𝐑𝐨𝐰𝐞𝐧 𝐀𝐳𝐚𝐫𝐢𝐚𝐡 25

들고 있는 상자에 이름 잊은 것들을 넣는다. 로웬은 차분하게 제 몫의 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쌓인 물건들은 대다수 쓸모를 잃은 것들이었다만 정리하며 모든 물건의 추억을 돌아보기 시작한 로웬에게는 버리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것들인지 대다수 것이 제자리로 돌아갔다. 이런 식으로 오늘 온종일 정리했지만 오 년 동안 쌓인 것들을 정리하자니, 동시에 전선에서 자리를 비우자니 일이 제법 많았다. 떠나기 직전인 내일까지도 꽤 바쁠 것 같다. 차라리 전선에 서는 게 낫지. 계속해서 숙여댄 허리 탓에 퉁명스럽게 생각하다가도 아직 다 아물지 않은 옆구리의 상처가 생각나면. 다시 훅, 하고 고통이 밀려와 눈을 찡긋 찌푸릴 때에 익숙한 얼굴이 다가와 다정하게 물었다.

“ 로웬. 시체로 돌아오는 건 아니지? ”

일년 넘게 지속한 악몽의 격류가 아직 사라지지를 않아서 침잠해버리고만 만 밝은 낯. 그 덕에 주변 동료에게 참 많은 관심을 받았다. 좋은 사람들이었다. 아름답지 못한 나날 속에서 저를 신경 써주는 그 모든 말에 담긴 진심이 거짓으로 보이진 않았다. 저를 피범벅인 상태로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없다며 출발하기 이틀 전부터 쉬게 해 준 것도 그들의 배려였다. 물론 그럼에도 어린 날처럼 그들에게 무수한 정을 줄 수는 없었다, 필히 그중 몇은 악몽이 되리란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그 마음이 고마웠다. 농담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 죽어봤자 시체 치우는 일이나 늘겠지. 민폐니까 별로. ”

“ 밥은 먹고 다녀? 피를 그렇게 흘리더니만 전보다 마른 것 같다? ”

“ 왜? 옷맵시가 좀 살아? 중요한 자리에 가니까 겸사겸사 잘 보이면 좋지. ”

“ 말을 말자. ”

무너진 웃음과 기가 차다는 듯한 대답, 억지로 일그러뜨린 표정. 그렇게 답해도 참 고맙고 이제는 안락한 말이었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에 이렇다 할 친구나 멀리 떨어져 가족도 없는 저를 위해주는 건 오랫동안 전선에서 마주한 이런 동료 뿐이었으니까. 적어도 로웬에겐 계속해서 사람이 있었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도 계속 곁에 사람을 두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그들의 반은 영광스러운 시절을 넘어 잠들었지만. 그래도 해는 항상 새로 뜨더라. 모든 추억이나 시간이, 계절이 그런 식으로 바스러질 뿐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잠을 통 자지 못한 탓에 핑 도는 시선이 있다. 생각이라는 어둠 너머로 머릿속이 하얗게 펼쳐지자 습관적으로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손짓이었다. 그 모습을 보는 동료는 거의 다 전막을 이해하는 상황이었으리라, 그러니 이리 물었겠지.

“ 그 악몽인지 뭔지는 아직도 악착같네 … 뭐 도와줄 일 없어? ”

“ 오늘 나갈 일 없으면 옆에서 자주던지. ”

대뜸 나온 음흉스런 그 말에 돌아오는 건 조금 놀란 듯 짓는 헛웃음이다. 묘한 기운이 주변을 맴돈다. 로웬은 여전히 사람을 보며 웃는다.

