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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안x엘리아데(여 실린 모험가)
일리아칸 및 실리안 애정퀘스트 이후~카멘 전의 시간대입니다
어린 엘리아데는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꽃은 고작 한 철 피고 질 뿐인데, 그런 부질없는 것에 마음을 쓰고 슬퍼하는 모습들이 어리석어 보였다. 오늘 져버린 꽃은 내일이면, 다음 달이면, 이듬 해가 되면 다시 필 것이다. 꽃은 언제나 피어나고 시들길 반복할 것이고, 긴 수명의 축복을 받은 우리는 피고 지는 수많은 꽃들을 보게 될 터였다.
나중에 자라면 적당한 실린이나 만나서 가정을 꾸리게 될지, 흥미로운 연구나 하며 홀로 살아가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다. 다만, 금방 피고 지는 꽃 따위에 관심을 주지 않을 거란 예상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찰나의 시간을 이루는 것에 마음과 정성을 쏟는 것만큼 비효율적인 일은 없을 터이니..
바보같지 않은가. 그건 그저 흔히 널린 꽃인 것을.
탑에 박혀서 연구나 하며 따분하게 살아갈 줄 알았는데... 대마법사였던 엔비스카의 뒤를 이을 자질이 보인다며, 대 악마 카제로스에 맞서기 위해 아크를 찾아 로헨델을 떠나게 되었더랬다.
여정의 시작에서 아크의 주시자에게 부름을 받았고, 그녀의 인도로 도착했던 땅.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발견했던 것은..
'부하들을 치료해줘서 고맙네.'
인간이라면.. 아크를 훔치겠다고 겁도 없이 아제나님의 친우를 죽이고, 로헨델에서도 난동을 부렸던 족속들 아니었던가. 게다가 욕심을 그치지 않고 전쟁까지 일으켰고, 끝끝내 사슬전쟁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게 되었다고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렇기에 그들은 신뢰할 수 없는 종족이라고.
아크를 탐내던 종족이라더니, 인간이란 제 혈육마저도 밀어내기 위해 악마와 손을 잡고 무고한 이들을 해치는 잔악함 또한 가진 자들이라 생각하던 때였다.
'나는 루테란의 왕으로서 악과 불의에 맞서 싸울 것이며 모든 백성들의 정의로운 방패가 될 것을 맹세한다.'
'이곳에 흐른 피는, 모두 루테란의 것인데...'
폭정에 신음하는 백성을 지나치지 않고, 어린 여자아이를 구하기 위해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 약자의 고통에 눈물 흘리고 그들을 보듬을 수 있는 성품을 가진 인간이라.. 나쁜 인간이 있는가 하면, 착한 인간도 있는 모양이었다.
'할아범...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게 대체 무슨 꼴이야...'
'나 때문이야...!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만 않았어도... 젠장.... 젠장!!!'
'올곧고 강인해 보이던 눈이 슬픔으로 얼룩져 있었다. 왜일까, 그 모습이 뇌리에 깊이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멈춰라, 네 상대는 나다!'
'패자의 검! 이제야 제대로 싸워볼 수 있겠군!!'
... 다행이다. 다행이야.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흉포한 마수군단장의 도끼질에도 상처 하나 없이 무사해서 천만 다행이었다. 일순간 손끝이 차갑게 얼어붙는듯한 고통과 함께 가슴을 바늘로 세차게 찌르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그 때를 떠올리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쓰러져 손가락조차 까딱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너를 잃을까 하는 두려움이 여러가지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점철되어 머리 속을, 온몸을 마구 울려댔었지. 평생 깨달을 일이나 있을까 싶었던, 애써 모른 척 외면하던 감정을 결국엔 끝끝내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더랬다.
벽난로 앞 소파에 앉아 회상에 잠겨 있던 엘리아데는 눈을 떴다. 손가락에 끼워진 독수리 반지가 따뜻한 빛을 받아 반짝거리다 이내 드리워진 그림자에 가려졌다. 엘리아데는 고개를 들어 그림자의 주인을 올려다 보았다. 온기를 띈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이 하고 있나?"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던데. 자신의 성품과 꼭 닮은 미소를 지으며 실리안이 가까이에 와있었다. 실리안은 따뜻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정리해준 뒤 뺨을 어루만졌다.
"잠자리가 불편하여 잠이 오진 않는 건가? 혹시나 싶어 따뜻한 차도 내어오라 했네. 어디 아픈 곳은 없는가?'
벨리온 유적지에서의 사건 이후로 군단장들의 직접적인 공세가 점차 강해졌다. 루테란도 예외일 수 없었고, 많은 악마들의 공격이 있어왔다. 아브렐슈드와 일리아칸의 침공까지 막아낸 이후, 아주 잠깐이라도 재충전이 필요할거라며 피네로부터 며칠의 휴가를 받게 되어 약간의 휴식시간을 누리게 되었다. 그래서일까, 지금 이 순간이 실로 꿈결같이 느껴졌다.
뺨에서 느껴지는 손길에 가만히 기대어 말없이 그를 바라 보자, 실리안은 걱정스러웠는지 비어있는 소파 옆자리에 앉아 천천히 그녀를 살폈다. 그 모습에 엘리아데는 엷은 미소를 지으며 실리안의 손바닥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전혀. 아픈 곳은 하나도 없어. 나는 괜찮아."
아프지 않다는 대답에 걱정이 잔뜩 서려있던 실리안의 낯에 안도의 빛이 섞여들었다. 괜시리 마음이 간질간질 했다.
요즘들어 예전의 나라면 상상조차 못할 미래를 그리곤 했다. 언제나 나의 우선순위엔 로헨델이 있었는데, 이젠 루테란의 안위도 우선하게 되었다. 처음 로헨델을 떠날 땐 전쟁 이후엔 다시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와 쉬게 될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젠 자연스레 루테란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생각치도 못했던 변수는 삶을 바꿔놓았고, 꽃을 보며 비웃던 실린 여자아이는 인간과의 미래를 그리는 어른이 되었다. 그로 인해 비롯된 다양한 감정들에 내 마음은 그렇게 다양한 색채를 띄며 흘러가게 되겠구나. 내 삶의 고작 찰나만을 살아갈 그로 인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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