서 기억이 뒤죽박죽이야.”

“네 이름은?”

“호르디에.”

“… 거짓말은 그쯤 해두지? 아크라고 날 부르는 것도 그만둬. 일리세오. 그걸로 충분해.”

날 선 대응에도 실험체는 웃음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무해함을 드러내고자 양 손바닥을 드러낸 채 시선을 마주한다. 그 눈에, 두려움은 없었다. 다만, 상처받은 설움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그래도, 일리세오. 내가 선명히 기억하는 것도 있어. 네 손으로, 내게 약물을 주입하던 순간이야.”

“… 난 실험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됐어. 내 마지막 실험체는 너같은 실패작도 아니고.”

“난,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 아니야, 아크. 아, 일리세오. 나는, 실패하지 않았어. 난 혼돈을, 이 힘을. 이제 다룰 수 있다고.”

실험체가 불안정해짐에 따라, 공기가 흔들린다. 공간이 진동한다. 눈물이 맺히는 걸 본 아크라브는 몸을 일으킨다. 실험체의 눈물이 떨어지던 공간이 깨진다. 눈물은 땅에 떨어지기 전에 사라지고, 균열이 벌어진다. 이다. 저건, 분명. 요란하게 울리는 사이렌도, 적색 경고등도 머나먼 것처럼 보인다. 틈 사이로 보이는 광활한 공간만이, 아크라브의 시야에 가득 찬다.

“호르. 거기에 있어? 호르!”

“난 여기에 있어, 아크. 나는, 여기에 있다고.”

“나 여기에 있어. 아크.”

“저건 거짓이야. 저런 것에게 넘어가지 마!”

틈이 점점 벌어진다. 더욱 커진 틈은 통로가 되어, 주저앉아 있던 실험체가 웅크려 절망할 공간을 만들어낸다. 틈 속에서, 보이드 콜러가 날아온다. 평소의 유유자적하던 모습과는 다르다. 조금은 조급히, 눈 깜짝할 새에 다가와서 아크라브에게 뻗어지는 실험체의 손을 쳐낸다.

제 것이라는 듯, 꼬리로 아크라브의 몸을 감싸고, 팔로 목을 감싼다. 뱀에게 먹히기 직전의 사냥감같은 꼴이지만, 아크라브는 호르디에의. 보이드 콜러의 이러한 애정이 너무나 달아서. 입을 틀어막고, 몸을 떤다. 헛구역질이 나올 만큼 기껍다. 시야가 일그러질 만큼 행복하다. 자신을 끌어안은 몸을, 그것의 형태가 뭉개질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끌어안을 만큼, 사랑스럽다.

“아, 아아. 호르…”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진짜란 말이야. 내가!! 네 손으로 세례한 건,”

“저게 아니지.”

훙. 꼬리의 움직임이 바람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착각한 순간, 방금까지 외치던 것이 한 줌의 진액이 되어 뭉개진다. 아크라브는 움켜쥐고 있던 몸에 제 몸을 더욱 붙이고, 그 몸을 한껏 끌어안는다. 온전히 형상이 겹쳐졌어도 부족했다. 그의 힘이 가득한 이 공간에 존재하는 것으로는, 이제 채워질 수 없었다.

“아아, 호르. 나의 신.”

서늘한 몸체에 뺨을 부빈다. 체온은 전염되기 마련이다. 자신이 더 서늘해진다 해도 상관 없었다. 그의 거대한 애정이. 호르디에가 자신에게 애정을 준다. 특별한 것 취급을 해준다. 사랑을, 삶을. 사사해준다. 그것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더라도 좋았다…

“왜 그것의 손을 쳐냈어?”

“뭐 말이야?”

“방금 내가 없앤 거 말고. ‘나’랑 닮았던 것 있잖아. 머리가 더 희었지만.”

“가짜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난 그런 것에게 관심 없어. 말했잖아, 호르.”

“네게는, 나만이.”

“오로지, 의미를 지닌다고. 기억해줬구나. 기뻐, 정말로.”

희열에 목소리가 떨린다. 등을 감싸쥔 손은 얼마 없는 살가죽을 움켜쥐고, 끌어안는다. 그 안을 파고들 수 있었더라면, 아니. 껍데기였다면 진즉 내장까지 파고들 만큼의 힘이다. 콜러는, 틈을 연다.

“인사해. 이제 다신 못 볼 모습이니까.”

열린 틈에는, 잠시나마 함께했던 호르디에가 존재한다. 새하얀 머리의 호르디에. 아크라브를 기다리며 콧노래를 부르고, 식사를 준비하는. 휙. 열린 틈에서 고개를 돌리고, 아양을 부리듯 보이드 콜러에게 뺨을 기댄다. 감싸안고 있는 서늘한 팔에 뺨을 얹고, 온전히 몸을 내어맡기는 건 뱃속에서 나비가 부화하듯. 간지럽고, 답답하며, 달콤한 일이었다.

“필요 없어. 저런 건. 내게 필요한 건, 나의 신. 나의 연인, 보이드 콜러. 당신뿐이니까.”

“세 번의 부정이 아닌, 세 번의 호명이네.”

“응. 시험은 만족스러웠어?”

“닭이 세 번 울었어.”

“나를, 선택해줄래?”

“나를 선택하여 받아들인 신도에게, 사랑을 베풀지 못할 건 없지.”

입맞춤이 내려온다. 고개를 한껏 젖힌 일리세오의 목이 꺾이지 않는 것은, 그 주인이 일리세오의 몸을 온전히 감싸안은 덕이다. 이마, 미간, 콧잔등, 입술. 겹쳐진 입술 사이로, 혀가 파고든다. 서늘하고, 부드럽게 일리세오의 혀를 감싸안은 혀는 온전한 허락을 내린다.

일리세오는 그 혀를 감싸고, 간지럽히고. 역으로 뻗어 제 연인의 입을 마음껏 헤집는다. 자신보다 작은 입 안의 공동에서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여린 살점을 문지른다. 온전히 인간의 형상과 동일하게 구성한 것은, 자신을 위함을 알고 있다. 여린 점막에서 새어나오는 액을 달게 받아 마신다. 호흡이 일정한 보이드 콜러와 달리, 일리세오의 숨은 점점 거칠어진다. 들이마시는 주기가 짧아지자, 콜러는 일리세오의 눈을 가린다. 평소라면 거기에서 멈추고, 기꺼이 그만뒀을 일리세오는 욕심을 부린다. 조금만 더. 조금만. 온전히 겹쳐진 인영이, 결국 하나가 되어 공허가 충족될 때까지…

꼬리의 끝이 툭. 툭. 일리세오의 척추 끝을 건드린다. 어쩌면, 그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그 뿌리가 있었을 자리를 두들긴다. 그 박자에 맞춰 콜러가 넘겨주는 숨을 삼킨다. 일리세오는 탐욕스럽게 숨을 삼키며, 그 몸을 끌어안는다. 혀와 혀가 얽힐 뿐인 행위가 너무나 좋아서. 한껏 달뜬 몸이, 피부가 붉어지는 것으로 티가 난다. 호흡을 전부 삼키고도 만족할 만큼 입술을 겹치고, 여린 살을 한껏 문지르고 나서야. 일리세오가 입술을 떼어낸다. 은사가 진득하게 이어진다.

“사랑해. 사랑해, 나의 신.”

“… 나도, 사랑해.”

은사가 끊어지는 것은, 작은 입맞춤이면 충분했다. 사랑이라는 것은, 공허를 가득 채울 만큼의 지독한 탐욕인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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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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