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F14] 죽음에 대하여
자캐 스토리, 블렌 디나 마이어
-안 돼요, 도련님. 이 쪽으로는 오시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시종인의 난감한 목소리가 열 살 소년의 낮은 귓가에 내려앉는다. 말끔하고 딱 맞는 옷을 입은 소년이 제 위쪽에서 자신을 설득하기 위해 재잘거리고 있는 시종인을 보기 위해 고개를 잔뜩 치켜 세운다. 그녀는 어찌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했던지, 심지가 다 타들어가 불이 거의 꺼져가는 램프에 새로 불을 붙이는 것마저 잊고선 소년을 막아세우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올려다 보는 대신에, 소년, 블렌 디나 마이어는 그녀 뒤편에 조금 열려있는 문쪽을 향해 고요한 시선을 던진다. 방 안으로 달빛이 들어오는지 옅은 청회색 그림자가 실처럼 길게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냥 얼굴만 보고 싶을 뿐이야. 에나.
여전히 문 쪽에서 갈망 어린 시선을 떼지 못 한 채로, 블렌은 에나에게 차갑게 말했다. 에나는 조그만 주인의 냉기 어린 목소리에 흠칫했지만 아직 그는 그녀에게 명령다운 명령을 내리기에는 작은 몸을 가지고 있었다. 저택의 사용인으로서 마이어 남작의 말을 우선시해야 되는 입장도 있었다.
-.......
한편으로는 이 작은 아이가 제 어머니를 보고 싶어 서성거리는 것을 자기 선에서 막아야된다는데에서 오는 자책감도 조금은 밀려왔으나, 에나는 결심한 듯이 단호한 어조로 문에서 비켜서지 않고 블렌을 부드럽게 밀어내었다.
-아버님 지시가 있었어요. 도련님, 어머님이 빨리 낫길 바라시잖아요? 도련님도 이제 다 크셨으니까 기다릴 수 있어야지요.
이쯤에서 물러나 주었으면 하는 에나의 마음을 조금도 모르는지, 블렌은 하, 하고 코웃음을 치며 그녀를 노려다본다.
-어머니가 아픈거랑 내가 거기 들어가는게 무슨 상관이야? 웃기는 소리 하지마.
누가 가르쳐주지도 않았건만 나이가 차기 시작하면서 이 작은 도련님은 종종 사용인에게는 버릇없는 말투를 사용해 말을 해오곤 했다. 블렌은 초조한 듯이 붉은 카펫 융단에 발을 끌었다. 디나 가의 안주인, 그리고 블렌의 어머니 이사벨은 오래 전부터 기묘한 병에 걸려 저택의 안 쪽 방에서만 은거하고 있었다. 방랑벽이 있는 그의 어머니는 경호원을 두고 이슈가르드의 변방을 느긋하게 여행하는 것을 좋아했다. 일반적인 성도 사람들이 보기에 기이한 짓거리였지만, 그녀 자신도 중급 수준의 치유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자신감에 이어지는 기행이기도 했다. 이사벨은 틈만나면 블렌에게 바깥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이슈가르드를 나와 커르다스 서부고지로 향하면 새하얀 눈밭이 펼쳐지고, 그 곳을 지나면 울창한 숲이 끝없이 펼쳐진 별세계가 있다느니 하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자기 아들이 자신처럼 '바깥세상'을 궁금히 여기길 바라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블렌은 성도 밖의 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아이가 궁금히 여긴 것은 오직 제 어미의 이야기였을 뿐이다.
평소보다 더 눈이 많이 내리던 밤이었다. 그 날, 어째선지 블렌은 잠이 오질 않았다. 침대에서 일어나 2층 방의 김서린 유리 위로 끼적이며 그림같지 않은 그림을 그리고 있던 블렌의 눈에 다급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부축하여 저택 안으로 서둘러 들어오는 사용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들어오며 사람들의 시선을 끌면 안 된다는 듯이 이곳저곳을 뒤돌아 봤다. 블렌은 호기심이 동해 제 방에서 나와선 긴 복도를 달린다. 저택의 사용인들은 어째선지 보이지 않았으나, 블렌은 이윽고 그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회랑에 모여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누군가 블렌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지만, 그는 당장 블렌에게 방으로 들어가라느니 하는 말을 하는 대신에 초조하게 손가락을 물어 뜯었다. 저택에 들어온 자들은 어디로 갔지? 블렌은 그들을 한 번 힐끗이곤 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다시 저택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나오는 곳을 찾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침실 쪽에서, 평소 엄격하기만 했던 아버지의 목소리에 당혹스러움과 노기가 더해져 들려왔던 것이다.
블렌은 문짝 위로 귀를 가져다 대었다.
[... 대체 어떻게 ... 에 감염이 될 수 있는건가?]
[이교도들의 습격을... 가, 용의... ]
감염되었다느니, 늦추려면 천문학적인 금액이 필요할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가 윙윙거리며 단편적으로 블렌의 귓속에 꽂혀 들어갔다. 블렌은 조금도 짐작되지 않는 이야기에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 들어선 좋을게 없는 이야기라는게 제 아버지의 목소리에서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자신이 몰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본다한들 아무도 그에게 대답을 해주지 않을게 분명했다. 두 남자가 아연실색해서 주고 받는 대화를 뒤로 하고, 블렌은 그렇게 생각하곤 뒷걸음질로 두어걸음 물러서더니 사뿐사뿐한 조용한 걸음걸이로 다시 복도를 걸어 여전히 회랑에 모여있는 사용인들을 지나쳐 제 방으로 되돌아 갔다.
사용인들에게 부축받아 들어온 그 '무언가'가 어머니라는 걸 블렌이 알게 되는 데에는 단 하루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고, 깨닫는 순간 블렌은 어머니를 보기 위해 그녀의 침실로 달려갔으나 블렌은 그 이후로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언제나 지금처럼 '어머님이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 따위로 가로 막힌지가 그렇게 몇년이 되었다. 어린 소년이 버티기에는 가혹한 시간이었다.
어린 소년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에나 역시도 그걸 알고 있기에 저렇게나 난감해 하고 있는 것이다. 작은 도련님이 큰 도련님과는 달리 제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어머니 외에는 의지하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저택 사용인들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사실, 누구라도 제 어미를 몇 년 동안이나 보지 못 하면 조금씩은 그리 집착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다르게 돌아갔다.
[됐다, 에나. 이제 괜찮아.]
쉽게 물러서지 않는 블렌 때문에 곤혹을 겪고 있던 그 때, 에나의 등 뒤에서 가느다랗고 힘없는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블렌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실로 오래간만에 듣는 이사벨,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종종 문밖에 서서 버티고 있으면 금방 나을테니 가서 기다리라는 말을 해오곤 했던 이사벨은 두달전부터는 아예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차였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으나 이사벨의 목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저 애 아버지한테는 내가 설명하도록 하지. 나는 이제 괜찮아. 블렌이 보고 싶구나...]
에나는 제 주인의 말이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굳었다가, 이어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블렌을 다시 쳐다보았다. 블렌은 에나를 스치듯 지나쳐 침실 문을 활짝 연다. 에나는 그런 블렌을 제지할 명목을 더 찾지 못 하고 옆으로 물러섰다. 들뜬 걸음으로 침실에 들어온 블렌은 유리창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에 점차 어둠에 익숙해졌다. 방의 구조가 익숙해지자, 어두운 방안에 홀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어머니가 보였다. 그녀는 저녁에 주었던게 분명한 식사를 조금도 손에 대지 않고 바닥으로 밀어 놓은 채 턱 끝까지 이불을 덮고 블렌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며칠은 아무것도 먹지 못 한 사람처럼 초췌한 안색이 그녀의 얼굴을 온통 뒤덮고 있다. 언뜻 보면 알아보지 못 할 정도로 달라진 어머니를 보고, 블렌은 쉬이 다가가지 못 하고 머뭇거렸다.
[괜찮아, 블렌. 이리 오렴. 엄마 품으로 와...]
그 다정한 음성에 힘입어, 블렌은 한걸음씩 걸음을 떼어 침대맡에 섰다. 이사벨은 이불을 들어 나풀거리며 손짓한다. 들어오라는 뜻으로 보여, 블렌은 조금씩 몸을 움직여 어머니의 옆에 몸을 뉘였다.
[내 걱정을 많이 했겠구나.]
이사벨이 블렌에게 쓴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녀는 떨리는 두 손으로 아들의 뺨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는 양,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막상 보고 싶었던 어머니에게 오자 할 말이 떠오르지않아서, 블렌은 어색한 표정으로 그 품에 안겨 가만히 그녀의 손길을 받았다. 많이 컸구나, 많이 컸어. 이사벨은 정말 감격했다는 듯 블렌을 계속해서 어루만졌다. 뼈마디가 앙상한 손이 위태로워 보였다.
그 이후로 모자는 새벽 내내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내었다. 잠에 겨워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는 블렌의 머리 위로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어린 네게는 특히, 그리고 앞으로도 위험한 세상일 것이니 항상 처신을 잘해야 한다, 걱정이 많지만 괜찮을거라 믿는다, 판에 박힌 이야기, 그러나 대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
그것은 경미한 예감이었다. 블렌은 어느새 자신이 잠에 들었다는 것을 알고 그녀의 품속에서 눈을 뜨고 몸을 비틀어보려고 했으나, 이상하게도 고목처럼 뻣뻣한 팔에 갇히어 그 안에서 나오지 못 했다. 당연한 예감이었다. 그러나 어째선지 공포감 대신에 안온함이 아이를 사로잡았다.
그는 소리지르지 않고, 사람들에게 말하지 않고, 그의 손 안에서 어머니의 몸이 더욱더 차갑게 굳을 때까지 머리 맡에서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동이 터오는 새벽에 그들 모자를 발견한 하인의 비명 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기 전까지 무서우리만치 아늑한 느낌 속에 있었다.
