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덕은 조용히
2020.01.19 / 앙상블 스타즈 - 사쿠마 레이 드림
사쿠마 레이는 요즘 고민이 생겼다.
남들이 들으면 비웃을지도 모를 고민이지만, 그에게는 제법 심각한 고민이었다. 지금까지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고 조금도 믿어 의심치 않았던 탓에 더 크게 와 닿았던 것이 틀림없다.
아무래도 언데드의 프로듀서가 더는 언데드를 덕질 하지 않는 것 같다. 이건 사쿠마 레이에게 있어서는 아주 크고 중요한 문제였다.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는 레이의 모습에 옆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있던 코가가 기타를 내려놓았다. 이 망할 흡혈귀가 이번엔 또 무슨 허튼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혀를 찬 코가가 소리쳤다.
“아! 뭐 때문에 그러는데!”
“멍멍아, 있었누….”
“하아~?”
아까부터 옆에서 시끄럽게 기타까지 치고 있었던 코가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지금 이 몸의 연주를, 으로 시작하는 말에 레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일 뿐 곧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요즘, 메이는 어떻누?”
“그 녀석이라면 평소랑 다름없지. 그 녀석 때문에 이러는 거였냐!”
코가는 팔랑팔랑 정신을 집에다 두고 나온 언데드의 프로듀서를 떠올렸다. 처음에야 그렇게 반대했지만, 지금은 메이가 없는 언데드 같은 건 생각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게 언데드의 무대를 사랑한다는 것을 티 내고 다니는 데 밀어내는 것도 어려웠다. 기본적으로 그렇게 나쁜 녀석이 아닌 점도 있었다.
“평소랑 다름이 없다니….”
“…헤, 헤어지기라도 했냐? 아님 말고!”
레이의 눈초리가 날카로워지는 것에 코가는 냉큼 말을 덧붙였다.
5월에 전학 온 전학생 메이를 홀라당 언데드의 프로듀서로 들어앉힌 것은 레이의 공이 컸다. 여자애가 있으니 카오루도 연습에 성실히 나오고, 나름의 긍정적인 효과들이 있었다.
워낙 자유분방한 유닛이었던 터라 언데드로서의 공연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언데드의 무대를 사랑하는 프로듀서 덕에 수시로 무대에 오르게 되었고, 그건 코가로서도 반길만한 일이었다. 의욕이 없던 자들에게 의욕을 불어 넣은 이가 메이였다. 그러니 어떻게 싫어할 수 있을까.
“연애전선엔 문제가 없으니 걱정하지 말 거라.”
“그럼 뭐가 문젠데?”
레이는 이걸 말을 해도 되는지 잠시 머뭇거렸다.
코가는 레이보다 상대적으로 메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긴 편이었다. 그런 코가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어지간히도 눈치가 없다는 것. 레이는 잠시 측은한 눈빛으로 코가를 쳐다보고선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아, 대체 뭔데!”
코가는 어깨에 걸치고 있던 기타를 내려놓고 레이의 곁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알아차린 메이의 변화를 코가가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은 코가의 앞에서는 평소처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니 레이는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고민했다.
“평소와 다름이 없다고 했지.”
“그렇다니까.”
코가는 레이가 대체 무슨 이유로 메이와 관련된 이유로 한숨을 내쉬고 있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코가가 아는 메이는 팔랑팔랑 가볍게 돌아다니는 녀석이긴 했지만, 그게 딱히 나쁜 것은 아니었다. 마냥 아무것도 안 하고 말갛게 웃기만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름대로 생각을 하는 녀석이기는 했다.
“애정 문제는 아니라고.”
“아니, 애정 문제라고 봐야 하누….”
말끝을 흐리는 레이에 코가의 입매가 굳었다. 애정 문제라고 봐야 한다니, 자신이 아는 메이는 레이를 두고 한눈을 팔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레이가 그런 사람이냐고 하면 그것 또한 아니었다. 그렇다면 외적인 일은 아닐 테고, 내적인 일이라는 것인데, 연애 중이 아닌 코가는 왜 자신이 이런 고민을 해야 하는지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아무래도 메이가 탈덕을 한 것 같네.”
