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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타콤에는 아담과 이브가 산다

만자타입 HL 소설 커미션 작업물

- 약 4일 소요 / 21,783자 / 전문 공개 샘플

- 해리포터 드림: 여캐 C, 남캐 R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뱀파이어 R X 인간 C]

- 주의사항: 유혈 요소

(뱀파이어물에 흔한 연출이긴 합니다만, 흡혈, 위협 및 상해, 자해, 살인, 시신 언급이 있습니다.)


카타콤에는 아담과 이브가 산다

: 뱀파이어 R X 인간 C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1526년 12월 31일, R이 태어났다.

R 가는 귀족은 아니었지만 평민 중에는 꽤 부유한 집안이었다. R의 부모님은 여러 번의 불임 끝에 매우 어렵게 얻은 R을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R에겐 문제가 하나 있었다. 바로 폭력적인 성향을 타고났다는 것이었다.

R의 부모님은 이 폭력성을 잠재우기 위해 R을 유하게 대하기도 하고, 때론 엄하게 혼내기도 하면서 갖은 육아 방법을 시도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R에게 효과가 있는 것은 없었다. 오죽하면 가정교사를 고용해도 도망가고, 학교를 보내도 제발 R을 다른 학교로 편입해 주실 순 없겠냐며 사정 사정을 할 정도였다. 결국 부모는 교육인의 손길에 기대지 못하고 R을 직접 가르치며 힘들게 키웠다.

그런데 그런 R이 11살이 되던 해, 큰 사건이 벌어졌다.

R이 갑자기 원인 불명의 열병에 걸렸다.

그의 몸은 온종일 펄펄 끓었고, 모처럼 먹기 쉬운 수프를 끓여다 줘도 그릇을 집어 던지고 깨 버리는 등 극단적인 거부 반응을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환기라도 시켜주고자 창문을 열면 쏟아지는 햇빛에 R의 살갗이 치이익 소리를 내며 타들어 갔다. R의 부모는 그간 축적한 모든 재산을 파산할 만큼 간절히 명의를 구했으나, 모두 R을 치료하지는 못했다.

R은 어둡고 음습한 방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누구와도 대화하지 않으려 하며 꼬박 한 달을 앓았다. 죽지 않는 게 대단한 기적일 정도였다.

그런데 한 달을 넘기던 밤, 갑자기 R의 고열이 뚝 떨어졌다. 물수건을 갈아주러 갔던 어머니는 뛸 듯이 기뻐했지만, R이 눈을 뜬 순간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R의 까맣고 예쁜 눈이 괴물처럼 새빨간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후 R 가는 아비규환의 현장이 되었다. R은 자신을 돌봐주러 온 어머니를 가장 먼저 물어뜯었고, 그 비명을 듣고 달려온 아버지도 목을 물어 살해했다. R은 한 달을 내리 굶은 끝에 폭주했다. 그는 도저히 소년의 힘이라곤 할 수 없는 괴력을 갖게 되었고, 그 힘으로 뛰쳐 나가 또 다른 사람들을 흡혈해 죽였다.

R은 낮엔 사람들의 눈을 피해 깊은 동굴에 숨어들었고, 밤이면 거리로 나가 인간을 사냥했다. 그렇게 거리에 하나둘 정체불명의 피 빨린 시체가 나 뒹굴기 시작하자, 왕실에서도 이를 누군가의 의도적인 연쇄살인으로 판단하고 수사에 착수했다. 그러나 짐승보다도 강하고 날쌘 R을 잡을 일은, 나아가 그를 찾아낼 일은 없었다.

 

 

***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러, 1826년.

R의 성장은 청년 모습에서 멈추었다. 그는 불사의 몸이 되어 자그마치 300년을 살아왔고, 그동안 인간이었던 과거를 버린 채 오래도록 ‘R 경’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그는 300년 동안 수많은 인간을 사냥하며 이름을 떨쳤으며, 그 결과 인간 세계에도 많은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먼저, R이 물어 죽인 자들 중 일부는 되살아나 R과 같은 특성을 가진 종족이 되었다. 그들은 다쳐도 금방 회복했고, 해를 볼 수 없었으며, 피를 갈구했다. R은 이를 알게 되고 고의로 인간을 물어 자신의 편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들은 아마 R이 피를 빨 때 재생력 좋고 늙지도 죽지도 않는 그의 특성을 어떤 식으로든 물려받은 것 같았는데, 모두 부활 이후 후천적으로 발현된 체질이기 때문에 R보다는 힘이 약했다. 또한 그렇게 두 번째 삶을 얻은 이들은 R을 아버지로 여기고 섬기는 경향이 있었는데, R은 이를 상당히 좋아했다.