블렌 디나 마이어는, 여즉까지도 계속 그 시간을 떠올린다.
움직이지 않는 건 어쩐지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영원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때 처음으로, 블렌은 제게 소중한 것은 죽어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일련의 사건이 성도를 지나가고, 아마도 그 날 이후부터 이미 작은 도련님의 성질이 바뀌었던 것 같다고, 그들은 뒤늦게야 수군거렸다.
*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기사단장이 두 번 바뀌는 시간동안 디나 가의 작은 도련님 역시 많은 것이 바뀐 것으로 보였다. 더욱이 훤칠해지고 어린 시절보다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단정히 올리기라도 하라는 아버지의 말에 반항하듯 짧게 친 검은 머리카락이 목 위로 뻗쳤고, 둔탁한 색채의 자수정빛 눈동자는 가라앉아 얼핏 보면 우수에 차 보이기도 했다. 블렌은 창 밖을 바라보다가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서 고개를 돌렸다. 오늘도 어김없이 이 곳은 눈이 내린다. 일년 사시사철 눈이 내리거나, 눈이 쌓여있거나, 아니면 눈이 녹아가거나, 모든 것이 다 눈 뿐이었다. 지겹고 지루하다.
-줄리아. 여기 있던 그릇 못 봤어?
이쯤 걸어가다보면 저택의 복도를 거닐다가 익숙하지 않은 풍경을 발견한 블렌이 옆에 있던 하녀에게 말을 걸었다. 줄리아는 허둥거리며 양손을 공손히 모으고 블렌에게 인사했다. 인제 막 저택에 들어온지 한달이 채 지나지않은 신입 하녀인 줄리아가 제 자랑을 하듯이 밝은 표정으로 블렌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아, 그거라면 찬장에 넣어놨어요, 도련님.
-그건 거기에 두고 싶어서 거기에 둔 물건이야. 다시 꺼내놔.
그러나 그 밝은 표정은 오래지 않아 얼굴 위에서 사라졌다.
-알겠습니다, 도련님.
-여기 온지 얼마 안 됐지?
-예...
-물어보지도 않은 정리는 하지마.
블렌은 매섭게 쏘아붙인 뒤 할 말을 다 했다는 듯 줄리아를 스쳐 지나갔다.
저택의 하인들은 하나같이 블렌을 껄끄럽게 여겼다. 정확히 말하면 최대한 그 앞에서 티를 내려하지 않았지만, 그건 숨겨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남작이 업무로 저택을 비우고 나면 넓은 저택엔 이상스런 침묵이 감돌았다. 이 작은 도련님은 남작 앞에서는 그리도 유순한 표정으로 어떠한 모난 행동도 하지 않다가도, 도대체 어느 부분에 있어서 심기가 불편해지는 것인지 유난히 주변 사람들에게 까칠하게 굴었다. 단 둘이 있으면 별 것 아닌 말을 나누는데도 이상할 정도로 숨이 막힌다며, 사용인들은 블렌의 시중을 드는 것을 조금 버거워 하였다. 남작의 강요 아닌 강요로 성 앙달람 신학원에 입학 지원을 넣어 신학을 배우게 되면서는 그 성질이 더 매서워졌다. 그는 평이하고 지루한 것을 질색했는데, 이슈가르드의 신학과 정교도는 '평이'하고 '지루한' 것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종류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동급생들은 동급생대로 그가 신학의 신 자도 모르면서 부유한 귀족 자제라는 이유로 돈을 이용해 입학생으로 꼽아졌다며 불쾌히 여겼고, 블렌은 그런 말을 불쾌히 여기는 대신에 신경쓰지않고 무시하는 것으로 마음의 가닥을 잡았다. 신학원 생활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지겨워 억지로 그 곳에 다녔다.
-형.
-또 그 '산책'을 하자는거야? 너도 참 질리지도 않는구나.
주일, 저택에만 있기엔 숨이 막혔던 블렌이 찾은 곳은 카셀 디나 마이어의 거처이다. 기척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생이 익숙한 듯, 책상에 앉아 양피지 위에 누구한테 보내는지 모를 전언을 빼곡히 끄적이고 있던 카셀이 블렌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블렌이 책상 옆에 비스듬히 허리를 대고 몸을 기댔다. 그리고 재촉하듯 손가락으로 툭, 툭 카셀이 갈무리하고 있는 양피지를 건드린다. 카셀은 난감한 듯이 양피지를 제 쪽으로 더 끌어당겨 블렌의 손가락을 피하며 말한다.
-오늘은 너랑 어울려주지 못 해. 내일 이 시간까지 끝내야 할 업무가 꽤 많이 남아있거든. ...그리고 이제 아버지도 뭐라고 하지 않을거야. 네가 무슨 어린애도 아니고.
-혼자 가기 심심하니까 그러는거지. 이것저것 떠드는 거 재미있잖아.
-말을 말아라. 네가 언제 나랑 떠드는 걸 좋아했다고 그래?
대답하는 대신 블렌은 카셀을 보고 눈매를 휘며 웃어보였다. 카셀은 이럴때면 정말이지 제 동생이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가 산책을 다니고 싶어하는 구름안개 거리는 최후의 보루와 맞닿아 있는 곳으로, 용들이 침략해 올 때마다 세워둔 건물이 무너지고 복원에 도움을 받지도 못 해 지금은 이슈가르드 성도 사람들 중에서도 최하층 빈민들이 보금자리를 꾸려 빈곤하게 살아가는 구역 중 하나였다. 자연히 산책을 나가기에는 좋지 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블렌은 카셀의 업무 때문에 처음 구름안개 거리를 구경할 수 있었던 열세살 이후로 꾸준히 이 곳으로 산책을 나가길 희망하는 것이다. 카셀 역시도 블렌을 따라 그 산책길에 동행하길 몇번이었지만, 언제 발을 디뎌도 그들 형제는 구름안개 거리의 모든 것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별세상 것을 본다는 시선도, 동냥하는 빈민들의 모습도, 꾀죄죄한 옷차림들도 하나같이 카셀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 거리의 어떤 모습이 블렌을 사로잡았는지, 카셀은 자신은 절대 알 수 없을거라고 생각했다.
-산책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슬슬 무얼 할지 가닥이라도 잡아 보는게 어때. 너도 내후년이면 성년이잖아. 되고 싶은 건 딱히 없는거야?
-형도 잔소리야? 너무한걸... 이제 기댈 사람이 아무도 없네.
블렌이 장난 어린 볼멘소리를 하며 뒤로 조금 물러났다. 갑작스레 꺼낸 말이긴 했지만 카셀은 어느정도 진심이었다. 블렌 디나 마이어가 별종인 것에는 제 일 말고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 망나니 인것에도 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귀족이라면 응당 귀족다운 처세가 필요한 법인데, 블렌은 어린 나이인 것을 감안해서도 너무 자유롭고 어떤 것도 하지 않으려 들었다.
-지금 배우고 있는 신학은... 허. 네 표정을 보니 말을 안 해도 알 것 같고.
신학의 신 자를 듣자마자 표정이 바뀌는 동생의 얼굴을 보고 카셀이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마무리했다.
-살기 팍팍하면 신을 믿게 되는거야.
지겨워.
끝말은 씹듯이 내뱉어진다. 블렌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그것이었다. 지겹다. 저 말을 들을 때마다, 그리고 그가 구름안개 거리의 산책에 집착할 때마다 카셀은 블렌이 어리기 때문에 평이한 일상을 행복이라고 생각하지 못 하는 걸수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런 말을 불쾌히 여길 것을 알기에 부러 이야기 하지 않았다.
더 기다려도 오늘은 동행해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는지, 블렌은 미련 없는 표정으로 목을 양 쪽으로 꾹꾹 힘주어 누르더니 왔던 방향 그대로 다시 문을 나섰다. 등을 보이며 손을 들어 낮게 팔랑거리는 모습을 보다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위해 깃털펜을 들었던 카셀은 어쩐지 거북한 감정이 스쳐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타르처럼 끈적거리는,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을 이유없는 불안감이었다. 혼자 간다고 낯선 사람들과 부딪치거나 하는 일은 없겠지. 사리분별은 하는 아이니까... 다시 고개를 들었으나, 블렌은 빠른 걸음으로 사라져 발소리조차 남기지 않은지 오래였다.
구름안개 거리에는 낮부터 할 일 없이 나동그라져 있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집과 거리의 경계가 희미한 사람들, 어딘지 모르게 결여되어 사회에서 튕겨져 나온 이들. 거리의 이름답게 언제나 낮은 안개가 도처에 깔려있는 이 곳을, 블렌은 처음 형을 따라 발을 디뎠던 1년여 전부터 좋아하였다. 2개월 전부터는 다른 이유로 이 곳에 발을 들였지만...
블렌은 제게로 휘번덕 넘어오는 초췌한 시민들의 시선들을 등 뒤로 넘기며 거리의 배경을 한 눈에 담는다. 저 한 쪽 구석에서 이 쪽 구석으로, 느른한 시선이 한 번에 돌아갔다.
'아. 있다.'
폐자재가 널부러져 있는 구석진 벽에 퍼질러 앉아있는 한 사람이 블렌의 눈에 띄었다. 블렌이 보고 싶었던 그 사람이다. 녹슨 화구를 옆에 두고 청색 돗자리 위에 그림 몇 점들을 걸쳐둔 남자. 남자는 블렌이 올 때마다 거리에 나앉아 그림을 그리거나, 손으로 간단한 목공품을 깎고 있었다. 이런 빈민가에 사치스럽고 도움 안되는 예술품을 살만한 위인이 있을 턱이 없는데. 그는, 정확히 말하면 그의 그림은 처음 본 순간부터 블렌의 시선을 잡아 끌었다. 싸구려 물감을 사용해 탁한 색감 속에서도 희한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무언가가 있다고 블렌은 생각했다.
