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붕을 피하는 방법

2차동인에서 캐릭터 붕괴를 일으키지 않는 방법….

그런 것은 없습니다.

2차동인이란 이미 존재하는 캐릭터를 멋대로 복제해다가 원본과 동떨어진 다른 맥락에 끼워넣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캐릭터성이란 캐릭터를 둘러싼 환경 또는 플롯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2차동인은 캐붕을 전제합니다.

캐붕은 이미 일어나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그 사실을 은폐할 수 있을까요?

이야기는 변화다. 캐릭터는 소모된다.

이야기의 본질은 이동과 변화라고 합니다. ‘주인공이 피치 못할 사정으로 저 건너편에 갔다가 새로운 진실을 깨닫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돌아온다’…. 서점에서 작법서를 펼치면 흔히 볼 수 있는 도식입니다.

하지만 2차 동인 작가인 우리는, 캐릭터를 변화시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캐릭터가 다르면, 원작과도 달라져서 캐붕으로 간주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희에게 캐릭터의 내적 여정을 다루는 스토리 작법은 큰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동인지의 재미를 위해서는 서사성이 필요합니다.

캐릭터성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이야기를 연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가장 중요한 부분은 다루지 않는다

위에서 언급했듯, 이야기는 변화입니다. 캐릭터는 이야기의 틀에 담으면 쉽게 산화합니다.

변화를 피하는 가장 직관적인 방법은, 캐릭터성의 핵심을 언급하지 않는 것입니다.

저는 캐릭터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부분, 특히 2차동인으로 그리고 싶어질 만한 부분은 ‘해소되지 않는 자기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A와 B 사이의 딜레마에 끼어 갈팡질팡하는 모습이요. 이것은 흔히 원작 이야기의 추동력이 되고는 합니다.

이러한 양자택일 딜레마는 캐릭터가 A와 B 둘 중 어느 한 가지를 택하면 해소됩니다. 그때 딜레마는 플롯을 끌고 갈 추동력을 잃고, 캐릭터는 꽉 닫힌 결말을 맞습니다.

그때까지 캐릭터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결말을 맞을 때까지 캐릭터의 이야기—즉 캐릭터성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시작했으면 끝이 난다

이야기는 처음, 중간, 끝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이 있으면 끝이 있습니다. 끝날 때 캐릭터는 변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2차동인에서 캐릭터성의 핵심인 내적 딜레마를 정면에서 다루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초점이 맞춰지는 순간부터 캐릭터성은 해결되어야 할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 핵심을 언급하고 직접 다루면, 이야기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해소되기 때문에, ‘캐릭터성’ 덩어리인 해당 캐릭터는 다른 무언가가 되어버립니다.

클라이맥스 배제하기

캐릭터가 변화했다는 증명은 이야기의 후반부에 몰려 있습니다.

캐릭터성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딜레마를 보존하기 위하여, 구체적으로는, 기승전결 중 전—클라이맥스를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기 승 (전 결) ←여기

이 부분을 피해야 합니다. 연재만화나 시트콤 등 캐릭터 중심 장기연재 시리즈물은 이 방법으로 계속됩니다.

기 ←이건 원작이 제시했습니다. 원작 시공에 끼워 넣는 타입의 동인은 다루지 않아도 좋습니다.

승 ←☆이걸 그려야 합니다☆

전 ←X

결 ←X

하지만 캐릭터성의 핵심을 전혀 다루지 않는다면 2차동인을 하는 재미가 없겠지요.

꼭 다뤄야만 한다면, 핵심을 다뤘다가도 금세 철회해버리는 것이 좋습니다.

개그동인이라면 사실 모두 착각이나 해프닝이었다는 식이거나, ‘우리의 모험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식이거나, 시리어스동인에서는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 달콤씁쓸한 결말을 낸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로맨스를 다루는 CP동인이라면, 독자 해석이 강한 부분은 과거로 어물쩡 미뤄버리고 일상 묘사를 주로 하는 것이 쉽습니다.

‘과거로 어물쩡 미뤄버리기’ 이야기는 다음 단락에서 계속됩니다.

미스터리로 다룬다

너무 많이 변화하면 위화감이 생기지만, 재미를 위해서는 서사성이 필요합니다.

내 동인은 원작과 너무 멀어졌다…. 하지만 나는 내 캐해를 포기할 수 없다! 타협하기 싫다!

그것도 좋습니다. 응원합니다. 하지만 어떻게 쿠션을 깔아야 캐해가 일치하지 않는 독자의 협조를 확보할 수 있을까요?

답은 미스터리입니다.

독자가 받아들이기 힘들 만한 일은, 과거에 일어난 확정사실로 만듭시다.

사람들은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사건보다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훨씬 잘 받아들입니다. 과거에 배치한 그것을 베일로 덮어두고, 궁금해하게 하세요. 마술쇼처럼요.

간단한 구조라면 이런 식이겠지요.

기 ←충격적인 단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승 ←점차 가까워지는 진실… 사실은…

전 ←이러저러했다 (이게 본론)

결 ←끝

하지만 저는 그 과거를 쌔벼파고 싶은데요

과거에 모든 것을 배치하고 그 끄트머리만 언급하면, 호기심을 자극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개연성의 공백을 전부 묘사하지 않아도 독자가 상상력으로 채우기 때문에 편리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야기를 과거로 미뤄버리면, 그 분량이 적어지는 점입니다.

나만의 캐해 때문에 동인을 하고 있다면, 분명 그것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겠지요.

미스터리로 남겨두고 그 영향만을 보여주는 것은 스토리 작법적으로는 괜찮은 방법이지만, 작가 입장에서 재미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고 싶은 걸 해야지 어쩌겠습니까. 동인 해서 돈 나오는 것도 아닌데요.

캐붕 같다고요? 알 게 뭡니까? 그 작품은 취향이 맞는 사람들에게 걸작이 될 수 있습니다.

하고 싶다면 하세요. 어차피 모든 2차동인은 캐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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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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