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鳴琴

제5인격 2차 창작

百波 by 파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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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도의 연주자 없이 스스로 소리를 내는 악기, 라고. 한데 모인 인파 사이로 겨우 보인 그 악기는 그저 평범하고 작은, 나무 상자로 보일 뿐이었다. 아주 조금 흥미가 동하였으나, 무수한 인파를 헤치고 나아갈 정도는 아니어서, 그대로 발길을 돌리려 하였는데. 한낱 작은 나무 상자에서 나온 소리라고 하기엔 너무도 애처로운 곡조가 옷깃을 잡아끈 것은, 눈도 깜박이지 못할 새였다. 그토록 찰나였다.


Music box, 라는 이름을 달고 장원에 들어온, 딱 제 손에 들어오는 작고 윤이 나는 나무 상자. 귀족들 사이에서 한창 유행한다는 그 나무 상자를, 트레이시는 지금 금속판에 반사되는 빛만큼이나 반짝이는 눈으로 살피고 있다. 태엽 장치로 인하여 일정히 돌아가는 봉과 그에 맞물려 튕기며 소리를 내는 정교한 금속판들을 보고 있자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척 보기에도 크기가 작아 만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음계와 박자를 정확히 계산하여 하나의 음악을 만들어내는 것을 보아하니 여간 세심한 작업임이 틀림없었다. 그동안 가까이에서 본 적 없음은 물론이고 직접 손에 들고 분해하며 만지작거릴 틈이 없었기에 트레이시는 들뜨는 마음을 억누를 생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조심스레 부품들을 들춰내며 트레이시는, 이 작은 상자의 노랫소리에 잠시 넋을 잃었던 제 정인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요 며칠간 제 정인의 얼굴을 잘 마주하지 못하였다. 무슨 사정이 있으시겠거니, 하고 마음을 다잡아도 눈에 서리는 근심은 어찌하질 못하는 그였다. 하루에 적어도 한 시진 정도는 함께 시간을 보내던 것이 급작스레 줄어 이젠 미소 건네며 안부 인사를 하는 것이 다였다. 혹여 제가 잘못한 것이 있는가 싶다가도, 애타는 제 속도 모른 채 환히 웃어 보이는 트레이시가 원망스럽기도 했으며, 괜스레 애먼 침대보를 움켜쥐며 속을 삭이기도 하였다. 도대체 무얼 하시려고 저리 급한 걸음으로 쪼르르 가시는지. 와중에 그러안고 놓고 싶지 않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사라지는 모습 뒤로 허공에 손을 뻗어보고 다시 거두길 벌써 몇 번째인지 셀 수 없었다.

언제부터일까, 이러한 시간이 반복된 것은. 가만히 기억을 더듬는 눈꺼풀 위로, 한 겹의 기억이 덮어 씌워졌다. 애틋한 곡조로 울던 자명금. 어찌하여 그런 작은 것에서 절로 곡조가 나오는지 도통 모를 노릇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은 나무 상자를 보는 제 정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음을 기억한다. 무얼까, 그래, 선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자세히 살펴보진 않았지만, 금속 태엽 장치라 언뜻 들었던 것도 같다……. 설마. 황급히 몸을 일으켜 자명금이 놓여 있던 곳에 걸음을 옮겼다. 없다. 주변을 살폈다. 없어.

그랬구나. 신중한 표정으로 침착히 자명금을 만지작거릴 제 정인의 모습이 자동으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들뜬 기색은 덤이었다. 사필안은 머리칼을 늘어뜨린 채로 길게 한숨 지으며 쓰게도 입꼬리를 올렸다. 기계라면 그렇게 좋으실까. 기름에 범벅이 되시고 금속 특유의 냄새가 온몸에 점철되어도. 기계라면, 기계라면 그렇게. 조금은 서글픈 기분이 고개를 드는 것을, 구태여 막지 않았다. 금일 밤은 서글프게 보내야 할 듯싶었다.

 


 

붉은 기모노 차림새의 그를 만나고 돌아온 것은 트레이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예정된 모든 경기가 끝이 나면,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제 정인과 시간을 보내거나, 온종일 방에 틀어박혀 기계 부품을 만지는 일상이 다였다. 가끔 생존자 몇과 수다를 떨기도 했지만, 감시자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만나는 일은 드물었다. 그를 찾아간 목적은 다름 아닌 제 정인을 위해서였다.