“…탈, 탈 뭐?”
“탈덕 말일세. 덕질을 그만둔다고 하지.”
코가는 이게 무슨 신박한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레이를 쳐다보았다. 레이는 진지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 녀석이 언데드를 안 좋아하게 됐다고?”
“…그런 것 같네.”
코가가 보기에 메이는 여전히 언데드를 사랑하고 있었다. 오늘만 해도 예전에 나온 언데드 굿즈를 들고 와서 너무 귀엽지 않으냐며 자신의 앞에서 흔들어 보이는 꼴을 봤던 터라 레이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을 너무 자더니 미쳐버렸나?”
“늙은이한테 너무하는구먼.”
“아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잖아!”
미간을 찌푸린 코가가 헛소리는 잘 때나 하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크게 노망이 난 것이 분명하다며 코가는 더 들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메이가 언데드를?
두 사람 사이의 감정적 교류는 자신보다 많다고 여겼는데 지금 이 꼴을 보니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다고 생각한 코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녀석한테 직접 물어보던가.”
“…그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지마는.”
“아, 왜, 뭐, 뭐가 문젠데.”
애초에 전제가 잘못되었다. 일단 메이는 언데드를 탈덕하지 않았다. 그러니 레이의 지금 이 고민은 시간 낭비이자 쓸모없는 짓이었다. 자신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으로 보이니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게 맞았다.
“정말로 탈덕 했다고 하면 어쩌누….”
“아니, 걔 탈덕 그런 거 안 했다니까?!”
코가는 자신을 측은하게 쳐다보는 레이의 눈빛에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지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게 누구인데. 코가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대신 물어보면 믿겠냐?!”
“본인들이 직접 물어보면 부담스러워서라도 아니라고 하지 않겠누.”
“아니, 이게 뭔…!”
코가는 이마를 짚었다. 자꾸 노인네처럼 굴더니 정신머리까지 늙어버린 것이 분명했다. 코가는 있는 힘껏 레이의 뒤통수를 내리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연애하더니 어딘가 고장 난 것이 분명했다.
“걔가 싫은 걸 좋다고 할 인간이냐고!”
“그건 또 그렇다마는….”
예의상 좋다는 말은 해줄 수 있긴 하겠지만, 얼굴에서부터 다 티가 나는 사람인지라 그걸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레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자신이 본 메이는 무대가 끝난 직후, 전만큼 좋아하지 않았다.
“저번 무대가 끝난 직후, 메이가 그다지 기뻐 보이지 않았네.”
“…하아?”
코가는 기억을 더듬어보려고 노력했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애초에 메이의 반응은 항상 좋지 않았던가. 레이가 기억하는 메이는 평소만큼 무대를 기뻐해 주지 않았다. 평소였으면 당장 달려와서 너무 멋있다던가, 평생 무대에서 내려오지 말아달라던가, 그런 말들을 늘어놓았을 것이 분명했다.
“결국 자길 덜 앓았다는 거 아냐?!”
어이없다는 코가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레이는 과거의 메이를 곱씹었다. 분명 평소보다 좋은 무대였다고 생각했는데, 기대했던 반응만큼 돌아오지 않으니 역시 메이가 언데드를 탈덕했다는 편이 더 가능성 있지 않을까 싶었다.
“선배, 너무 멋졌어요.”
평소보다는 텐션이 낮아 보이는 메이의 모습에 아픈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어딘가 시원치 않은 반응이 영 마음에 남았다. 좀 더 기뻐해 주는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 같았다.
“언데드의 퍼포먼스에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누.”
“…하아?”
“무언가 부족했으니, 그다지 기뻐하지 않은 게 아닐까 싶구먼.”
코가는 당장이라도 입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하는 말을 깊은 한숨과 함께 삼켰다. 언데드의 퍼포먼스에 부족한 점 따위 있을 리가 없었다. 코가는 어디서부터 정정을 해야 할지 생각하는 것 대신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멍멍아, 어디가누.”
“그 녀석한테 물어보러!”
