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선물

기숙사방에서 소란스러운 파티가 끝난 것은 점호를 아슬아슬하게 앞둔 9시 40분 무렵이었다. 다들 각자의 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르네 데카르트의 방은 여전히 정리하지 못한 선물들로 가득했으나, 사감은 생일을 축하한다는 짤막한 한 마디로 그 난장판을 눈감아주었다.

점호가 끝난 직후 르네는 벤과 라이를 찾아갔다. 도저히 많은 선물들을 혼자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물론 그 나이를 먹고도 그걸 혼자 못하느냐 한소리 듯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두 사람 모두 착실히 르네를 따라와 잘 포장된 상자나 꾸러미 같은 것들을 날랐다.

“생일 파티는 몇 명 안 왔는데 생일 선물은 뭐가 이렇게 많아?”

“동아리 후배들이랑, 3학년 선배들이랑, 아! 이거 고향에서 온 거다! 프랑소아즈랑 누나들이네~”

한 구석으로 몰아놓고 보니 르네는 제때 정리를 하지 않는다면 오늘밤은 선물에 파묻혀 잠들 운명이라, 가장 먼저 라이가 한숨을 쉬며 부피가 작은 선물들을 골라냈다.

“선물 정리는 힘들어도 하나하나 열어보면서 누가 준 건지 맞춰보는 것도 재밌네~ 아, 이거 니콜라다.”

“참내, 없는 시간 쪼개서 도와주고 있으면 좀 서두를 줄도 알아라.”

“에이, 넌 생일날까지 꼭 잔소리를 해야겠냐~ 르네 신났네.”

어떤 것은 기숙사실 소형 냉장고로 들어갔고 어떤 것은 그 위의 선반으로, 어떤 것은 옷장, 또 어떤 것은 협탁의 서랍에 들어갔다. 시간이 11시를 넘어갈 즈음에야 기나긴 노동의 끝이 보였다.

“스피노자, 상자 좀 문 근처로 치워봐.”

“네, 엄마~”

“저거 또 맥락도 없이 저러네.”

르네는 선물을 담은 상자마저도 잘 버리지 않는 사람이어서 도저히 쓸모를 찾을 수 없는 과상한 형태만 아니라면 모두 옷장 아래 공간에 가지런히 쌓이게 되었다. 벤은 그 괴상한 모양의 상자들을 문 바로 옆에 쌓았다.

“르네 너, 내일 나올 수는 있어?”

“내버려 둬. 문이 막혔으면 안 나오고 말 놈인데.”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나가게?”

“하……. 그럼 저걸 또 어디로 치워야 하지?”

벤은 문이 열리는 데에 방해가 되지 않게 또 상자를 옮겨야 했다. 사람 한 명 드나드는 건 되겠구나 싶을 정도로만 길을 만들어 놓고, 벤의 내일 일정에는 등교하기 전 르네의 방에 들러 상자를 모두 버리는 일이 추가되었다.

마지막 상자를 들어올리며 우연히도 벤의 시선이 신발장 위에 가 닿았다. 평소라면 방향제 하나 놓여 있는 게 끝이었어야 했을 그 위에 못 보던 통이 놓여 있었다.

“르네, 여기 뭐가 있는데?”

“어? 뭐가?”

‘르네에게’라고 쓰인 쪽지가 함께 있는 걸로 봐서는 누군가 잘못 놓고 간 것도 아니고, 라이프니츠는 가까이 와서 통을 집어들고 이리저리 살폈다.

“이거 유명한 브랜드 홍차인데.”

“홍차? 앤이 준 건가?”

“앤이 준비한 건 다른 선물이었다. 확실히 영국인이 줄 만한 선물이기는 한데…….”

수리과는 영국인 비율이 그렇게 높지 않았다. 스무 명 남짓한 학생들 중 가장 많은 국적은 르네 같은 프랑스인이었고, 그게 아니어도 영국보다는 유럽 본토 출신이 다수였다. 앤이 오히려 드문 경우였지.

하지만 수리과의 몇 안 되는 영국인들은 오늘 모두 선물을 전해줬다. 남은 영국인이라면 모두 과학과에 포진해 있을 테고, 설마 그들이 르네 데카르트의 생일을 챙겨줄 정도로 친할까.

그렇게 파고들면 또 이 선물을 두고 간 익명의 인물은 또 미궁 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정갈한 듯 흘려쓴 필체가 본인을 찾는 데에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답을 요구하듯이 라이와 벤이 르네를 돌아봤을 때 르네는 드물게 굳은 얼굴로 가만히, 라이의 손에 들린 통을 쳐다보고 있었다.

평소처럼 동그랗게 뜬 눈은 그대로인데 입꼬리 하나 올리지 않는 것만으로도 분위기가 달려졌다. 르네는 통에 시선을 고정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데카르트……?”