이곳 장원은 제 정인이 나고 자란 곳과는 많이 다른 곳이었다. 그와 같은 검은 머리의 사람들이 거리를 누비는 동쪽이 아니라, 푸른 눈의 전혀 다른 언어를 가진 이들이 거리를 누비는 곳. 혼령이 되어 서쪽에 방문한 제 정인으로서는 고향이 그립고 문득 생각날 것이었다. 그 증거로 그가 가끔 흥얼거리는 곡조는 그의 고향 냄새가 고스란히 배어나 있었다. 쉽지 않음을 알고 있었지만, 트레이시는 제 정인이 작은 나무 상자에서 흘러나온 소리에 지은 표정을 볼 적부터 직접 만들어 주겠노라 다짐한 터였다.

짐작한 대로 힘든 일이었다. 언뜻 훔쳐 들었던 리듬만으로는 정교한 음계 작업이 불가했다. 게다가 익숙하지도 않은 리듬이었으므로 꽤 고전 중이었다.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에 서운해하는 제 정인 얼굴을 마주하기도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얼른 끝내고 달려가 안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찾아간 것이, 그나마 그와 비슷한 출신의 붉은 나비였다. 아무래도 동쪽의 음악에 전혀 문외한인 자신보다는, 예전에 게이샤였다던 그가 더 정통할 듯싶었다.

다행히도 헛수고는 아니었다. 그는 실제로 많은 도움이 되어주었고, 상냥하기까지 한 덕분에 트레이시는 오랫동안 묵은 고민이 풀린 듯한 편안한 미소를 지으며 제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속도를 높여서 작업하자. 이제 조금만 있으면 돼. 그러나 트레이시는 몰랐다. 제 방으로 돌아오는 도중 자신의 미소 띄워진 얼굴을, 사필안이 먼발치에서 보고 말았다는 것을. 곧바로 서글픈 빛이 서리던 사필안의 눈동자도.

 


 

사필안은 거듭 생각했다. 금일, 어떻게든 결론을 내 보자고. 그간 타는 속을 삭이며 돌아서서 멀어지는 걸음을 가로막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참아왔다. 본래 그는 참을성이 좋아 웬만한 일에 대해서 끈기 있게 대처할 수 있는 성정이었다. 하지만 더는 못 참아. 이만하면 충분히 참았다고 생각하며 사필안은 눈을 꾹 감았다. 표정을 잘 숨기는 그가 일부러 서운한 티를 내보기도 하고, 말 같지도 않은 말들을 늘어놓으며 질질 끌어보기도 했다.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트레이시는, 제 정인은, 그는, 여전히 바빴다. 그 빌어먹을 자명금에 빠져서.

금일은 사필안의 생일이었다. 사필안은 부러 찾아가지 않고 기다렸다. 식사 자리에도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고, 경기 내에서 마주쳤음에도 특별히 반응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무언의 항의이자 한편으론 제발 알아달라는 절박함이기도 했다. 사필안은 정좌하고 침상 한가운데 앉아 있었다. 피가 돌지 않아 차디찬 육신이건만 눈만은 이글거리며 똑바르게 시계를 응시했다. 식사 시간은 한참 전에 지났을 것이었다. 이러다 정말 안 오면 어쩌지. 불현듯이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설마 정인의 생일을 잊었을까. 아무래도 그건 아닐 것이라며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떼어내려는 듯이. 그러나 한 번 떠오른 생각은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의미 없이 고개만 힘차게 내젓는 제 모습이 조금 우스워서 실소하고 말았다. 약하지만 확실한 손 기척 소리가 들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누구십니까. 이 늦은 시에.”

하마터면 튕겨 나가 방문을 활짝 열 뻔했다. 사필안은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고 조금 텀을 두어 차분히 대답했다. 누군지 알면서도 묵묵히 대답을 요구하는 그에 조그마한 목소리가 답했다.

“저에요, 트레이시.”

누군들 모를까. 이 시간에 여길 찾을 사람이 누가 있다고. 손 기척만 들어도 당연히, 당연히 그대잖아. 쏟아내고 싶은 말을 누르고 또다시 사필안은 텀을 두어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대, 무슨 일로.”

“당연히 필안 생일이니까 왔죠…!”

당연히. 이쪽은 진즉부터 하고 싶던 말임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평히 말하는 눈빛에 그만 깜박 넘어가 버릴 뻔했다. 자연스레 안아 들 뻔했다. 정말, 그럴 뻔했다. 제 정인을 들어오게 하고 사필안은 짐짓 화난 몸짓으로 방문을 닫았다. 꾹 다문 입술에 서운함이 뚝뚝 묻어나왔다. 제 정인 쪽을 보지도 않고 휙 돌아서서 자신이 생각할 때면 자주 앉는 의자에 소리 없이 앉는 사필안에 트레이시는 어쩔 줄을 몰랐다.

