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기사] 친애하는 나의

“새까만 닭. 뭔가 의견은?”

“....없어.”

 

평소보다 낮은 와론의 목소리가 음울하게 깔렸다. 차라리 찡찡거리거나 짜증을 냈으면 이렇게까지 공기가 불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다른 기사들은 드물게 새까만 닭의 기분을 살피며, 함부로 그의 심경에 말을 얹지 않았다. '괜찮은 것이냐…' 그런 상투적인 말을 적당히 받아넘겨 줄만한 사람이라 확신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지금은 그럴 상황도 아니라는 걸 잘 알았기 때문이다.

회의를 하는 동안 목걸이줄을 만지작거리며 간간이 한두마디 내뱉던 새까만 닭은, 끝내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니니 알아서 이야기하고 통보하라'는 말을 남기곤 다른 기사들의 반응을 듣기도 전에 훌쩍 사라졌다.

***

저의 심장 앞에서 언제까지고 반짝일 것 같았던 녹색의 광물이, 산산이 흩어졌다.

와론은 순간을 다투는 전투의 와중에 그 녹빛에 눈을 빼앗기고 말았다.

**

 

명백히 외따로 떨어진 견습들을 노린 습격이었다. 인솔자가 새까만 닭이었다는 악재만 없었어도 이 습격자들은 적지않은 피해를 내는 데 성공했으리라.

임무 지역이 겹쳤던 기린이 합류하고, 전장을 이탈한 견습들이 다른 기사들에게도 빠르게 상황을 전달하여 속속이 모이고 있었다. 상황은 금방 정리될 예정이었다. 지우스는 상황이 정리되면 습격의 배후를 캐내야겠다고 생각하며, 아직 전장을 벗어나지 못한 견습을 공격하던 이를 제압했다. 지우스가 이만큼의 여유를 가질만큼의 적, 견습 근처에 있는 기사의 기척을 알아채지도 못할만큼 약한 적이었다. 기사 중에서도 강한 축인 새까만 닭에겐 '위협'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아까울만큼 쉬운 전투였을, 텐데.

"새까만 닭! 집중해!"

지우스는 틈을 놓치지 않고 와론에게 짓쳐들어가는 적의 공격을 대신 쳐내고, 동료의 주의를 본래 자리로 잡아끌어왔다. 사위를 뒤덮은 흙먼지 속으로 금세 사라진 빛을 붙잡고 싶은 마음을 겨우 내리 누르고, 와론은 론누를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지우스는 욕설을 읊조린 와론의 목소리가 저가 알던 것과 다름을 눈치챘다.

**

"승냥이와 여우, 견습들의 부상을 확인하고 숲에 있는 녀석들도 찾아서 캠프로 돌아와라. 재정비 후 이동하지. 그리고 너구리, 닭... ......새까만 닭?"

뭔가 고요하다 했더니 전투가 끝나면 당연히 들려야할 와론의 너스레가 없었던 것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그는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있는 것이라곤 땅과 바위 뿐인 허허벌판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인형은 눈에 띄었으므로. 다만, 그 모양새가 예상한 것과는 달랐던 것이 문제였다.

창에 꿰뚫려 절명한 마지막 적을 등 뒤에 두고, 와론은 무릎을 꿇고 앉아 돌과 자갈로 덮인 땅을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조심스레 주워 반댓손에 옮기고, 시체 하나를 이미 살폈던 곳으로 던져두곤 다시 허리를 숙였다. 전투 중 새까만 닭의 신경이 모조리 다른 곳으로 날아갔던 그 순간을 기억한 지우스는 와론이 찾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쉬이 알아챌 수 있었다.

새까만 닭이라는 기사는 워낙 안하무인으로 다녀 타인의 생각이라곤 죄 모르는 것처럼 굴지만, 만약 정말 그렇다면 때때로 보여주는 날카로운 통찰은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와론은 자신의 행동에 확신이 있는만큼, 그 행동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아는 자였고 그로인해 타인이 자신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고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도 꽤나 정확히 아는 자였다.

 하지만 지우스는, 지금 와론이 그런 건 생각조차 못하고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지금의 와론은 마치…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 같았다.

"...너구리. 너도 견습 쪽에 붙어. 여긴 나와 새까만 닭이 처리하고 가겠다."

