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 벗어나기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백호열 전력110분, 주제_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헤어지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집안의 물건들을 전부 정리하는 것이었다.
진부하다면 진부한 짓이지만 눈앞에 있는 집 안의 모든 물건들을 사용할 때마다 헤어졌던 강백호와의 추억이 생각나 미쳐버릴 것 같았기에 무식하게 저지른 짓이었다. 한 달의 한번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 회사원이 무슨 돈이 있어서 집 안의 물건들을 싹 정리하냐고 묻는다면, 돈이 넘쳐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동안 제법 모아놓은 목돈이 있었고 한 번에 모두 바꾸진 못해도 차근차근 한 가지씩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분리수거장에 내놓았다. 저번 달에는 소파, 저번 주에는 식탁과 의자, 두 세트씩 맞췄던 그릇과 식기류도 전부.
화장실에 들어가 두 개의 칫솔, 면도기, 슬리퍼를 20리터 종량제 봉투에 넣다가 주책없이 눈물이 터져 한참을 차가운 타일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기도 했다. 퇴근 하고 돌아와 현관문을 열었을 때 불 꺼진 집 안 복도에서 울었고, 아직 바꾸지 못한 라지킹 사이즈 침대에 홀로 누워 밤이 새도록 울다 지쳐 잠든 날들도 있었다. 성인 남성의 몸은 수분이 60%로 이루어져 있다는데, 지금만큼은 몸 안의 모든 수분이 눈물로 흐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방 가득 채웠던 침대까지 대형 폐기물 스티커를 붙여 내놓고 싱글 사이즈 침대를 새로 들여놓은 날. 새 베개와 이불을 깔고 양호열은 한숨을 쉬었다.
드디어 집 안의 모든 물것들은 새 것이 되었다. 더 이상 너의 흔적은 없다.
언제까지 강백호의 그림자 안에서 초상난 것처럼 슬퍼만 할 수는 없다. 슬퍼만 하기에는 매달 월세와 관리비, 카드값은 꼬박꼬박 청구되고 매일 아침 일어나 돈을 벌러 가야 하는 양호열은 어른이고 직장인이다.
창밖으로 라지 킹사이즈 침대를 싣고 멀어지는 트럭을 바라보며 호열은 문득 자신의 사랑이 이루어졌던 그때를 떠올렸다. 기대 없이 내뱉었던 고백에 오랫동안 품어왔던 사랑이 이루어 진 날. 두 사람이 연인이 되고 호열의 집에서 함께 지내온 5년의 시간 동안 당연히 행복한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금세 화해할 수 있었던 것은 항상 자존심을 굽히고 먼저 손을 내민 양호열 덕분이었다. 양호열이 먼저 말을 걸고 손을 내밀면 강백호는 입을 삐죽 내밀며 제 연인을 흘겨보다 내민 손을 끌어 당겨 꽉 껴안곤 했다.
그래, 사실 이번 다툼도 아주 사소했다.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양호열이 먼저 굽히지 않았다. 강백호가 먼저 잘못한 일로 다툼이 시작되었기에, 화가 난 양호열은 이번만큼은 절대 자신이 먼저 굽히고 들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했고, 원래라면 반나절 만에 간단히 풀렸을 만큼 사소한 다툼이 하루가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고 집 안에서도 서로 못 본 척 하며 말을 하지 않게 돼버려 감정의 골이 깊어만 갔다.
양호열은 화가 났다. 언제까지 내가 먼저 굽히고 들어가야 해? 네가 먼저 사과할 수는 없는 거야?
다툰지 열흘째. 결국 양호열은 강백호에게 선언한다.
"우리 헤어져."
강백호는 이별을 말하는 양호열의 입술만 바라보다가 사납게 눈을 떴다. 너.
"······ 후회 안 해?"
왜그러냐고, 내가 잘못했다고 강백호가 말을 했다면 양호열은 반쯤 충동적으로 뱉은 이별 선언을 취소하며 사과를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을 노려보는 강백호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리고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온 후회 안 하겠냐는 물음에 가슴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자존심이 불붙어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해.
양호열의 대답에 강백호는 자신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더플백에 자신의 옷가지와 지갑을 챙겨 넣고 작별의 인사도 없이 호열의 집을 나갔다.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석 달 전 강백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이렇게 이별은 간단했고 순식간이었다.
