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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페커미션 35. 이것을 배반이라 부를 수 있는가

1차 - 파이+무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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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무명] 이것을 배반이라 부를 수 있는가

어두운 방 안에서, 오직 네모난 빛의 덩어리가 무명을 스치고 지나간다. 한 장, 한 장, 의자에 걸터앉은 무명이 넋이 나간 얼굴로 명암을 홀로 맞고 있었다. 빛으로 군데군데 얼룩진 무명의 얼굴은 새파랗게 보일 정도로 하얗게 질려있었다. 현실이 망치로 그의 머리를 마구 내리쳤다.

이건 배신인가? 아니, 배신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다. 신뢰하지 않는 상대의 일면을 알았다면, 그 일면에 충격을 받았다면 그것을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가?

무명의 정신이 아지랑이처럼 휘청거렸다. 결국 자신은 기계가 될 수 없었다.

 

유토피아는 그야말로 이름값을 해서 무명은 기존 주민들의 시선 외에는 불편한 것 하나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기존 주민들이 무턱대고 저를 배척하는 게 충격이었지만 이내 곧 익숙해졌다. 그들의 기준에 자신은 여전히 자격미달인 것이다. 정부가 정치적인 이유로 추가선발계획을 세운 것이라고는 하지만, 남겨두고 온 사람이 없는 쪽은 불만스러울 수밖에 없다. 무명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은근한 차별에 대해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덤덤하게 받아내며 반응하지 않을 뿐이었다. 차별이 자신에게 상처가 되는가?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무명은 자신의 인간성을 너무 오랫동안 눌러두고 있었다. 게다가 이정도 차별을 받고 유토피아에서 살 수 있다면 누구나 지구를 버리고 유토피아에서 살 것이다. 불평할 계제는 되지 않는다.

다만 꼴사나운 것이 있다면 미로의 상당수가 저와 같은 취급을 받는 반면 파이는 차별에서 비교적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그냥 자신들이 유토피아에 입성했을 때의 신문만 보면 알 수 있었다. 유력가문의 자손이면서도 기준미달에 속했던 자가 미로라는 시련을 거치고 기어이 유토피아에 입성한 이야기가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으니까. 심지어 그의 이야기는 며칠정도 전자신문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함께 탈출했던 누군가가 말했다.

‘정치적으로 써먹기 좋은 소재니까 대대적으로 내보냈겠지. 설령 부적격자라고 해도 기회를 잡고 노력하면 유토피아에 올 수 있다는 거야. 그래서 그게 어쨌냐고? 그럼 지금 지구에 남은 사람들은 뭐가 되겠어? 노력부족으로 오지 못한 거라는 논리를 세울 수 있잖아. 우리가 미로를 탈출한 게 노력만으로 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미로에 초대받을 수도 없었던 사람들이 부지기수인 게 진실이지만, 그들에겐 알 바 아닌 거야. 기존 주민의 반발심을 재울 수 있으면 그걸로 끝인 거지.’

그럴듯한 이론이었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파이 역시 이용당한 처지이니 차별에서 멀다고 아니꼽게 볼 일도 아닐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처지가 뭐가 어쨌다는 것인가? 그는 어쨌든 그 잘난 집안 덕에 관리자로 미로를 시작하지 않았나. 조금 이용당하는 대가로 차별받지 않는다면 그 또한 저보다는 나은 처지인 게 아닌가? 실상을 알아도 그저 더 혐오스러워질 뿐이었다.

갑자기 유명인이 된 파이의 대처 또한 무명의 속을 뒤집어놓기는 마찬가지였다.

‘파이? 그게 진짜 이름일 리 없잖아요. 하지만……. 이제는 파이 쪽이 훨씬 더 내 이름 같은데. 유토피아에 왔고 집안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쨌든 나는 파이로 살고 싶으니까, 다른 이름 같은 건 신경 쓰지 말고 파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그 때까지만 해도 무명의 속이 뒤집어지지는 않았다. 뭐, 상류층에 속할 기회를 잡았으면서도 그런 식으로 미로출신과 인연을 이어나가려하는 게 참으로 교활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파이가 교활한 것이 하루 이틀인가.

하지만 파이는 기어코 무명의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 말만 하고 끝내면 되었을 텐데, 장난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무명에게 말한 것이다.

“아, 무명 너는 특별히 사피르라고 불러줘도 좋아요? 우린 연인이니까. 연인이라면 내 과거도 같이 공유해야 하는 거잖아요?”

웃기는 소리였다. 연인으로서의 특별 취급 같은 거라고? 파이의 말 그대로만 믿는다면 그렇겠지만 무명은 속지 않았다. 애초에 저 번지르르하게 웃는 낯짝인 것부터가 무명을 속일 생각이 없다고 웅변하는 꼴이었다.

