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림

양자택일

키아라바냐

“…선배, 아직도 방 구하고 있어요?”

위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키아라는 책상 위 쿠션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산발이 된 붉은 머리카락 사이로 치켜 뜬 붉게 충혈된 갈색 눈에 케일럽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너무 예민할 때 말을 걸었나. 하지만 점심시간 이후론 계속 인터뷰 약속이 있어 물어볼 시간은 지금 뿐이었다. 키아라가 고개를 까딱이며 의자에 기댄 행동을 말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케일럽은 옆에 놓인 간이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내가 방 구한다는 말을 했던가.”

머리카락을 대충 손가락으로 몇 군데 다듬으며 키아라가 중얼거렸다.

“요즘 계속 부동산만 보고 계셨잖아요……”

케일럽이 말 끝을 흐렸다. 또 그건 언제 훔쳐봤냐는 날 선 말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키아라는 그저 작게 긍정하는 듯한 소리를 내곤 책상 위에 남은 커피를 들이켰다.

최근 계속 부동산만 들여다 보고 있기는 했다. 지난 달까지만 해도 없었던 집에 대한 불만이 이번 달 들어서 미친듯이 쏟아졌다. 옆집으로 이사온 대형견 세마리 덕분에 개털에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알았고, 빌어먹을 아랫집 남매는 뭐가 문제인지 매일같이 소리 지른다. 안그래도 아픈 몸뚱아리 붙들고 살기 힘든데, 점점 더 좆같아지다가… 집주인이 다음 달부턴 세를 올려야 할 거 같다는 말을 했고, 거기서 끊겼다. 뚝-소리가 실제로 나지는 않았지만. 값이 싸든가, 조용하든가, 살기 편하든가, 하나는 해야지. 어떻게 세 개 다 충족하지 못하는 건데.

이사를 결심한 후로는 정말, 툭하면 이사갈 곳을 찾아봤다. 그 젠장맞을 컨테이너로 돌아가는 것까지도 생각할 정도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는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느니 죽어버리고 말지. 넘버 원까지 나간 저택이면 모를까, 누군가 남아있는 저택으로 가는 건 미친 짓이다. 강도는 심해지고, 잠을 못 잔게 벌써 며칠 째인지 모른다.

“그, 그게 제가 이번에 다시 본가로 들어가야 해서… 방이 비는데… 한 번 보실래요?”

케일럽이 조심스레 한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가능한 빨리 나가고 싶은데 괜찮은 곳은 안 보였으니까. 이 후배가 조금 멍청한 부분이 많지만, 쓸모없는 걸 물어오는 애는 아니었다.

“…기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넘겨주고 싶어서요…… 선배도 알잖아요. …제가 자주 잊어버리고…그러니까 혹시라도… 다시…”

그리고 케일럽이 왜 자신에게 말했는지도 이해했다. 점차 목소리가 줄어들다 케일럽은 결국 고개를 떨궜다. 알고 있는 사람이라곤 선배 뿐이니까, 자칫해서 스토킹으로 신고당하거나 다시 정신병원으로 들어갈 지도 모르니까,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뻔히 보였다. 숨기고 싶은 걸 억지로 말하고 있는 꼴을 보는 게 괴로워 키아라는 케일럽의 말을 끊었다.

“그래서 위치는?”

“네?”

“보러 갈래. 네가 이상한 집을 보여주진 않겠지.”

케일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잠깐만요 제가 오늘 끝나면… 케일럽은 급히 안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 시간을 보았다. 가능한 시간을 말하며 조잘대는 후배를 앞에 두고 키아라는 다시 커피만 홀짝였다.

빨리 끝내자고, 키아라는 케일럽이 제보자를 만나기 전에 집에 들르는 길에 동행했다. 이 직업의 그나마 좋은 점 중 하나는 취재를 핑계로 뛰쳐나갈 수 있다는 거다. 케일럽은 그러다 선배가 잘리면 자길 봐줄사람이 없다고 말했지만, 딱히 키아라가 상관 쓸 일은 아니었다. 그러게 다른 놈 라인 타라고 자기는 몇번이고 경고했다. 그리고 자기도 2시간이나 일찍 나와 놓고는, 뭘. 일단은 남의 집에 가는거니 선물이라고 작은 케이크나 하나 사줬다. 마시멜로 초코 케이크. 케일럽이 고른 맛에 키아라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 모습에 케일럽이 또 눈치를 봐서, 키아라는 별거 아니라며 계산했다.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맛이었다. 순간 괜한 기억이 몰아쳐 키아라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떨쳐내려 노력했다. 잠을 못 자는 만큼 예민해진다.