어둠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그들은 햇빛을 피할 곳을 찾다 도시 지하에 있는 거대 굴을 발견했다. 그게 바로 고대 지하 묘지인 카타콤이었다. 그곳은 R 집단의 거처가 되었다. 카타콤은 그 규모가 무척 크고 미로 같았기 때문에, 그곳에 사는 R 집단에게 물려 죽을 것을 두려워한 인간들에겐 금기의 장소가 되었다.

그리고 둘째, R의 세력이 커져 작은 도시국가 수준의 인구가 형성되고 인간계에는 사망자가 속출하면서 사람들은 전보다 더 신을 믿고 교회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왕권보다 교황권이 우세해졌고, 교회에서는 사람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대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다.

교회에서는 우선 R 집단을 ‘죽음을 먹는 자’들로 명명했다. 그들은 은으로 만든 무기에 심장을 꿰뚫리는 게 아니면 어디를 공격해도 죽지 않았는데, 그것이 죽음조차 불사한 자, 인간의 죽음을 먹고 사는 자로 보이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후에는 발음이 힘들어, 단순히 피를 빠는 괴물 ‘밤피르’로 불렀다. 그리고 밤피르를 사냥하는 토벌 전문 기사를 육성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은 ‘팔라딘’이라 불렸다. 팔라딘이란 신을 섬기고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는 성기사로, 밤피르 사냥을 위해 혹독한 과정을 거쳐 육성된 최고의 인재였다.

그리고 이 팔라딘에는 제3 신성기사단 소속, 기사단장 C가 속해 있었다. C은 팔라딘인 아버지, 밤피르 사냥꾼 길드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평민 여성이었다. 가문이 밤피르 사냥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역사를 가지는 이상, 그녀의 미래도 반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본디 무기력했으나, 팔라딘의 신념을 짊어지고 굳세고 책임감 강한 여성으로 자라났다.

그리고 그런 C은 지금, 목 끝까지 단추를 꼼꼼히 여민 채 창을 들고 서 있었다.

오늘은 10월 31일, 발푸르기스의 밤.

발푸르기스의 밤은 1600년대 후기, 팔라딘의 시초인 불사조 기사단이 밤피르로 분장해 밤피르들을 치는 데 성공하고, 밤피르들이 강탈한 유명 후작의 고성을 되찾아낸 데서 유래한 130여 년 전통 축제였다.

축제에서 모든 국민은 밤피르 분장을 하고 밤의 거리로 나와 밤피르 따위 무섭지 않다는 구호를 외치고, 건강한 피를 선호하는 밤피르가 싫어할 단 디저트들을 먹고, 피처럼 진한 포도주 잔을 부딪힌다. 그렇게 다음 한 해가 무탈하기를 기원한다.

이날만큼은 사람이 너무 많은데다 거리도 은으로 장식되기 때문에, 밤피르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더욱이, 행사 진행을 위해 모든 교회의 팔라딘이 거리에 배치되기도 했다.

행사는 매년 안전하게 끝났지만, C은 약간 긴장한 채 서 있었다. 이유인즉 최근 밤피르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줄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개체 수가 급감한 것도 아니고, 별다른 사건도 없었는데 이렇게 활동이 위축되는 경우는 의도적인 경우가 많았다. 역사적으로, 밤피르의 활동이 줄어든 다음에는 꼭 밤피르들의 대형 사육제가 벌어지곤 했다.

C은 저도 모르게 식은땀까지 흘리며 보초를 서 있었다. 일렁이는 축제 불꽃이 약간은 어지럽다고도 생각하던 그때,

툭.

누군가 뒷덜미를 건드렸다.

C은 소스라치게 놀라 당장 창을 겨눴다. 그러자 보석처럼 예쁜 녹색 눈을 한 남자가 멋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려다보니 손수건이었다.

“이런, 미안하군. 땀을 뻘뻘 흘리고 있기에.”

녹색 눈. 빨간 눈이 아니었다. 밤피르일 리가 없었다. 더욱이, 밤피르처럼 망토를 두르고 분장했다곤 하나 말투와 차림새를 보니 고위 귀족인 듯했다. C은 귀족의 호의에 제가 무례하게 반응했단 것을 알고 곧장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잠깐, 조금 놀라서…….”

그러자 남자가 괜찮으니 신경 쓸 것 없다며 손을 내저은 뒤, 고개를 기울여 다정하게 상태를 살펴 왔다.

“그나저나, 더운 날씨가 아니건만 이리 땀을 흘리는구나. 어디 아픈 데라도?”

혹, 몸이 안 좋은가? 그리 묻는 남자의 차가운 숨결이 C의 솜털을 삐쭉 세웠다. C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닙니다. 약간 긴장해서 그렇습니다. 매년 이날은 팔라딘에겐 긴장될 수밖에 없는 날인지라….”

C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하다며,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꼿꼿하게 섰다. 그러나 남자는 떠나갈 줄을 모르고 누가 봐도 명백한 흥미의 눈빛을 띤 채 그녀의 곁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좀 쉬는 게 나을 듯한데.”

