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더스 게이트 3 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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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더게 3] 피 맛 - 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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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싱거울정도로 흔쾌히 흡혈을 허락해주었다. 흡혈을 허락해주다니! 뱀파이어라는 걸 들켰는데 그걸 눈감아주는 것을 넘어서서 피까지 내어주겠다니!

아스타리온은 이 행운을 믿을수가 없었다. 미친 척하고 던져본거고, 파티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떠날 생각이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싸울 생각도 하고 있었다. 흡혈귀라는 것도 우연히 들켜서 실토하게 된 것이지 원래는 숨길 수 있는데까지 최대한 숨길 생각이었다. 가능하면 영원히.

그 모든 걱정과 고민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간단히 해결되어버렸다.

아스타리온은 상대의 관대함에 감사함을 느끼기보다는 의아함을 먼저 느꼈다. 이 녀석 혹시 바보인가? 뭘 보고 흡혈귀를 믿지? 아스타리온이 상대편 입장이라도 흡혈귀는 절대 믿지 않을 것이다. 흡혈귀는 피를 빠는 시체다. 몬스터다.

혹시 아스타리온의 미모가 이번에도 주사위 굴림에 성공한 것일까? 여태껏 그 많은 바보들을 속여 넘겼던 것처럼? 그렇다면 이 호구를 잘 구워삶아서 앞으로도 손 쉽게 이득을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피 맛이었다. 200년간 단 한번도 허락되지 않은 지성체의 피 맛이었다. 아스타리온은 멍청할 정도로 사람을 잘 믿는 어리숙한 하프엘프 음유시인을 속으로 비웃다가 미약하게나마 죄책감을 느꼈다. 여태까지 선뜻 자기 피를 내어주는 존재는 없었다. 시궁창 쥐새끼조차도 그의 손 안에서 찍찍거리며 버둥거렸다…….

감사한 마음이 고개를 슬쩍 들었지만 이유를 알 수 없는 억하심정이 그것을 다시 찍어눌렀다. 감사는 함부로 표시하면 안된다. 200년간 뼈저리게 겪지 않았던가. 아무도 믿을 수 없다. 악의는 가장 선한 가면을 쓰고 다가온다. 그러나 최소한 흡혈귀의 갈증을 달래주겠다는 분을, 그 자비로운 제안을 비웃어서는 안된다. 피가 고프다는 절박감은 한 인격체를 정말 비참하게 만든다…….

타브는 아스타리온을 믿어주며 얌전히 목을 내주었다. 아스타리온은 씁쓸하게 웃었다. 진짜로 멍청한 거 아닌가? 내가 괴물인 것을 밝혔는데. 언제든 변덕을 부려 목을 꺾어버리거나 동맥을 잘라버릴수도 있는데. 세상은 여태 아스타리온을 속여왔고 그의 믿음에 대해 잔인하게 굴었다. 그래서 아스타리온도 세상에게 똑같이 되돌려주었다. 그게 아스타리온이 믿는 세계관의 규칙이었다. 자비나 믿음이나 사랑 같은 건 다른 사람들에게나 허용된 것이었고 아스타리온에겐 꿈에서조차 바랄 수 없는 것이었다. 애초에 꿈도 꾸지 않았지만.

신들은 그를 미워한다. 그의 뇌에 올챙이가 박히고 햇빛에 면역이 생긴 것도, 난생 처음 사람 피를 빨아볼 기회가 생긴 것도, 이 멍청한 놈의 자비도 모두 우연의 결과일 뿐이다. 억세게 운이 좋을뿐인 우연.

아스타리온은 존경을 담아 최대한 조심스럽게 타브의 살갗을 찢었다. 외과의처럼 정교하게 자신이 피를 빨아마실 부분만 상처를 냈지만 타브는 자기 살이 날카로운 송곳니로 찢겼기 때문에 꿈틀하고 어깨를 떨었다. 아스타리온은 달래듯이 타브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입술이 환부를 완전히 덮었다. 타브의 목에서 천천히 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피 맛은 입술을 적시고 이윽고 멈춤 없는 시냇물처럼 아스타리온의 입 안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첫 피 맛은 피부 표면에 흐르고 있던 것이라 약간의 투명감이 있었고 농도도 그리 진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윽고 향기가 깊어지며 진한 피 맛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 관능적인 향기를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흐드러지게 핀 장미의 향기. 살아있는 생명체의, 인생의 한창때를 살아가는 젊고 싱그러운 향기! 꿀 같은 질감의 피는 산소를 가득 머금고 있어서 비내린 직후의 숲에서 맡을 수 있는 신선함이 느껴졌다. 그러고보니 이 녀석 우드엘프 반쪽짜리라고 했던가?

