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도착지가 이세계라고는 들은 적이 없는데 (2)
어쨌거나 살 수 있을 것 같으니, 살기는 해야 했다.
인생사 기구망측이라지만 그래도 정도라는게 있지 않았던가. 샤워기에서 쏟아져내리는 물을 물끄러미보면서, 윤은 그런 생각을 했다. 한숨을 푹 쉬고 안으로 들어서면서도 생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윤이라고 해서, 매번 그토록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검은 마차에 올라타면서 뭐 이상한 일이 안 일어나리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했던 내용을 말로 말해보자면 그냥 그대로 존재소실되거나 하는 일 정도지, 이런 일은 역시 생각의 밖이었던 것이다.
‘아니, 원래세계 기준으로는… 내심 바라던대로, 제대로 존재소실이겠지만.’
스스로 도달해버린 답에 윤은 머리에서 무너져내리는 거품 탓만이 아닌 이유로 눈을 꾹 감았다. 일단 고통스러우니 방법을 찾으면서 순응부터 하고 말았지만, 용케도 신체가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었다고나 할까. 세상을 구성하는 기운도 이적에 닿는 법칙도 다르다. 이러한 법칙 중에 하나가 다르다는 건 그야말로 다른 세계라는 이야기밖에 안된다.
윤은, ‘번역’작업이 안정세에 들어섰음에도 아직도 들끓는 듯한 기맥 탓에 쑤시는 몸을 잠시 뜨끈하게 쏟아지는 물 아래 세워 뒀다. 기실 세계를 넘는다는 건, 윤의 고향 기준으론 왕왕 일어나기는 했다. 지식이라면 있기는 했다. 어쨌거나 보통이 아닌 일이긴 했다. 쉬운 것도 아니었고. 그래서, 이 정도면─ 법칙이 다른 이세계에 정의되지 않은 힘을 끌어안고 넘어온 상황에선, 오히려 선방이라 해도 좋기는 했지만.
윤은 그쯤에서 쏟아지는 물 아래에서도 떼지 않은 귀걸이에 손을 가져다 댄다. 본디부터 잡아당기면 귀에 연결된 자리에서 툭 떨어지게 만든 것이지만, 부러 떼지 않고 물 아래서 만지작댄다. ‘그래도 관이 열리기 이전에 이것이 움직일 정도로 번역이 끝나서 다행이긴 했지만.’ 하고 생각을 하면서.
그 귀걸이, 재료가 대개 나무와 실자락임에도 젖지 않는 귀걸이 또한 술식을 엮어둔 것이었다. 저주의 잔향을 억누르는 술식을 잔뜩 엮은, 인식저해의 효과도 있는 물건. 퍽 눈에 띄는 화려한 모양이지만, 그래서야말로 시선을 끌어 이내 흩어버리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윤 본인이야 관 안에서의 사태와, 관을 열자마라 들려오는 낯선 언어로 이 곳이 아주 별세계임을 알고 말았다. 통역 기능이 덤으로 붙은 목걸이가 하도 달아오르는 탓에 이 곳이 아주 다른 말을 쓰는 것을 제대로 눈치채고 말았다. 그래도 타인은 윤 본인이 직접 자각시키거나, 혹은 아예 처음부터 주의를 깊게 기울이는 것이 아니라면 참으로 낯선 말을 쓰고있다는 사실을 눈치채기가 어려울 것이다. 퍽 다르게 생긴 특성도, 흐릿하게 만들어선 무던하게 넘겨 줄 것이고.
‘그것만으로 괜찮을지는 또 모르겠지만.’
나이 서른쯤 넘어가기 시작하면 서너살이 무슨 대수랴만, 스물도 되지 못한 애들 사이에선, 특히 학생이라면 교육과정이란게 으레 학년이 갈리는 탓에 또래인지 아닌지 티가 나고 만다. 말하자면, 위아래로 나이차이가 ‘좁은’이들 사이에선, 그 ‘범위’에 들지 못하는 것이 못내 티나버리고 마는 것이다. 물론 아주 갈라선것도 아니고 서너살쯤이나 될 거 같으니, 그 정도 나이차정도라면 부러 먼 곳에서 온 문화차이라고 묻어버리지 못할 것은 또 아니지만.