“아닙니다.”

“팔라딘은 원래 이렇게 빡빡한가? 이런 즐거운 날, 힘들어하는 동료까지 세워두고….”

“힘들지 않습니다. 괜찮습니다.”

“내가 열외 시켜 달라고 말해볼까?”

“아, 아닙니다!”

C은 기어코 비꼬는 그의 어조에 당황해 삑사리를 냈다. 아무리 왕국 최고 기사단인 팔라딘의 영향력이 세다 한들, 그녀는 귀족보다, 또 다른 고위 성직자보다 아래 신분일 수밖에 없었다. 행여 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긴 이 귀족이 제 상사나 그보다 더 높은 자리의, 이를테면 추기경과 인맥이라도 있는 인물이라 말을 옮긴다면….

…….

설령 그가 배려 차원에서 저를 좀 쉬게 해달라 요청할지라도, 상사의 귀에는 그것이 어떻게 들릴지 모를 일이었다. C은 좀 전부터 이상하게 제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슬슬 버거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늘 아프지도 않았고, 또 아프다 해도 근무지를 이탈할 생각이 없었다. 쭈뼛, 그녀는 옆으로 한 걸음을 옮겼다. 나름 거리를 벌린 행동이었다.

“흐음.”

그러자 성큼, 남자가 따라 곁에 붙어 왔다. C은 더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저, 혹시 필요하신 것이라도….”

C은 힐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용건이 있다면 얼른 해결해주고 어떻게든 남자를 쫓고 싶었다. 그러자 남자는 필요한 게 있었는데 까먹었다는 양 작위적으로 눈을 굴리더니, 곧 유려하게 웃으며 저를 바라보았다.

“사실, 내 길을 잃었는데.”

“길을 잃으셨다고요?”

“그래, 이리 평민들 거리로 나온 게 오랜만이라 말이지.”

C은 난감해졌다. 팔라딘의 업무가 우선이냐, 귀족을 호위하고 그를 찾는 곳으로 모시는 것이 우선이냐.

“…….”

대외적으로는 팔라딘의 업무가 우선이지만, C의 상사들은 늘 귀족을 우선시하라고 말하고는 했다. 이유야 간단했다. 교회가 부흥할 수 있게 후원하고 왕이 아닌 교황의 뒤를 봐주는 것은, 바로 이 귀족들이었던 까닭이다.

결국 C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창을 쥔 손에 힘을 약간 풀었다.

“……어디로 모실까요?”

“루블랑 거리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했어. 그곳 굴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아나?”

루블랑 거리. 그곳은 통제 구역으로, 팔라딘도 주민도 없는 행사 외 거리였다. C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곳이라면, 확실히 이 남자를 혼자 보냈다가는 위험할지도 몰랐다.

게다가 여기서 좀 멀리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그 정도 거리라면 무리 없이 데려다줄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본적으로 팔라딘의 소명은 사람의 구명이다. 자신이 이 남자를 거부해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간 큰일이었다. 그녀는 앞장섰다.

“좋습니다. 따라오시죠. 제가 길을 압니다.”

“고맙군.”

C은 근무지를 이탈해 밤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C이 보초를 선 곳은 광장이었으므로, 그곳을 벗어나 축제의 불빛이 닿지 않는 골목까지 걷자 하나둘 사람들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은제 장식품들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C은 행여 거리에서 밤피르가 튀어나오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걷고 또 걸었다.

아, 마침내 루블랑 거리의 표지판이 보였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굴다리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위치에 있었다. 그때였다.

하아….

뒤에 바짝 따라오는 남자의 숨결이 언뜻 야릇하게 들렸다. C은 순간 움찔했다. 내, 내가 잘못 들었나. 그녀는 좀 더 긴장한 채 굴다리를 향해 걸었다. 뚜벅뚜벅 각 잡힌 기사의 걸음 소리 뒤로, 그보단 훨씬 여유롭고 묵직한 구두 소리가 뒤따랐다.

그렇게 걷다 보니 마침내 커다란 굴다리가 보였다. 그 근처에는 가스등이 딱 하나 있었는데, 연료가 새는지 희미하게 점멸하며 어둠 속을 채 비추지도 못하고 있었다. 저거 고치라고 말해야겠구나. C은 그리 생각하며 뒤로 돌았다.

“도착했습니다.”

남자가 웃으며 C을 내려다보았다.

“그래, 맞게 도착했네. 고맙군.”

밝은 곳에서 보았던 예쁜 미소와 달리, C은 왜인지 그 웃음이 좀 음산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밖으로 티 내지 않도록 유의하며, 그녀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았다. 거리가 뭔가 찜찜했다.

“한데… 정말 여기서 약속을 잡은 게 맞으십니까? 사람은커녕 개미 한 마리도 안 보이는데요.”

