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n 멘탈 이상한 이야기 pkm에 의한 범죄표현, 트라우마, 범죄현장 묘사등 주의요함


잊어버려, 금랑.

금랑이 챔피언에게 도전한지도 아주 오래된 일이었다. 단델은 이번에도 아슬아슬하다고 느꼈다. 질 뻔 했다. 이번에야말로, 금랑의 송곳니에 꿰매여 왕좌에서 내쳐질 뻔 했다. 이번에야말로. 단델은 늘 느끼는 감각에 웃었다. 금랑은 그에게 늘 기꺼운 라이벌이었다.

분한 표정을 수습하고 셀카를 찍어 올리는 습관도 오랫동안 보아온 것이다. 단델은 드물게도 초장부터 거다이맥스로 다툰 배틀을 복기하며 킬가르도를 볼로 불러들였다. 금랑은 배틀이 끝나는 순간 퓨즈가 나간 것처럼 늘어지기 마련이었지만, 오늘은, 어쩐지 아직 날이 선 모습이었다.

“오늘도 굉장했어, 금랑!”
“네 킬가르도 말이야.”

악수를 하면서 환하게 웃는 단델과 반대로 금랑은 자그맣게 속삭였다. 카메라에 잡히지 않을 음량이었다.

“잠깐 빌려줄 수 있어?”
“? 물론이야!”
“그래.”

금랑은 단델의 대답을 듣고서야 평소처럼 웃어보였다.

“고마워.”

그 웃음이 평소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아, 단델은 번지듯 따라 웃으면서도 의아함을 삼켰다.

금랑에게는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

금랑이 별로 신경쓰지 않았던 과거에, 금랑은 일가족 살해사건의 생존자였다. 로즈 위원장의 말로는 당시 금랑은 제대로 증언까지 했다. 금랑의 일관적인 증언과 현장의 흔적으로 사건은 종결되었고, 로즈의 배려로 모든 일은 묻혔다. 금랑은 아무것도 신경쓰지 않고 챌린지에 뛰어들 수 있었다.

단델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날 로즈는 ‘이겨낸 것 같아 다행이다’하며 금랑에게 인사를 건넸다. 금랑은 막 시합이 끝나 늘어진 눈매로 로즈를 보다가 웃었다.

‘무슨 소리에요? 난 챔피언에게 졌어요.’
‘오... 그렇구나, 패배의 슬픔에 대해 말이다. 포기하지 않는 도전자, 챔피언에겐 그런 라이벌이 필요하지.’

금랑은 사건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챌린지에 뛰어들기 전의 기억을 도려낸 것처럼 잊었다. 금랑에겐 집이 없었고, 가족이 없었고, 그렇기에 가족의 포켓몬도 없었고, 안주할 장소가 없었다. 금랑은 계속해서 나아가야만 했다. 자기 포켓몬들을 돌보고 챔피언에게 도전하는 것만이 삶의 이유였다. 로즈는 금랑에게 스폰서를 소개했다.

금랑은 때때로 자기가 왜 기억을 잃었는지에 대해 고민했지만, 대개 길지 않은 시간의 상념에 불과했다. 금랑은 자기 삶에 만족했다. 금랑이 충분히 크고 나서 로즈가 알려준 다소 조잡한 정도의 사건경위만으로 궁금증은 충족되었다. 생존자. 배틀에 방해될 트라우마가 남지 않았다면, 금랑이 더 파헤칠 이유가 없는 이야기였다.

왜냐면 놀라울 정도로 모든 게 깨끗했다. 부모님은 죽었고 연고가 없는 부부였기에 다른 일가친척을 찾지 않아도 되었다. 부모님이 남긴 재산은 당시에 로즈가 깨끗이 정리해 금랑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부모님의 포켓몬은 남지 않았다. 때마침 금랑은 법적 성인이 되었다.