특별한 취급이 아니라 최악인 취급이겠지. 더 이상 불리고 싶지도 않은 옛 이름으로 불러도 된다는 건. 옛 이름으로 불리든 말든 무명에게서 불린다는 것 자체가 기분 나쁘니까 어떻게 불러도 상관없다는 이야기 아닌가? 쌍욕을 치장하는 솜씨가 한두 번 해본 게 아니어보여서 더욱 더 불쾌했다. 차라리 자신처럼 대놓고 불쾌한 걸 표시했다면 이정도로 기분 나쁘진 않았을 거다. 무명은 파이의 가식에 치가 떨렸다.

누가 말했더라, 무명이 파이의 말을 너무 꼬아 듣는 거 아니냐고 했던 게. 그 때도 지금도 무명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파이가 자신에게 향하는 말들만은, 한 번도 틀리게 해석한 적이 없다고.

무명은 진짜 특별한 취급이 어떤 건지 모르지 않았다. 지금도 불쑥불쑥 생각나는, 생각날 때마다 거대한 압착기로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은 고통을 느끼는 그와의 추억. 메모에게 자신은 친구였지만, 특별한 친구였다. 그는 충분히 애정과 우정과 배려를 받고 있었다. 알아차리는 게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어쨌든. 무명은 고통스러운 가슴께를 더듬으며 생각했다. 파이가 아무리 흉내 내려 노력해보았자 진짜를 아는 무명을 속일 수는 없다고. 물론, 파이도 그걸 알면서 굳이 연기를 해서 저를 도발하는 것일 테다.

무명은 가볍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어째서 여기까지 생각이 온 거더라. 아, 그래, 식량배급소에 이번주치 식량을 얻으러 오면서 유토피아이긴 하다고 생각한 게 처음이었다. 식량배급이라고는 하지만 쌀과 밀 옥수수 등의 주식을 선택할 수 있었고 자신이 생각한 식단에 따라 다른 식재료도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었다. 고급재료를 먹으려면 추가노동을 하면 되지만 무명은 굳이 고급재료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냥 정부가 주는 대로 먹었다.

노동의 종류는 각기 다르지만, 어쨌든 의식주 모든 게 최소한의 노동으로 모두 해결이 되는 유토피아다. 일상생활과 관계없는 유흥은 가격이 엄청나게 비쌌지만 일상생활과 교양에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최소한의 노동을 대가로 모두 제공된다. 주민증을 보여주면 자동으로 적격여부가 표시되고 지정된 노동시간을 채우기만 했다면 적격한 주민임을 인정받아 필요한 모든 것을 받을 수 있었다. 나이가 있는 사람은 몸을 적게 쓰는 노동을 했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학교 수업을 수료하는 것으로 적격임을 인정받았다. 먹고 사는 걱정 없이 모두가 건강하며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었다. 그야말로 낙원이 아닌가.

무명은 오늘도 배급소 앞에서 껄끄러워지는 마음을 애써 다스렸다. 이상하게도 무명은 이 낙원이 불편했다. 왜? 물론 메모의 생각이 나는 건 당연했다. 메모도 여기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하루하루를 자책과 자기혐오로 살아가는 건 유토피아에 와서 더욱 더 심해졌다. 그러나 단지 그것뿐? 자책과 자기혐오는 이미 무명에게 호흡과도 같았다. 그것이 더욱 심해졌다 한들 크게 달라질 건 없어야 했다.

그럼에도 무명은 일주일치 식량을 고르고 무료로 지급받은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을 하며 돌아오는 내내 무언가 껄끄러웠다. 그저 신기하고 놀라울 뿐 아무 생각도 없었는데, 유토피아라더니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하는 감탄 외에는 아무 감상도 들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뭔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걸까?

무언가 놓친 게 있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게 뭐가 어떻단 말인가. 뭔가 빠트린 게 있다거나 잊어버렸다거나 하는 건 무명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그게 메모와 관련된 게 아닌 이상은 그랬다. 파이와 관련된 것을 잊어버렸다면 그건 오히려 좋은 일이고. 그러나 무명이 짐을 정리하고 사람이 겨우 먹을 만한 간단한 요리를 할 때까지도 이상한 기분이 도무지 떨쳐지지 않았다.

요즘 파이와 싸우고 섹스하기를 반복하는 것도 이 기분의 영향일지도 몰랐다. 이전처럼 파이의 도발을 그냥 넘기는 게 어려웠다. 주먹다짐을 하다 파이가 무기를 손에 쥔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러면서도 결국 모든 싸움이 성관계로 이어졌다. 파멸적인 관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요즘처럼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건 처음이었다.