남자는 제 물음에 빙긋이 입가에 호선만 그렸다. 저벅. 그가 말없이 큰 보폭으로 거리를 좁혔다. C의 코앞에 그가 다가왔다. 뭐, 뭐야. 왜 이러시지. C은 어정쩡하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러자 또, 저벅.

남자가 한 걸음 더 다가섰다.

“저어…… 경, 혹시 제게 하실 말씀이라도….”

C은 그제야 어색하게 물으며 한 걸음 더 물러났다.

그러나 이번에도, 저벅. 남자의 구둣발이 제 걸음을 따라잡았다. 마찬가지로 대답은 없었다.

C은 슬슬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뭐지? 왜지…? 어떡해. 이 사람 좀 이상한 사람인가 봐. C은 불손한 생각을 품은 채, 뚜벅.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희미하게 깜빡이던 가스등 불빛이 가시고, 그녀의 머리 위로 어두컴컴한 그늘이 쏟아져 내렸다.

새까만 어둠. 그 속에 서서, 그녀는 그제야 천장을 올려다봤다. 눈앞의 남자에게서 거리를 벌리려다 보니, 어느새 자신이 굴다리 밑에 들어와 있었다. 이건 위치가 확실히 이상했다. 불안했다. 그녀는 천천히 젖혔던 턱을 내렸다.

“저, 경, 장난은 그만하시고─”

그때, 확…! 남자의 커다란 손이 순식간에 허리를 낚아챘다. 챙그랑. C은 졸지에 창을 떨어뜨렸다. 남자의 코트가 크게 펄럭이고, C을 감쌌다. C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무어라 말하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러나,

콰득.

“아……!!”

터져 나온 것은 새된 비명밖에 없었다. 생리적인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C은 아, 히익, 가냘픈 신음을 흘려댔다. 억센 손이 그녀를 꽉 끌어안았고, 송곳니가 살결을 꿰뚫어 피를 냈다. 그 위에 차디찬 입술이 달라붙어 노골적인 소리를 내며 제 피를 빨아 마시고 있었다.

대체 이 남자는 무슨 힘이 이리 괴물 같은 건지, 왜 이러는 건지, C은 순간 너무 놀라 그가 밤피르라는 사실은 떠올리지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그가 제 목덜미에 입술을 지분거렸다. 키스하듯 혀를 놀리고, 흘러나오는 피를 핥고, 또 빨았다. 몸에서 소중한 체액이 쭉쭉 빨려 나가는 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 느낌을 자각하고 나자, 비로소 머릿속에 한 단어가 떠올랐다.

“윽, 밤피르……!”

C은 당장 남자를 밀쳐내려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녀는 그의 괴력에서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하아, 츄읍, 하……. 남자의 신음 섞인 갈망이 C의 귀 바로 옆에서 흘러내렸다. 그가 욕심껏 꿀꺽꿀꺽 피를 넘겼다. 그녀는 모욕감과 분노, 두려움, 팔라딘으로서 그를 없애야 한다는 책임감에 사로잡혔다.

이윽고 남자가 입술을 떼어냈다. 대체 어떻게 한 건지, 녹색 눈은 온데간데없고 루비처럼 빛나는 빨간 눈 한 쌍이 C을 맞이했다.

“하아… 당장 물고 싶은 걸 참느라 혼났잖아.”

남자의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C을 더한 치욕감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는 보란 듯 입가에 번진 C의 피를 엄지로 훑어 날름 핥아먹었다. C은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밤피르, 지금 이 자리에서 처형을……!”

그러나 역겨운 손가락이 제 입술을 눌렀다.

“어어, 쉬잇. 흥분하지 마.”

C은 순간 배 속이 크게 울렁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깨질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좀 전의 가스등처럼 시야가 깜빡깜빡 점멸하고, 어쩐지 모든 감각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모든 일이 부지불식간에 일어났다.

그런 제 머리 위에 대고, 밤피르가 속삭였다.

“곧 독이 퍼질 거거든. 그렇게 흥분하면, 독이 빨리 돌아서─”

하지만 그 속삭임을 다 듣지 못한 채,

…털썩.

“거봐, 금방 기절할 거라니까….”

C은 정신을 잃었다.

 

 

***

 

 

C은 눈을 떴다.

빛 한 점 없는 어둠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이게 뭐지. 내가 어디에 있는 거지? C은 욱신대는 제 어깨를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콩. 하지만 몸을 반도 못 일으킨 채 머리를 부딪혔다. 그녀는 그제야 주변을 더듬었다. 사람 하나만 겨우 들어갈 크기의 방, 사방에 둘러싸인 푹신푹신한 가죽의 촉감이 느껴졌다. 뭐지. 대체 어디에 갇힌 거지. C은 쿵쿵거리며 벽 곳곳을 두드렸다. 그러자, 덜컥. 천장이 열렸다.