그 이후 대다수의 헤어진 사람들이 그러하듯 양호열은 회사 일에 몰두했다. 야근도 자진해서 했고, 철야와 주말 출근도 필요하다고 하면 빼지 않고 나갔다. 아, 술을 마시진 않았다. 술을 마시고 흐린 정신에 자신도 모르게 강백호에게 연락을 할까 봐 회식 자리에서도 물만 마시며 버텼다.
이별했다고 청승 떨다 폐인 됐다는 말 듣기 싫어 큰맘 먹고 담배도 끊고 헬스도 시작했다. 늘 회사가 바쁘진 않기에 일찍 일을 마치고 돌아온 적막한 집에 드리운 강백호의 그림자에 허우적거리지 않기 위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읽고 취미로 글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양호열은 살아간다.
그래, 언제까지 강백호만 바라보고 살 거냐. 헤어졌어도 자신의 삶은 끝난 것이 아니고 당장은 연애할 생각은 없지만 언젠가 또 다른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양호열은 고개를 끄덕이며 이별을 대처하는 자신의 성숙한 태도에 뿌듯함까지 느껴졌다.
그렇게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뜨거웠던 여름의 날이 끝나고 가을의 시작인 입추가 지났다. 호열은 미리 가을에 입을 코트와 스웨터들을 꺼내려 장롱 속 서랍을 열었다. 오래 묵은 향을 품은 코트와 스웨터들을 꺼내다가 서랍 구석에 유독 커다란 후드티 하나를 발견했다.
회색 후드티.
자신도 모르게 그 후드티를 꺼내어 들었다. 후드티에 코를 대고 숨을 들이키니 이제는 희미한 그리운 냄새가 났다. 양호열은 멍하니 장롱 앞에 앉아 제 상체를 덮을 만큼 커다란 후드티를 들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야! 호열아!'
아.
겨우 잊나 했는데.
고작 후드티 하나에 옛일들이 떠오른다. 가을의 초입, 저녁 공기가 제법 서늘해질 때 처음 손을 잡던 그날. 강백호는 유난히 별빛이 밝았던 밤하늘을 올려보다 웃으며 말했었다.
'호열아, 너는 추위를 잘 타잖아. 여기 모자 뒤쪽에 손 넣어봐 엄청 따뜻하지 않냐?'
'따뜻하긴 한데, 백호야. 네가 키가 커서 내가 손 넣기 힘들어.'
'그래? 그럼 모자 뒤보다 내, 내 손 잡는 게 더 좋겠네! 자!'
'······ 뭐야, 손 한번 잡으려고 밑밥 까는 거 봐라 강백호!'
'후눗! 들켰다! 그래도 따뜻하지?'
'하하! 그래, 따뜻하네.'
정말로 그때 맞잡은 손은 크고 따뜻했다. 그렇게 쉽게 손을 건넬 줄 알면서 왜 우리가 싸웠을 때는 손을 내밀지 않았을까?
이봐, 양호열아. 그렇게 간 놈을 아직도 그리워하는 게 말이 되냐? 그렇게 좋냐? 한 번도 자신의 자존심 굽히지 않고 늘 사과만 받았던 강백호가 아직도 보고 싶냐? 미친 놈아.
그래, 아직도 보고 싶어 죽겠다. 젠장. 난 진짜 미친 놈인가 봐.
양호열은 아주 오랜만에 울었다. 그동안 안 울었으니 제 몸의 60% 수분은 적절하게 채워져 있을 것이다. 그 수분을 모두 다 뺐다 할 정도로 울었다. 한참을 눈물 콧물 흘리며 후드티에 얼굴을 박고 울다가 비척비척 일어나 풀썩 침대에 누웠다.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바스락거리는 이불에 온 몸을 파묻고 누워있는데 꼬르륵 거리는 뱃소리에 킁-, 코를 훔치며 일어났다. 식음까지 전폐하고 슬픔에 빠지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사양이다. 다 울었으니 배를 채우고 푹 잘 것이다. 그것이 어른이니까.
똑.
부엌으로 가는 길에 현관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너무나 작은 소리였기에 옆집 소리를 착각했나 할 때.
똑똑.
이번엔 꽤 크고 분명하게 들린 문 두드리는 소리에 양호열은 현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누구세요?