카셀이 있을 때에는 그가 이상히 여길까싶어 일부러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 기회가 없었지만, 혼자 이곳까지 온 이상 블렌은 꼭 저 사람과 대화를 나눠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성큼성큼 남자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갈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뻗쳐 길러져있고 체격이 호리호리해 혹시 여자인가도 싶었던 그 화가는, 가까이서 얼굴을 살피니 미려한 구석이 있어도 남자로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길게 기른 앞머리는 한 쪽눈을 가렸다. 제게 다가올 줄 몰랐는지 지나치게 당황한 입매로 고개를 푹 숙인다.
'어라.'
블렌 디나 마이어는 그 파리한 얼굴에서 이상한 기시감을 느꼈다. 어디서 본 것만 같은 얼굴. 가슴 한 가운데를 눌러내는, 익숙한 기시감. 그러나 그 이유는 알지 못 한 채 이상한 기분을 떨쳐내며 손짓으로 남자의 그림을 가리켰다.
"이건 뭘 그린거야?"
블렌은 선명한 푸른색과 청회색이 자연스럽게 절반씩 그라데이션 되어 있는 그림을 가리켰다.
"그,그,냥 추,추상화예요."
남자의 얼굴 위로 떠올랐던 당황한 표정이 블렌이 그림에 관심을 보이자 더욱 더 짙어졌다. 남자 역시도 블렌이 초면이 아니었다. 그냥 잊어버리기엔 블렌은 옷차림도 고급스럽고 행동거지에도 귀족의 제스처가 자연스레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곳에 어울리지 않았고, 그렇기에 남자에게도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얼마정도 하는데?"
"저,어,정,정해진 가,가격은 없,어요."
정확히 말하면 팔 생각으로 들고 있던 그림이 아니다. 남자라고해서 누군가 이 그림을 살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자의 목소리는 군더더기가 없었으며, 처음 듣는 블렌이 속으로 놀랄만큼 투명한 미성을 띄고 있었다. 그런데 말더듬이라.
"이렇게 하자. 그 그림을 비싸게 살게. 대신에 내 말동무가 되어주는거야. 어때?"
그러면서 블렌은 번쩍거리는 금화 한 닢을 손에 꺼내어들었다. 주변의 다른 이들이 보지 못 하게 손바닥 안에 감추어서. 이보다 좋을 일은 없을 거라는 표정이다. 대번에 휘둥그레 뜬 큰 눈으로, 남자는 블렌에게 고개를 미친듯이 저어보였다.
"...! 금화라니! 그리고 저, 같은 마, 말더듬이가. 말동무,라니, 그, 그, 그건 안 될 말이죠."
그러면서도 남자의 눈은 블렌이 내민 금화에서 떨어질 줄을 모른다. 말과 다른 솔직한 시선에 블렌이 샐쭉하게 웃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남자다.
"받아."
"하, 할 말도, 없어요. 저는 재미도 없, 없고..."
"말 안 해도 되는데. 아니면 자릿세 준다고 생각하던가."
남자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일이 자기에게 행운인건지, 그리고 행운이라면 왜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고민하였다. 소위 말하는 잘 나가는 도련님의 변덕스런 감정을 자신이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리가 없으니, 고민은 무색한 일 일것이다.
"......."
그래서 남자는 시선을 거두고 고개 숙여 제 그림을 바라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블렌은 기쁜 얼굴로 그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꺼내 들었던 금화는 그의 바지 주머니안에 슬며시 찔러넣고서 말이다.
블렌은 약간의 대화를 통해 남자의 이름을 알아낼 수 있었다. 남자의 이름은 노아라고 했다. 노아 딜테인. 그는 왜소한 체격으로 블렌보다 세 살이 더 많았다. (형으로 불러도 되냐는 말에, 노아는 당신이 나한테? 왜요? 하며 어이 없어 하였다.) 노아는 정말 마지못해 제 이름을 뱉었다. 그리고 더욱 더 깊이 고개를 숙이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제 이름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그,그러고 여기까지 오는거... 위험해요."
저들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무리가 서너번 반복되고나서, 그는 양다리를 두 팔로 그러모은 채로 시선을 바닥으로 멀리 떨어뜨리고 입을 열었다. 블렌을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아하면서도 그냥 둘 수는 없는 눈치였다.
"오늘은 가,같이 다니던, 사람도 없,없잖아요."
"오. 알고 있었어? 왠지 기쁜걸..."
블렌이 반색하며 대답하자 노아는 곱게 뻗어있던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받았다.
"다,당신들 여기서 유명해요. 당신 여기에 우,우릴 구경하러 오잖아요. 고깝게 보는 사람 한둘이 아니니까 산책길 조,조,심해요."
그 말에 블렌이 아하하!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산책길 조심하라는 말이 왜 그렇게 웃긴지 자신도 알 수 없었지만 웃음이 나왔다.
"...웃지말아요. 노, 농담하는거 아니야. 애초에 왜 여,여,기서 어,얼쩡거리는 거예요? 귀한 귀족 자제분, 아니신가?"
블렌이 마지막까지 큭큭 웃음을 삼키는 걸 듣고서, 남자는 조금 발끈하며 말을 끝마쳤다. 나름대로 빈정거림도 섞이어 있는 말투였다.
찌푸린 눈매 사이에 반짝이는 푸른 눈동자가 퍽 예뻐보인다.
"글쎄... 여기 오면 기분이 좋아졌거든."
"당신 막, 변태같은 거, 거예요?"
노아의 진지한 대꾸에 블렌이 다시 배를 쥐고 웃어대었다. 노아의 귀끝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블렌이 붉어진 귓볼에 자연스레 손을 대자, 노아는 화들짝 놀라 제 귀를 부채질하던 손으로 그 손을 밀어냈다.
"아. 잠깐만."
블렌은 언뜻 보인 '무언가'를 놓치지 않았다.
노아의 옆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며 언뜻 보였던 숨겨진 눈동자. 그것을 다시 보기 위해, 블렌은 밀어내는 손을 치워버리고 다소 예의 없이 그의 머리카락을 옆으로 넘기었다. 앞머리에 가려진 왼쪽 눈동자는 아주 옅은 청회색을 띠고 있었다. 선명히 파랗던 반대편 눈과는 다른 오드아이다.
블렌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노아의 두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노아가 할 말을 잃고 두 눈을 깜박거리다가, 블렌의 시선이 불편한 듯 다시 고개를 숙였다.
"아하."
그 눈동자에서, 블렌은 쉽게 방금전 보았던 추상화를 유추해낸다. 이 젊은 화가는 제 눈동자를 보고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오묘하고 빨려들 것만 같았던 그 그림의 모델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모델이 자신이란 걸 들키고 싶지 않았던게 분명했다. 그게 민망했던지 붉어진 귓불은 그뒤에도 한참동안 사그라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블렌은 그의 붉어진 귓볼과 서서히 이어서 발그레해지는 뺨을 보면서,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념에 빠져들었다.
"왜 부끄러워 하는데?"
"예?"
"내가 본 그림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인데..."
그리고 그림의 모델도. 아무렇지도 않게 덧붙이자 노아의 얼굴에 희미하게 난처한 기색이 피어올랐다. 그는 진심으로 당황해서 그전보다 더 떠듬거렸다. 부정하고 싶어했으나 빙긋빙긋 웃는 블렌의 얼굴을 보고 부정할 마음을 접어버리곤 고개를 돌리었다.
"고개 돌리지말고 여길 봐."
흠칫하며, 노아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블렌이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띤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나 네 그림이 갖고 싶어졌어. 다음엔 진짜로 너를 그려보는 건 어때, 노아."
그런 그림을 준다면, 오늘 준 값의 세 배를 줄게.
이어서 들려온 말은, 노아 딜테인에게 있어선 정말이지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자리만 아니었다면 펄쩍 뛰었을 것이다. 블렌의 안색을 봐서는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 하지만..."
"그걸론 부족해?"
노아가 손사래를 쳤다. 이미 금화 한 닢의 값어치만 해도 일주일의 식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부족할 일이 있을 턱이 없었다.
"넘,넘쳐서 문제인걸요! 내, 그, 그림이, 뭐, 뭐라고..."
노아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객관적인 사람의 시선으로 보자면 노아의 그림 실력은 크게 좋은 편은 아니었다. 사람들은 이 빈민의 그림 열 점을 살 바에야 이름난 화가의 그림 한 점을 살 것이다. 그러나 블렌은 빈말이 아니었다. 블렌은 노아의 그림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하얀 목덜미를 보면서, 블렌은 그림이 얼마나 조잡하던지간에 노아 딜테인이란 사람이 그렸다는 하나만으로 어쩐지 시선을 끄는 그림들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선 어쩐지 익숙하고 그리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그에게 드리워진 묘한, 처연한 분위기도 말이다. 블렌 디나 마이어는 그 익숙한 기시감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왜 낯선 남자에게서 그러한 기분이 느껴지는 것인지. 그것은 오랜만에 느껴지는 흥미로운 감정이었다.
블렌이 더욱이 다정해진 목소리로 노아에게 물었다.
"널 그리는데에는 며칠이 필요하지?"
"......."
노아가 쉬이 대답하지 못 하고 어물거렸다. 그러나 거절은 하지 않는다. 길다면 긴 시간을 블렌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이윽고 노아가 눈을 굴리며 입을 열었다.
"별로 저,정성들일, 그, 그런, 것은 아니지만 파,팔,아야 되는, 건 정성들여야, 하니까, 3주일이면..."
