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세계

케일럽 개인로그


호흡마다 눅눅하고 차가운 습기가 폐부를 가득 채웠다. 젖은 풀의 냄새가 코끝을 스치고 바스락거리는 풀잎 흔들리는 소리가 귓가를 쓰다듬는다. 케일럽은 눈을 내리깐 채 고요하게 숨을 내뱉었다. 한 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은 채 키가 큰 풀 사이에서 몸을 감추고 있는 중이었다. 제 옆에서는 외조부가 숨을 죽인 채 날카로운 눈으로 풀 너머를 꿰뚫듯 쳐다보고 있었다. 봄과 가을은 사냥을 나서기에 괜찮은 때였다. 야생 동물들이 분주해지는 시기였고 사람이 움직이기에도 적당한 계절이었다. 사냥을 나서면 주로 잡는 짐승에는 꿩이나 오리, 사슴이 많았다. 그리고 드물게 여우나 멧돼지 같은 것을 잡곤 했다. 오늘은 꿩이나 오리가 많이 보이곤 하는 들판으로 왔으니 멧돼지 같은 것을 잡는 날은 아니었다. 케일럽은 작년 가을 사냥에서 성체가 다 되어 가는 멧돼지를 잡았던 일을 떠올렸다. 침을 줄줄 흘려대며 언제든 들이받을 준비를 하던 멧돼지는 총을 여섯 발이나 맞고 그 무거운 몸을 바닥에 뉘였더랬다. 거친 산을 오르내리며 생활하던 짐승의 고기는 누린내가 심했다. 그날 저녁은 식사를 거의 할 수 없었다.

 

사냥에 적절할 만큼 떨어진 곳에 말 두 필을 묶어두고 낮은 자세로 풀숲에 몸을 감춘 지 어느덧 한 시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외조부는 사냥을 나설 때 열의 여덟은 사냥개 두 마리를 함께 데리고 다녔는데, 오늘은 그마저도 없는 날이라 간간히 들려오는 말의 투레질 소리 외에는 사위가 조용했다. 사냥은 인내심과의 싸움이라고, 외조부는 케일럽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가르쳐왔다. 때문에 언제부턴가 기다림은 케일럽에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늘은 흐렸고 먹구름이 덩치를 불린 채 아래를 굽어보고 있었다. 언제 비가 쏟아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날씨였다. 습기를 머금고 짙은 색으로 물들어있는 흙을 내려다보던 케일럽이 흘긋 고개를 돌려 저만치 멀리 묶어둔 말을 쳐다보았다. 말 등에 얹힌 안장 아래로 머리가 꿰인 채 축 늘어진 오리 다섯 마리가 보였다. 외조부는 지나칠 정도로 과하게 사냥을 즐기는 이는 아니었지만 항상 넉넉하게 사냥을 했고 그 대부분은 별장과 말을 관리하는 이들의 손에 떨어졌다. 평소의 사냥시간을 가늠했을 때 오늘의 사냥은 끝이 나려면 아직 멀었고, 그 사이 짐승이 잘만 나타나 준다면 적어도 열댓 마리는 더 잡을 수 있을 터였다.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케일럽의 상념을 깨트렸다. 사냥감이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는 신호였다. 이 소리가 들리면 사냥개들은 몸을 낮추고 귀를 뒤로 접어 꼼짝도 않은 채 외조부를 기다렸었다. 오랜 훈련의 결과일 것이다. 사냥개들에겐 그러한 의미였고, 케일럽에게는 총을 견착하라는 의미였다. 종종 엇맞아 푸드덕 홰를 치고 솟구치는 새를 놓치지 않기 위해 외조부가 발포 준비를 하면 함께 총구를 든 채 기다렸다. 케일럽은 발포 직전의 긴장감이 마음에 들었다. 고요했고, 한 점을 제외한 모든 것이 시야 밖으로 사라졌으며, 당겨진 공기의 팽팽함이 심장을 가볍게 조였다. 다가올 작은 죽음의 냄새를 기다렸다. 흡, 하고 숨 삼키는 조그만 소음 뒤로 탕― 공이가 화약을 폭발시키는 소리가 모든 긴장감을 찢어발겼다. 오리 몇 마리가 요란스레 날아올랐다. 케일럽은 외조부의 총을 맞고 튀어 올랐다 다시 떨어지는 한 마리를 내버려두고, 날아오르던 것들 중 하나에게 발포했다. 익숙한 반동이 어깨를 뒤로 미는 동안에도 눈은 제가 쏜 것을 맞고 추락하는 오리를 좇았다. 떨어지는 위치를 봐두어야 회수하러 갈 때 헤매지 않을 수 있었다. 섬찟한 화약냄 새가 매캐하게 죽음의 냄새를 덮어 가린다. 사냥은 가장 쉽고 유희적인 살육이었다.