어쩌면 그것은 불안일지도 모른다, 자신이 무언가를 모르고 있다는 느낌, 혹은 놓치고 있는 게 있는 것 같은 감각, 그것도 모르고 있어서는 안 될 것에 무지한 것에서 오는 불안. 그 누구와도 상관없는, 아니, 모든 것과 상관있는 무언가.

애써 그 느낌을 지우려 애쓰며 무명은 집 안의 모든 불을 끈 채 거실 의자에 앉았다. 살짝 걷어둔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조명등의 불빛 외에는 밝은 게 없는 방 안. 그는 그저 가만히 빛과 어둠을 보고만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시간을 죽일 수 있는 어둠이 그에게는 더없이 편안했으나, 완전히 빛을 지울 수는 없었다. 제 인생에서 메모를 지울 수 없는 것처럼.

언제였더라, 넋을 놓고 있던 무명의 귀에 작은 말소리가 들려온 게. 들려도 들리지 않던 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조금 높아지면서 조금씩 들리기 시작했다. 또 누군가가 은밀한 대화를 하는 걸까. 무명의 집은 구석진 골목 막다른 길에 있었고, 언제나 일정한 시간에 불이 켜지고 꺼졌기 때문에 사람들은 종종 그의 집 근처를 애용하곤 했다. 사실은 늦은 밤까지 깨어있을 때도 많았지만. 지금처럼 말이다.

무명은 늘 그랬듯 흘려 넘기려고 했다. 남의 비밀을 알아서 어쩌려고. 누가 바람을 피운다느니 친구가 아니라느니 사실은 그렇다더라 하는 온갖 말들이 무명에게는 무의미했다. 그러나 지금의 말소리는 예전처럼 흘려보내지지 않았다.

“지구 리셋은 얼마나 진행되고 있어?”

“뭐, 거의 다. 아무래도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더라고. 자연재해로 위장하는 건 말이지.”

“에휴, 얼른 싹 없애고 자연이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나. 지금도 두고 온 사람들이 어쩌고 하면서 난리를 치는데.”

“그건 걔네들로 해결 안 됐나? 미로 출신 있잖아.”

“자기 친구는 안 뽑혔으니까 프로젝트를 계속 해달라는 거지. 제기랄, 사람 늘려서 좋을 게 뭐가 있다고.”

“그러니까. 배급의 질부터 달라질 텐데.”

“당연하지. 닭이나 먹는 묵은 쌀 먹기 싫다고.”

“친구 살리고 자기가 죽을 거냐고 하면 싫다고 할 거면서. 위선자들.”

“그러니까.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려면 인구수를 줄이는 거 말고는 방법이 없는데 어쩌라는 건지.”

“다음엔 어디를 리셋한대?”

“서남아시아 쪽인가? 해일로 위장해서 싹 치운다는데.”

“염병 빨리 좀 하지…….”

“그게 안 된다니까. 유토피아 주민이 의문을 가지게 되면 큰일 난다고.”

“윤리고 나발이고 내 참. 다 같이 죽느냐 우리만이라도 사느냐의 문제에서 꼭 다 같이 죽자는 놈들이 있다니까.”

“그러니까. 내가 살고 보겠다는데 어쩔 거야.”

“그래서 지금 죽어가잖아. 멸망을 받아들이니 어쩌니 하면서.”

“킥, 그건 그래.”

이어지는 말소리와 숨 죽여 킬킬대는 소리. 빨리 다 죽여 버리고 회복 프로젝트를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끝으로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무명은 한동안 멍하니, 의자에 앉아만 있었다. 지금 자신이 들은 게 무엇인지 이해하는 데만 해도 한참이 걸렸다.

억누르고 또 억누르려 해봤지만 자라나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저들은 재해와 멸망을 ‘시킨다’고 했다. 그렇다면 일부러 그걸 조장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환경오염이 심각해서 돌이킬 수 없으니까, 사람들을 선별한 다음 지구에 남은 자들을 조금씩 말라죽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데,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지구에 남은 사람들이 죽어간 이유가, 자신이 알던 이유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리고 무명에게는, 아주 가까이에 죽어버린 사람이 있지 않은가.

밤을 꼬박 새운 무명은 다음날부터 도서관에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지식을 보존하는 가장 좋은 형태는 결국 아날로그였기에 유토피아에는 커다란 도서관이 있었다. 모든 디지털화된 자료가 오염되었을 때를 대비한 곳이었다. 무명은 필수노동시간과 파이를 비롯한 자들과의 최소한의 접촉시간 외의 모든 시간을 도서관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렇게 몸이 한계에 다다를 때까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조사에 몰두하다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자신은 모르는 곳에 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진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아, 그래, 유토피아는 시체의 산 위에 지은 낙원이었다.

그리고 그 시체의 산 아래에는, 분명히…….