“일어났네.”

C을 꺼내준 사람은 다름 아닌 아까 그 밤피르였다. C은 경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누워 있던 곳은 관이었다.

“깨끗이 나았군.”

밤피르의 손이 상처 하나 없는 제 목덜미를 쓸어 만졌다. C은 놀라 그를 내쳤다.

“손대지 마.”

“치유의 관까지 빌려줬더니, 이거 야박하기는.”

밤피르는 두 손을 들고 껄렁껄렁한 움직임으로 물러났다. C은 관 밖으로 나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해골들로 지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닌 벽면, 퀴퀴한 지하의 냄새, 간간이 횃불들만이 타닥타닥 타는 소리를 내는 넓은 방. 여러 곳에서 통로가 이어지고, 달빛 한 점 들지 않는 곳. 이곳은….

“여긴…….”

“카타콤에 온 걸 환영하지.”

C의 등 뒤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카타콤. 그 단어에 그녀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꼈다. 팔라딘 수십 명이 들어가도 나오지 못하고 밤피르에게 살해당했던, 그 후 금제의 구역이 된 카타콤. 지금 그곳에 제가 와 있다니.

C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급히 무기로 쓸 만한 것을 찾았지만, 손에 잡히는 것은 없었다. 그녀는 밤피르와 거리를 벌렸다.

“당신은 누구야. 왜 날 이곳으로 데려온 거지?”

밤피르가 여유로운 포식자의 모습으로 걸어왔다. 그가 담백하게 물었다.

“내 이름이 궁금하니?”

“…….”

그의 붉은 입술이 또 한 번 열렸다.

“R 경.”

그 이름을 듣자마자, 쿵. C은 심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몸에 스르르 힘이 빠져나갔다. 이름을 말할 수 없는 자, R 경. 밤피르의 시초, 밤피르의 왕, 카타콤의 지배자. 그 살인귀가 바로 저 남자라고?

“…거짓말하지 마.”

제아무리 제3 신성기사단장인 C이라지만, 원초적인 공포 앞에서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뒤로 더 물러났다. 툭. 등에 해골로 울룩불룩한 벽이 닿아 왔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스스로를 R 경이라 소개한 밤피르는 굴다리에서처럼 제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C은 어깨만 움찔할 뿐 움직이지 못했다. 그토록 매섭게 훈련받았던 세월이 무색하게, 몸이 굳어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 제 귓가에 대고 R 경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스산한 숨결을 쏟아내고, 또 체향을 음미하듯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속삭였다.

“널 이리 데려온 데 감사해. 네 향이 빌어먹게 달콤해서, 아껴 먹으려고 살려두고 있는 것뿐이니까….”

뭐, 뭐라고…? C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바로, 이 밤피르가 사람들 틈에 숨어 자신을 납치해 올 정도면, 현장에 다른 밤피르도 숨어 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

가슴 속에 불안감이 싹텄다. 이런 상황에서도 철저히 팔라딘인 그녀는 제 안위보다는 국민의 안위가 우선이었다. 손이 서서히 떨려왔다. 그녀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마을 사람들은. 축제를 즐기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지?”

푸핫. 제 물음에 R 경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재미있다는 듯 큰 소리로 웃더니, C의 턱을 감싸 쥐었다. 그리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지금쯤 사육제가 시작됐겠지. 오늘은 달콤한 밤이 될 거야….”

…아, 아아.

R 경이 내뱉은 문장은 단순했으나, 그 단순한 문장으로 말미암아 C은 손쉽게 무너져내렸다.

아아아아아…….

눈앞이 핑 돌았다. 수년간 밤피르와 싸워 온 C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떠올렸다. 밤피르는 체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흡혈하는 것이라고, 분명 타협점이 있을 것이라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헛된 희망을 품었다가 어떤 광경들을 마주했는지.

밤피르의 습격 현장을 처음 수습하러 나선 날, C은 끔찍한 광경에 구토했다.

두 번째로 수습을 나갔던 날엔 선배의 조언에 기대어 코밑에 치약을 바르고 술도 한잔했지만, 마찬가지로 구토했다.

세 번째는 조금 익숙해져 시신을 수습할 수 있게 되었고, 네 번째부터는 바로 현장에 투입되어 밤피르 퇴치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신의 가호를 받아 마땅할 팔라딘의 목이 무참히 꺾이는 것을 보았고, 내장이 튀어나오는 것을 보았으며, 투입된 전 인원이 밤피르를 공격해 은으로 만든 칼날과 창을 몇 개씩 꿰뚫어 고정하는 것도 보았다. 그 뒤에야 비로소 그 밤피르 하나의 심장을 파괴할 수 있었다. 지독할 만큼 힘든 시간이었다.

일이 그렇다 보니 C의 곁에 머무는 동료는 많았고, 그만큼 떠나가는 동료도 많았다.