아무래도 부끄러울 수록 말 더듬는 버릇이 더 심해지는 모양이라고, 블렌은 생각했다.
저택에 돌아오자마자 블렌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제 방에 노아가 그린 그림을 거는 일이었다.
그림은 침대 맞은 편 벽면에 걸렸다. 이전까지 그는 방 안에 그림을 거는 일이 없었다. 무채색이었던 방 안에 처음으로 색채가 일었다.
예쁜 눈이었지.
블렌은 의자에 앉아 그 그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생각했다. 만족스럽고 충만된 얼굴이다.
하인들은 반대로 블렌이 제 가슴팍에 소중히 안고 들고온 그림을 벽에 걸어둔 것을 보고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에 머뭇거렸다. 벽에 걸린 그림은 저택의 다른 명화들과는 궤를 달리하고도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의 만족스러운 표정은, 하인들로 하여금 괜히 화를 입지 말고 서로 조심하자며 말을 아끼게 하기에 충분했다. 블렌은 하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 들어 그림을 빤히 보고 있었다. 오래도록, 창문 아래로 길어진 그림자가 조금 짧아질 때까지.
이윽고 제 방 문을 닫고 , 블렌이 무릎으로 기어 벽면의 그림과 시선을 맞췄다. 그는 그 위에 가만히 입술을 내리 눌렀다. 마치 그게 다른 무언가라도 된다는 듯이.
*
"...그래서, 3주 뒤에 그림을 찾으러 가기로 했어."
"생각보다 귀여운 사람이야."
"그리고 흐음, 되게 예쁘게 생겼더라."
블렌의 말을 일방적으로 들으며 페이지를 넘기고 있던 카셀이 마지막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 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였다. 마치 자신이 무엇을 들은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는 블렌의 말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구름안개 거리의 화가라면 자신 역시도 안다. 그 거리에 갈 때마다 동생이 온통 시선을 빼앗기는 사람을 자신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아무리 노동할 수 없어 보이는 몸이라해도 그림 그리기 같은 생산성 없는 일을 하다니, 배가 덜 고팠군, 따위의 감상이 느껴졌었다.
그 남자에 대한 카셀의 감상은 블렌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카셀이 봤을 때 남자는 보기싫게 말랐으며,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고, 머리카락은 푸석푸석하고, 눈빛만은 형형해서 오히려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짙은 눈 밑 그늘이 표정을 피곤하게 만들고, 깊게 드리워진 병색이 완연했던 남자다. 남자를 빈말로라도 예쁘다고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블렌의 얼굴은 무엇보다 만족스러워 보여서, 카셀은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예쁘게 생기진 않았던 것 같은데."
감상의 괴리에 한마디 하는 것을 참을 수 없었기에 했던 반박이었으나 블렌은 들리지 않았다. 사실 별로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다. 뭐라하여도 노아 딜테인의 그 눈과 표정을 본다면 카셀 역시도 같은 감상일거라고 생각했다.
카셀은 이런 걸로 더 얘기해봤자 서로의 입만 아플거라고 생각했다. 동생이 유난히 그 화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 같다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으나 이내 자신의 기우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더 이야기하지 않고 같은 공간에서 기묘한 시간을 흘려보냈다.
오랜만에 눈 대신 해가 난 날이었다.
*
3주동안, 블렌은 자신이 꽤 충실한 하루하루를 보냈다고 자언했다. 그건 꽤나 머리 좋은 선택이었다. 구름안개 거리에 가는 것도, 그림을 사오는 것도 자신의 마음대로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신학원 수업엔 한 번도 빠지지 않았으며 깐깐한 칸탕 교수나 자신이 실수라도 하지 않는지 벼르고 있는 동기들에게 트집 잡힐 일도 하지 않았다. 마음은 딴 곳에 가있었지만 블렌은 남들 눈에 다른 어느 때보다 더 하루하루를 구체적으로 보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변화를 가장 마땅히 여겼던 건 마이어 남작이다. 그는 직접적으로 티를 내진 않았지만 신학원이 지겹다고 투덜거렸던 아들의 변화가 못내 반가웠다. 블렌이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하고 싶어하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남작은 블렌이 사온 쓸 데 없는 그림 한 점 정도야 머리 속에서 지워낼 수 있었다. 뭐가 어떻든 행동만 바르게 한다면 다른 것이야 상관없었다. 아들이 저런 특이한 행동을 하는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남작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위 말하는 '완벽해보이는' 3주가 지난 후, 블렌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층으로 향했다.
블렌이 서둘러 돌아온 거리는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사람들은 의욕이 없었고 하나같이 초췌하다. 블렌은 그들 틈바구니에서 같은 자리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노아 딜테인을 발견하곤 상기된 얼굴로 그에게 다가갔다. 노아 역시도 자신에게 다가오는 블렌을 발견했는데, 그는 어째선지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아..."
노아가 고개를 수그려트렸다. 항상 가지고 있던 그림들을 다 널어놨지만, 블렌이 부탁했던 그림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지 않은건가? 흠, 하며 눈을 가늘게 뜨자 노아의 변명이 이어졌다.
"...그, 그렸어요! 다, 그, 그리긴 했는데... "
노아가 몸을 꼬며 말을 더듬었다. 이내 결심한 듯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남들 앞에 두,두는게 부끄러워서..."
노아는 그 날 집에 돌아가자마자 쉬는 시간 없이 계속, 계속 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마지막 붓질 한 번을 끝으로 완성하고나서야 이것을 어떻게 들고가야 되는지 고민하게 되었다. 추상화 정도야 얼마든지 그려서 내놓을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자기 자신을 그려 길가에 두는 것은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던 탓에 차마 집에서 그 그림을 들고 나올 수 없었다.
"그냥... 돈 안 줘도 괘... 괜찮아요. 초상화라니, 역시 이, 이상해서."
그러더니 노아는 제발 그냥 지나쳐달라는 듯 애절한 표정으로 블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런 말로 지나쳐줄 블렌이 아니었다. 블렌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이상한 이유를 다 대네. 난 네 그림이 가지고 싶어서 여기까지 온거야."
그러더니 소매까지 걷어올리며 노아에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정 문제가 되면 내가 그걸 가지러 가겠어."
"저, 저희, 집이요?"
"그것까지 안 된다고 하지는 않을 것 아냐."
의뢰자가 그렇게까지 하겠다는데 노아가 그걸 막을 이유가 있을리 없었다.
*
노아의 거처는 자신이 자리 잡은 장소에서 크게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구름 안개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 그의 집 역시 집보다는 지붕이 있어 눈을 피할 수 있는, 잠을 잘만한 공간만 간신히 만들어진 그런 거처에 가까웠다. 그것을 집이라 부를 수 있다면, 집 안은 습하고 불결했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잠자리와, 낡은 붓과 굳어 갈라진 물감들이 도처에 널려있는 더러운 자리. 그것들이 분리되지 않고 한 데 얽히어 있었다. 굳이 신발을 벗을 필요도 없어보여, 블렌은 허리 숙여 그 안으로 들어오다가 뺨 위로 뚝 떨어지는 물을 맞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 봤다. 삭은 목재 틈새로 녹아내린 눈이 물방울로 떨어져 닿은 것이었다. 벽 한 켠에 천으로 덮이어 세워져있는 캔버스 쪽으로 저절로 시선이 옮겨 간다.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서 블렌이 악의 없이 노아에게 물었다.
"네가 사는 곳이야?"
노아는 부끄러움으로 달아오르는 얼굴을 숨기기 위해 앞머리를 더욱 앞으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집에까지 데려와놓고 보니, 저와 이 남자의 차이점이 더 명확히 드러났다. 노아는 혹시라도 제 집 안의 얼룩이 블렌의 옷에 묻진 않을까 싶은 생각에 신경이 곤두설 지경이었다. 정작 블렌은 신경쓰이지 않는다는 듯 종횡무진이었다. 블렌이 캔버스 앞에 서서 그림을 가린 천을 손으로 걷어내었다. 회색 천이 바닥으로 흘러내리며, 블렌의 눈 안에 노아가 그린 그림이 들어찼다.
"......."
그 그림 속의 노아 딜테인은 마치 실제로 블렌의 옆에 지금 존재하는 노아 딜테인처럼, 잔뜩 긴장해 있는 표정으로 어정쩡하게 앉아 있었다. 마치 자신이 왜 여기에 그려져 있는지 모르겠다는 모양새로 말이다. 그림 속의 노아는 말끔한 귀족 자제의 복식을 하고 있다. 그 차이에 블렌의 고개가 조금 옆으로 기울어지자, 노아가 그 옆에서 변명하듯 떠듬거렸다.
"그, 그래도, 드릴, 그림인데. 그,그리다 보니까, 제 옷이, 너무, 더러워서..."
블렌이 그림에서 눈을 떼고 노아를 쳐다본다. 마른 손가락들이 서로 갈 곳을 잃고 꼼지락대고 있다. 또다. 이런 순간에 자신은 이 젊은 화가를 퍽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게 된다. 블렌은 신경쓸 것 없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좀 더 가까이서 그림을 보기 위해 노아를 두고 그 쪽으로 다가간다. 거의 얼굴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블렌은 그림을 눈에 담았다. 한참 그림을 보던 블렌이 재미있는 것을 찾았다는 표정으로 노아에게 다가와, 그가 무어라 반응하기도 전에 멋대로 목가에 손을 뻗었다.
"...아, 아?"
당황한 노아가 잔뜩 긴장해 움츠려트리자, 블렌이 제 손가락으로 훑어낸 노아의 목가를 가리키며 꾹, 가볍게 누르곤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있구나. 너 정말 목가에 점이 있어."
노아는 갑작스레 닿은 손이 불편했으나 그걸 블렌에게 티낼 정도로 자신이 멍청하진 않다고 생각했다. 무어라 대답해야 될지 몰라 얼타있는 노아에게 블렌이 처음 말했던 것의 두 배 정도되는 금화를 아무렇지도 않게 건네었다.
