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껍질에 관하여

에스마일>헨

트리거/소재 주의: 현실의 약자(젠더퀴어) 및 가상의 약자(스큅)에 대한 차별과 혐오, 당사자의 심리 등에 대한 묘사, 현실의 약자와 가상의 약자를 연결하는 비유, 마법 세계의 젠더퀴어에 대한 관점에 대한 독자적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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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깰 수 없었어

생각도 못해본 그대의 다정한 말 한마디가

너무 눈부셔서 여기까지 와버렸지만

하지만 그건 나였어요 우체국을 오가며 맘 졸이던

-뮤지컬 <팬레터>,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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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의 고해인지 알 수 없는 사실: 에스마일 시프는 늘 멍청하게 무르다.

무르기만 했대도 좋았을 것이고 멍청하기만 해도 좋았을 것이나 그 두 가지를 모두 지닌 것이 불운이다. 같은 연설을 듣고, 헨 홉킨스가 배신과 변절과 분열에 대해 말할 때 에스마일은 옆에서 낙관과 신뢰와 배신자의 감정을 말한다. 정작 역설적이게도 그 시점 이미 우리의 위치는 바뀌어, 배신당해 죽을 수 있는 것은 그였음에도. 그리고 현재로 돌아와 이제는 확실하게 당신이 “배신자”에 가까워졌음에도, 충분히 당신을 공격할 이유가 있어도 여전히 그러지 못한다.

잠시 감정에 북받쳐, 당신을 밀어내려 날선 가시를 뱉었다가도, 그것이 막상 당신을 상처입히는 모습을 보면 곧 다시 후회하며 매달리고는 만다. 당신이 스스로 못박히려 하는 십자가의 밑단에 매달려 당신을 끌어내리려 애쓴다. 입학 첫날, 연회장에서 했던 대화에서도, 보가트 수업이 끝나고 그를 직시하는 당신이 싫다고 처음으로 말했을 때도. 전쟁이 성문 밖을 두드리고 그가 삶을 견딜 수 없어 숲과 싸움과 죽음으로 향하다, 당신이 그를 쫓아오자 더 가지 못하고 자리에 멈춰섰던 밤에도. 그가 당신을 몇 번이나 서툴게 부정해도 당신은 그를 부정한 적 없으니 위태로운 관계가 지난 가을까지는 이어져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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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 그의 관심사는 그저 어쩔 줄을 몰라 하며 당신을 일으키려는 것뿐이다. 그의 죽음이 여전히, 아직까지도 당신에게 어느 정도의 상처가 될는지 비로소 이해해서. 자신이 한 요구의 무게를 뒤늦게 깨달아서. (그러니 당신을 가장 크게 상처입힐 때는 그가 그것을 의도하지 않았을 때뿐이다.) 결국 그가 그렇게 요구하고 싶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당신이 쓰는 글에 대해서, 퍼뜨리는 혼란과 그 파장에 대해서는 더 이상의 말을 삼간다.

그냥 지금 이 행동만, 단 한 번 그의 고통을(그리고 즉 현재 그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만 멈춰 달라는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청이 다인데, 당신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럼에도 조금은 기대했지만, 깊이 생각하지는 말자.) 당신은 고통을 보고 그것을 마냥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늘 그것을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다고 믿는다. 당장 지금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당신이 고통을 용납한다면 더 큰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당신으로서 가장 직관적으로 보이는 길을 택해 그에게 위로 대신 논리를 내밀었고, 그래서 그는 이것을 몰이해에 의한 폭력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악은 어디에서 올까요? 멀리에서 총구에 입김을 불며, 어느 선동가는 그것이 약함에서 온다고 말했고, 가까이에서 독약에 죽어가는 이를 붙들고 울며, 어느 코미디언은 그것이 그저 몰이해에서 온다고 답했다-, 그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당신의 몰이해를 이해하니까. 당신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나는 네가 무엇이든 신경 안 써. 늘 그랬지.”

기억하는가? (그는 기억한다.) 당신은 세계의 변혁을 원하면서도, 옆에서 발을 질질 끌며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운명에 한탄해 잠겨가는 그를 그저 기다렸다. 예언이자 발악이었던 것을 당신은 묵묵히 감내했다. 그는 한때 스스로가 남자이니 당신의 무도회 파트너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먼저 그것이 “이상하지 않다”고 답했다. 당신은 에스마일 시프가 원하니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고 “여자아이”의 얼굴을 한 그를 에스미라고 부르며 결국 함께 서툴게 그를 리드하며 춤을 췄다. 하지만 결국 그것의 양면이다. 당신은 그가 어째서 괴로워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째서,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모방하게 되는 것 말고도, 그 스스로도 늘 자신의 육신에서 어디로든 탈출하고 싶어했는지. 그럼에도 그것을 삭제해 보려 애쓰는 것이 당신의 본능이다.

만약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았다면 그는 살아가며 괴로워할 이유가 없었겠지만.