피의 맛은 달콤했고 아스타리온이 생전에 먹어본 그 어떤 디저트의 맛보다도 진미였다. 그 모든 디저트를 합치고 나서도 맛을 표현하기 부족하고 아스타리온이 느껴보지 못한 진미까지 합해야 설명이 가능할 것 같았다. 그 어떤 귀한 술보다도 다채롭고 복합적인 향이 깃들어 있어서 한 모금 한 모금 빨아들일때마다 코 끝으로 섬세한 잔향이 느껴졌다. 라일락, 자스민, 최고급 고기의 진한 육즙, 로즈마리, 이 녀석이 방금 마신 포도주의 향긋함, 분해되지 않고 피 속에 아직 남아있는 알콜의 알딸딸한 여운.

모든 감각이 한꺼번에 들이닥쳐서 머리가 멍해질 것 같았다. 짐승의 피 맛은 단순했다. 말 그대로 배를 채우기 위해 마시는 것이었고 진심으로 즐기지는 못했다. 물론 시궁쥐에 비하면 토끼나 멧돼지는 진수성찬이었지만 사람의 피에 비할바는 아니었다. 사람의 피는 미식이었다. 그 자체로 한 사람이 겪어온 역사였고, 내밀한 비밀을 속삭여주는 귓속말이었고, 아주 은밀하고 사적인 감각 공유였다…….

성관계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가 해왔던 그 어떤 관계보다도 진솔하게.

아스타리온은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지만 200년만에 처음 맛 본 지성체의 피 맛은 잔잔한 애무로 시작했다가 격렬한 오르가즘이 되어 가엾은 흡혈귀의 자제력을 완전히 날려버렸다. 이따금 타브가 헐떡이는 소리를 내던가, 미약한 손짓으로 아스타리온의 어깨를 밀어냈던 것 같긴한데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몇 초전의 기억조차 가물가물할정도로 흡혈에 몰두하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아스타리온은 정신을 차렸다. 속이 거북할정도로 과식을 해버렸다. 그리고 타브는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말 그대로 숨조차 쉬지 않았다. 큰 사고를 쳤다. 아스타리온 안쿠닌은 살인을 저질러버리고 말았다.

크게 당황한 아스타리온이 타브를 흔들어 깨웠으나 타브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동공도 풀린 지 오래였다. 언제부터 이 상태가 된걸까? 그가 중간중간 거부 의사를 표시했던 것 같은데, 그런 신호가 있었다는 게 어렴풋이 기억나긴 하는데 확실하진 않다. 200년 만에 처음으로 피를 빨게 해준 은인인데 죽여버리고 말았다!

엄청난 후회와 죄책감이 몰려왔지만 곧바로 현실적인 걱정이 들이닥쳤다. 캠프원들이 이 꼴을 보면 아스타리온은 뭐라고 해명해야 한단 말인가? 아직은 밤이다. 모두들 잠들어있다. 아스타리온이 무슨 짓을 했는지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은 타브 빼고는 증인도 없고 증거조차 없다.

이대로 시체를 바깥에 내다버릴까? 배은망덕한 생각이지만 아스타리온의 목숨을 건지려면 어쨌든 범행 흔적을 지워야한다. 하지만 파티를 이끄는 대장이 갑자기 불쑥 사라져버렸다고 하면 그 행방불명을 순순히 받아들일 멤버가 있을까? 아스타리온이 시신을 내다버린다고 해도 아주 먼 곳도 아니고 근처 수풀에다 버리는 게 고작일텐데 금방 들통나고 만다. 그럼 살인자 색출이 시작되겠지. 아스타리온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죽을 것이다.

그냥 이대로 내버려두고 연기를 할까? 간밤에 살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누가 범인인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아스타리온은 이미 불침번을 서겠다고 자원한 몸이다. 엘프라서 잠을 자지 않는다고 열심히 설득하지 않았던가. 이 경우에도 가장 의심스러운 용의선상에 아스타리온이 제일 먼저 올라갈 것이고, 금방 진실이 탄로날 것이다. 아스타리온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죽을 것이다.