케일럽은 3층에 살았다. 적당한 높이였다. 강도가 들지는 않겠네. 키아라가 중얼거렸다. 케일럽이 손님을 위한 커피를 타는 동안, 찬찬히 집 안을 둘러본 키아라는 거실 소파로 돌아와 앉았다. 작은 부엌과 연결된 거실, 방 하나, 화장실 하나. 햇빛은 나쁘지 않게 들어온다. 어둡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키아라에겐 이정도면 충분했다. 어차피 밤이나 어쩌면 새벽에나 들어온다. 광합성을 집에서 할 일은 없다. 늦은 시간에 시끄럽게 날뛰는 미친 이웃도, 개를 기르는 이웃도 없다고 케일럽이 말했다. 이삿짐을 벌써 정리하기 시작했는지 쌓여있는 박스들 때문에 좁아보였지만, 그래도 지금 자신이 사는 곳보단 넓은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이 물건을 들여놓으면 추울 정도로 빈 공간이 많을 거 같다. 괜찮은 집이다. 가능한 오래 살 예정이라, 섣불리 결정하면 안되지만 지난 2주 동안 집 같지도 않은 집에서 자지도 못하고, 집 같지도 않은 집만 소개받은 걸 생각하면 그냥 이대로 계약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키아라는 자신의 기준이 지나치게 내려와 있다는 건 눈치채지 못했다.

생각에 빠져있던 걸 깨운 건 어디선가 들려온 바이올린 소리였다. 바이올린. 다른 것도 아닌 바이올린. 아까 전 케이크도 그렇고, 오늘은 왜 이렇게 그 애를 떠올릴 일이 많은지.

“아. 2층이네요, 거기 바이올리니스트가 살거든요.”

“듣기 좋네. 바이올린은 오랜만이야.”

케일럽이 건네는 커피 잔을 받아들며 키아라가 말했다.

“우리 형제 중에 바이올린을 연주한 애가 있다고 말했던가.”

“엄브렐러 아카데미에요?”

묘하게 좋아진 기분에 키아라가 충동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엄브렐러 아카데미 얘기라면 항상 눈을 빛내는 케일럽은 당연히 놀라 반응했다. 평소 케일럽이 관련된 말만 해도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던 키아라답지 않았다.

“누구였어요? 스페이스 보이?”

“뭐? 아니! 걔가 바이올린을 연주할 뇌가 있어 보여?”

“…힘조절하라고 배웠을 수도 있으니까…”

추측이 빗나가자 케일럽이 약간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호러? 아닌가, 루머인가. 케일럽이 나름의 이유를 대며 찍어보는 모습에 키아라가 소리를 죽이며 웃었다.

“다 틀렸어. 너무 못 맞추는 거 아니야?”

못 맞추는 게 당연하지만 키아라는 그렇게 말했다. 누가 넘버 세븐을 알겠어. 모르는 게 당연하지. 자신조차 가끔 잊고 산다. 잊으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모르고. 바냐를 생각하면 복잡해진다. 자신을 챙기는 것도 벅찬 곳에서, 다른 애도 아니고 중간에 끼어든 자신이 그애한테 관심을 갖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고 키아라는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애써 자기합리화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고. 어차피 가족 중 누구 하나 죽지 않는 이상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인데 오늘따라 왜 그렇게 떠오르는지 모른다. 이러다 마주치는 거 아니야? 갑자기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그럼 설마 선배가 배웠어요? 확실히 선배 능력이면…”

케일럽의 마지막 추측에 키아라는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르게 웃었다. 바이올린 소리가 그쳤다. 좋았는데 아쉽네.

“그만 나가자. 이러다 늦겠네.”