“…제가, 달라지지 않죠. 능력이 없으면 마법을 쓰든, 폴리주스를 쓸 수도 있고, 사실 뭘 하든 저는 달라지지 않지만, 하지만 헨. 제가 달라지지 않지만 세상도 달라지지 않잖아요. 상상을 한 번만 해보시겠어요. 제가 만약에, 만약에 머글 세계에 사는 어떤 ”남자“를 마음에 품었다면… (그 사람에 대해 이따금 공상하며, 꽃잎점을 쳤다면.) 그러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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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하나: 스큅이란 근본적으로 무엇인가? 마법이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은 보편적으로 마법이 없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머글들은 머글이라는 단어의 존재조차 모르며, 그것을 보통으로 여기고,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않고 평생을 살아간다. 그중 마법사들이, 강한 의지와 연습만으로 세상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이들이 극소수로 태어나는 희귀하고 특수한 집단인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마법사들이 가족 중에 있는 아이라면 마법사인 것이 다시 ”일반적“인데, 스큅은 그 기대를 깨고 마법사가 아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메브는 "마법사여야 하지만 아니“기에 외롭다.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없다. 마법사들은 그가 괴로운 이유이며 머글과는 진실하게 어울릴 수 없어 친구가 되지 못한다.

근본적으로는 당신들의 부모가 가장 먼저 당신들의 가장 가혹한 부조리가 되었으나, 사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세계가 그대로인 이상 스큅은 순탄한 인생을 살지는 못한다. 로저와 도리언 허니컷의 자녀, 아브릴 허니컷이 기억하지 못해 증언할 수 없듯.

이것이 당신이 말하는, 세계를 근본부터 뒤엎어야 하는 이유다. 처음에는 행진이, 그 다음에는 폭동이 일어나더라도 우리가 행진을 멈추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그는 그것은 이해한다. 그래서 그는 당신이 말하는 폭력을 부정한 적 없으며, 당신이 그리는 청사진을 동의했었다. (그 푸른 색조에 동의하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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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하자면…. 에스마일은 어쩌면 그와 조금 유사한 고통을 가진다.

그가 여자아이인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남자아이였어야 했지만” 아니기에 문제가 된다. 가족이, 친애하는 사람들이 그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은 위안이 되지만 문제의 종결이 될 수는 없다. 이 분리가 공고할수록 그는 어느 세계에도 속할 수 없게 되며, 마법사들은 사실 머글 세계의 영향을 짙게 받은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 듯하지만. 그를 첫눈에 여성으로 봐 주지는 않더라도 그렇게 주장했을 때 그가 메타모프마구스 능력을 가진 것이나, 머글 태생이라는 것만큼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 듯하지만. 원치 않는 것으로 인식되기를 끔찍해하는 그에게는, 어떤 일을 계기로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기억과 합쳐지면,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는 내내 생의 의지가 조금씩 마모되는 결과이자 이유가 되었겠으나,

머글 세계에서 이 분리는 아주 공고하기에. 그리고 그의 심장은 실은 언제나 머글들의 세상에 있어서. (사실 하나: 어쩌면, 누군가 그의 고향에 대해 핀갈 모레이에게 한 것과 유사한 제안을 했다면 그는 거절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사실 둘: 영국에서 성별 정정 제도는 2004년에 처음 법제화되었으며, 동성 결혼은 2013년에 법제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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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해요. 헨. 너무 오래된 얘기인데. 너무 오래 거짓말해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아… … 사실 어쩌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분을 조금 좋아했어요. 그리고 4학년 끝나고 리버풀에 갔을 때, 제가 학교 밖에는 처음 ”나가는out“ 거였는데. 저를 정말로 정중하게 대해 주셔서. 아냐. 그때까진 괜찮았던 것 같아요. 그런데 당신이 점술 시간에… 뛰쳐나간 이후에. 저도 계속 메브에 관해 점을 치면 불길한 상징만 보여서. (그는 불현듯 찢어졌던 스페이드 에이스를 떠올린다.)

저는… 그냥 걱정돼서, 잘 지내는지 편지를 보냈는데, 메브가 답장을 해 줘서. 그런데 제가 그때 너무 외로워서, 당신도 아시잖아요. 제가 하는 일에 대해 아무한테도 말할 수가 없었다는 거. 메브는… 계속 물어봐 줘서. 제 일은 어떤지. 전쟁이 어떤지, 마법 세계는 어떤지. 어차피 메브가 여기로 올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저랑 메브랑 둘 다 당신을 걱정하는 것뿐이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모르겠는데 다 틀어져 버렸어요. 그때 졸업하기 전에 당신이 메브한테서 편지를 받고 힘들었던 거, 전부 제 잘못이에요. 그런데 그 뒤에도 계속… 작년까지 계속. 연락하다가. 작년 4월에 마지막으로 보러 갔는데, 그 뒤에는… 제가 많이 아파서 보러 갈 수가 없다고 했어요.

…… 제가 너무 어리다는 건, 애초에 말도 안 된다는 건 아는데. (그리고 그는 자신이 나이들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랑은 그의 생을 깎을 이유는 되지만 채울 이유는 되지 못한다.) 그냥… 제가 그냥 여자아이였다면 뭔가 달랐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 지금 생각나서. 미안해요. 지금은 두 분이 잘 안 본다는 건 알지만, 당신은 여전히 메브를 사랑하잖아요. 모를 수는 없어요. 당신은 쉽게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때 많이 힘들었을 텐데. 너무 늦었지만 말하고 싶었어요.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까….”

어쩌면 그가 무릎을 꿇었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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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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