"예, 예?"
"마음에 들어. 더 얹어줄게, 노아."
"하, 하지만."
"저것이랑 네가 정말 똑같아. 예뻐."
"......."
"한 점 다른 것 없이 깨끗하구나."
그렇게 말하며 블렌이 노아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림을 가까이서 보았던 것처럼, 똑같은 행동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노아는 성큼 들어선 블렌의 얼굴에서, 그 중에서도 선연하고 깊은 보랏빛 눈동자를 보고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고요하게 타오르는 눈동자 속의 염원이 노아에게는 보였다. 그리고 노아는 그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림 속의 자신은 정말로 말 그래도 '자신'이다. 그리고 자신은, 누군가를 저렇게 바라보게 만들 몰골이 되지 못 했다. 블렌이 말하는 아름다움이나, 깨끗함이라던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인 것이다.
"저... 이런 해, 행동은, 조금... 오해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쓰며 간신히 말하자 블렌에게서 웃음 소리가 터져나왔다.
"무슨 오해 말야? 하하하... 정확히 '무슨' 오해를 말하는 거야?"
"다, 당신이 나를, 좀, 이상하게, 본다던가... 하는 그, 그런, 오, 오해요! 도대체가 왜... 읏. 크윽. 콜록..."
"
놀리는 것처럼 낄낄거리는 그 모습에 노아가 이를 악물고 제 말을 끝마치려했다. 이변은 그때에 일어났다. 블렌이 더 웃어대자 노아는 신경질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다 제 입을 다시 틀어막고 기침을 쏟아냈다.
블렌은 웃다말고 노아의 등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금방 멎겠지, 싶었던 기침은 이상할 정도로 오랜 시간 이어진다. 블렌은 웃음기 사라진 얼굴로 노아의 얼굴을 응시했다. 노아의 눈가에 생리적인 눈물이 맺혀 흘렀다. 그는 다분히 고통스러워보였다.
"노아?"
"죄, 죄송해요. 그, 그냥, 요즘 더 심해져서..."
"요즘 더 심해졌다는게 무슨 소리야?"
기침 소리가 사그라들고, 노아 딜테인은 별로 이야기 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멀찍이 자리를 잡고 앉아 블렌의 눈치를 살핀다. 블렌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인내심 있게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손등으로 닦아낸 입가에 피가 조금 묻어있는 것을 보았다. 잠시간의 침묵 끝에 노아가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보면 아시겠지만, 저, 저는 어릴 때부터 몸이 약해서... 어, 어머니랑, 누나랑, 살았는데."
그 말은,
"두, 둘다. 저, 저, 저번. 용들의 치, 침략 때. 죽어가지고. 그, 근데, 그런데 제, 벼, 병이. 이게 점점 심해져서, 살도 점점 더, 빠,지고. ... 이, 일같은. 일도. 못 하니까요."
블렌에게 말한다기 보다는 허공에 대고 흘려보내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였다.
"조금, 자포자기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서... 그, 그림을, 그리면, 그, 그림 안에 내가, 남으니까요. 사, 사라지지 않고... 그, 그럼... 어쩐지, 괘, 괜찮은 것 같아서."
노아가 실없이 웃음을 흘리며 제 머리를 감싸쥐고 고개를 숙였다. 금방 죽을 사람이라는 걸 참으로 길게도 말하고 있구나 싶었다.
"내가 대, 대체 당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는거지? 본지 어, 얼마나 된, 사람이라고..."
제멋대로 떠드는 것을 보아하니 자신이 꽤나 사람을 못 만나보긴 했나보다, 생각하면서.
블렌은 노아의 끝말은 듣지 못 했다. 그는 노아의 말 중에서도, 그림 안에 자신을 남기기 위해 그린다는 그 말에 사로잡혀 노아 딜테인의 초상화에 다시 시선을 두었다.
아, 그래서 네 그림이 그렇게도 아름다웠구나. 그래서 네가 그렇게 깨끗해보였어. 블렌은 속으로 생각하며 황홀한 마음을 가졌다. 동정심이나 연민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이윽고 벼락에 맞은 듯한 깨달음이 블렌 디나 마이어를 엄습해왔다. 그를 처음 본 순간 느껴졌던 기시감, 말이다. 처음 보는 사람 같지 않던 그 익숙한 기시감은, 죽음을 눈 앞에 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인영에 대한 기시감이었다는 것을. 이보다 더 어렸던 시절, 자신은 그것을 눈 앞에서 목도한 적이 있다. 그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도한 적이 있으니 잊을 수 있을리가 없었다. 노아에게 드리워져 있던 것은 죽음의 그림자였다. 블렌은 자신이 그토록 확실한 죽음의 색깔에 끝없이 끌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들어 웃어보이는 노아의 얼굴엔 체념의 기색이 어려있었다. 노아가 하하, 웃으며 말을 이었다.
"뭐... 죽기보다 더 하겠어요?"
블렌은 웃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그런 말은 하지 말라고, 죽지 않는다던지 하는 말 역시도 뱉지 않았다. 블렌이 벽 위에 걸쳐 있던 그림을 가슴 안에 안아들었다. 소중한 것을 담아드는 모양새에 노아가 민망한지 다시 고개를 돌린다.
"가끔 찾아와도 돼?"
그 모습을 빤히 보고있던 블렌이 대뜸 노아에게 물었다. 그림이 아니더라도 노아 딜테인을 조금 더 곁에서 지켜보고 싶었으니까. 예상대로 노아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어리둥절해 한다.
"...왜요?"
"그림 그리는 걸 구경하고 싶어. 매일 감상비를 줄게. 너한테도 나쁜 일은 아닐텐데..."
노아는 블렌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었지만, 그의 얼굴은 태평하고 아무런 감정의 기복이 없었다. 그저 품에 든 그림을 더 힘주어 끌어안았을 뿐이었다. 저를 바라보는 블렌의 시선이 다분히 노골적이어서, 노아는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 귀족 도련님이 왜 자신에게 이런 무한한 관심을 주는건지 알 수 없는 데에서 오는,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그리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인가 알 수 없는 데에서 오는 불안감 또한 있었다. 그러나 '감상비' 따위로 이름 붙인 돈이 자신에게 꼭 필요한 돈이라는 것은 부정할 길 없는 사실이기도 했다. 노아가 몇 분 고민하지 않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블렌이 전에 없이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근데 노아는 내 이름이 궁금하지도 않은가보네."
"알고 이,있어요. 블렌..."
노아는 당연히 블렌의 이름을 먼저부터 알고 있었다. 얼마나 거리에서 한눈을 팔았던지, 블렌의 옆에 있던 남자가 몇 번이고 블렌, 블렌하며 그의 이름을 인내심을 가지고 불렀던 것이다. 블렌은 노아가 어떻게 이름을 알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고, 그저 제 이름을 알고 있는게 기쁘다는 듯 웃어보였다.
"...알고 있었어? 넌 계속 나를 놀라게 해. 근데 왜 이름으로 부르지 않아?"
"그냥..."
또다. 또 고개를 숙이는군. 블렌이 노아가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몇 주전에 보았던 두 눈동자가 정말 예뻤는데, 노아의 앞머리는 너무 길어서 잘 보이지 않는게 불만이었다. 블렌은 다음에 올 때는 머리라도 잘라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
"너 정말 예쁘다."
블렌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노아는 그보다 더 놀라지 않은 표정이 없었다. 무슨 소리를 하냐며 웃어 넘기려 했지만 블렌은 더 없이 진지하게- 정말 예뻐. 정말로. 하고 중얼거렸다. 노아가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방황하는 꼴을 본 블렌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었다.
"그림 잘 가져갈게. 노아. 내일 만나."
"...내일이요?"
"될 수 있는 한 매일매일 여기에 올거야."
그렇게 하고 싶으니까. 블렌이 나직이 덧붙인다. 아마도 저택의 사람들은 자신이 내내 이상한 곳으로 나돌아다니는 걸 금방 알아차리고 말 것이다. 신학원도 그전처럼 꾸준히 나가지 않을지 몰랐다. 그러나 블렌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는 노아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면 안 돼?"
마치 제 반응에 상처받았다는 듯이 구는 모양새를 보고 노아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어쩐지 블렌의 행동이 마냥 싫지는 않아 부정하지 않고 고개를 옅게 끄덕였다. 끄덕이는 머리를 보고 블렌이 다시 환한 미소를 짓는다.
.
"그림 때문에 안아줄 수가 없네. "
"아, 안기고 시, 싶지도, 않아요. ...!"
노아가 질색하며 팔을 휘저었다. 블렌은 자신의 몇주간 일정 중에서 이렇게 많이 웃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것을 알면 노아가 어떻게 생각할런지가 궁금해졌다. 대다수의 경우 그는 웃음이 헤픈 사람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도 노아와 함께 있으면 적던 많던 어떤 식으로라도 웃음이 나오게 된다. 블렌은 이 흥미로움이 오래가길 바라며 낡은 대문을 지나 밖으로 나섰다. 그는 지루함이나 지겨움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곁에 두어야 될 사람이다.
*
저택에 돌아온 블렌 디나 마이어가 제 방에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낸 그림에, 하인들 모두가 의문을 가졌다. 누군가 참지 못하고 그림에 대해 물었으나 블렌은 쓰잘데 없는 것을 궁금해하지 말라는 표정으로 넘겨버릴 뿐이었다. 카셀만이 그 그림의 주인을 알아보고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그 역시도 블렌에게 직접적으로 그 화가에 대해 묻지는 않았다. 그리고 부디 제 동생이 어떤 식으로라도 마이어 가의 선을 넘지 않기를 바랐다. 카셀은 그저 동생에게, '다른 일에 너무 집중하지는 마'라는 말 한마디로 제 의견을 대신 전달하려 했다. 블렌이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는게 문제라면 문제였었다.