그 모습은 마치 머리를 한 대 얻어맞고 멍해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해서, 라이는 조심스럽게 르네를 불렀다. 르네는 벽 너머에 있는 사람처럼,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르네!”

“아, 응?”

르네가 응답한 건 벤이 한 번 더 불렀을 때였다. 그조차도 한 박자 늦은 대답이었으니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것은 확실했다.

“괜찮아?”

“뭐가?”

“방금 우리가 부르는 것도 못 듣고 계속 저것만 보고 있던데?”

“아……. 그랬어?”

르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라이의 손에 있던 차를 가져왔다. 통이 흔들리면 안에서는 바스락거리며 마른 잎이 서로 얽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냥, 이거 누가 보낸 건지 생각하느라.”

“왜, 짐작 가는 사람이라도 있는 건가?”

“응. 고향에서 소꿉친구가 보내준 건가봐. 어렸을 때 자주 마셨지, 이거.”

르네는 추억에 잠긴 듯 제 머리 만한 통을 품에 안고 뒤로 세 발짝 물러섰다.

“오늘 정리 도와줘서 고마워. 시간 늦었는데 두 사람 다 괜찮아?”

엄연한 축객령이었다. 르네 데카르트가 이제 무엇을 할 계획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계획에 베네딕투스 데 스피노자와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를 자신의 공간에 남겨둔다는 전제는 없었다.

라이는 퉁명스럽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벤의 목덜미를 낚아채 르네의 방을 나왔다. 르네는 문 앞까지 나와 짧게 손을 흔들고 손수 문을 닫았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라이는 분명 내일 아침, 아니 점심에 ‘도와준 사람을 그렇게 보내는 게 프랑스 예의냐’를 시작으로 해서 르네에게 늘어놓을 잔소리를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벤도 생각이 많기는 마찬가지였는데, 늘 순한 양처럼 웃기만 하던 친구의 정색한 얼굴을 갑자기 보게 되리라고 그가 생각이나 했을까.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해 평소라면 실없는 소리라도 던지며 끌려갔을 그가 조용했다.

그러니 두 사람이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놓쳐버리고 만 것은 그 시간 머리가 유독 바빴기 때문이다.

르네 데카르트의 고향에서 온 선물은 일찌감치 그의 옷장 안으로 들어갔고, 단 네 글자가 적혀 있던 쪽지의 필체가 그들에게 낯선 필체가 아니며, 르네 데카르트는 방을 비울 때 웬만해서는 문을 잠그지 않는다는 사실과, 그 홍차를 주기적으로 주문해 쌓아두는 곳이 학교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은, 분명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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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무슨 생각해?”

“……별 거 아니야. 그보다 어디까지 얘기했더라?”

“학과 개편안 세부사항 얘기 중이었잖아. 그래서 거기에 논문이랑 수상 실적 말인데, 갯수로 판단하지 말고 비율로 고치자니까?”

본인은 쓰지도 않는 기숙사 건물 윗층에 올라간 걸 우연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처음부터 찾는 방은 정해져 있었다. 다행히도 우편 계단은 사용하는 사람이 없다시피 해서 몸을 숨기기에도 좋았고.

하지만 그 실없는 녀석은 친구 중에 기숙사를 쓰는 사람은 다 모아놓고 점호 시간이 다 되어 가도록 방에서 생일 파티를 했으니 준비해간 선물을 전해줄 틈이 있었을 리가.

그의 선물이 익명의 선물이 된 건, 그때문에 귀가 시간이 늦어진 것에 대한 복수였다. 어쩌면 충동적으로 준비해버린 선물이 누가 보낸 것인지 몰랐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을 수도 있고.

어찌되었건 그는 르네 데카르트가 방을 비운 사이에 선물을 두고 나왔고, 평소보다 늦은 귀가를 했으며, 그 밤 내내 선물을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지금쯤 속 편하게 잠들어 있을 얼굴을 생각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 그 의견도 일리가 있네. 생각해볼게.”

“그럼 이제 공지할 거는 대충 끝났고, 또 할 얘기 뭐 있었지?”

그래, 그 선물을 익명으로 두고 온 건 아주 잘 한 일이다, 그런 합리화를 하는 중이다. 르네 데카르트가 맹탕 같은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게 빠르게 알아채더라도, 나머지가 그 선물을 보낸 주인공이 그임을 아는 데에는 시간이 제법 걸리지 않겠나. 그 사이에 변명거리라면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애초부터 선물을 주지 않았더라면 변명을 생각하는 일 따위도 없었겠지만, 그 간단한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 생각하지 않은 건 더 볼 필요도 없이 어떤 형태의 미련 혹은 아집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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