방법이 없으니까 지금 당장 파티를 이탈해 혼자 떠나버릴까? 하지만 아스타리온 혼자서 이 막막한 곳에서 뭘 하겠다고? 간신히 햇빛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얻었지만 그는 싸우는 법도 제대로 모르고 자물쇠나 조금 만질 줄 아는 뱀파이어 스폰 따위일 뿐이다. 진짜 싸움은 이 파티의 나머지 괴물들이 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녀석들은 강한 녀석들이고, 옆에 붙어 있으면 아스타리온의 생존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갈 것 같았다.

아스타리온은 이런저런 가능성을 계산해보며 고민하다가 결국 연기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어차피 200년동안 누굴 꼬시고 주인님의 먹이로 갖다바치면서 마음에도 없는 연기만 해왔다. 그게 이번에도 그의 목숨을 살려주겠지. 운이 나빠서 주사위 굴림에 실패하면, 뭐 어쩔 수 없다. 아스타리온은 가슴에 말뚝이 박혀 죽을 것이다.

카사도어한테 끌려가서 죽으나 지금 여기서 죽으나 어차피 모든 존재는 죽게 마련이다.

그래도 최소한 피다운 피를 마셔보지 않았는가.

아스타리온은 미안함과 짜증과 고마움을 복합적으로 느꼈다. 죽은 타브를 힐난하고 싶었다. 왜 죽어버려서 나를 곤란하게 만드냐고. 하지만 그 살인 또한 자신이 저지른 것이다. 타브가 좀 더 격렬하게 아스타리온을 밀어냈으면 중간에 눈치채고 순순히 떨어졌을 것 같은데 왜 때리고 걷어차고 소리지르지 않았단 말인가. 왜 멍청하게 피를 다 빨리도록 내버려뒀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도 핑계다. 아스타리온이 자제했어야 한다. 결국 내 잘못이다.

어쨌든 200년 동안 누군가가 자기를 이렇게 온전히 믿어준 적이 없지 않은가…….

자기를 믿어준 사람이 죽어버리고 나서야 아스타리온은 그 믿음이 진실이라는 것을 알았다. 타브는 거짓말을 했던 게 아니다. 정말로 아스타리온한테 자기 자신을 내어준 것이다. 왜? 대체 왜? 무엇을 감수하고? 왜 그랬단 말인가? 자기 자신의 죽음인데?

왜 나한테 잘해줄까? 200년 동안 그 많은 신들에게 기도했지만 단 한 분의 신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운명에 침을 뱉었는데 왜 이 반쪽짜리 엘프는 나를 믿어줬을까?

아스타리온은 죽은 타브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죽은 사람은 배신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스타리온은 안도하고 감사함을 표현했다. 타브가 온전히 아스타리온을 믿어줬던 것처럼, 아스타리온의 감사함도 한 점의 가식 없는 진짜 감정이었다.

근데 다음날 아침이 되자 시체를 발견한 섀도하트가 생환 스크롤을 사용해 타브를 되살렸고 타브는 눈을 뜨자마자 아스타리온은 주먹으로 후드려 팼지만 어쨌든 용서해줬다고 한다!

파티에 클레릭이 떡하니 계신데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둥 완전범죄를 계획하고 있던 아스타리온은 이로써 흡혈귀 강제 커밍아웃을 당하게 됐고 “사실 모두가 너의 정체를 알고 있었는데 발연기가 너무 불쌍해서 다들 모르는 척 해주고 있었던거다”라는 충격적인 사실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누가 범인인지 모르겠다고 호들갑 떨던 연기도 사실 손발 오그라들게 못하니까 앞으로는 그냥 연기를 하지 마라”는 뼈가 박살나는 팩트 폭행도 들었다!

자기 미모 때문에 사람들을 홀리는 줄 알았던 모기 같은 뱀파이어 스폰은 “사실 외모보다는 니 어색한 태도와 과장된 행동이 존나 웃겨서” 캠프 애완동물 비슷한 느낌으로 키우고 있는거라는 말을 듣고 마상을 입었다!

그리고 위더스는 한 구석에서 이 소란을 지켜보다가 양피지에 뭘 끄적끄적 적으며 “운명이 순리대로 돌아가고 있구려”라고 했다고 한다!

쓰기 귀찮아졌으니까 끝. 진짜 끝(후비적)

게임하러 가야함 ㅂㅂ

2회차 밀고 3회차 들어가야함 ㅂ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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