고백하자면 사람이 있는 밤은 그나마 견딜 수 있었다. 누군가의 심장 소리를 불려 그 목소리를 애써 무시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단 말이다. 일 년이란 시간 동안 저도 나름의 방법을 찾은 것이다. 하지만 저 역시도 거듭 말하지만, 사람들은 굳이 제게 그래 줄 의무가 없다. 다만, 인간이란 참 바보같이 이유 없는 선행을 하고는 하는 것인지라 저도 바보같이 셈을 한다. 제가 타인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기꺼운 것을 주고,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받는다. 서로 필요로 하는 관계의 구축이다. 그 관계에서 맺게 되는 감정이란 것이 분명 있었다. 저도 그 미련하고도 서글픈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 오 년이란 시간 안에서 사람에게 호감이라는 감정을 가지게 된 적이 저도 분명 있었다. 다만 그깟 감정에 얽매여서는 별의 아이라는 명칭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망스러운 신의 안배로서 알았기에 항상 놓고야 말았다. 일반인으로 태어났다면 저도 누군가에게 속해 서로의 흔적, 시간, 추억을 간직하며 살았겠지. 하지만 이번 생의 저에겐 부질없는 것이다. 저는 별자리에 속해 있어야 한다. 썩은 애정에서 달큼한 향이 난다.

손을 뻗어 가녀린 팔을 잡고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 날 위해서. 안돼? ”

팔을 쥐었던 손에 힘을 푼다. 툭 떨어진다. 상대의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이 입술을 물며 새까만 손을 뻗는다. 한숨이 제 얼굴에 가까워지면 몸을 앞으로 기울인다. 해소되지 않은, 터트리지 못한 많은 것들이 느껴진다. 시선이 마구잡이로 제 살갗을 뜯어 먹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상실을 그리워하거나 고통받지 않아도 좋아. 눈앞에 놓인 추악한 욕망을 고스란히 마주하면 머릿속이 텅 빈다. 손을 뻗어도 하늘이 아닌 바닥에 더 가까워지는 아이러니. 사랑은 하나의 한계이자 상징이라는 것을 나의 아름답고, 찬란하고, 눈부신 신에게 배웠다. 팔을 잡아 강제로 몸을 세운다. 어딘가 요사스러운 붉은 눈이 다시 입을 열었고. 열려있던 방문은 도로 닫혔다. 그래, 우리는 분명 신의 아이인지라 사람보다 ◼◼을 더 닮았어.

트라이야의 의지로 로웬이 전장을 잠시 비우기로 결정된 것이 내일부터다. 더럽고 치졸하게 살다가 억지로 숨이 트이니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된다. 제 삶은 늘 이렇게 망가지고 무너지고 다시 무뎌지며 살게 되는 걸까. 앉은 자리에서 주변을 살피다 더듬더듬 탁자에 놓인 빗을 들었다. 다시 그 별자리에 얽힌다니, 현실이 코앞으로 다가오자 어쩐지 기대가 되어서 요즈음 제대로 신경 써본 적도 없는 제 머리채를 잡고 무심하게 빗어내란다. 차분하게 생각해본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남겨질 이들을 외면했다. 그 사람들, 이제는 얼마나 빛나고 있으려나.

빈 공간에 소리가 채워지기 시작하자 침대 위에 나체로 누워있던 이의 표정이 밝아진다. 깨어난 모양이네. 다만 로웬은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가치가 없었다. 그의 관심은 이미 온통 저로 채워진 것을 알기에, 다시 저로 채울 자신이 있기에.

“ 로웬, 언제 오는데? ”

밝은 목소리가 허리를 조심스레 감아오며 물었다. 숨 막히는 애정이 목소리에 녹아있었다.

“ 언제 올지 몰라. 너도 슬슬 가, 바쁠 테니. ”

무심한 대답에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밝은 목소리의 주인은 잠시 로웬을 바라보다 제 짐을 주섬주섬 챙기기 시작했다. 설령 제가 돌아오지 못해 썩은 것이 된다 한들 그에게 이것은 아름다운 추억일까? 그가 옷을 다 입고 문밖으로 멀어졌지만, 로웬은 눈도 돌리지 않았다. 그저 저 멀리서 제게 꽂히는 시선을 만끽하며 잡고 있던 빗을 손에서 놓았다. 어젯밤과 오늘의 아침은 그에게는 여전히 아무 감흥도 들게 하지 않았다.

다만, 다시 만날 이들을 생각하면 심장이 뛰어 죽어 버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