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도망자의 낙원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있다. 아니, 어떤 낙원은 도망쳐야만 발견할 수 있다.

* 발더스 게이트 3 전력 1회 - 도망과 방랑

** 가내 타브의 백스토리 연성입니다. 타브의 고유 설정 및 이름이 언급됩니다.

어느 도망자의 낙원

 

칠흑같이 어두운 그믐밤, 한 청년이 하부 도시의 더러운 뒷골목을 헤매고 있었다. 그는 후드를 깊이 눌러쓰고 망토로 몸을 단단히 감싼 채 가장 어두운 그늘만을 골라 유령처럼 걸음을 옮겨다녔다.

청년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롭게 비틀거렸으나, 기이하게도 결코 누군가와 부딪히는 일은 없었다. 마치 시선을 끌거나 자취를 남겨서는 안 된다는 강박이라도 가진 것처럼. 그러나 청년의 상태에 신경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곳은 발더스 게이트, 자칫 잘못하다가는 배에 칼이 꽂힌 채 어느 지하실에 누워 영영 발견되지 못할 이름 없는 시체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도시가 아닌가. 그래서 망토 아래에 감춰진 그의 몸이, 그의 손이 온통 타인의 피로 질척하게 젖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는 이 또한 없었다.

망쳐야 해, 달아나야 해. 여기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아무도 나를 찾을 수 없는 곳까지. 라스의 심장이 그를 질책하듯 쿵쾅거렸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 라스를 쫓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림자 속에서 길러진 꼬마의 존재를 아는 자, 라스를 질책하고 벌하고 처분할 수 있는 자는 조금 전 그의 손에 고꾸라져 싸늘하게 식어 가고 있었으니까. 그러니 라스를 쫓는 건 스스로의 과거,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붙는 양심뿐이었다.

라스가 잠시 숨을 돌리려 발을 멈출 때마다 여태껏 앗아 온 생명의 무게가, 양심이 귓가에 네 죄를 기억하라고 속삭인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여태껏 수많은 사람들을 죽여 왔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명령 뒤에 숨은 채 도구로 살아 왔다. 하지만 이제는 눈을 떠야만 한다. 귀를 막은 손을 치우고, 명령이라는 이름 아래 저지른 모든 짓을 마주해야만 한다. 이제는 그럴 수 있었으니까. 그에게는 그렇게 할 힘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습게도 라스는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 주인의 심장에 칼을 박아넣었다. 살기 위해 또다시 타인을 죽여 버리고 만 것이다. 결국 그가 배운 건 그런 방식밖에 없었으니까. 

그래도, 이제 그는 자유였다. 자유, 얼마나 달콤한 말인가. 동시에 얼마나 냉혹한 말인가. 제 발로 문명을 벗어난 인간에게 의식주를 전부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자연의 법칙은 제법 가혹한 것이었으나, 라스는 그 새로운 법칙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는 황야에서 고요함을 찾았고, 숲에서 아늑함을 찾았다. 세차게 흐르는 강물에서 해방감을 느꼈고 이따금 마주치는 여행자들에게서 희미한 우정을 느꼈다. 도시에서는 결코 겪어 보지 못했던 순간들이었다.

도망친 곳에도 낙원은 있다. 아니, 어떤 낙원은 도망쳐야만 발견할 수 있는 법. 라스의 낙원은 도시 바깥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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