노아는 블렌이 자신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처음 대화했을 때부터 쉽게도 저를 찬양하는 말을 입에 담았다. 그 이유를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다. 그러나 블렌이 찾아오는 나날들이 그는 그리 싫지가 않았다. 그는 꽤 좋은 감상자였고 가끔 제 신분을 생각 못 하고 내뱉는 말 또한 악의가 없었고 크게 모나게 하지 않았다. 단 한가지 부담스러운 것이 있다면 '감상비'라며 건네주는 과분할 정도의 돈 정도였다. 매일 볼 때마다 금화를 준다는 것을 만류하고 또 만류해서, 금화 대신 오천 길 정도의 금액을 받는 것으로 그들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었다. 블렌은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어느 순간부터 노아 딜테인은 블렌의 방문을 기다리게 됐다.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이에게서 그런 식의 황홀하다는 눈빛을, 그런 식의 '예쁘다'던지 '사랑스럽다'던지 하는 말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것 역시 싫지 않았다. 그게 단순한 호기심이던, 아니면 사랑이던지간에 상관없을 정도로, 블렌 디나 마이어는 노아의 영혼 안 쪽을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었다. 노아는 저도 모르게 블렌의 방문을 기다리게 되었다. 돈 때문이 아니더라도 돼지 우리같던 집 안 꼴이 점차 단정해져갔다. 노아는 이제 그림을 그릴 때 자신의 얼굴을 뭉뚱그려 뭉개 그리지 않았다. 그림은 점점 더 선명해져간다. 그리고 그림이 점점 더 선명해져갈수록, 반대로 노아 딜테인의 몸은 덧칠해진 물감의 양만큼 비워져가는 것처럼 보였다. 기침하는 시간이 길어져갔으며, 묻어나오는 혈액의 양도 점차 늘어만갔다.
*
"조금만 더 감고 있어. 눈에 머리카락 들어가면 안 되니까."
사각사각거리는 가위 소리가 기분 좋게 노아의 귓바퀴 옆에서 울리듯 지나간다. 죽어도 머리는 자르고 싶지 않다고 버팅겼으나, 블렌이 노아보다 더한 고집쟁이였던 탓에 버팅기는 것은 통하지 않았다. 이것도 돈을 받고 싶은거냐는 장난스러운 말에 노아가 먼저 백기를 들었다. 차가운 쇠의 촉감이 얼굴선을 스칠 때마다 노아는 눈이 떠지려하는 걸 겨우겨우 참았다. 블렌은 기분이 좋은지 허밍으로 한때 성도에서 유행했던 그 옛날의 노래가락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고 잘라낸 머리카락을 어깨 위에서 털어내는 손길이 기분 좋았다. 노아 딜테인은 점점 더 자연스레 블렌의 손에 몸을 맡기고 편안하게 숨을 내쉬었다.
"다 된 것 같아. 노아."
"......."
노아가 머리카락이 사라져 허전해진 눈두덩 위를 어색하게 쓰담아보다가, 블렌이 건네준 거울을 들고 제 얼굴을 살펴본다. 눈썹 위까지 자연스럽게 잘린 앞머리를 한 거울 속의 남자는 여전히 깡마르고 초췌해보인다. 제 눈으로 보기엔, 양 쪽 색깔이 다른 눈마저도 동물의 눈처럼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블렌은 무엇이 좋은지 실실거리며 웃는 얼굴이다.
"이게 더 좋아. 네 눈은 정말 아름다우니까."
나랑 있을 때는 눈. 가리고 그러지마. 블렌이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그는 알고 있을까, 저 말을 듣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자신이 정말 그렇게까지 아름다운 사람인지 착각하게 되버린 다는 것을. 노아 딜테인은 자신이 자신의 분수를 잘 알고 있다고 자신했지만, 그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들 정도로 자신에 대한 블렌의 다정해빠진 말은 확고하기만 하였다.
"이제 가, 가야죠. 슬슬 해도 저, 저물고..."
노아가 블렌의 웃는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시선을 돌리며 재촉하듯 말한다. 노아의 말대로 바깥은 어둑어둑하게 해가 지고 있었다. 깨진 창문 틈새로 노을이 쏟아져내린다.
"힉."
"왜 놀라고 그래."
"뒤, 뒤에서, 사람을, 안으면 누구라도, 노,놀라요."
등 뒤에서 노아를 답싹 끌어안은 블렌이, 노아의 어깨에 코를 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쉬는 행동에 노아가 긴장해서 어깨를 움츠려트렸다. 그 반응이 퍽 재밌었는지 블렌이 잘게 웃음소리를 내었다. 노아는 자신의 몸이 불결한 편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블렌의 행동에 수치심이 확 들어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비틀었다. 블렌이 그 꼴은 보지 않겠다는 듯 더 힘주어 끌어않았지만 말이다.
"씨, 씻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너한테서는 좋은 냄새가 나."
"...그, 거는 블렌의 코가, 좀, 이상한 것 아닐지..."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문득 블렌의 입에서 그러한 말이 흘러나왔을 때, 노아 딜테인은 몸을 비틀던 것을 멈추고 잔뜩 긴장한 눈동자로 바닥을 바라보았다. 묘한 정적이 흘렀다. 노아 딜테인은 저를 안고 있는 블렌이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게 대체 무슨 분위기인지 모르겠다며 의자에서 일어나 아무렇지도 벗어나려고하자, 블렌이 노아를 다시 품에 가둬 안아 발걸음을 몇 번 옮기어 매트 위에 눕혔다. 풀썩 쓰러져 누운 매트 위에서 그의 팔 안에 갇힌 노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노아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새빨개져 있었다. 블렌이 콧잔등 위에 가벼이 입을 맞췄다. 새가 부리로 쪼듯이 가벼운 입맞춤이 연달아 이어졌다. 노아는 설마, 싶은 표정으로 아무 행동도 하지 못 하고 굳어있다가 블렌이 재촉하듯이 두어번 옷깃을 잡아당기는 행동에 무얼 해야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블렌을 바라본다. 블렌이 환히 웃었다. 그리고 귓속말로 나직이 속삭였다.
벗어야지.
내가 그와, 이런 사이였던가? 자신이 왜 거절하지 못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다. 빠른 시일 내에 어쩐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자신은 암묵적으로 짐작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온 행동으로 자신에게 호감을 표했으니, 어느 순간 이런 날이 오리라는 걸 몰랐다는 쪽이 더 이상할 것이다. 그러나 짐작하고 있던 것이 현실로 넘어온 것에 대한 충격은 꽤 상당했다. 노아가 쉬이 옷을 벗지 못 하고 망설이자 블렌이 팔을 뻗어 노아의 옷을 위로 걷어내었다. 차가운 손바닥으로 하얀 살결을 어루만지며, 블렌이 그 위로 입술을 누른다.
소중하게 대해줄게.
그 목소리는 평소보다 배는 더 다정해서, 노아는 가슴 한 켠이 저릿해져 괜히 손 안으로 주먹을 움켜쥔다.
적어도 네가 나를 바랄 수 있을 만큼은...
*
"아... 아! 잠...깐, 아..."
"노아."
"으응... 아아..."
"너는 티 한 끌 없이 깨끗해."
그게 날 계속, 계속 미치게 만들어. 애타는 목소리로 말하며, 블렌은 노아의 구멍 안에 제 물건을 박아넣고 있었다. 꽉 들어찬 구멍은 주름진 틈하나 없이 펴져있었다. 숨쉬는 것에 맞추어 제 성기를 끝까지 밀어넣고 다시 빼낼 때마다 노아의 입에서 저조차도 예기치 못한 교성이 차례로 터졌다. 차라리 거칠기라도 했다면 그렇지 않았을텐데, 블렌의 손길 하나하나가 곧 부서질 것을 다루듯 부드럽고 다정했던 탓에 노아는 뇌가 녹아내리는 기분이었다.
"...여기 너무, 좁아... 노아."
반쯤 숨을 집어삼키며 블렌이 중얼거렸다.
"나 봐. 노아. 눈 뜨고 나를 봐."
블렌은 노아가 눈을 질끈 감을 때마다 인내심 있게 그리 말했다. 끊어지는 신음 소리와 함께 간신히 눈을 떠 마주한 블렌의 눈동자는 황홀함에 잠겨 있었다. 블렌은 제가 잘라놓은 머리카락 덕에 훤히 드러나는 노아의 두 눈동자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 위로 여러번 입술을 맞췄다.
열락이 이어졌다. 가슴의 돌기가 짓궃게 비틀어지고 입 안 가득 제 소중한 것이 품어지는 쾌락에 노아 딜테인은 몸을 맡긴다. 이래도 될까, 정말 이렇게 해도 되는건가? 이유 없이 덜컥 겁이나 블렌을 바라보는 노아의 눈동자엔 쾌감과 섞인 고통으로 인한 눈물이 자연스레 맺혀 있다. 블렌은 불안한 그 표정에 무슨 다른 생각이 들었는지 아프게 해서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그를 힘주어 끌어안는다. 어느새 그들은 입은 옷 한 점 없이 얽혀 있다.
*
"오늘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작은 창 너머로 어둑한 구름이 깔려 있었다.
노아가 이불을 온몸에 두른 채 블렌의 옆에 누워있다. 블렌이 뒤에서 그를 다시 끌어안으며 나긋하게 속삭였다. 손에 잡힌 가녀린 목어깨 위로 맥박이 뛰는게 느껴질 정도로 그들은 서로 가까이에 있었다. 노아 딜테인은 혈관 아래 뛰는 맥박마저 사라질 듯이 여리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생명이 기분좋아, 블렌은 그 느낌을 더 생경히 담기 위해 노아의 품에 더욱 파고들어온다.