무엇보다 단델에게 이길 수 없었다. 실마리조차 없는 기억을 찾고자 시간을 허비하기엔, 금랑에게 남은 부모에의 애정이 전혀 없었다. 금랑은 때때로 자기가 잃은 기억이 있단 걸 자각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손에 이끌려 다닐 때. 아기포켓몬들이 부모포켓몬의 품 속에 옹송그릴 때. 대부분의 시간에, 금랑은 자기의 어린 시절을 생각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기억이란 상기하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나와, 킬가르도.”

금랑은 너클시티, 외곽의 2층짜리 전원주택, 넓은 마당에서 단델의 킬가르도를 불러냈다. 오랫동안 배틀해온 결과 포켓몬들끼리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지만 자기 파트너들을 꺼내지는 않았다. 역시 오래도록 마주해왔고, 때때로 사건이 꼬이면 서로의 포켓몬에게 지시내리는 일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킬가르도는 궁금한 것처럼 금랑을 보았지 공격성을 비치지는 않았다.

금랑은 킬가르도 앞에 긴 팔다리를 그러모아 앉았다. 킬가르도는 궁금한 것처럼 가까이 다가와 금랑을 본다. 포켓몬은 귀엽다. 금랑은 그 방패를 쓰다듬어주었다. 왕의 선정에 기여했다는 포켓몬은 챔피언의 왕좌를 지키기에 마땅한 이였다.

“성스러운 칼을 쓸 거야. 저쪽 바위에. 약하게 해도 돼.”

킬가르도가 작게 울었다. 금랑은 배틀을 되새긴다. 약간 변칙을 주었던 배틀은 초반에 거다이맥스를 뺐다. 시간을 낭비시킬 모든 방법을 차단했다고 자부하지만, 어쩌면 단델은 다음엔 거다이맥스로 대응하지 않고 금랑의 수를 흘려버릴지도 모른다.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그보다는 먼저, 킬가르도가 마지막에 성스러운 칼을 썼을 때의 일을 해결하고 싶다. 아마 앞으로 같은 진행이 되는 배틀은 없을테니 곧장 킬가르도를 빌려왔다. 회복시키고 밥을 챙겨주고 케어를 해 준 다음의 새벽녘에야 킬가르도를 꺼낼 수 있었다.

“킬가르도, 성스러운 칼.”

킬가르도가 휘둘렀다.

잊어버려, 금랑.

킬가르도는 바위를 부순 다음의 지시를 기다렸다. 자기 트레이너의 유구한 라이벌은 트레이너만큼 날카로운 관찰안을 지녔으므로, 무언가 부족한 점을 말해주던가 킬가르도 자신도 몰랐던 부진을 눈치챈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전혀 반응이 없어서 킬가르도는 의아해하며 뒤돌아섰다.

방패를 한 손에 들고 한 손을 뻗은 블레이드폼을 보고, 금랑은 손을 뒤로해 제 몸을 밀쳤다. 그건 킬가르도에게서 도망가는 모양새였다. 킬가르도는 라이벌의 창백한 안색에 걱정을 띠고 있었다. 금랑은 핏빛을 떠올렸다.

이시간엔 자고 있어야 착한 아이지.

그 혓바닥은 칼날처럼 어린 날의 금랑을 난도질해서,

잊어버려, 금랑.

금랑은 차라리 숨을 멈췄다. 더 들이쉬면 안된다. 이 공포는 지금 금랑의 것이 아니다. 그 때 무엇이 있었던지 금랑은 지금 여기 있다. 킬가르도는 단델의 포켓몬이다. 자신은 너클 시티의 자택에 있고 여긴 안전하다. 금랑은 끊임없이 사실을 되새기고서야 몬스터볼을 들었다.

“..괜찮아. 미안해. 돌아와, 킬가르도.”

금랑은 식은땀이 턱 밑으로 떨어지는 걸 느꼈다. 킬가르도가 놀란 것 역시. 일단 킬가르도를 집어넣고 나자 깊게 내쉰 숨이 떨리는 것도 알았다. 킬가르도에게 미안했다. 갑작스레 트레이너의 상태가 변하면 포켓몬은 으레 불안을 느낀다.