왕국 최고 기사단도 그 정도일진대, 민간인이 모인 곳에서 사육제라니….

C은 절규했다. 그녀는 지금쯤 거리가 얼마나 수라장이 되었을지 떠올렸다. 얼마나 많은 밤피르가 숨어들었을지는 모르겠지만, 아아 어쩌면, 아냐 어쩌면 팔라딘이 잘 대처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교회는 안전할지도 모르고, 또 사람들은, 또…….

“…….”

C은 새하얘질 정도로 꽉 쥔 손을 간신히 쥐락펴락했다.

그러고 나니 불현듯 공포에 질려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바로 단검이었다. 그녀는 밤피르 몰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주변에서 무기를 찾는 덴 실패했지만, 기본적으로 모든 팔라딘에겐 비상시 사용할 은제 단검이 하나씩 보급되었다. C은 그것으로 R 경을 기습하고 뛰쳐나갈 생각이었다.

어쩌면, 어쩌면 사람들은 아직 안전할지도 모르니까. 당장 발푸르기스의 밤을 종료하고 전원 경계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돌아가 밤피르를 색출해야 한다고, 모두 당장 대피해야 한다고 알려야만 했다. 그녀의 손이 천천히 검집에 닿았다.

다음 순간, 쐐액. C의 검이 눈 깜짝할 새 R 경의 심장을 겨냥했다.

하지만 아무리 빠른 팔라딘이라도, 타고나길 신체 능력부터 다른 R 경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그가 가볍게 C의 손목을 낚아챘다. 단검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R 경이 코웃음을 쳤다.

“상처를 치료해 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R 경은 한동안 C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리 원한다면 어디 카타콤에서 벗어나 보라며 몇 걸음 물러나 주었다. C은 그를 쳐다보았다. 미로 속에 쥐를 넣고 그것이 치즈로 향하나 덫으로 향하나 구경하길 즐기는, 명백한 흥미의 눈빛이 반짝였다.

속내를 숨길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 눈빛을 보며, C은 망설였다. 이렇게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함정일 게 뻔했다. 제가 등을 보이고 달려 나가면, 당장 뒤에서 목을 물어뜯어 피를 빨 게 분명했다.

하지만 뻔한 속임수를 두고도 C이 갈등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는 물론 죽음이 두려웠지만, 그렇다 해서 제 죽음만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보단 자신이 살아나가지 못해 사육제를 막지 못할 사태가, 사람들에게 조금도 힘이 되지 못하고 이곳에서 그저 그렇게 죽어버릴 일이, 팔라딘의 소명을 다하지 못할 경우가 더 두려웠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지?”

C은 경계하며 벽을 따라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사실 R 경이 자신을 죽이려 한다면 지금 당장도 죽일 수 있다는 것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식은땀을 흘리며 벽을 짚었다. 누군가의 두개골이 만져졌다.

“믿지 않는다면 별수 없지. 하지만 난 기회를 주는 거야. 이곳 카타콤은 도시의 여러 곳과 이어져 있지. 네가, 그래… 10분. 10분 안에 이곳을 나간다면 못 본 척해줄게.”

물론, 탈출에 성공해도 네 피가 생각나면 널 다시 납치해 오겠지만. R 경이 덧붙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C은 그의 저의를 파악하기 위해 붉은 눈을 부단히도 노려보았다. 그러자 R 경이 재촉해 왔다. 어, 지금 시간 가고 있어. 난 분명히 10분이라고 말했어, 하고.

C은 금세 초조해졌다.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곳에 갇혀 저 밤피르의 먹이가 되느냐, 그 전에 무엇이라도 시도해 보느냐.

C은 전자보다는 후자를 택했다. 그녀는 곧장 달렸다. R 경은 따라오지 않았다. 그녀는 미로 같은 카타콤 벽을 따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동쪽에서 남쪽으로, 또다시 서쪽으로 마구 달렸다. 중간에 다른 밤피르를 마주치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그들은 제게 다가오지 않았다.

심장이 초침보다 빠르게 쿵쾅거렸다. 갈급히 숨이 터져 나오고, 해골들이 발밑에서, 머리 위에서, 사방에서 춤을 추었다. C은 출구를 찾아 공기의 흐름도 가늠해 보고, 벽을 짚고 그대로 따라 나가보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실패했다.

결국, 약속한 10분이 되었다.

R 경은 시간 약속을 귀신같이 잘 지키는 남자였다. 어느덧 갈 길을 잃은 C의 뒤에서 바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C은 이 발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었다.

“네가 실패할 줄 알았어.”

“…내게 다가오지 마.”

“돌아가자.”

“내게 오지 말라고 했어.”

평소의 책임감 있는 C이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약속을 지켰겠지만, 상대는 밤피르였다. 그것도 제 목숨을 노리고 있는, 비열하고 사악한 밤피르.