노아는 블렌의 말에 조금 전까지의 열기도 잊고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돌아다봤다.
"하, 하지만, 블렌은..."
"좋아, 싫어? 그것만 말해, 노아."
이럴 때의 블렌은 다소 단호한 면이 없잖아 있다. 노아가 벌개진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리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
"나참. 왜 그렇게 부끄러워할까."
"...! 하, 하지, 마..."
"하지마?"
블렌이 장난스레 귓불을 깨물자 잔뜩 움츠린 노아의 입에서 긴장한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제가 지금 뭘 할거라고 생각하냐느니, 뭘 하지 말라는건지 정확히 말하라며 이죽거리자 노아의 얼굴은 이제 붉어지다 못해 파래지고 있었다.
"너랑 영원히 이렇게 있고 싶어."
"......."
"시간이 멈춘 것처럼. 쓸데없고 지겨운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게 내버려두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로."
노아는 블렌이 영원이란 말을 함부로 입에 담는다싶었다. 자신은 그정도의 단어가 붙을만큼 소중할 존재가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블렌은 진심이었다. 그는 사람의 온기를 처음 느껴본 것처럼 잔뜩 감상에 젖어있었다. 노아는 이 마음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블렌 역시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노아가 이해하지 못 하더라도 저와 함께 있어주길 바랐다.
노아는 관계 중에 블렌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여러번 불렀던 것을 계기로 자연스레 그에게 반말로 말하고 있었다. 스스로도 생경하긴 했지만 어째선지 블렌이 그 변화를 더 좋아했다. 어색하게나마 반말을 해달라며 좋아하기에 애써 입을 열때마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오, 오늘은, 그럼... 여, 여기서... 자고 가."
"정말?"
블렌이 눈웃음치자 노아는 침을 삼키며 시선을 피했다. 자신이 웃으면 저런 얼굴은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말. 하고 뒷말을 따라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럼, 더 해도 돼? 장난스런 목소리가 따라왔다. 이번엔 하지말라는 말 대신 정적 속의 숨소리만이 두 사람의 사이에 내려앉았다. 숨소리를 깨고, 블렌이 노아의 입술 위로 제 입술을 다시 겹쳐 품에 안는다.
"개같은 새끼!"
퍽, 하는 파열음과 함께 블렌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살벌한 광경에 저택의 공기가 순식간에얼어붙는다. 하인들은 재빨리 시선을 거두고 다른 일로 분주한 척 바쁘게 움직였다.
씨근거리는 남작의 어깨가 티나게 들썩거린다. 그는 분이 풀리지않아 다시 팔을 올렸다가 체면이라도 생각하는 것인지 이를 악물고 간신히 팔을 내렸다.
그러나 블렌은 예상했다는 듯이 돌아간 머리 그대로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고개를 바로해 제 아버지를 바라본다. 별 것 아니라는 눈빛은 기어코 남작의 성질을 건드리고말아, 그는 참지 못 하고 몇 번 더 아들을 손찌검했다. 블렌의 피부 위로 검붉은 피와 상처가 새겨진다. 카셀이 그들 사이로 끼어들어 남작을 만류할 때까지 일방적인 폭행이 계속되었다. 남작은 평소 아들들에게 손을 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러나 블렌을 미행해온 자가 넘겨준 이야기는 간단히 넘겨줄만한 일이 더더욱 아니었다. 씨근거리는 남작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검붉어진 블렌의 얼굴과는 퍽 대조적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하고선, 남작이 블렌에게 노기 어린 목소리를 쏟아냈다.
"네 나이에 외박이야 이상할 것 없지. 사내 새끼가 아랫도리 놀리는 것에 뭐라 할 생각도 없다. 응당 예쁜 여인과 놀아나고싶을 때지. 그게 추문이 될지언정 오래가진 않을 것이다."
으득, 하고 이가는 소리가 울린다. 블렌은 비스듬한 자세로 그 목소리를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블렌 디나 마이어, 장소가 구름안개거리에, 외박한 곳이 빈민 남자의 집이라면 또 다르지 않겠느냐? 너는 가문이 우스운게냐? 또 내가 우스운게지? 내가 얼마나 더 비웃음 당해야 한단 말이냐? 지긋지긋하구나! 너는 나를 욕보이고 싶어서 안달이 났어!"
너무 맞아 귓속에서 이명이 울리는 와중에도 블렌은 남작이 대충 어떤 것으로 화를 내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다. 가문, 명예, 비웃음, 추태...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목소리를 그냥 한 귀로 흘려 넘기며, 블렌은 속으로 노아 생각이 가득하다. 그리고 진열장 유리에 비친 제 뺨을 보며 생각한다. 검붉은 뺨은 흉이 지는게 이상하지 않을만치 끔찍하게도 부어올라 있다. 온 성도 사람들에게 소문낼 작정으로 나를 이 꼬락서니 만들어 놓은게 자신 아닌가? 그러면서 가문을 걱정하다니 참 우습네요, 아버지, 따위의 생각을 한다. 조소 섞인 표정 그대로, 블렌이 입을 열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명예가 다 있던가요?"
마이어가는 안주인이 불미스러운 죽음을 당한 그날부터 명예와는 어울리지 않는 가문이 되지 않았던가요. 남작은 그 말에 흠칫한다. 그는 블렌의 입에서 더 나올 말들이 두려운 모양이었다. 한참 뒤에 내려진 처벌은 4주간의 개인실 연금이었다. 카셀이 과도한 처사라 얘기했지만 남작은 듣지 않았다. 그 정도 시간이라도 강제로 갖지 않으면 정신을 차리지 못 할거라 말하며, 남작은 단호하게 아들을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저어... 남작님께서 저, 저 그림을..."
그런 처사에도 아랑곳 않던 블렌이 정작 제 방에 붙은 그림을 떼어버린다는 말에 반응했다. 남작의 명령에 따라 그림을 떼러 들어온 하인들의 표정은 두려움에 빠져있다. 침대에 누워있던 블렌이 빤히 뜬 눈으로,
-손 대기만 해봐. 제 목숨 아까운 줄 안다면 건드리지 않는게 좋을거야.
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하인들은 남작보다 작은 도련님이 더 꺼림칙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택의 주인인 남작의 지시에 반할 수 없어 그들이 액자에 손을 대자, 블렌은 분노조차 들어가지 않은 평이한 어조로,
죽여버린다고 말했어.
케이틀린 노스. 디알레 주드. 하고 그들의 이름 음절을 또박또박 말한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액자를 떼던 한 명이 서슬퍼런 낯을 참지 못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하고싶어서 하는게 아니예요. 도련님, 저희도 하고 싶어서 하는게 아니예요... 블렌은 그들을 보고 웃기만 한다. 뭐가 그리 웃긴지 킥킥거리며 제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수그렸다. 니깟 것들은 모르겠지. 모르니까 그렇게 쉽게 그 그림을 없애려는거야. 블렌은 자신이 그림을 가져가지 못 하도록 막을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을 조금 안타까워하는 표정이다.
*
블렌 디나 마이어가 자택에서 밑도 끝도 없는 분투를 하는 동안, 노아 딜테인은 쇠약할대로 쇠약해졌다. 밥도 몇 숟갈 뜨지 못 했고 먹는 족족 그대로 토해냈다. 살이 빠질대로 빠져 악력이 들지 않아 그림 그릴 붓도 손에 쥐지 못 했다. 움직임도 버거워서 이대로 있으면 정말로 죽을거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제 몸이 약을 먹을 단계가 지났다는 것은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는 일이었다. 맨정신으로 있을 때조차 멍해서 잠깐 까무룩 정신만 놓아도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블렌이 찾아오지 않는 그 기점이 정확히 자신과 하룻밤을 보내고나서라는 것을 노아는 온연히 의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바보라도 블렌에게 무슨 일이 생긴거라는걸 알 수 있었다. 아마 예전의 자신이라면 몸을 포함해 얻을걸 다 얻었으니 귀족나리의 관심이 다했다고도 생각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블렌은 마지막까지 도저히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운 모습을 보이며 떠났다. 다정하고, 애정으로 가득한 손짓...
노아는 한편 블렌이 오지 않아서 차라리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제가 생각해도 제 모습이 끔찍했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사랑한다느니 했던 말을 후회할거야. 다행이다. 이대로 오지 않는게 나아. 그러면서도 바람에 헐거운 경첩으로 문판이 덜컹거릴 때마다 블렌이 오진 않았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문쪽을 바라보는게 여러번이었다.
그는 그런 애정에 매달리듯이 행동하게 되는 자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도, 죽어가면서 제 겉모습이나 치장에 신경쓰게 되는 것도,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블렌."
옷매무새를 다듬는 블렌의 귀에 걱정어린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고개 들어 바라본 곳엔 카셀 디나 마이어가 미묘한 표정을 하고 벽에 기대어 서있다.
"아버지 앞에서 언사를 조심해라, 블렌,"
블렌은 그런 말을 하러 찾아왔느냐며 해사하게 웃어보인다. 오늘이 그 지긋지긋한 연금의 마지막 날이다. 그리고 블렌은 한치 망설임도 없이 노아 딜테인에게로 찾아갈 작정이었다. 비어버린 액자에 시선을 두던 블렌이 카셀을 지나쳐 길을 나서려는 순간, 그에겐 전혀 달갑지 않은 남작의 목소리가 뒤편에서 들려왔다.
"또 그 남자한테 가는건 아니냐?"
"......."
블렌이 후, 하고 작은 한숨을 내뱉는다. 기껏 연금에서 벗어났으니 행동거지를 조심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가문의 수치라는 그 말이 블렌의 머리속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안 간다고 하면 믿어주시려고요?"