덥석 팔을 붙잡힌 코가는 레이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힘없는 늙은이 코스프레를 하는 주제에 악력이 이렇게 셀 필요가 있을까. 코가는 씩씩거리며 레이의 손에 잡힌 팔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아, 그럼, 뭐 어쩌라고!”
언제부터 이렇게 자신에게 자신감이 없었나 싶어질 정도였던 터라 코가는 다시금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본인한테 물어보면 바로 해결될 거 아냐!”
“생각해서 그렇지 않다고 말할 것이 뻔하지 않누.”
“아니, 걔가 그럴 인간이냐고!”
다시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오는 것이 몇 번이고 반복되자 코가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어졌다. 이 답답한 흡혈귀 자식. 관 안에서 자더니 머리까지 죽어버린 것이 틀림없었다. 경음부가 아니니 메이가 부실에 오는 일은 언데드의 연습이 있을 때밖에 없었다.
“…갑자기 나타날 리도 없고.”
“그래서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누.”
“없다고! 그런 거 없어! 언데드의 퍼포먼스는 언제나 최고라고!”
“하아….”
코가는 한숨은 내가 더 쉬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올 예정이 없다면 오게 만들면 될 거 아닌가. 괜히 부르지 말라고 할 것이 뻔한 레이를 대신해 코가는 메이에게 빨리 경음부실로 오라는 연락을 보냈다.
“그런 쓸모없는 고민은 혼자 하라고!”
“늙은이에게 너무 차갑구먼.”
“난 간다!”
커플 사이에 끼는 것은 몇 번을 해도 못 할 짓이었다. 둘이서 사귀는데 왜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폐를 끼치는 것인가. 코가는 진저리를 치며 냉큼 몸을 뺐다. 오라고 했으니깐 올 테고, 그러면 둘이서 알아서 지지고 볶고 할 것이 분명했다. 안 한다면 알게 뭔가. 자리까지 마련해줬으면 뒤는 알아서 해야지!
“서운허이….”
혼자 부실에 남은 레이는 코가를 붙잡지 않았다. 붙잡을 수 있긴 했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어차피 코가로부터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말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코가가 알았다면 열불이 났겠지만, 다행히 코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앗, 선배.”
벌컥 문이 열리고 들어오는 메이에 레이의 입가가 느슨해졌다. 오늘은 언데드의 연습이 있는 날도 아니었으니 부실엔 오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던 터였다.
“오늘은 연습이 있는 날이 아닌데도 왔누?”
“선배가 보고 싶어 할 것 같아서요!”
활짝 웃는 낯에 레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성큼성큼 레이의 곁으로 다가오는 메이에게 레이는 자신의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냉큼 옆자리에 앉은 메이가 재잘재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선배는 뭐 하고 있었어요?”
“아…, 프로듀서로서 언데드에 부족한 게 뭐라고 생각하누?”
“…에?”
메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선 레이를 올려다보았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질문을 들은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어서 레이는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부족한 건 모르겠고…, 넘치는 건 있어요! 무대에서 과하게 멋있어요!”
“호오, 그래, 멋있었구먼.”
“그냥 멋있는 게 아니라, 진짜 너무 과하게요! 치사량! 무대 볼 때마다 심장마비 올까 봐 걱정된단 말이에요! 그렇다고 약하게 하라는 건 아니고…. 아니, 그냥 너무 좋아요. 선배 완전 별로예요! 내 마음의 별로!”
한껏 신이 나서 주먹까지 쥐고선 열변을 토하는 메이에 레이는 턱을 괴고 잠자코 메이의 말을 들었다. 자신은 이 들떠서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부족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이는 답답했던 가슴이 트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제 프로듀서가 없으면 큰일일세.”
“네? 왜요? 저, 하는 일도 별로 없는데…?”
“가장 큰 일을 하고 있지.”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는 메이를 보니, 레이는 절로 입꼬리가 느슨해졌다. 어떻게 메이를 보면서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을까.
“아이돌을 무대에서 빛나게 하고 있지 않은가. 더없이 커다란 일이라 할 수 있지.”
이제야 원래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온 기분에 레이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자연스럽게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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