모르는 목소리였다.

킬가르도는 며칠 더 금랑의 집에 머물렀다. 그동안 금랑은 미안함을 담아 극진히 킬가르도를 돌봤다. 처음에 안절부절 못하던 킬가르도는 결국 금랑이 완전히 괜찮다는 걸 믿었다. 킬가르도에게 이상을 전해듣고 같이 안절부절 못하던 미끄래곤들도 곧 안정을 찾았다.

킬가르도를 돌려주는 것은 단델의 스케줄에 맞춰야 했다. 공사다망하신 몸께 부탁드린 것이었으니 금랑에게 불만은 없었다. 슛시티의 카페에서 킬가르도의 볼을 돌려주며 금랑은 단델의 컨디션을 걱정했다.

“머리가 산발이 됐잖아.”
“내 머린 원래 이랬어.. 볼 일은 끝난 거야?”
“응. 킬가르도 실드가 멋있어서 좀 돌보고 싶었어.”

그치, 킬가르도? 아직 단델의 손 위에 있는 볼을 손끝으로 튕겨주면 킬가르도는 볼 안에서 즐거운 듯이 흔들흔들 대꾸했다. 단델은 웃으며 킬가르도의 볼을 허리춤에 끼웠다.

단델은 의심하지 않았다. 단델이 걱정한 것은 금랑의 SNS에 달린 도를 넘은 비난들이었다. 병주고 약주기냐고 금랑이 깔깔걸리며 놀릴만한, 달콤한 걱정이었다. 금랑은 첫 시즌이었던 챌린저들과 배지 3개 미만인 챌린저들을 제외하고 모두를 고소했다. 그쪽은 뭘 모르는 아이들에 불과했다.

금랑은 단델의 제대로 식사를 챙기기 힘들다는 투정에 빠르게 조리할 수 있고 밸런스가 좋은 레시피를 몇 개 보내주었다. 한 번에 대량으로 만들어 얼려둬도 괜찮은 레시피도 주었다. 식사 대용의 라구소스 팬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지난번의 배틀에 대한 반성회 비슷한 것을 한 후, 그들은 헤어졌다.

자택의 우편함엔 두꺼운 서류봉투가 몇 개인가 와 있었다. 개봉흔적이 없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스마트로톰으로 촬영한 뒤 금랑은 집에 들어섰다. 하루종일 볼에 갇혀있던 아이들을 풀어주고 한바탕 놀아주며 간식을 챙겨준 뒤, 샤워하고, 젤리를 먹으면서 봉투를 개봉했다.

경위서는 몇 장 없고 대부분이 사후처리 보고서였다. 로즈 위원장도 참 꼼꼼하다니까. 금랑은 금랑의 가족에 대한 해부보고서와 이 자료들의 열람을 요청했던 미디어들의 목록이 나란히 나오는 것에 실소했다. 한 번도 금랑의 가족에 대한 뉴스는 나온 적이 없었다.

“아, 이 열쇠 아는 거다.”

꽤 긴 해부보고서엔 자세한 사진이 껴 있었다. 아마 동영상도 남아 있었을 테지만 CD같은 것은 없었다. 반출금지거나 데이터 삭제일 것이다. 로즈 위원장도 참 꼼꼼하다니까. 금랑은 두 번째로 생각하며 사진들을 클립에서 빼내 순서대로 늘어뜨렸다.

부모님의 피부거죽엔 안농문자로 새겨진 문신이 있었다. 금랑이 문헌으로만 봤던 것이다. 아버지의 내장에서 나왔다는 열쇠는 지금 금랑이 소유하고 있다. 열람이 금지된 보물고 안쪽의 고문헌들이 있는 구역에 접근할 권한이다. 복구작업 때에만 사용되는 열쇠였고 작업 내내 금랑이 감시해야만 해서 피곤함밖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생각보다 간단한 이야기였다. 금랑은 로톰이 보지 못하게 사진들을 정리해 치우고 그를 불러들였다. 로즈에게 면담일정을 잡는 문자를 보내고 금랑은 잠시 생각했다. 추적해야 할까?