그쯤에서 윤은 ‘…글쎄, 어떨지.’ 하고 한숨을 뱉었다. 인식저해의 도구를 빌리고, 온갖 수작으로 위화감을 줄이는 것도 정도가 있는 법이라. 이거저거 잔뜩 있는 와중에 뭐가 먼저 터질 지 알 수가 없다. 당장 윤 기준으로는, 이 기숙사에 속한 이들의 경향성에서부터 제 자신과 위화감이 드러날 요소였다. 윤 본인의 본업이 애초에 철장鐵匠이었던 것도 있는데다가, 어릴적부터 전형적인 무인武人이라 해도 좋을 사촌에게 휘둘려 이런저런 무예까지 익히기까지 했다. 그런 윤의 시점에서는 과연 책상머리라도 조금 비리비리하지 않은지, 싶은 정도가 대충 이곳의 중간값. 이를 역으로 보면, 당연히 윤 자신이 눈에 띈다는 결론밖에 나오질 않는다.
재차 한숨을 뱉은 윤은 머릿속 가득한 생각들을 일단 거기에서 끊었다. 딴 생각을 하며 샤워했더니, 한 것도 없는데 지나치게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직은 그럭저럭 그려러니 할 수 있지만, 이대로 생각을 이어가면 가벼운 샤워로 소비하기에는 지나친 시간이 되버린다.
이 전의 삶도 기숙학교에서만 8년 차. 빠르게 씻는 재주만 잔뜩 늘은 윤은 샤워 치고는 조금 오래 걸린, 그러나 심적으로 조금 시달렸을 소년 치고는 그런대로 이해할만한 시간으로서 샤워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같은 방이지만 가림막으로 갈라둬서 그런가, 제법 독림감이 강한 방. 각자의 구역에는 책장과 책상, 옷장과 침대가 한 채씩. 굳이 이렇게 넓게 4인실을 만들 거면, 아예 1인실을 만드는게 낫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널찍하다. 창가의 벽면에는 아마도 공용으로 보이는 냉장고. 전반적으로 구성은 4인실로 보이지만, 한 칸은 깔끔하게 비어 있다. 룸메이트 둘은, 다소 어둑해진 조명 아래서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다가, 문 소리에 반응한 듯 움찔 이 쪽을 바라본다. 윤은 머쓱한 양 고개를 꾸벅였다. 스치는 것 만으로도 대충 무엇인지 살피면서였다.
‘…손에 들고 있는 건 우리쪽의 학생용 단말 비슷한가? 지급 방식은 아닌거 같은데. 개인적으로 구해야 하나? …그런데, 내 단말 여기서도 쓸 수 있… 을리가 없군.’
제게 할당된 구역으로 들어간 윤은 뒤늦게 정신이 들어 짐을 풀듯 가방을 뒤지는 모양으로, 원래 다니던 학교에서의 지급 단말을 꺼내보았다. 다른 룸메이트가 들고있는것과, 모양에 일견 큰 차이는 없지만… 안된다, 전원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번역’한 것이나 ‘번역’이 아직 덜된 힘을 다 써가며 억지로 깨워 보면 일시적으로 전원은 들어오지만, 내부의 술식회로─구성하고 있는 법칙이 다르니 버티질 못한다. 손에 들고 억지로 하자면 못할 것도 아니나, 그리 억지로 가동시켜 봤자, 이 곳에서 있는 것들과의 호환성이 어차피 문제일 것이다. 같은 통신 방식을 쓰지도 않을 테고. 그것을 드러내 위화감을 늘리느니, 고장난 것으로 두는 것이 낫다.