벽에 매달린 시계가 오후 3시를 향했다. 키아라가 들고왔던 가방을 집어들었고, 케일럽은 챙길게 있다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기다려달라는 케일럽에게 키아라는 싫다며 먼저 내려갔다. 살짝 삐걱거리는 계단 소리가 좋았다. 좋은 것에 좋은 것을 더하고, 또 한 번 더 좋은 것을 더한 상황에 있다가 와서 그런 모양이다. 어쨌든 키아라의 목표는 빠른 이사였으므로, 이틀만 더 찾아다니고 없으면 이곳으로 오기로 결심했다. '안녕히 가세요.' 계단 건너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 순간 내려가던 발걸음이 멈췄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고, 열린 문 틈새로 마주쳤다. 키아라 하그리브스는 다시는 자신의 감을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빌어먹을. 젠장. 어떻게 하필. 그 집에서 나온 사람이 자신의 옆을 지나갈 때까지도 키아라는 다른 행동을 못했다. 급히 남은 계단을 전부 도망치듯 내려와 떨떠름하게, 예전처럼, 이름만 겨우 입에 올렸다.

“…바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고, 가끔 찾아오는 사촌은 그런 소리를 했었다. 네가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있냐며 쏘아붙였는데, 잠깐의 꿈에 나와서까지 잔소리를 하고 간다. 자기 인생 하나 못 챙기는 멍청한 리안 스톤 주제에 감히 누구한테 그딴 소리를 하는 거야.

내일이면 집을 나간다. 뭐가 그리도 지쳤는지 고꾸라지듯 잠들었다 깨어나 창밖을 보니 이미 새까만 밤이다. 비가 왔었는지 열린 창문에 물이 묻어있다. 예전이라면 기분 나빴을 일이지만, 지금은 별다른 생각이 안 들었다. 더는 머무르지 않을 방이다. 젖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본래도 짐이 많은 방은 아니었지만, 책과 옷을 전부 빼버리니 정말로 텅 비었다. 책은 가져갈 거지만, 옷은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상자 속에 전부 밀어넣어 두긴 했으나 자꾸만 버리고 싶었다. 조금 더 생각해봐야 했다.

그리고 생각을 위해서 제일 좋은 건 역시 아이스크림이지. 키아라는 잠긴 문을 열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시간이 늦어 그런지 아무와도 마주치지 않았다. 전부가 있을 때에는… 아니다. 그때를 기억해서 어디다 써먹겠는가. 나갈 때가 되니 괜히 기억이 미화되는 것 같아 절로 불쾌해졌다. 냉장고에 넣어둔 애플민트 아이스크림의 상쾌하고 달달한 맛만 생각하려 노력했다. 내려가는 발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먼저 온 사람이 있는걸까, 부엌 불이 켜져 있었다. 그레이스가 끄는 걸 잊은 거라면 좋겠지만 아니었다. 가끔 잊어버리지만 이 집엔 아직 사람이 셋이나 살고 있다. 상대도 발소리를 들었는지 계단 쪽을 쳐다보았다.

“키아라?”

익숙한 목소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싫은 목소리도 아니었다. 놀란듯한 바냐를 보며 키아라는 아무것도 없다는 듯 두 손을 들어올렸다. 처음에는 몰라도 지금은 이 집에서 제일 마주치는 일이 적은 상대였다.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모른다. 입을 다문 후에도 가끔 눈에 밟혔고, 키아라는 바냐가 지금까지 이 곳에 머무를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키아라는 아무 말 없이 냉장고 깊은 곳에 넣어둔 아이스크림 통에 손을 뻗었고, 그사이 바냐는 그럼 자기는 들어간다는 작은 말을 남겼다.

“…바냐.”

“어?”

정말 충동적인 부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부른 키아라도, 불려진 바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무슨 말을 해야지. 나는 왜 부른거지. 갈색 눈을 잠시 굴리며, 바냐가 다시 올라가기 전에 키아라는 애써 다른 이유를 찾으려 노력했다.

“아니야, 아무 것도.”

집을 나가기 전날에서야 겨우 한 대화는 그따위였다. 저택에서 입을 다문 이후 처음으로 바냐와 했던 대화는 고작 그게 다였다. 다른 말을 할 수 있음에도 키아라는 그러길 택했다.