종이더미가 정리된 것을 보고 플라이곤이 낮게 날아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포켓몬은 귀엽다. 금랑은 플라이곤의 턱을 긁어주며, 역시 집에 서류를 가져오는 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금랑의 포켓몬들은 집 안에선 늘 어리광부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금랑도 그렇게 생각했다.

로즈에게서 수락의 문자가 왔다. 금랑은 늙은이들을 털어먹어 마당 구석에 나무열매를 심자고 다짐했다. 아킬을 통하면 좋은 업자를 소개받을 수 있을 것이다. 포켓몬들은 귀엽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혀 귀엽지 않기 때문에, 금랑은 자기가 당한 부당함을 포켓몬들의 이익으로 바꾸고 싶었다.

“좀 더 빨리 찾을 거라 생각했네만.”
“그렇죠, 뭐. 이몸이 좀 공사다망하셔서.”

로즈는 눈썹을 들어올렸다. 금랑은 매스컴에 스스로를 포장하는 것을 잘 했다. 금랑이 편하게 취할 수 있는 태도를 금랑이 이득을 볼 수 있는 이미지로 매니징했다. 그가 가진 포켓몬에의 애정은 가짜가 아니고, 승부에의 집착도 연기가 아니지만, 그가 가진 엔트리에서 뽑아낼 수 있는 스토리텔링을 활용하는 것에 금랑은 거부감이 없다.

가장 약한 포켓몬들로 시작하여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 금랑을 얄미워하는 사람은 많았지만 금랑을 존경하고 동경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으며, 그가 매 시즌마다 더이상 어리다고 할 수 없는 이들을 고소하는 것을 빼더라도, 챔피언의 라이벌을 정도 이상으로 매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금랑은 가진 모든 조건을 활용할 수 있을 만큼 머리가 좋다. 로즈 ‘위원장’에게 함부로 뻗댈 만큼 자제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로즈는 웃으며 금랑이 가져간 자료들을 생각했다.

“자네는 머리가 좋아.”
“욕심도 별로 없고요. 원하시는 대로가 아닌가요?”
“아주 좋군.”
“보물고는 돈이 많이 들거든요. 짐의 환경도 좀 바꾸고 싶고.”
“자네 취임 때 고생했던 것을 생각하면.”

로즈가 웃었다.

“더한 요구가 나올 줄 알았는데.”

금랑도 마주 웃었다.

“마땅한 문지기를 박대했던 것에 대해서요? 거기에 대해선 별로 불만 없는데요. 보물도 어떤 용이 자길 지킬지 선택할 권리가 있으니까.”

금랑은 문득 플라이곤의 턱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손가락이 반사적으로 움츠러든 걸 로즈도 확인했지만 말하진 않았다. 금랑은 추적해야 할지 고민했던 걸 떠올렸다.

“불만은 용의 자릴 빼앗으려던 뱀에게 생기죠. 내가 뱀사냥을 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나요?”

금랑의 부모는 보물고를 관리하던 사람이 틀림없었다. 로즈라도 경찰기록을 사사로이 묻는 것은 무리다. 정말 천애고아라면 보물고의 관리를 끝까지 맡기지 않았을 것이다. 금랑은 보물고를 위해 여러가지 학위를 따야 했는데, 금랑이 사실 정당한 후계자였던 고로, 그건 꼰대들의 텃세에 불과했다. 금랑은 여러 박사들을 고용해 보물고를 관리할 수도 있었다.

“이걸 대대적으로 알리지 않고 다 묻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가라르를 지키기 위해서.”

금랑은 눈을 반쯤 감았다. 로즈는 그가 지루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금랑은 일순간에 표정을 바꿔 웃어보였다.

“공사다망한 이몸이라고 말했잖아요?”

로즈는 한숨을 쉬었다.

“3개월 이상은 안되네.”
“충분해요.”
“실마리는 있나?”