블렌이 잔뜩 빈정거렸다. 말은 생각보다 더 먼저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온다.
"제가 간다해도 아버지에겐 안 간다말하면 그만 아닙니까?"
남작은 새파래진 안색이다. 자신의 차남은 남들에게야 몰라도 저에게는 예의를 지키는 아들이었다. 남작은 아들을 이렇게 만든게 그 빈민촌의 남자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네가 아니라 그 남자가 문제일 수도 있겠구나."
얼버무리는 남작의 말에 블렌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고 웃는다.
"하하."
"......."
"농담도 참. 문제는 언제나 저한테 있지요. 가엾은 노아에게 책임을 지우려하지 말아요. 그 앤 내가 왜 자길 사랑하는지도 모르고 있으니까... 가엾은 노아. 가엾은..."
노아 딜테인이 가엾다. 블렌은 손바닥이 젖는 느낌에 제 얼굴을 더듬거린다. 뺨 언저리로 눈물이 흐른다. 몇주간 온갖 감정이 섞이어 마음이 엉망진창이다.
"카셀은... 너같지 않았는데."
남작이 기어이 자신을 카셀과 비교하자 블렌이 재미있다는듯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가 아버지에게 이토록 버릇없이, 제 본성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나 다름없다.
낮은 점에서 끓어오르는 물처럼 천천히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카셀은 나랑 다르지. 이 집안 사람들과 내가 유이하게 다른 점이 명확한데, 왜 내가 당신들과 같아야하지?"
"다른 점이라니?"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어머니가 용의 피를 마신 걸 알고 있었죠. 카셀도, 아버지도, 이 저택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은 이단자로 몰리는게 두려워 책이 잡히기 전에 그녀를 천천히 말려 죽였어요."
어머니가 왜 그날 나를 불렀을까 생각해봤는데, 아, 그건 어머니의 선물이었어요. 자길 잊지말라는 마지막 선물. 이 저택의 모든게 무의미했는데, 그날 나는 유일하게 그곳에서 사랑이란걸 느꼈어요.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영원해졌지. 당신들은 모르지, 모르잖아? 그 안에서 나는 느꼈다고. 사랑을 느꼈다니까.
남작은 제 아들에게 구역질이 이는 기분을 느끼며 뒤로 조금 물러선다. 블렌에게 직접 그 날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 끔찍한 광경이 제 아들에게 어떻게 각인되었는지 직접적으로 듣는 것에 남작은 한없이 역겨움을 느꼈다.
이번으로 정말 마지막이예요. 이번 한번만, 다시 한번더...
온전히 그 안에 놓일 수 있다면.
블렌이 부은 얼굴로 아버지에게 미소지었다.
이번만 지나가면 다시는 이런 일 없을거예요. 아버지. 그냥 잘, 모르겠어서 그래요.
그러니 내게서 노아를 뺏어가려하지 말아요.
그 말은, 꽤나 애절하게 흘러나온다.
*
깨끗했어요. 그렇게나 깨끗한게 좋았으니까. 왜냐하면 그는, ...이 부분이 중요해요. 결국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인 나를 좋아했을 뿐, 나를 썩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으니까. 이부분도 중요해요. 그러면서도 내가 오는걸 기다리는 눈치였고, 나를 기다렸지. 언제나, 그림을 그렸고, 그리지 않을 때에는 우울해했고, 수줍고, 조용했죠. 그는 나를 사랑했던 적이 없어요. 그 자신이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언제나 자기 안에 있는 그림을 그렸어요. 눈동자 속에 그림이 그대로 들어있었는데. 눈을 보는 걸 싫어했어요. 계급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이었을까? 계속, 계속 시선을 돌렸어요.
그 날 그는 평소보다 더 많이 아팠어요. 쓸 데 없는 말다툼이나 하느라 찾아가지 못 한지, 아,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하는게 맞아요. 당신과의 그 쓸 데 없는 기싸움말이예요. 집은 조용했고 난로를 뗀 흔적도 없이 찬 기운이 서려있었어요. 노아, 노아, 노아 딜테인... 그게 그의 이름이었고,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어요. 이름을 불렀을 때 한참동안 대답이 없었는데, 이부자리 옆을 보니 새까만 피가 뿌려진 대접이 서너대는 던져지듯 놓여있더군요. 쌕쌕거리는 바람 새는 소리가 이불 안에서 들려왔어요. 들춰진 이불 안에서 노아와 시선이 마주쳤죠. 그는 내 이름을 부르려다 부르지 않더군요. 그래서 제가 무슨 생각을, 아버지,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만약 그가 죽는다면. 그 일이 일어난다면, 부디 지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 시간을 영원히 함께 가졌으면 하고 생각했어요.
이전에도 한번 그랬던 적이 있었어요. 서서히 지워져서, 사라지지 않고 손 안에 영원히 남을 것만 같은게 보고싶었던 거예요.
어쩌면 그도 나한테 말하고 싶었을거야. 저를 온전히 가져달라고... , 나는 그렇게 생각해.
움직이지 않는 건 어쩐지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영원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제게 소중한 것은 죽어있는 것이 살아있는 것보다 나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제게 소중한 것은.
나는 그게 보고 싶었어요.
-어떤 것이? 너는 도대체 어떤 것을 보고싶었던게냐?
아버지가 보셨다시피 마지막에 남겨졌던 것 말이예요. 애매한 말인가요?
보지마, 보지말라고, 노아 딜테인이 내게 내지르는 소리가 이불 안에서 들려왔어요. 죽음 앞에서 초라해진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오래된 지병이었고, 꾸역꾸역 살아갈 희망이란 의지가 그의 눈빛 속에서 보이지 않았어요. 아, 그를 잃고나면, 나는 오늘의 일을 후회하고말까? 하지만 아버지, 나는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제고 그를 잃을 수 있다는 걸 알았던 거예요. 그렇다면 꼭 오늘이어야만한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을 때, 끊어지는 숨을 느낄 수 있을 때여야만 한다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듯, 그의 눈 속에는 삶이라는게 보이지 않았어요. 노아 딜테인은 그냥 노아 딜테인으로, 물감처럼 의미없지만 그것만으로 그저 아름다운 눈동자로. 그는 그냥 나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나는 그에게 괜찮다고 했어요. 내가 도와줄 수 있다고도, 말했어요.
목 너머로 맥동하는 숨결, 손 안에 오래도록 그 사람이 남았어요. 그 숨결이 끊어져 사라질 때까지, 썩 기분이 좋지는 않았어요. 그러니까 말하자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건, 그걸로 기분이 좋았다는 것 마저도 기분이 좋지 않았다는 걸 말해요. 알겠나요?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어요.
몇 주간 이 이야기로 바깥은 시끄럽겠군요. 하지만 아버지, 이걸 봐요.
구름안개거리에서 그를 처음 봤을 때 카셀과 나는 함께 산책을 하고 있었어요.
형이 말했어요. 더럽고 불결하다는 표정을 하고서는, 하찮은 자라고.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자라고 말했지요.
카셀은 내가 그를 사랑했다는 걸 알고 놀라더군요. 정말로 그 더러운 화공과 추잡한 짓을 했느냐고 몇 번이고 내게 되물었어요. 형의 판단과 그의 목숨에 대한 가치는 다른가요?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모든 행위들이 단지 직접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더 나은 것들이 되나요? 그러니 예를 들면 당신의, ...
이건 요지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군요. 당신은 인정하지 않을테고요.
죽을 때 노아는 괴로워했지만 슬퍼하지는 않았어요. 죽는다고 슬플 일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지요.
장례를 치러 줄 사람도, 애도해 줄 사람도 없다는 걸 알았던거예요. 그의 곁에는 나밖에 없었어요.
그와 나는, 그래, 그저 서로가 원하는 걸 손에 넣었을 뿐이예요.
...성도 사람들은 무료한 삶에 재미있는 일이라도 생겼다는 양 신나서 들고 일어나고 있지... 살인자니 뭐니 실컷 떠들라고 해. 아버지라면 그게 신경 쓰이기라도 하겠어요? 그의 성, 그의 이름, 그가 좋아하던 것들, 그의 눈색, 그리고 그 눈으로 자주 보던 것, 자주 그리던 그림. 그런 걸 알고 있는 사람은 나 하나밖에 없는데. 그가 죽고난 지금도, 그리고 살았더라도 그건 변하지 않았을거야. 그러면서 사람이 죽었기에 안타깝단 말이지. 정말이지 웃기는 일이야.
......
......
아까부터 말씀이 없으시군요. 듣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요. 약속해요, 아버지. 나는 언제나, 언제나 똑같다는걸 깨달았으니 이런 일은 앞으로 없을 거예요.
어떤 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좋아요.
블렌 디나 마이어는 제 손바닥을 구부려 쥐어본다. 손 안의 온기는 따스하고 미적지근하다. 저릿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도 평생이 다 지난다하더라도, 이 감정은 영혼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는 담담하게 예감한다.
블렌 디나 마이어의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그에 대해 말한다. 도무지 알 수 없고, 제 아비 앞이 아니면 당장에라도 베어낼 것처럼 성정이 예민했으며, 어딘지 모르게 두려운 사람이었노라고. 성도를 휩싼 추문은 이레가 지나도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는다. 달이 지나지 않아 블렌이 느닷없이 모험을 떠나겠다며 이슈가르드를 나섰던 그 순간 진실이야 모를 일이지만 사람들은 그가 아버지와 사람들의 눈을 피해 도피하는 것이라 수군거렸다. 세월이 지나 이름 없는 모험가에서 야만신을 토벌한 '영웅'으로 이름을 떨쳐 이슈가르드에 불명예스러운 귀환을 했을 때, 그를 환영하는 성도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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