 

네 마리의 오리와 두 마리의 꿩을 더 잡는 동안 케일럽과 그의 외조부는 들판과 숲이 만나는 경계에 가까워져 있었다. 케일럽은 마지막으로 총을 맞은 꿩 한 마리가 숲 안쪽으로 도망치는 것을 뒤쫓아 숲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흐린 날씨에 우거진 숲 속은 더 어둑하고 눅눅했다. 발아래에서 삭아가는 지난 계절의 마른 낙엽과 풀잎의 톡 쏘는 냄새가 젖은 공기에 뒤섞여 짙은 숲의 향을 내고 있었다. 날아오르지 못해 날개만 요란하게 푸드덕거리는 소리를 좇아 걷길 수십 걸음, 제법 깊이 도망친 꿩이 저만치에서 발악을 하고 있었다. 케일럽은 그 광경을 보며 총을 한 발 더 쏘아야할까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가죽 부츠가 걸음마다 묵직한 소리를 내며 가녀린 나뭇가지를 부러뜨린다. 케일럽은 그것이 죽음을 감싸 안는 숲의 비명 같다 느꼈다.

 

케일럽이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 시끄럽게 퍼득이던 날갯짓 소리는 간헐적으로 들려올 뿐 서서히 잦아들고 있었다. 케일럽은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서 조용히 선 채 꿩의 숨이 다해가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인간에 비하면 턱없이 조그만 가슴이 얕게 오르락내리락 했다. 작은 눈이 유리구슬처럼 반질거린다. 흙바닥을, 풀숲을 딛고 서있어야 했을 발은 발가락을 편 채 뻣뻣하게 굳어가는 중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조류는 사슴 따위의 짐승만큼이나, 혹은 더 많이 사냥과 같은 귀족들의 유희거리에 이용되었다. 조류는 사냥하기에 쉬웠고, 개채 수가 많았다. 야생 조수 수렵에 대해 엄중한 규제를 받던 일반 시민들까지도 살아있는 비둘기를 날려 쏘아 맞추는 사격을 즐긴 역사가 있으니 조류들이 인간을 원망할 수 있다면 그 크기가 결코 만만하지 않으리라. 지금 제 앞에서 퍼득이는 꿩도 짙은 원망을 품고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간헐적으로 몸부림치는 꿩의 눈에서 살고자 하는 시퍼런 본능이 들여다보이는 듯 했다. 케일럽은 꿩의 목을 꺾어 좀 더 빨리 편하게 만들어 줄 수도 있었으나, 그렇게 하는 대신 꿩이 스스로 숨이 다하기를 기다리는 쪽을 선택했다. 살고자 하는 본능으로 몸부림치는 그 선연함을 좀 더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의 죽음을 유희로 삼아 즐긴다는 것은 지나치게 폭력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폭력적인 만큼 자극적이었다. 자극은 사람에게 생동감을 주어 움직이게 만드는 힘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익숙해지고 싫증이 나게 마련인지라. 죽어가는 꿩을 내려다보던 케일럽은 문득 궁금해지는 것이다. 고릿적부터 이어져온 이 살육의 유희에서 다른 사냥감을 쫓은 역사는 또 얼마나 길런지. 살아 움직이는 것은 짐승만이 아니다. 이를테면, 그래. 동족 같은 것. 케일럽은 어깨에 메었던 엽총의 끈을 스르륵 잡아 내렸다. 엽총을 쥔 채 돌아서자 나뭇잎 사이로 외조부의 몸이 반쯤 가려 보인다. 이렇게 보는 외조부는 아무것도 모른 채 한가로이 풀을 뜯는 사슴과 무엇이 다른가. 