잊어버려, 금랑.

“물론이죠. 에스퍼타입 포켓몬 대여할 수 있나요?”

이시간엔 자고 있어야 착한 아이지.

금랑은 기억의 시작부터 착한 아이였던 적이 없었다. 금랑이 그 정체모를 목소리에 할 수 있는 대꾸는 ‘엿먹어’ 밖에 없다.

너클 짐은 3개월 휴관에 들어갔다.

금랑은 휴관 공지를 SNS에 올리고서야 단델이 미심쩍어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배틀 끝나자마자 포켓몬을 빌려가더니 갑작스레 휴관이라면, 누구라도 이상하게 여길 것이다. 금랑은 잠시 먼저 연락할까 고민하다가, 단델이니 괜찮다고 여겼다.

로즈가 빌려준 건 제법 높은 레벨의 마임꽁꽁이었다. 단델의 엔트리에 가끔 들어가는 녀석이라 금랑도 많이 상대해보았다. 금랑은 아이들을 모두 꺼내주고 음식을 넉넉히 챙겨준 다음 마임꽁꽁과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난 잃어버린 기억이 있어.”

마임꽁꽁의 기술폭은 분명히 편향되어 있었다. 어떤 용도로 육성되었는지 뻔해서, 금랑은 마임꽁꽁에게 간식을 먹이며 얘기했다. 다정한 손길에 마임꽁꽁이 눈을 빛냈다. 포켓몬은 귀엽다. 금랑이 지시했다.

“알겠지? 내가 잊고 있는 기억을 떠올려야 해. 나한테 최면술이야.”

마임꽁꽁은 따랐다.

집은 컸다. 금랑은 어린 마음에도 얼른 톱치가 자라나 이 집을 날아다니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천장이 높으니까 비브라바가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다.

어른이 된 금랑은 꿈을 보는 기분으로 생각했다. 어림도 없지, 비브라바가 날기에 이 집은 너무 좁았다.

반나절이 빠르게 흘렀다. 금랑은 지루함을 느낀다. 어린 저는 뭐가 좋은지 하루종일 웃는 얼굴로 어머니를 따라다녔다. 금랑은 어머니가 다루는 서류들이 보물고의 보수실험용 샘플에 대한 것이라고 깨닫는다. 아버지가 귀가했다. 기억에 없는 따뜻한 저녁이었다.

“톱치 배고픈 것 같다.”

금랑은 소파 구석에 웅크려서 말했다. 말해도 톱치는 그를 돌아보지 않는다. 여행의 시작부터 함께해 준 그 아이가 맞을 것이다. 이렇게 어릴 때부터 함께해줬구나, 금랑은 그제서야 잃은 것에 대한 흐린 향수를 느꼈다.

불청객은 밤늦게 찾아왔다.

예상했던 대로, 부모님의 보물고 열쇠를 노린 괴한이었다. 금랑은 꼼꼼히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사용하는 포켓몬은 킬가르도와 마임맨, 나옹이다. 둘 다 가라르 리전폼이 아니었다.

금랑은 어린 자신이 물을 마시러 내려왔다가 그 모든 걸 목격하는 것을 보고도... 그 품에 톱치가 없어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아버지는 일격에 목이 잘렸다. 떨어진 머리통을 보고 어린 금랑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서웠겠지. 금랑은 주저앉아 떨고 있는 금랑을 본다. 저것은 그의 공포가 아니다.

“이시간엔 자고 있어야 착한 아이지.”

괴한이 상냥하게 말했다. 자기보다 키가 큰 아버지의 목을 잘라낸 킬가르도를 물리면서였다. 괴한은 어머니를 깔고앉아 있었고, 어머니는 울부짖으면서 금랑에게 도망가라고 했다. 금랑은 어딘가 영화를 보는 기분으로 말했다.

“이름을 부르면 안 되지, 이런 건.”

손가락이 잘려나갔다. 검지였다. 금랑은 제 손가락을 까딱였다. 플라이곤이 너무 쓰다듬고 싶었다.