저택에서 입을 다물었던 시간을 가지고 비난할 사람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안다. 동정을 하면 했겠지. 천하의 케일럽 블란은 울면서 안아주기까지 했다. 우스울 정도로 한심한 놈. 하지만 그러니까 그래서 키아라는 자신이 바냐에게까지 말하지 않았던 건 화풀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다. 적어도 걔는 그 망할 가족 안에 속해있었으니까. 모든 것에서 배제되었던 그애가 가끔 자신을 복잡한 눈으로 보는 걸 알면서도, 한심하게, 그애한테까지 그따위로 굴었던거지. 디에고와 바냐 중에 정말 입을 다물어야 했던 상대는 따져보면 디에고인게 확실한데도.

끔찍할 정도로 애정하는 사촌, 네가 맞았다. 후회할 일을 만들면 안 되었다.

한달. 케일럽의 집을 후보에서 곧장 배제한 후 다른 집을 찾아본 기간. 그리고 여전히 이사갈 집을 못 구한 기간. 오른 월세를 내고, 알레르기 약을 먹는 일에 익숙해지고, 아래층의 싸움에 대응해 헤비메탈을 트는 미친 이웃이 아래층에 이사 온… 끔찍한 시간. 이정도면 옆 건물에서 신고해도 된다. 아니 그보다 이 건물에는 나말고는 정상적인 사람이 없는건가? 다들 저 소음을 견디며 사는건가? 사실 이 건물은 시끄럽게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던 건가. 집주인에게 말해보고, 경찰에 신고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였다.

“선배, 부장님이…”

“뭐, 부장이 또 왜?”

매번 갈구던 부장이 외근처리 해줄테니 제발 들어가라 말했다고 케일럽이 조심히 전했다. 항상 피곤에 쩔어있긴 했지만, 지금만큼 심했던 적은 없다. 책상 밑 쓰레기통에 찌그러진 커피 캔들이 쌓여있었다. 끊임없이 기사도 칼럼도 뽑아내고 있었지만, 저대로 두었다간 응급실에 실려가는 게 먼저다.

“아니, 아니야.”

“선배… 진짜 죽어요.”

“기사 쓸 거 남았어. 조금만 더.”

대체 뭔 기사길래. 케일럽은 타자기에서 뽑아져 나온 종이 중 하나를 들어 읽었다. 층간소음… 기사 제목 첫단어만으로도 키아라가 쓰고 있는 내용이 짐작갔다. 대체 얼마나 심한가 해서 키아라의 집에 방문했다가 곧장 어안이 막혀버렸던 기억이 케일럽에겐 있다.

“그리고 나, 이번주에 이사한다.”

“어디로요? 더 마음에 드는 곳 찾았어요?”

“어, 겨우 찾았다.”

커피를 다시 한모금 들이키며 키아라가 씨익 웃었다.

“제가 살던 데보다 좋아요?”

“그건 아닌데, 비슷하긴 해.”

케일럽이 살던 곳과 비교해서 더 좋으냐는 글쎄 확실히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 키아라가 만족할 정도의 곳은 되었다. 월세가 조금 비싸고, 직장에서 조금 더 멀어졌고, 방도 조금 더 작다는 단점이 있지만 괜찮다. 일단 필요한 건 조용한 집에서의 조용한 잠이니까.

마지막까지 고민을 하기는 했었다. 뭘 봐도 계속 눈에 밟혔다. 이 놈의 뇌는 양심부분이 생각보다 작은건지, 아래층에 바냐가 사는 걸 알면서도 그냥 뻔뻔스레 굴라고 계속 외쳤다. 최후에 급해졌던 케일럽이 보증금도 안빼고 그대로 있어도 된다는 말을 했을 때는 정말 한계점이라 그쪽을 택할 뻔했다. 하지만 자신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어도, 바냐가 그럴 수 있을까. 결국 또 바냐를 두고 그러는게 싫어 그만뒀다. 이대로 죽어서 자기 장례식에 바냐가 오는 일을 만들면 만들지, 자신이 바냐를 보는 건 그건 또다른 후회할 일이 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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