C은 그의 말을 따르는 대신, 출구를 찾던 중 주운 뼈를 검처럼 꽉 쥐어 보였다. R 경이 가소롭다는 양 웃어 젖혔다. 그가 하등 위협될 게 없다는 양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지 마!”

C은 이번에도 훈련받은 대로 심장을 겨냥했다. 날카로운 뼈가 공기 가르는 소리를 내며 R 경의 가슴팍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좀 전과 달리, 이번에 R 경은 C을 저지하지 않았다. C이 내지른 무기가 정확히 ‘퍽’ 소리와 함께 R 경의 가슴을 관통했다. 피가 터져 나왔다. 분명, 분명히 피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정작 R 경의 얼굴은 평온했다. 은 무기가 아니어서인지, 가슴을 관통했는데도 그에게는 씨알만큼도 타격이 없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불사의 몸.

“난 이래서 멍청한 것들이 싫어. 왜 알아서 매를 버는지….”

그 길로, C의 처벌은 곧장 진행되었다.

그녀는 R 경에게 또 한 번 목을 물어뜯기는 수밖에 없었다.

R 경은 당황한 C을 두고 아무렇지 않게 가슴에 박힌 뼈를 뽑아낸 뒤, 바로 흡혈을 시작했다. 그리고 강제로 그녀의 손을 취해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는 가슴팍을 짓누르게 했다.

C은 위아래로 느껴지는 징그러운 감각에 몸서리를 쳤으나, R 경은 절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C의 목덜미에 더 세게 이를 박아 넣었고, 해 하나 입지 않는 제 우월한 신체를 똑똑히 이 손바닥에 새겨두라는 양 팔목만 더 잡아당겼다. 손 밑에서 무서운 속도로 메워지는 살이 꾸물대며 촉각을 더럽혔다.

C은 하는 수 없이 R의 입술에 피를 빨리면서 그의 환부를 어루만져야 했다. 역겨움에 토기가 올라왔지만, 이번에도 결말은 첫 흡혈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R 경이 제 피를 빠는 만큼 체내에는 독이 퍼지고, 까무룩.

그녀는 기절했다.

 

 

***

 

 

이후 C의 나날은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한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24시간 내내 해가 뜨지 않는 밤의 도시 카타콤의 소유가 되었다.

R 경은 C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는 C을 어여쁘게 여기며 적당히 돌봐주는 척하다가도, 언제든 배가 고프면 잡아먹기 좋은 가축처럼 대했다.

그는 내키면 C의 피를 빨았고, 또 흡혈이 끝난 뒤에는 그녀를 치유의 관에 거칠게 밀어 넣었다. 그 관은 먼 옛날 한 연금술사가 밤피르를 연구하기 위해 만든 관인데,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안에 들어가 잠을 자기만 하면 몸이 회복됐다.

R 경은 C을 잡아먹는 흡혈귀 주제에 우습게도 그녀의 안전을 보장했다. 일례로 그녀가 카타콤에 납치된 첫날, 다른 밤피르들이 도망치던 그녀를 건드리지 않은 것도 R 경 덕분이었다. 모든 밤피르가 그렇지만 특히 그는 먹이를 독점하고 타인과 절대 나누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체향을 폴폴 풍기는 C을 건드렸다간 뼈도 못 추릴 거라는 걸 모든 밤피르가 알았기 때문이었다.

한 번은 이 사실을 알게 된 C이 탈출을 시도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밤피르들이 제게 손대지 못함이 곧 저를 보고 있지 않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카타콤의 출구를 찾아 열심히 달렸지만, 몇 분도 안 되어 R 경을 마주쳐야만 했다. 운동은 잘했냐며 비꼬는 R 경의 뒤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밤피르들이 보였다.

제가 도망칠 경우 감시하지 않고 뭐 했느냐고 문책할 R 경이 두려워, 오히려 많은 밤피르가 저를 감시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C은 고발자들을 보며 탈출은 함부로 감행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녀는 분노한 R 경에게 또 피를 내어줘야만 했다.

따라서 C의 하루는 대체로 할 일 없이 지루하고, 불안하고, 때론 아프고, 바깥세상과는 조금도 연이 없는, 전혀 팔라딘답지 않은 시간들로 구성되었다.

그렇게 R 경에게 피를 빨리며 끔찍한 고통을 겪고, 억지로 치유되고, 다시 피를 빨리고, 또 도망을 시도했다가 피를 빨리는 날만 반복되다 보니 C은 점점 지쳐갔다. 맑고 건강한 영혼은 차츰 소모 되어갔고, 육신은 수련하지 못해 둔해져 갔으며, 정신 또한 바깥세상을 향한 해소되지 못한 걱정으로 고갈되어 갔다.

C은 마음의 병태에 빠졌다. 그녀의 삶은 괴로웠고, 살아가는 이유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녀는 무력한 존재가 되어 갔다.