“금랑이라고? 예쁜 아이네. 자, 저 아일 저미기 전에 말하는 게 좋을 거야.”
“애는 안 건드린다니 좀.. 무단횡단 하면서 쓰레기 줍는 사람 같네.”

어머니는 결국 말하지 않고 절명한다. 용의 의기는 금랑을 기분좋게 했고, 홀로 괴한에 맞설 상황에 닥친 어린 금랑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아쉬운 일이야.”

나옹이 조그맣게 울었다. 그는 나옹과 킬가르도를 볼로 되돌렸다. 마임맨이 웃으며 금랑 앞에 섰다.

“가라르의 보물고는 보스가 좋아하셨을 텐데.”

금랑은 이제 그 목소릴 완전히 기억했다.

“잊어버려, 금랑.”

금랑은 흠뻑 젖은 목덜미를 문지르며 일어났다. 어린 아이가 부모의 살해현장을 목격하고 포켓몬의 최면술에 대항할 수 있을 리 없다. 정말로 톱치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금랑은 마임꽁꽁을 칭찬하고 볼에 돌린 다음, 방에 딸린 욕실에서 샤워했다.

스마트로톰을 불러 SNS를 등록하고 로즈가 보내온 자료들을 확인한다. 포켓몬들의 간식을 만들면서였다. 본인 몫의 젤리를 먹으면서 어깨에 달라붙는 미끄래곤과 플라이곤을 쓰다듬는다. 로즈가 염려한 것은 그 끄나풀으로 인해 조직 전체가 가라르를 폭격하는 사태였고, 금랑도 그런 걸 바라지는 않았다.

금랑은 며칠간 마임꽁꽁만 데리고 와일드 에리어를 돌았다. 서로에게 익숙해지기 위한 과정이었다. 몇 주 뒤에는 단 둘이 성도로 떠났다. 괴한의 억양으로 추측한 지역이었다.

한 달이 되기 전에 금랑은 괴한이 어느 조직에 속해있는지 알아냈다. 로켓단이 한참 휘저은 뒤 멸절하다시피 했던 지역이라 좀 험한 신흥세력이 생겼던 것 같다. 이쪽의 리그에서 박멸에 나선 뒤 간부급들이 일제히 잡혀 점조직화 되었다.

금랑은 넷상에 퍼진 정보를 모두 뒤졌다. 범죄자의 신원정보는 생각보다 공개된 정보다. 금랑은 문득 로톰이 보고 싶어져서 손을 멈췄다. SNS의 기록이 멈춰서는 안 된다. 한 달 째에 금랑은 가라르로 잠시 돌아갔다.

50여일만에 금랑은 목표를 포획했다.

“잠깐,”

괴한은 저항했다.

“난 널 살려줬어! 이름도 기억해, 금랑! 맞지? 금랑이잖아!”
“얼씨구.”
“자비를 베풀렴, 착한 아이니까, 그렇지? 너 가라르에서 유명하잖아, 맞지?”
“그거 진짜 웃긴 소리네. 당신이 말했잖아.”

이시간엔 자고 있어야 착한 아이지.

금랑은 처진 눈을 휘어 웃었다. 파쪼옥이나 만타인같은 유순한 포켓몬에게 비유되는 웃음이었다. 괴한은 그런 평가를 일절 몰랐고, 알았다면 고소당할 만큼의 수위로 부정했을 것이다. 얇게 뜨인 눈꺼풀 사이로 시리게 빛나는 눈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있었다.

“나님은 그시간에 안 자. 착한 아이였던 적이 없다고.”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금랑에겐 상관없는 일이었다.

“마임꽁꽁.”