와론의 낯선 모습을 미묘하게 바라보던 기사들이 제각기 나뉘어져 사라졌다.

지우스는 와론을 내버려 둔채 시체를 뒤져가며 단서를 모았다. 셋이서 할 일을 홀로 하려니 시간은 자연히 늘어졌다. 그가 조사를 마치고 해가 완전히 넘어가기 직전에 와론을 불러 야영지로 돌아가야함을 알리자, 와론은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자각한 것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차마 절반도 모으지 못한 조각들을 내려다 본 와론은 론누에 묶인 하얀 손수건을 풀어내 녹빛의 조각을 감싸고 품 안에 넣었다.

 ***

 

지우스는 회의 중간에 나가버린 와론에 대한 변호 아닌 변호를 해야했다. 변호라고 해도, '새까만 닭의 개인적인 일 같으니 일단 내버려두자' 정도의 이야기만 한 것이었지만, 평상시 온갖 기행을 벌이던 새까만 닭이었기에 더 이상 다른 기사들도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회의가 끝나고, 견습기사들을 살피고, 야영지를 손보고 모두가 제대로된 휴식을 청하는 동안에도 새까만 닭은 보이지 않았다. 해와 달이 동시에 하늘에 걸렸다가, 어두운 하늘에 달과 별이 뜨고도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뒤에도.

"하아..."

지우스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영지 주변을 뒤져 겨우 찾아낸 와론은 회의장을 나갈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그 좋은 귀를 두고도 자신의 기척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빈 목걸이 줄과 하얀 손수건을 쥐고 바위에 가만히 앉아있었다. 발소리를 내어 자신이 왔음을 알릴지 고민하던 지우스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렇게 소중한 물건이었다면 어째서 옷 바깥으로 내어놓고 다닌 거야?”

작게 잘각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와론이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 말했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냐? 물건 간수 제대로 못 했다고? 나 지금 기분 더러운 거 알면 닥치고 꺼져.”

“시비가 아니라 말 그대로의 질문이야. 나라면 망가질 위험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옷 안쪽 몸 가까이 숨기겠어.”

 

와론은 오랫동안 대답이 없었다.

“나도 몰라.”

“...뭐?”

“모른다고. 왜 늘 그렇게 하고 다녔는지.”

 

그리고 뒤엣말을 모조리 삼켰다.

그걸 묻기도 전에 죽어버렸으니까.

너의 흉내를 내며 살다 보면, 언젠간 알 수 있을 줄 알았다.

대답을 듣고 싶은 건 자신이었다. 기린보다, 자신의 질문이 더 크고 많았다.

삶에 전투가 끊이지 않던 넌 이게 평생 망가지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테지. 넌 작별 인사를 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니까. 끝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이니까….

목걸이가 망가지는 날엔 너도 나처럼 이렇게 화를 냈을까? 아니면… 네겐 이 목걸이가 별거 아니었을까? 그래 난 네게 무의미했던 물건을 몇 년이나 붙잡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지만 와론은 영영 대답을 들을 수 없고, 스스로 답을 내리지도 못한 채 오늘을 맞이했다.

단지, 얼마 남지 않은 친우의 흔적을 하나 더 잃어버렸을 뿐인, 그런 오늘을 맞이했다.

와론의 알쏭달쏭한 대답에 지우스는 제대로된 답을 듣는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는 듯 더 되묻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에서 작은 천뭉치를 하나 꺼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아는 왕성 마법사가 있는데, 그 사람이 수도 바깥에 복원을 전문으로 하는 법사를 친구로 두고 있다고 들었다. 그 목걸이가 정 아쉽다면 의뢰라도 맡겨보든지 해. 조각 전부가 없어서 완벽하진 않더라도─”

 

지우스는 작은 천뭉치를 와론에게 던지려다 생각을 바꿔, 몇 발자국 다가가 와론이 걸터앉은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천뭉치 안에는 익숙한 빛깔의 광물조각이 여럿 있었다.

 

“─얼추 비슷한 형태까진 나올 테지.”

자신의 것과 합하면 못해도 3분의 2정도는 될 것이다. 와론은 몸을 완전히 지우스 쪽으로 틀었다.

"내 이름을 대면 네 부탁 정돈 들어줄 거라 생각하지만, 불안하면 소개서라도 써주지."