흘깃 쳐다본 품엔 조그마한, 정성스레 포장된 상자. 크기로 보아하니, 자명금이 틀림없었다. 사필안은 냉소를 흘리며 턱을 괴었다. 그간 실컷 만지작거리시더니, 기필코 그걸 여기까지 들고 오셨구나. 냉소의 의미를 알 턱이 없는 트레이시는 그저 엉거주춤 방 한가운데에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영겁의 세월 같은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먼저 입을 뗀 것은 사필안 쪽이었다.

“여기까지 걸음 하셔놓고 그리 아무 말도 없으시면 제가 어찌 해드려야 합니까?”

“…미안해요.”

정말 미안하단 얼굴임에도 놓지 않는 품 안의 자명금. 무엇이, 어떻게, 얼마나 미안한 것인지, 사필안은 도저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무얼 그리 열중해서 하시는지. 그간 나눈 대화가 몇 마디인지 셀 수도 있겠더군요.”

제 정인의 입이 열리려는 찰나, 사필안은 서늘하게도 말을 이었다.

“자명금이 그리도 좋았습니까? 정인보다도 더?”

 


서늘하게 와서 박히는 그 말들이 어찌나 아픈지. 트레이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요새 정인과의 모든 시간에 소홀했다는 것을. 아무 설명도 없이 서운하게 군 것도 알고 있고, 일부러 내비치는 서운하다는 신호들도 알아챘다. 그럴수록 죄책감은 심해졌지만, 제 정인이 모르게 기간에 맞춰 그 정교하고 세밀한 기계를 제작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절대로 이 기계가 더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분명 만드는 과정은 즐거웠지만, 그것은 모든 과정이 제 정인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부품 하나를 조립해도 정인 생각. 완성된 음악을 들을 때도 정인 생각.

그러므로 이 불편한 상황을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제 정인을 위해 열심히 만든 결과물을 보고, 듣고, 제 진심을 전하고 싶었다. 제 눈앞의 정인은 형형히 눈을 빛내며 저를 뚫어버리겠다는 듯이 바라보고, 제대로 말조차 꺼내지 못하는 지금 이 상황을, 풀어내야만 했다. 하지만 어지간한 변명 따위는 상황을 악화시킬 것임이 분명했다. 제가 감정이 격해져도 안 될 것이었고, 우는 것은 더더욱 안 된다. 트레이시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고 결연하게 말했다.

“좋았어요. 왜냐하면,”

제 정인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며 또렷이, 그러나 확실하고 신중하게 다음 말을 이었다.

“필안을 위한 자명금이었으니까요.”

순간 정인의 눈이 의아함과 그것을 억누르는 복잡한 심경으로 가득 찼다. 반응을 확인한 트레이시는 또박또박, 그간의 모든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동안 바빠서 같이 보낼 시간이 없었던 것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해요. 아무런 설명 없이 그런 일을 당하면 누구라도 화가 날 거예요. 필안이 화가 난 것도 당연해요. 저라도 화가 났을 거예요. 그러니 마음껏 화를 내도 좋아요. 하지만 이 말들만은 다 듣고 화를 내줬으면 좋겠어요.”

침묵. 잠깐 숨을 고르고.

“처음 자명금이 장원에 들어왔을 때를 기억해요? 저는 생생히 기억나요. 자명금이 인상 깊어서, 라고 하면 틀린 말은 아니겠지만 중점은 그게 아니에요. 그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 건 필안의 표정을 봤기 때문이에요. 자명금 소리를 듣기 전에 필안은 흥미가 그다지 있어 보이지 않았어요. 그래서 실제로 흘낏 보기만 하고 뒤를 돌았죠. 하지만 소리가 들리자마자 필안은,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어요. 넋이 나간 표정으로 낯선 소리를 듣는 필안을 보자마자, 저는 결심했어요. 필안이 자주 흥얼거리던 노래가 생각났거든요. 그 노래를 직접, 자명금으로 만들어 선물하자, 하고요. 시간은 조금 촉박할 수도 있겠지만 생일에 선물하고 같이 듣고 싶었거든요.”

말하면서 트레이시는 천천히, 품에 안은 포장을 풀었다. 제 정인의 눈에 서늘함이 사라지고 놀라움이 들어찬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때부터 자명금을 가져가서 구조를 파악하느라 분해하고 조립하고를 몇 번이나 했는지 몰라요. 처음엔 어려웠지만 이젠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필안이 흥얼거리던 노래를 떠올리려니 막상 막막해져서 도움도 좀 받고, 기억을 더듬어 최대한 흉내 낸 리듬을 완성해 만들기에 착수하고. 어느새 필안 생일이 성큼 다가왔지 뭐에요. 정신없고 힘들고 초조했어요. 오늘까지 못 끝내면 어쩌지, 하고요. 하지만 그때마다 항상 필안을 생각했어요. 필안이 기뻐해 주면 좋겠다고. 절대 필안보다 자명금이 좋지 않아요. 자명금을 만드는 모든 순간에 필안 생각을 했는데, 어떻게 그래요.”