그의 세 포켓몬은 이미 쓰러져있었다. 금랑은 그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조직에게 넘겼는지부터 파헤쳤다. 에스퍼 포켓몬의 사이킥파워로 자백하게 만드는 것은 법정에선 금지되어 있다. 최면술에 의한 허위진술은 있을 수 없지만 대상에게 영구한 손상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금랑은 세 포켓몬에게 딱 혼절할 만큼의 데미지만 주었다. 이후에는 볼에서 해방시켜 입양보낼 예정이다. 좋은 트레이너를 찾아 줄 것이다. 포켓몬은 귀엽고-

-인간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잊어버려.”

금랑은 제 머릿속을 떠돌던 말을 내뱉었다.

“잊어버려, 아저씨.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무엇인지.”

금랑에겐 기억이 없었다. 가장 처음 금랑은 트레이너였다. 톱치를 다루고 있었다. 미끄메라를 잡았다. 그들이 진화하고, 다른 포켓몬들을 잡고, 일생의 라이벌을 만났다. 금랑은 사람에게 호의를 느낄 수 없었다. 포켓몬이 좋다. 포켓몬은 귀엽다.

“몽땅 잊어버려.”

금랑은 그를 방치하고 그가 넘긴 정보를 수습했다. 그 과정에서 몇 가지 음모를 알았지만 금랑은 그걸 그냥 내버려뒀다. 자꾸 손을 댔다간 꼬리가 밟힌다. 포켓몬들을 유기로 신고하고 입양보냈다. 입양하는 트레이너는 금랑이 직접 살폈다.

60일째에 금랑은 가라르로 돌아왔다.

“성도는 재미있었어?”
“응.”

금랑은 마임꽁꽁을 반납하고 단델과 만났다. SNS의 텀 때문에 단델은 로즈에게 물어본 모양이다. 프라이빗한 성도여행이라고 둘러댔다는 로즈에게 금랑은 감사를 전했고, 로즈는 정말 이상한 표정으로 금랑을 봤었다.

“모다피탑 귀엽더라. 칠색조 동상도 봤어.”

금랑은 생기있는 얼굴로 떠들어댔다. 단델은 안심하고 금랑의 이야기에 어울렸다. 이야기는 아킬의 포켓몬으로 옮겨가 그와의 배틀에 대해서가 되었다. 관장들의 스타일에 대해, 멜론의 센스에 대해서. 그러고나면 서로에 대한 이야기밖에 남지 않는다.

단델은 신나게 금랑의 굉장한 점에 대해 떠들어댔다. 늘 다른 스타일을 소화할 수 있는 점, 그렇게 많은 전략을 포켓몬에게 부담주지 않고 해내는 점, 금랑은 늘 단델에게 지고 있으므로 놀리는 거냐고 장난을 걸기도 했다. 단델은 늘 금랑에게 위협을 느낀다고 진지하게 대꾸했다.

“단델은 귀엽네.”

그 진지하게 바라보는 눈빛, 긴 속눈썹과, 갑작스런 칭찬에 쑥스러움을 담아 발그레해지는 뺨 모두를 금랑은 좋아했다.

포켓몬은 귀엽다. 단델은 귀엽다. 수문장으로서 지켜야 할 것은 보물고이며, 마지막 관장으로서 지켜야 할 것은 왕좌 위의 챔피언이다. 챔피언의 총의에 따라 가라르를 지킨다. 배틀은 즐겁다. 이기는 것이 좋다. 지고싶지 않다.

금랑을 이루는 것은 틀림없이 그것이 전부다.

가라르만이 그의 세계고, 단델만이 그의 왕이며, 포켓몬만이 그의 가족이다.

그 외의 것은 전부 잃어버린 기억이다. 용의 기억에는, 이것들만이 남으면 된다. 금랑은 그간의 일에 대한 기억을 차곡차곡 접어 머릿속 보물고의 어딘가 구석진 곳에 밀어넣었다. 잊어버려, 금랑.

무적의 챔피언이 펼치는 퍼레이드를 따라가자. 즐거운 일만 있는 세상에 드래곤스톰이 있다. 금랑은 울고있던 어린 금랑을 잊기로 했다. 그것은 금랑의 공포가 아니다. 금랑의 세계가 아니다.

잊어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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