총구 앞에 세우는 순간 사람도 그저 사냥감에 지나지 않는다. 케일럽은 소리 없이 유려한 움직임으로 개머리판을 어깨에 단단히 가져다대고, 가늠쇠 끝에 외조부의 몸을 세웠다. 말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는 등의 정중앙이 가늠쇠에 걸렸다. 숨을 가늘고 길게 내쉬며 흔들림을 묶는다. 총은 이미 장전된 상태였다. 방아쇠울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던 검지가 방아쇠 위로 사붓하게 내려앉았다. 방아쇠만 잡아당기면 빗나가지도 않고 저 등에 작은 구멍을 내놓을 수 있을 터다. 치명적이지 않은 곳을 쏘아 달아나게 만든다. 고통은 사지를 옭아매니 서둘러 쫓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핏자국을, 혹은 소리를 쫓아 따라잡아서 강렬한 감정에 젖은 눈을 마주하면. 그 사이 미간을 조준하고……. 케일럽은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너른 등이 나뭇잎에 완전히 가려질 때까지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케일럽! 아직 못 찾은 거냐?"

"…아뇨. 지금 챙겨 가요."

 

조준할 때만큼이나 조용하게 총을 다시 어깨에 맨 케일럽이 거의 숨이 끊어진 꿩의 두 다리를 한데 잡아 올렸다. 눈 감긴 꿩의 작은 머리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눈높이까지 들어올려 감긴 눈을 쳐다보던 케일럽이 이내 저벅저벅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몸에 힘이 빠져 축 늘어진 꿩의 몸이 죽음의 무게만큼 무거웠고, 빠져나간 영혼의 무게만큼 가벼웠다. 두 가지 감각이 동시에 느껴지는 기분은 기묘했다. 쉽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함에 휩싸인 케일럽은 돌아오는 저를 발견하고 먼저 말 위로 훌쩍 올라탄 외조부와 시선을 마주친다. 그 단단한 시선과 외조부의 곧은 자세는 종종 그를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게끔 만들곤 했다. 허물어지는 것이 보고 싶었던 걸까. 케일럽은 조금 전 숲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총을 쏘지 않은 것은 옳은 일이다. 외조부와 단 둘이 나온 사냥이었다. 몸에서 짐승의 흔적이 아닌 총탄 자국이 발견될 경우 의심을 받는 것은 당연히 자신일 테니. 그런 의심을 사서 받을 정도로 바보는 아니었다. 외조부는 자신과 '무사히' 돌아가야 했다. 꿩의 눈구멍을 통해 굵은 끈을 꿰어 매단 케일럽이 제 말 위로 가볍게 올라탔다. 발굽을 구르는 말의 목을 두드리며 진정시키는 사이 케일럽의 시선은 외조부의 말에 걸린 오리들을 향해 있었다. 총구 앞에 세우는 순간 모든 것은 똑같이 사냥감이 된다. 어떤 존재든 저런 꼴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불현듯 고개를 든 케일럽이 외조부를 말간 눈으로 바라보았다. 어깨에 멘 엽총이 제 존재감을 발하듯 묵직하게 느껴졌다.

 

"비 냄새가 나요. 그만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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