가끔 옆집에 사시는 아주머니가 반찬을 많이 만들었다며 주시곤 했기에 이번에도 그럴까 싶어 현관문을 여니 역시 누군가가 서 있다. 그러나 예상했던 인물은 아녀서 양호열은 순간 당황해버렸다.
"어······."
마지막 모습 때보다 조금은 길은 붉은 머리. 자신을 내려다 보는 눈동자. 기억 속 그때보다 조금 피곤함이 묻어있는 얼굴.
떠났던 강백호가 다시 돌아왔다.
당황한 양호열이 급히 문을 다시 닫으려는데 강백호가 다급하게 손을 뻗는다.
"자! 잠깐만!"
그리움은 그리움이고 양호열은 또 다시 가슴 속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 같았다. 그렇게 쌩하니 떠나놓고 이제 와서 무슨 염치로 돌아왔냐! 아까까지 울어서 발갛게 짓무른 눈가가 쓰라리다. 그것도 하필이면 오늘! 그동안 정말 괜찮았다. 자기 일을 하면서 운동에 취미활동까지라며 잘 지내다가 딱, 오늘 서랍 속 후드티를 보고 펑펑 울었던 지금 왜 왔냐고!
사납게 눈을 뜬 양호열을 바라보던 강백호는 머리를 긁적이다가 조심히 힘을 주어 현관문을 열었다.
"호열아."
항상 자신감 넘치던 자칭 천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옛 연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곤 한 걸음 다가가 손을 다시 뻗는다. 호열아.
"미안해."
기가 찬다. 양호열은 이를 갈며 답했다.
"늦었어."
"아, 안 늦었어!"
"석 달이나 지났는데 뭐가 안 늦어? 사과는 그때 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저도 모르게 삐딱하게 나오는 말투에 멈춰 보려고 했지만 치솟는 화에 제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다. 어차피 헤어진 사이인데 뭐 어떠냐 싶어 강백호를 흘겨보았다.
"강백호. 난, 할 말 없어."
"난 있어. 그때 네가 헤어지자는 말에 너무 화가 나서 그랬어. 내가 먼저 잘못해서 싸운 거였는데, 먼저 사과 안 해서 미안해. 호열아, 잠깐 이야기 하자 응?"
"나가, 문 닫을 거야."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
거의 고함처럼 외친 강백호의 말에 양호열의 잘 다듬어진 눈썹이 올라간다.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얘는.
"우리가 헤어지고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근데 안되더라. 안돼. 사랑해보려고 했는데 안돼."
"미친! 야! 우리 헤어진 지 석 달밖에 안됐는데 넌 다른 사람 만날 생각을 했냐!?"
"이, 이별은 새로운 만남으로 극복하는 거라고 말하길래."
"어떤 새끼가?"
"마, 만만군이······."
"하. 그 인간은, 아래 이빨도 임플란트 하고 싶다니?"
지끈거리는 두통에 양호열은 양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이런 쓸데없는 언쟁은 그만하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서 배를 채우고 푹신한 이불에 눕고 싶었다.
강백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양손을 뻗어 양호열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손을 뿌리칠까 고민하던 호열은 강아지처럼 울망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강백호를 보고 잠깐은 괜찮겠지 싶어 순순히 잡혀 주었다.
"헤어지지 말자."
강백호는 양호열의 손을 만지다가 결국 두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우리 헤어지지 말자. 호열아, 내가 다 미안해. 진짜 이제 잘할게. 오래 만나서 편했나 봐. 그래서 그랬나 봐. 너라고 맨날 좋아서 먼저 사과하는 거 아니었을 텐데. 미안해. 진짜 우리 헤어지는 거야?"
나는 너 말곤 사랑 못할 것 같은데.
울음 소리도 없이 흐르던 눈물은 점점 어깨가 떨릴 정도로 굵게 방울방울 떨어지다가 결국 흐어엉, 하면서 울음이 터져버렸다.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우는 강백호를 바라보다가 양호열은 한숨을 쉬었다. 점점 커지는 울음소리에 다른 집사람들이 나올까 싶어 결국 양호열은 제집 현관 앞으로 강백호를 들여보낸다.
겨우 너의 흔적을 다 지운 나의 집에 또 다시 너를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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