"이거 어떻게 찾은 거야?"

"시체 처리와 배후의 단서를 찾기 위해 조사하다가 발견한 걸 몇 개 주운 것뿐이야."

"왜 진작에 안 주고?"

"네가 사라졌잖아. 계속 안 돌아왔고."

 

드물게 와론의 입이 닫혔다.

그리고 곰곰히 떠올렸다. 그러고보니 현장 조사 시간이 꽤 길었던 것도 같다. 그땐 워낙 정신이 빠져있던 터라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또, 아무리 흙을 털어냈다지만, 무릎 아래로 저의 것처럼 잔 흔집이 유난히 남아있다. 이 새끼, 제법 기특한 짓을 하잖아.

투구로 얼굴이 가려져있음에도 그의 시선과 표정을 알아챈 양, 지우스가 서둘러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그걸 계속 걸고 다닐 셈이라면 보호 마법이라도 함께 부탁하는 게 낫겠군.”

와론이 계속 해보라는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니까, 그 물건에 다른 사람이 손대거나, 마법적인 가공을 덧입히는 걸 꺼리지 않는다면 말이야.”

“징그러울 정도로 친절한데. 뭐 잘못 먹었냐? 너 기린 아니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너만한 전력이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무척 비효율적이니까.”

 

이번 현장 탐색만 해도 그래. 네 나린기를 이용했으면 탐색 범위도 넓어지고 배후의 단서를 더 빠르게…

담담한 목소리로 하는 그 말은 어조도, 내용도 사뭇 건조하게 들렸다. 와론에겐 언제나와 같은 지우스의 군소리였다. 와론은 중간부턴 아예 딴청을 피우며 듣지 않는 체 했다. 그런 와론을 곁눈질로 슬쩍 살핀 지우스가 한숨을 쉬곤 야영지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무튼, 네가 이러고 있는 동안 다른 녀석들이 수고해줬으니 이번 일에 대한 보고는 새까만 닭 네가 한다. 바로 중앙으로 갈 준비를 해. 보고 내용은 정리해서 출발 전에 공유하도록 하지.”

“바로 부려 먹는 것보소?"

"회의 결과를 통보하라고 한 건 너야."

"아~주 버르장머리 없어. 기린이 아니긴, 담청색 기린 맞네!”

 

지우스는 이어지는 대답없이 멀어지기만 했다. 근 5년동안 내가 만만해진 모양이지. 버릇없는 녀석 같으니. 와론이 입속말로 중얼거리며 지우스가 건넨 조각들을 챙겼다.

"..."

와론은 그러고도 한참이나 그대로 앉아있었다. 기감을 세워 야영지를 살피니, 불침번 두어사람의 움직임만이 느껴졌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어둠이 천천히 물러날 무렵, 짙은 하늘에 주홍빛 여명이 깔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저 하늘은 푸른 색으로 물들게 될 것이다. 와론은 또 다시 떠올린다. 그 하늘과 같은 색의 눈동자를 가졌던

나의 벗,

상상은 잘 안 되지만, 어쩌면 넌 낡아빠진 목걸이 제발 좀 버리라며 소리치고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 목소린 들리지 않는걸.

어린애처럼 군다고 혼내지는 말아. 그날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하루도 자라지 않았으니까. 앞으로도 계속 그러겠지.

그러니 지금은, 조금 더 가지고 있어야겠어. 네 목소리가 다시 들릴 때까지는.

 

“싫으면 꿈에라도 나와보시게나~”

 

뭐, 어차피 내 맘대로 할 거지만.

 

*

 

“엽! 내가 왔다네~”

 

몇 주만에 다시 합류한 새까만 닭은 전과 다를 바 없어보였다.

길고 빨간 깃을 휘날리는 투구와 하얀 손수건이 묶여진 창, 온통 새까만 옷차림,

그 가운데, 전보다 조금 작아진 녹빛의 목걸이가 있다.


네.. 며칠 전 튓타에서 이야기한 '와론 목걸이 망가지면 우짜지?!!?'를 단편으로 쪘습니당

그날 트친분들과 이야기하며 나온 소재들을 조금씩 차용하였으니 문제가 되는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와론 목걸이 절대 지켜. 깨지지 마. 영원히 함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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