 

어두운 방에서 프로젝터가 모든 영상을 띄웠다. 흘러가는 빛 덩어리는 가장 사실적인 형태로 무명에게 진실을 휘둘렀다. 활자로는 다가오지 않던 현실감이 온몸을 가시처럼 찔러왔다. 무명은 처음엔 부정하고 싶었다. 어쩌면 제 감이 틀렸다는 걸 증명하려고 그렇게 절박하게 매달렸을지도 모르겠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면 연관이 없다고 할 수도 있을까? 그들이 열차사고 자체를 조작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진이 있었고, 물자수급이 부족했고, 철로를 보수하기도 힘든 현실이었다. 열차사고가 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요행일 테다. 그리고 무명은, 애초에 메모의 죽음을 불운이 아닌 자신의 탓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지구의 남겨진 이들을 생각하는 사람들…… 이라는 단체명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

“그 단체는 일종의 뭐랄까, 위장이죠. 실체는 저희들입니다. 저희는 지금 정부 자체에 반기를 들었죠. 이 유토피아는 미친 곳입니다. 이 부조리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낙원이 얼마나 유지될까요? 애초에 이런 곳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단 말입니다!”

괴이한 가면을 쓴 여성이 웅변하듯이 팔을 크게 벌리고 호소하듯이 소리쳤다. 그러나 무어라 더 말하려다가는 이내 화제를 돌렸다.

”물론 조심스럽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큰 성과를 내지는 못했죠. 하지만 미로 프로젝트가 시행되도록 한 것도 저희가 노력한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미로에 참가했을 때부터 포섭 리스트에 올라있었습니다. 이유는……. 방금 보여드렸죠.”

그가 프로젝터로 고갯짓을 했다. 그래, 똑똑히 보았다. 무명은 지금 자신이 프로젝터를 부수고 싶은 건지 프로젝터를 지키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야 당신과 접촉한 건 이유가 있습니다. 당신의 연인, 사피르씨의 집안이 정부와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열차사고가 당신의 애인 집안과는 관련이 없지만, 정부를 적대시하게 된다면 연인의 집안과도 대적하게 될 겁니다. 이 점 때문에 우리는 당신과 접촉하는 것을 꺼렸습니다만.”

여성이 말을 멈추자 똑같은 모양의 가면을 쓴 남성이 말을 이었다.

“관계 이름만 연인일 뿐, 실제로는 서로 증오하는 사이에 가깝더군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리 신중하게 생각해보아도 당신이 사피르씨에게 호감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모셔드린 거고요.”

“……제게 뭘 원하는 겁니까.”

“사랑하던 친구의 죽음, 복수하고 싶지 않습니까?”

“…….”

무명은 침묵했다. 그러나 그 침묵이 거절이 아님은 모두가 금방 알 수 있었다. 무명의 견고한 무표정에 금이 가고 있었으니까. 지금 무명을 아는 누군가에게 표정을 보여준다면 기겁할 정도로, 그는 근본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여자가 이어 말했다.

“당장 결정하라는 건 아닙니다. 며칠간 생각할 시간을 드리죠. 가시는 길은 죄송하지만 다시 잠들어주셔야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보안을 위함이지 당신을 함부로 대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주십시오. 또한 우리를 밀고한다면 우리는 그 즉시 당신의 밀고를 알 수 있으며 당신 또한 우리의 적이 된다는 것을 미리 말씀드리겠습니다.”

“절 억지로 재우겠다는 겁니까.”

“걱정 마시죠. 저희는 인체에 해가 가장 적은 마취약을 씁니다. 동지가 되겠다면 3일 후 ○○일 ○○시, ○○로 오십시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자가 말을 마친 후 곧이어, 뒤에서 있는지도 몰랐던 누군가가 손수건으로 제 입과 코를 틀어막았다. 독한 약냄새가 코를 찔렀다. 무명이 다시 기절하기까지 몇 초, 몽롱해지는 머릿속으로 그는 생각했다.

복수는 당연한 일이다. 저들은 굳이 며칠을 기다리게 할 필요도 없었다. 며칠이 지난다고 해서 변할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메모를 그렇게 오래 기리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복수만이 유혹적인 게 아니었다.

파이의 집안과 대적이라, 그거 재미있지 않겠는가. 이왕이면 그를 제 손에 떨어트린 다음 그의 가문을 무너뜨린다면 더 좋을 것이다. 메스꺼운 느낌을 참고 그를 유인해보는 건 어떨까? 마음을 산 다음 모든 걸 무너뜨린다면 조금은 기분 좋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니, 사실은 아주 많이, 좋을 것이다. 그들은 메모지 하나 주지 않고 말로만 통보했지만 시간과 장소는 무명의 머리에 뚜렷이 각인되었다. 무명은 사흘 뒤에 틀림없이, 통보받은 곳으로 향할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 날은 파이가 메모지를 사던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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