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3] 이유
겔펠
*펠 비중>>>>>게일비중
3막 게일 개인퀘스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네 포부는 겨우 이 정도였나? 내 눈이 틀렸던 모양이군.”
싸늘한 말이 조용한 예배당 안을 채웠다. 펠은 할 말을 잃은 채로 게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 넘치는 사랑을 이야기하던 그의 눈에는 어느 새 실망감과 힘을 향한 욕망만이 자리잡아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고 있자, 게일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좋아, 이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 접자고.”
펠은 자신도 모르게 게일의 눈을 피했다. 네더브레인 수조에서 카서스의 왕관을 처음 봤을 때 부터 가슴 한 켠에 자리잡아 있던 불안감이 폭풍처럼 휘몰아쳐 자신을 덮쳤다. 그의 눈 안에서 넘실대는 힘에 대한 열망이 그를 자신에게서부터 앗아갈 파도처럼 느껴졌다.
“그래.”
펠은 게일에게 등을 돌리며 말했다.
“나는 잠깐 주변 좀 돌아볼 테니까, 너는 먼저 여관으로 돌아가 있어.”
예배당의 문이 닫힐 때 까지, 연인에게서는 아무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맑은 오후였다. 바실리스크 게이트 주변은 언제나 그렇듯이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했다. 신문을 파는 어린아이들의 외침, 항의하는 시민들과 이를 제지하는 불주먹용병대의 냉정한 말, 그 뒤에 모두를 위협하듯 서 있는 강철 감시대의 날카로운 작동 소리까지. 보통 때였으면 동료들과(혹은 연인과 단 둘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어갈 테지만, 오늘은…….
펠은 거리를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게일과 연인이 된 이후로 이렇게 다툰 것은 처음이었다. 사실 다투었다기보다는 일방적으로 그를 피한 것에 가까웠지만. 그의 연인은 아마 이 상황을 달갑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아마 여관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설득할 준비를 다 마치고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펠은 한숨을 쉬며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게일은 아마 쉽게 왕관을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눈빛에서는 지금까지 본 적 없었던 열망이 느껴졌다. 그의 눈에는 왕관을 차지하는 것만이 그의 생을 지속시킬 수 있는 단 하나의 희망으로만 보이겠지, 실제로 그럴수도 있고.
펠은 눈을 뜨고 발끝으로 지면을 툭툭 찼다. 입 안이 썼다.
하지만…….
게일은 이미 카서스와 비슷한 과오를 저질러 미스트라에게 버림받고 그 댓가로 가슴에 오브를 품고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카서스의 왕관을 탐한다니? 마법의 역사에 대해 잘 모르는 펠에게도 너무나 위험한 선택지라고밖에는 생각되지 않았다. 펠은 그가 다시는 자신의 목숨을 바치게 될 수도 있는 끔찍한 짓을 하지 말았으면 했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마인드플레이어 군체에서의 그가 생각난다. 결의에 찬 모습으로, 지금이야말로 자신이 희생해야 한다고 했던 그 때를. 함께 별을 보던 날에 죽는 것이 두렵다 솔직하게 털어놓던 그의 말도 머릿속에 희미하게 울린다. 어쩌면 게일은……. 두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으로 왕관을 탐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극한까지 몰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를 두는 것이다. 그 방법이 또 다른 추락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면서. 게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떻게 설득해야…….
솔직해져야 한다.
사실 게일을 말리고 싶은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었다. 펠은 다시 눈을 감고 자조하듯이 한숨을 내뱉었다.
게일의 사랑을 믿지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의 신에게 부여받은 의무를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거부한 사람을 믿지 않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게일이 영원히 필멸자로 자신과 함께 하는 경우에서만 통하는 말이었다. 만약 게일이 왕관을 얻고 불멸이 된다면? 그는 신이 되고, 나는 그저 흔한 필멸자 중 하나가 되어도 우리는 함께할 수 있을까? 게일은……. 나를 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신이 된 그를 여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
펠은 자기 자신을 저주하고 싶어졌다. 게일이 왕관을 가지는 것을 반대할 이유는 많고 많았다. 하지만 그 많은 이유중에서 펠이 그를 가장 간절히 말리고 싶어하는 이유는 작고 보잘 것 없었다. 사랑 때문에, 그를 향한 나의 사랑이, 나를 향한 그의 사랑이 영원하길 바라는 못나고 이기적인 이유. 게일을 위한 이유로 그를 말리는 게 아니라는 죄책감과, 고작 나의 감정으로 자신의 야망을 향해 펼치려는 게일의 날개를 꺾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뒤섞여 약한 구역질이 올라왔다.
그를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사랑이 나를 이렇게 못난 사람으로 만들 줄도 모르고. 작은 호감으로 시작한 마음은 어느 새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렇게 추한 마음이 되었다. 고작 이런 마음으로 게일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까? 나의 사랑으로, 그를 나에게로 다시 끌어올 수 있을까?
펠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설득할 수 있다는 자신은 없었다. 말주변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논리적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렇다고 그를 잃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부딪혀야지. 내가 가진 것은 나의 보잘 것 없는 마음밖에 없다고 해도.
이번에는 펠이 자신의 마음을 그에게 내 보일 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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