윤은 들어오기 전에 안내로 설명들은 말을, 애써 머릿속에 그대로 떠올려 본다. 안내자는 기본적이고 간단한 사항만을 말하고, 대체로는 인트라넷에 있으니 각자 단말로 살펴보라고 했다. “우리 쪽에 들어온 노…학생들이 이렇게 대면으로 말한 것을 기억해 줄 리 없고.”라는 발언을 떠올려보자면 이쪽에서는 당연한 일이겠지. 들은 내용은 크게 다를 것 없이 세세한 부분까지 머릿속에 일단 담겨 있지만. 핵심에 닿을 수 있는 도구가 없다.
윤은 이번에는 정말로 표정을 제대로 가리지도 못한 채 다소 허망한 표정을 지었다. 손으로 제 눈을 가리고 한숨을 뱉었다. 짐이 있는 것과 숙소를 얻었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나. 화폐도 안통할텐데,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나? 그리 고민하는 모양은 알기 쉬운 절망의 모양이었다.
“…그, 너. 혹시, 단말이… 안돼?”
분명 사람 사이 관계가 서툴어보이는 동실자가 말을 걸고야 말 정도로.
아르덴은 그야말로 넋이 나간 듯한 모양으로 샤워를 양보하고 가장 마지막 순서까지 멍하니 침대에 걸터앉아있던, 샤워를 하고 나와서는 정신을 잡은 듯 단말기를 찾았던 룸메이트를 보았다. 그 단말에 전원이 들어오다가 픽 꺼지는 것도. 표정의 변화는 적었지만, 이어지는 모든 모양은 알기 쉬운 절망의 모습이었다.
‘…그러고보니 까만 머리, 라고 할까. 마지막까지 불리지 않아서 넋나간 얼굴로 있던 그 쪽이지.’
그 모든 것을 떠올린 아르덴은 (어둠의 거울에 인정받아서 온 나이튼 레이븐 칼리지 생이지만) 동정을 금치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이그니하이드다. NRC출신이라고 할까, 이그니하이드의 OB인 손윗동기가 있는 아르덴은 기숙사가 본질적으로 닮은 부류를 배정한다는 것도, 이 이그니하이드는 서브컬쳐와 기계류에 능숙한 이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르덴 자신이라면 이 룸메이트의 상황에 충분히 절망할 수 있었다.
아르덴은 그 때, 절망하는 쪽이 아닌 다른 룸메이트도 비슷한 시선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형은 같은 방을 쓰는 놈들과 굳이 애쓰면서까지 친해질 필요 없다고는 했지만, 어차피 1년은 같은 방에서 살아야 하는데……. 그래서 아르덴은, 새해 첫날 계획을 세우는 (분명 3일을 채우지 못할 그런 계획을 세우는) 느낌으로, 룸 메이트에게 용감무쌍하게 말을 걸었다.
“…그, 너. 혹시, 단말이… 안돼?”
말을 걸린 것에 놀란 것인지 룸메이트가─ 분명, 성도 뭣도 없이 ‘윤’이라는 이름이었을 그가 고개를 든다. 표정 언저리엔 약간의 절망, 다소 어둑한 곳에선 묘하게도, 깊은 구멍위에 무언가 타오르는 듯 보이는 검보랏빛 눈동자. 그 형형함에 움찔 물러서면서도, 어라, 어디 출신이지. 무심코 의문을 가지게 되는 낯선 느낌의 이목구비. 흔치 않은 피부톤. 새삼 인지하자면, 드문 동방계의 낯이다.
“아, 응……. 아, 나는 윤이라고, 하는데. 응. 그,”
낯선 인상에 멈칫한 사이 머뭇거리는 듯 토해지는 말의 어설픔이 동류의 것이다. (아직 아르덴은 이것이 이 룸메이트가 요령을 섞어서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정도의 경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르덴은 이 룸메이트가 정신을 빼놓고 있던 탓에 이름조차 제대로 교환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헤메는 말 끝에서 깨닫고는 말했다. “아, 아르덴, 아르덴 클라렌스 Arden Clarence.” 그렇게 말하니 입술이 달싹인다. 이름을 한번 입 안에서 굴린 것일까. 잠깐 그런 모습을 보인 윤은 조금 묘하게 찡그린 듯한 낯으로 말했다.