직접 만든 자명금의 태엽을 조심스레 감았다. 끝까지 감고 손을 놓자, 몇 번이고 검토하고 들어보며 완성한 리듬이 또렷하게 흘러나왔다.

“생일 진심으로 축하하고 사랑해요. 정말로요. 그리고 다시 한번 미안해요. 이제, 마음껏 화를 내도 좋아요.”


 

이야기를 들어가면 갈수록 사필안은 제 뺨을 격하게 때리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이 멍청한 이를 매우 쳐달라고 하고 싶었다. 왜 제 정인을 못 믿었던 건지. 왜 섣불리 단정 짓고 혼자 마음 상해했던 건지. 왜 알지도 못하면서 매정한 말을 그리도 내뱉었는지. 흘러나오는 익숙한 곡조를 듣고는 거의 실성할 지경이었다. 최대한 흉내 냈다더니, 그냥 똑같잖아. 낯선 자명금 음이지만 제 고향의 곡조니 눈물이 맺히는 것은 덤이었다. 자신의 오해를 풀고 진심을 전하고자 제 눈을 똑바로 마주하는 동그란 눈을 보고 있자니 엄청난 무게의 죄책감이 마음을 짓눌렀다. 어찌 용서를 빌어야 할까.

의자에서 일어나 제 정인에게로. 자명금을 가까이서 보니 정교한 기계라는 것이 더 실감 났다. 한참을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트레이시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이 작은 손으로 얼마나 고되었을까. 저를 위해 온종일 자명금만 붙잡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미치자 마음이 아려왔다.

“저는, 저는.”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말들이 눈물이 되어 방울져 떨어졌다. 미안하고, 고맙고, 사랑하고. 사필안은 울음 섞인 말들을 겨우겨우 내뱉었다. 제 정인은 서글픈 빛으로 미소지으며 그저 가만히 눈물들을 닦아주었다. 그것이 또 미안해서, 미안하다는 말만 수없이 내뱉었다.

“정말, 맘에 듭니다. 자명금. 너무, 감사합니다.”

그 말을 들은 제 정인이 다행이라며 환히 미소짓는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사필안은 정인을 품에 안으며 생각했다. 이리 고운 면밖에 없는 사람은 세상에서 제 정인 하나뿐일 것이라고. 다시는 제 잘못을 번복하지 않겠다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대뜸 자명금을 들고 찾아온 제 정인의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지난 정인의 생일날, 자신은 손수 만든 자명금을 선물했다. 그 당시 오해를 푸는 것과 울보가 되어버린 정인을 진정시키는 것에 급급해서 미처 작동 방법을 설명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태엽이 다 풀려서 멈춰버린 자명금에 어쩔 줄 몰라 하며 함부로 손도 대지 못하고 상자에 넣어 귀히 가져온 제 정인이었다. 눈물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했고, 또다시 미안하다는 말이 입에 달라붙어 왔다. 저번에 매정한 말을 했던 것을 마음에 담아 둔 것은 아니지만, 놀리고 싶은 욕구가 부풀어 올랐다. 트레이시는 짐짓 심각하고 화난 투로 제 정인에게 말했다.

“고칠 수 없을 것 같아요, 이제. 소리를 들을 수 없어요. 필안, 제가 손수 선물한 건데….”

더욱이 울상이 되어서는 사과하며 쭈그러진(?) 정인을 한참을 지켜보다, 트레이시는 폭소를 터트렸다. 갑작스러운 폭소에 놀란 정인이 토끼 눈을 뜨고 자신을 쳐다본다. 소리 내 크게 웃고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훔치고서, 트레이시는 웃음기가 만연한 목소리로 제 정인에게 이 서양물건의 진실을 알려주었다.

“필안, 이건 고장 난 게 아니에요. 그저 태엽이 다 풀렸을 뿐이니 태엽만 다시 감으면, 언제든 소리를 다시 들을 수 있어요. 이렇게요!”

순간 멍해졌다가 제정신으로 천천히 돌아오는 제 정인이 한없이 귀엽다. 태엽을 다시 감아 멀쩡히 소리 나는 자명금을 옆으로 치워두고, 트레이시는 제 사랑스러운 정인의 볼에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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