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의 문학인

사축농장 일지-1

6년차 봄, 4일

힐 부부가 시골 마을에 정착해 돈을 벌며 마을 사람들과 교류한 지 벌써 다섯 해가 지났다. 이번 봄 부터는 남이 아니라 우리라고 해도 무관할 정도의 소속감을 지닌 사람들이 됐다. 처음에 남편인 줄 알았던 포스턴, 랭던, 선생. 뭐였더라. 거스는 그 덩치 큰 작자를 선생님이라 불렀고, 마을 이장은 랭던 씨, 혹은 힐 씨라고 불렀던가. 그나마 편하게 호칭하는 사람이 로빈과 레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손재주 좋은 사람들끼리의 모임이라고 하여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서 5시까지 괴상하고 단순한 물건 만들기 시합을 한다던가. 가을 즈음, 일이 바빠 휙휙 지나가는 사이 에블린의 요청으로 화단 아래의 구멍을 확실히 파둬 물이 빠지기 쉽게 만든다던가. 말 수가 적은 건 아니었는데 워낙 머리카락도 부스스의 꼴인데다가 체격은 스타듀벨리 마을에서 가장 크다고 알려진 저 위, 광산 옆의 칼잡이보다도 둥글둥글하고 탄탄해보였으니 몇 해 동안 말 걸기가 어려웠다.

반면 힐 씨, 그러니 미스터- 미스- 그 둘 다 아니라 해도. 상대를 아주 짧고 예의바르게 Sir, 라고 부르며 제 용건을 묻는 사람은 누가 봐도 도시 사람이란 것이 티가 났다. 태양빛 잘 안 받아 핏기 없는 피부나 창백하게 보이지 않나 때로 돕는 옷 밖으로 드러난 면에 자리잡은 푸른 핏줄 같은게 증거였다. 깍듯하게 굴다 못해 아이들을 대할 적엔 어쩔 줄 몰라하다 어정쩡 몸 굽혀 시선 맞추는게 캐롤라인의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아비게일이나 샘, 뭐 이런 어린 애들이랑은 잘 어울리지 않고. 하루의 일이 끝나면 거스네 술집에 꼭 들러 맥주 한 잔이나 팸과 함께 페일 에일 한 잔을 사 나눠 마시며 하루동안 -그래봤자 다음 날 또 만나게 될 것을- 있었던 일을 무용담처럼 두런두런 꺼내두곤 했다. 그러면서도 이전에 뭘 하다 온 사람인지 입 한 번 벙긋 하질 않았다.

힐 씨 특유의 뒤로 깔끔하게 넘겼던 헤어 스타일은 이제와선 죽죽 길러 어깨에 닿았고, 바람 불면 살랑이는 가닥이 되었다. 관리를 꾸준히 받는 모양인지 그 결에서 갈라진 흔적 따윈 볼 수도 없었다. 봄의 꽃비가 흩날리는 날, 만일 그들의 농장으로 갔다면 집의 그늘 아래. 계단에 그 커다란 몸들 잘 붙여 말린 포도나 커피 같은 걸 마시며 앞으로의 농사 계획을 논하는 걸 볼 수는 있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요청을 들어주는 그들에게 호의적이었고, 내부의 유대를 한 층 견고하게 만드는 그들을 선호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서로를 어떠한 성별로 언급하지 않더라도 봄의 꽃 축제가 오면 각자 원하는 곳을 입은 채 춤을 추게 두었으며, 결혼식을 맺는 날 엉망으로 옷을 입고 서로의 손을 잡았지만 그 모습 조차 보기 좋다고 박수를 손바닥 안쪽 뼈 아플 정도로 두들겼다.

사실 결혼 전에도 흔적은 많았다. 랭던 씨는 힐 씨의 뒤를 언제나 쫓아 다녔다. 힐 씨 보다 약간 작나? 하지만 옆으론 두툼하지. 월리가 크기를 가늠하듯 팔을 벌린다. 먹는 건 또 얼마나 많고. 거스씨는 자신의 한 달 매상을 선생이 혼자 채울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진지하게 언급한다. 피에르는 단순하게 콧바람 불며 자신에게 예의바른 힐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떠들 기에 바쁘다. -물론, 그러면서도 다음 해의 가을 품평회 때엔 기필코 이기겠다며 이를 아득바득… 이야기로 돌아와서. 둘은 서로에게 꽃을 주기에 바빴다. 봄에는 수선화, 여름에는 스위트피, 가을엔 뭐였더라. 백량금? 그러다 겨울엔 그동안 모아둔 들꽃 하나 둘 꺾어 주더니 피에르가 돈 벌 수작으로 들여놓은 부케를 가득 사서 서로에게 건네주곤 했다. 사람이 있는 곳이든 없는 곳이든 무관하지 않고! 이렇게 화사한 것이 아니라 할 지언정 자신이 그 날 얻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싶으면 양 손으로 고이 모아 전해주었다. 징그럽게 생긴 해삼이나 괴상한 소릴 내는 물건이라 하더라도 주는 상대는 언제나 확신에 찬 얼굴이었고, 받는 상대는 자신을 위해 가져온 이 선물이 마음에 들어 견딜 수 없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러면 뺨에 패이곤 하는 보조개, 귓가에 달아오르곤 하는 열, 가늘어지는 시선과 마흔 넘게 나이 먹은 어른들이 ‘히히’ 같은 소릴 내고 있는 걸 보자니… 마을 사람들은 자연스레 자리를 피하며 그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그리고 최근 들리기 시작한 그 농장의 소문 하나. 아니, 글쎄. 힐 부부가 ‘새로운 결혼 반지’를 얻기 위해 그렇게나 노력 중이라던데. 아니야! 로빈이 소리쳤다. 당장 랭던이 어제 오늘 하면서 이곳저곳에 가구 가져다 두는 걸 봤거든. 하지만 그건 선생의 집 꾸미기 취미이지 않나. 누가 받아쳤다. 그렇긴 하지. 로빈이 수긍했다. 힐 씨는 왜 이렇게 밖으로 안 나오는 거람? 마니가 사근사근 답했다. 하지만 닭과 양들이 어떻게 해야 건강한 지에 대해선 꾸준히 물어보러 왔는걸. 결국 이야기는 아리아드네의 실타래 안쪽으로 굴러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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