“…그, 아르덴, 군이라고 하면 되나? 미안, 아마 문화가… 틀린거 같아서, 그, 우리쪽은 보통 이름을 부르는데, 이름을 불러도… 실례가 아닐까?”
“앗, 응, 괜찮아. …편하게 아르덴이라고 불러도 돼.”
“…응, 고마워. 그럼, 그 혹시… 뭔가, 방법을 알아?”
“아, 그. 학교에 구매부가 있는데, 물건이… 많다고 했어. 아마 비싸지 않은, 프리페이드 단말도, 있을거야. 수업 전에… 아침 7시에서 9시 사이에도 잠깐 연다고, 들었거든. 내일 가보면?”
아르덴은 말을 전하려는 사실을 다 전달해냈다. 룸메이트, 윤은 조금 놀란듯한 표정을 내다가, 이내 금방 웃는 낯을 했다. 아마도 본연의 것일듯한 웃음은 묘하게 어른스러운 듯 단정한 모양이었다. “…고마워, 아르덴.” 묘하게 낯선 느낌으로 닿는 제 이름에, 아르덴은 ‘어라, 이대로면 꽤나 좋지 않아? 칼리지 첫 친구 성공?’ 라는 생각을 하며니 적당히 물러났다.
그쯤에서, 혼자 조금 소외되는 분위기로 있던 다른 룸메이트가 말을 걸어왔다.
“…그, 혹시. 윤… 이라고 했지. 조금 구형이긴 한데, 오늘 볼 것도 있을 테니까, …태블릿…빌려줄까?”
망설이는 듯한 분위기로 말을 걸어온 그는 두 개의 시선에 멈칫했다가. “아, 나는, 스카일러 던Skyler Dunn, 이라고 해. 카일kyle, 이라고 불러도 되고……. 괜한 참견이면,” 제 이름을 밝히다가 금방 부정적인 영역에 떨어지듯 붙는 말에 윤이 재빠르게 끼어들어온다. “아냐! 정말, 고마워.” 정말로 기쁜듯이 보였다.
“…나 정말, 오늘 운수가 왜 이러나 하고……. 이름은, 누락돼지 않나. 단말은, 먹통이 되고……. 재차, 둘 다, 먼저 말 걸어줘서 정말 고마워.”
그리고 이것은, 윤은 아직 몰랐지만, 이것은 이 빌런 학교에는 정말 드문 호의의 콜라보였다. 이그니하이드라면 더더욱. 스카일러가 “내일 저녁에 돌려줘.” 라며 건네준 구형 태블릿을 받아든 윤은 눈인사마냥 고개를 조금 까딱인다. 그리고 무언가를 생각하듯이─혹은 다소 낯선 것을 보더니 잠깐 톡톡 화면을 두들기는가 싶더니, 금방 감을 잡은 듯 손이 움직인다. 그렇게 스카일러가 처음 띄워 준 인트라넷 사이트의 화면에서 빠르게 안내 내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것에 조금은, 위화감이 있었지만. 신경쓸 정도는 아니었다.
스카일러도 아르덴도, 금방 신경을 닫고 제 손에 들린 단말로 시선을 다시 돌렸다.
사실 남학교라고 할지 내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른 성비 망한 공학 날조로 갈 지 아직 정리 못한 편.
그래서 룸메이트 이름은 일부러 적당히 여자 이름으로도 남자 이름으로도 쓸 수 있는 친구들만 골라서 썼습니다.
그래서 확실히 남학교 설정은 따로 빼서 써 두었습니다. 아래에 링크 공개, 언젠가 한 쪽으로 마음 정하면 본문에 들어갈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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