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문 모음 1

키워드 : 북풍(케서릭), 추억(아라벨라), 거울(아스타리온)

북풍

그림자에 잠긴 땅의 끝자락에는 외로운 탑이 홀로 솟아 있다. 더는 새로운 계절을 맞이할 수 없게 된 이 대지 위를 스치는 바람은 차갑고 축축하고 무거운 북풍뿐, 검은 바다 너머에서 몰려오는 싸늘한 공기가 부두를 후려칠 때면 탑은 몸을 뒤틀며 울부짖는다.

케서릭 쏨은 문라이즈 타워 꼭대기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온통 새카만 빛으로 뒤덮인 바다, 하얗게 넘실거리는 파도. 겨울 바다에는 지독한 권태와 빨려들 것만 같은 매혹이 공존한다. 도무지 속을 비추지 않는 수면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귓가에 허무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이 모든 짓에 의미가 있나?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멜로디아, 이소벨….

색조를 박탈당한 이 땅과 바다는 그의 영혼과 같은 빛으로 물들어 있다. 사람을 배반하고, 신을 배반하고, 자신마저도 배반한 남자. 죽음을 피해 몇 번이고 달아나면서도 죽음의 달콤한 입맞춤을 갈망하는 남자. 케서릭은 이 길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자신의 파멸을 필사적으로 거부하면서도 그 날이 오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다. 그는 이미 선을 넘어 버린 지 오래, 더 이상 스스로의 의지로는 멈출 수가 없다.

또다시 바람이 몰아친다. 탑이 울부짖는다. 이 땅에 갇힌 수많은 영혼이 울부짖는다. 이 바람이 멎을 때가 올까? 이 고통이 잦아들고, 이 비명이 잠잠해질 때가 올까?

…케서릭은 알 수 없었다.


추억

쉼없이 내리치는 망치질은 강철을 벼리고, 끊임없이 물결치는 시간은 사람을 벼린다. 위브의 포옹을 받은 티플링 소녀는 어느새 훌쩍 커 제법 단단한 어른으로 자랐다.

아라벨라는 발더스 게이트의 지하, 어둡고 습한 수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매혹적이며 음험한 이 도시의 이면에는 위험한 것—혹은 위험한 자—이 득실거린다지만, 그녀는 그런 것들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지하의 구조쯤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아무리 짙은 어둠이 뻗쳐 온다 해도, 목에서 반짝이는 로켓이 있는 한 아라벨라는 길을 잃지 않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라벨라, 이제 다시는 어두워지지 않을 거야.

낡은 목걸이를 손에 쥐면 아직도 그리운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응, 그래요. 분명 그럴 거예요. 아라벨라가 그녀의 주변을 맴돌며 춤추듯 흔들리는 빛무리를 향해 손을 휘두르자 어둡고 깊은 통로를 따라 광채가 퍼져나간다.

아픈 기억도, 괴로운 기억도 세월의 먼지가 쌓이면 모두 추억이 된다. 아라벨라는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부모님의 손을 잡고 엘투렐에서 떠나오던 날, 독사에 물려 죽을 뻔한 그녀를 구해 준 영웅의 뒷모습, 어둡고 추운 땅에서 부모님을 잃은 날, 영웅의 곁에서 그녀의 힘으로 이상한 괴물들과 싸우던 순간…. 그리고 모든 것이 끝난 뒤 상처투성이가 된 채 비틀거리며 다가와서는 품에서 익숙한 목걸이를 꺼내 쥐여 주던 따뜻한 손까지도.

그러니 걸음을 좀더 서두를 필요가 있다. 오늘은 타브와 만나기로 한 날이니까. 타브를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다. 아라벨라는 입가에 미소를 띄운 채 환하게 밝아진 통로를 따라 달려나갔다.

…추억을 공유할 사람이 있다는 건 얼마나 기쁜 일인가.


거울

뱀파이어 스폰이 된다는 건 말이야, 한 사람의 인생에 굉장히 많은 변화를 가져오는 사건이야. 알아?

…뭐? 안다고? 아, 당연히 그러시겠지. 창백한 피부에 특이한 식성, 햇빛을 받으면 타들어가는 몸, 초대받지 않은 집에는 들어갈 수 없고 흐르는 물을 건널 수도 없음…. 하, 책에서 읽은 지식들.

있잖아, 자기, 들어 봐. 200년이라는 시간을 버텨 내는 동안 가장 괴로웠던 게 뭐였는지 알아? 

…뭐, 그래.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도무지 채울 길이 없는 허기와 갈증도 끔찍했고 그림자에 숨어 다니는 신세도 지긋지긋했으니까. 하지만 정답은 아니야, 달링. 나를 가장 괴롭게 만들었던 건… 오래된 책이 닳아 부스러지는 것처럼 내가 나를 조금씩 잃어간다는 사실이었어.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다 보니 ‘살아 있던’ 시절의 아스타리온 안쿠닌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조금씩 잊게 됐거든. 내 모습, 내가 좋아하던 음식. 내가 자주 가던 공원에 내리쬐는 햇살, 내가 옳다고 생각했던 것과 그르다고 생각했던 것들…. 난 살기 위해서 그런 걸 전부 버려야만 했어. 내가 살아있던 시절에 나를 이루던 모든 요소를 버려야만 했다고. 

하지만 이제는 다시 살아볼 수 있게 됐지. 그러니, 내 거울이 되어 줘. 말해 봐. 네 눈에 나는 어떻게 보여?

…너는, 내게서 무엇을 보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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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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