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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지에서
적당한, 직육면체 모양의 여행케이스를 든 라브는 약속 장소에 다소 일찍 나와 루카를 기다렸다. 조금만 더 우겼으면 먼 데로도 갈 수 있었을텐데. 협박이라도 할 걸 그랬나. 버릇없는 생각을 하며 습관처럼 연초를 물었다가, 이곳이 평소의 집이 아님을 떠올리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흡연을 하지 않으니, 잡다한 생각이 떠오르며 개중에 종종 루카가 하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너만 있으면 돼, 난 다른 건 없어도 괜찮아, 이런 생각은 정말 부담스럽다고. 신분도, 가족도 버리고 사랑의 도피를 했다는 스캔들 기사를 읽을 때마다 다소 비딱한 반응을 보였었다. 그래, 솔직히 그 말이 맞았다. 충만함, 믿음, 이런 것 대신 불신, 질투 이런게 가득차있는 루카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어릴 적 이리저리 구멍난 정서를 메꾸기 위해서 그는 대신 부정적인 감정을 밀어넣었다. 결혼도 마찬가지였다. 가족과 강력하게 묶이는 수단으로서, 루카는 결혼을 선택했다. 라브 입장에서도, 어디서 근본도 없는 자기같은 놈하고 살 바에는, 적절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가진 상대와 함께, 기존 가족 내에서 위치를 공고히 하는 쪽이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배는 아니어서 다행이네."
잠시 상념에 잠겨 있던 사이, 기차역에 도착한 루카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슷한 사이즈의 가방과, 평소보다 다소 밝은 톤의 옷은 한층 더 여름에 가까운 얇은 복장이었다.
기차의 탑승 계단을 오른 둘은, 미리 예약한 자리로 이동하여 앉았다. 적절하게 넓은 공간과 타인과의 거리. 티켓을 차장으로부터 확인받고 나서야, 몸에 긴장이 풀림과 동시에 다른 설렘이 밀려왔다. 기차의 엔진 소리가 들리면서 잠시 잠이 몰려오려고 할 때, 코끝에서 익숙한 체향이 느껴졌다.
"비는 안 왔으면 좋겠다."
향수 바꿨어?
아니.
핑계를 대며 루카를 가볍게 끌어안은 라브는, 딱 떨어지는 대답을 들으면서도 코끝을 머리카락 사이로 파묻었다. 붉은 머리카락 너머로 익숙한 그 향이 느껴졌다. 기차가 기적 소리를 시끄럽게 울리고, 거대한 수증기를 토해내어 잠시 밖에 안개가 낀 것같았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모두 흩어지고, 여름 특유의 눅눅한 볕과 함께 기차가 떠나갔다.
3시간은 길면서도 동시에 짧은 시간이었다. 처음에 한 시간정도는 라브가 꾸벅꾸벅 졸았고, 마지막 한 시간정도는 루카가 잠깐 눈을 붙였다. 연녹빛 초록이 스쳐지나가다가, 다시 짙은 녹음이 우거졌고, 어둡고 캄캄한 터널을 지나기도 했다. 커다란 건물이 보이기도 했고, 사람이 없는 풍경이 잠시 이어지기도 했다. 자세를 이리저리 뒤틀기도 했다가, 결국 가장 바른 자세가 편안함을 알고 허리를 바짝 편 채로 등받이에 기댔다가, 또 다시 비스듬히 몸을 기울기도 했다. 길지 않은 시간이 흘러, 기차는 아담한 역에 멈췄다.
역 자체가 아담하여 시골일 것이라고 생각했으나, 의외로 역은 작은 마을 근처에 있었다. 이 정도면 양호하긴 하지. 노르망디풍의 집들이 바로 길 건너에서 이어져, 마치 동화같은 풍경을 지어내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로 세심하게 관리받은 꽃과 나무가 즐비해있고, 회색의 벽돌이 깔린 광장은 청소가 깔끔히 되어있었다.
"이런 데를 오고 싶었어?"
" …… 응."
막무가내 생떼를 부려서 이상한 곳일줄 알았더니. 거리는 소박하면서도 평화로웠다. 많은 사람이 이곳을 휴양지로 삼는듯, 낮은 층수의 호텔 외에도 별장처럼 보이는 건물이 많았다. 와서 몇달씩 지내고 그런걸까. 기분나쁘지 않은, 따뜻한 여름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십여 분정도 걸었을 때, <널판지 해안가>라 적힌 팻말이 그들을 반겼다.
본래도 말이 많지 않기는 하나, 수상할 정도로 조용한 라브를 보며 루카는 조금 의아하다고 느끼다 못해, 다소 위화감까지 느껴졌다. 그러나 본디 성격이 괴팍하고, 갑자기 벌집 들쑤신 것마냥 난폭하게 굴 때가 있으니, 조용할 때 최대한 이 평화로움을 즐기자고, 애써 무시하며 진주빛 해안가를 바라보았다. 상아가 산산히 부서져 쌓인 것같은 바닷가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고 가고 있었다.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적당한 호텔을 찾아 들어간 둘은 운좋게 비어있는 방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점이 다소 불편하다고 생각했으나, 한층씩 계단을 올라갈 때 보이는 동쪽 창문 밖 풍경이 꽤 눈부셨다. 아침에 여길 내려온다면 눈은 피곤해도 잠은 확실히 깨겠는데. 구조 자체는 구식의 구조였으나, 청소와 관리가 잘 되어있어 오히려 쾌적하면서도 클래식한 느낌을 줬다.
팅, 데구르르 ……
"뭐야?"
짐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으려던 것도 잠시. 얇은 금속이 부딪히고 굴러가는 소리에, 루카는 반사적으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소리의 발원지를 찾아 조금 움직이려는 찰나, 자신을 다급하게 붙잡는 손길이 느껴졌다.
"별 거 아냐."
"정말?"
"아니야, 정말로."
아니긴 뭐가 아냐. 뭐라고 반박하려던 찰나, 갑작스럽게 허리를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어색한 웃음, 다소 제멋대로인 건방진 얼굴 표정을 지으며 어느새 라브는 가까이 붙어 예의, 그러한 종류의 설득을 시도하고 있었다.
"요즘, …… 결혼 준비한다고 맨날 바빴잖아. 와도 피곤하다고 잠만 자고, …… ."
"네가 먼저, 피곤할거라면서 자라고 눕혀줬잖아. 왜 이제 와서 딴 소리야?"
정확히 맹점을 찌른 질문에는 늘, 어영부영 미소로 덮으며 넘어가려고 했다. 라브의 말은 대체로 논리가 없었고, 그 때 그 때 본인에게 유리한 단편적인 사실만을 잘라내어 이야기할 뿐이었다. 반쯤 내리감은 눈으로 잠시 시선을 피하던 라브는, 대신 가볍게 루카를 끌어안은 채로 침대 위로 함께 누웠다.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구태여 기분나쁜 대화를 지속하여야 할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러한 점이, 자신을 지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제 속을 들여다 보려고 하지도 않고, 착각만을 덕지덕지 붙여 놓은 채로 제멋대로 투영중인 네가 슬슬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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