知覺

끝사랑

하운현 by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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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성숙한 사랑 같은 것은 알지 못했다.

천륜으로 이어진 관계에서 오는 사랑도 느껴본 적 없는 인간이 인륜조차도 아닌 사람에게 사랑을, 그것도 성숙한 걸 건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인간도 사랑을 나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그런 사람이길 바랐다. 내 안에 없는 것을 줄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상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정이 피어난 상대를 보면 심장은 당연히 빨리 뛰는 것인데도, 나는 심장이 이상하다며 사람이 없는 곳으로 뛰어가 애꿎은 심장을 마구 쳤다. 가라앉아. 가라앉아. 차라리 멈춰. 가슴 한 중간에 멍이 든 것은 그 안의 심장과도 닮아있었다. 뇌와 심장에 진한 울혈로 남은 어린 시절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우울하진 않았지만 무력했고, 그렇기에 알코올과 니코틴으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그 두 가지가 아니면 나는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루에 한 갑 내지 두 갑. 닷새면 한 보루를 없앴다. 한 달이면 대여섯 보루가 사라졌다. 술은 가격 대비 효과가 좋지 못해 담배보단 덜하게 마셨다. 그래봤자 주에 양주 두세 병이었으니 일반인의 기준은 아니었다. 죽고 싶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살고 싶지도 않았다. 집에 굴러 다니던 양주병을 박스에 가득 담아 분리수거를 할 때면 가끔 죽는 게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란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나는 자기효능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무언가를 성공한 적도 딱히 없지만, 가끔가다 성공해도 그것은 그렇다 할 긍정적인 경험이 아니었다. 어떤 것을 해도 도파민이 나오지 않았다. 마땅히,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술과 담배는 달랐다. 마시고 태우면 몸에 곧바로 흡수되어 뇌에 다다랐다. 기다림과 실패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기도를 타고 폐를 거치고 나오는 연기는 자신의 파편을 온몸 곳곳에 박아두었다. 그러면 나는 온종일 하던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편했다. 몸에 남은 파편들은 자신의 어미가 다시 지나가길 바랐고, 나는 그들의 요구에 따라 주기적으로 담배 끝을 불로 지졌다. 이는 날이 갈수록 늘었고 담배를 태운 지 7년 만에 나는 닷새에 한 보루를 태우는 인간이 되었다.

그나마 네가 있으면 담배를 끄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 너를 자주 만나고 싶었다. 나 또한 인간적으로 괜찮은 생명체라는 착각에 빠지게 했으니까. 너를 챙겨주는 것은 나에게 즉각적인 효능감을 주었다. 너의 걱정을 한 몸에 받는 것 또한 그랬다. 마주치면 좋았고, 못 마주친 날은 괜히 서운했다. 이 모호한 애정에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걸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나는 서로에게 반응하는 우리가 참으로 이상하고 특이하다고만 생각했다. 나 자신의 마음조차 깨닫지 못하는 내가, 너의 마음을 알 리가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나는 그러한 선택을 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것을 두고 영영 떠나버릴 마음 또한 있었다는 말이다.

미국 지사로 발령 났다. 보름 뒤에 출국. 아마 다시 한국에 안 올 것 같다. 내가 간다고 서운해할 사람도 딱히 없으니까. 너야 알아서 잘하겠지만, 잘 지내라. 이 관계의 마침표를 멋대로 찍어버리는 말을 네게 직접 했다면 어땠을까. 너는 나를 잡았을까. 가지 말라고 말했을까. 아니,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너의 표정은, 행동은, 나를 붙잡기는 했을까. 희망 사항에 머무르는 생각들을 고이 접어 하늘로 날렸다. 그럼에도 다시 피어오르는 생각을 굳이 막지도 하늘로 띄우지도 않았다. 기억하는 것은 내 사랑의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어떤 크기였던지 잊고 있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나의 품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잡았던 손목은 어땠는지, 눈높이는 어땠는지 서서히 흐려졌다. 다만 이와 비례한 속도로 가슴 한켠 너의 자리는 서서히 분명해지고 심지어는 커지기도 했다. 새해가 될 때마다 시간과 돈을 들여 타임스퀘어로 갔다. 그 커다란 전광판의 카운트다운을 보며 숫자를 세고 열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고독하였다. 올해도 잘 부탁해. 올해도 건강하자, 행복하자. 덕담과 애정을 나누는 사람들. 1년 치 키스라며 새해가 되기 10초 전부터 입을 맞추는 사람들. 전 세계의 행복과 기쁨, 그리고 사랑이 여기에 모인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들의 행복과 기쁨, 사랑을 모방하려 애썼다.

모방한다는 것은 나는 절대 그대로 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내 안에서 나오는 것을 상대에게 주어야 비로소 모방에서 벗어나 그 자체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기에 모방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그만둔 것은 더 이상 내가 애꿎은 심장을 치지 않는단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연애를 하자 언약 맺은 이를 보아도 심장이 빠르게 뛰지 않아서 치지 않았다. 

나는 누군가를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었다. 애정조차 가질 수 없었다. 그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미국으로 떠나온 지 3년이 되던 해였다. 이 무렵의 나는 사진을 인화하여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익숙하든 아니든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풍경이면 닥치는 대로 찍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한 달간 찍은 사진 중 인화할 것을 간추리고 있었다. 그러다 오래전의 사진을 발견했다. 내가 만들었을 리가 없는, 아주 잘 만들어진 눈사람. 그다음 장에는 역시나 네가 있었다. 3년 만에 너를 봤다.

쿵.

쿵.

쿵.

심장이 툭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구 뛰는 심장을, 애꿎은 가슴을 멍이 들도록 쳤다. 나의 온몸 구석구석 스며들어있던 너의 존재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아주 오래간만에 울었다.

끝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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