그리고 바로 그즈음이었다.

 

“콜록, 윽…….”

돌연 C에게 극심한 열병이 찾아왔다.

C이 하도 죽을 듯 아파하다 보니, 밤피르들은 저마다 난리가 났다. 저만큼 달콤한 피 냄새를 가진 인간은 처음인데, 저 여자가 죽으면 대체품을 또 찾기는 힘들 텐데. R 경께서 화가 나면 어떡하지, 저 여자가 죽어 우리에게 불똥이 튀면 어떡하지, 하면서.

하지만 정작 R 경의 반응은 예상외였다. 그는 처음 C을 발견했을 때와 똑같은 흥미로운 미소로, C의 증세를 그저 관찰하기만 했다.

“…….”

과묵한 듯 은근히 말이 많던 R 경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C을 치유의 관에 넣지도 않았고, 성질을 부리지도 않았으며, 단지 그녀를 카타콤의 아주 내밀한 구석,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그 본인만의 방으로 데려갔다.

C은 그곳에서 사경을 헤매었다. 전신에 열이 불길처럼 타올랐고, 속이 메스꺼웠으며, 머리가 쪼개질 것만 같았다.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관절이 욱신거리고, 몸에 한기가 들고, 구토감과 날 선 인후통이 번갈아 목구멍을 찔러댔다.

설마하니 역병에라도 걸린 것인가, 아, 이대로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그녀는 마음 한편으로 은근히 죽음을 바라기도 했다.

…그래, 차라리 죽여 주시옵소서. 나의 주님이시여. C, 이 한 몸 쓸모없었던 이번 생 죽음으로 참회할 테니, 부디 다음 생에는 사람들을 지킬 수 있게… 팔라딘의 소명을 다할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C의 뺨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소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완전히 의식을 잃었다. 어렴풋이 차가운 손가락이 눈가를 쓸어내는 느낌이 들었다.

이후 그녀의 기억은 없었다.

 

***

“허억……!!”

C은 고통스러운 갈증과 함께 눈을 떴다. 해골들이 쌓인 익숙한 천장, 익숙한 공기. 신은 C을 곁으로 데려가지 않았다. C은 아직도 지옥 같은 현실에 있었다.

“콜록, 흐윽…….”

C은 힘없는 몸을 일으켰다. 갈증, 어마어마한 갈증이 몸을 덮쳤다. 이런 감각은 처음이었다. 그녀는 물을 찾기 위해 벽을 짚었다.

그런데, 퍼석.

갑자기 제 손에 닿은 해골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다.

단언컨대 해골이 부식된 것은 아니었다. 외부 압력에 의해, 명백히 힘에 의해 부서진 것이었다. C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녀는 제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단단한 뼛조각이 하나 박혀 있었다.

“…….”

한 문장으로 형용할 순 없었지만, 무언가 무척 달갑지 않은, 어떤 일이 제게 벌어진 예감이 들었다. C은 심장이 불안감으로 꽉 옥죄어 오는 것을 느끼며 조각을 느리게 뽑아냈다.

조각은 꽤 컸기 때문에, 뽑자마자 동그란 핏방울을 수반했다. C은 선명한 빨간 피가 제 손바닥에 맺혀 나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옛말에 불안한 예감은 꼭 적중하는 법이라고 했던가.

C의 구멍 난 손바닥이 빠른 속도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피가 나던 자리에 바로 새살이 돋아 구멍을 메웠다. 딱지 같은 게 앉을 새도 없었다. C은 이처럼 기이한 신체 능력을 지닌 종족을 하나 알고 있었다.

“…안 돼.”

그녀는 공포에 떨며 날카로운 뼛조각 하나를 더 집어 들었다. 환각, 환각일 거야. 이런 게 사실일 리 없다. 그녀는 그대로 손바닥을 그었다. 아까보다 더 많은 피가 배어 나왔다. 하지만 이번에도 상처는 괴물 같은 속도로 아물었다.

“안 돼…….”

C은 절망했다. 그녀는 혼란스러워하며 이마를 짚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혹시 마지막에 열병이 났을 때 죽어서, 그래서 밤피르로 부활한 걸까? 하지만, 하지만 밤피르는 기본적으로 흡혈로 사망해야만 태어난다. 그런데 제가 이미 죽었다면 그 원인은 열병이지 않나.

더욱이, 신학교 시절 배웠기를 밤피르 부활 조건은 그들이 제 피를 빠는 양만큼 많은 독이 몸에 주입되는 것이라고 했다. 오래 피를 빨릴수록 그들의 송곳니에서 더 많은 독이 나오기 때문에, 몸에 화학 변이가 일어나 재탄생하는 것이라고….

…….

하지만 나는, 난 그렇게 많은 독이 주입될 정도로 오래 피를 빨린 적이 없다. 나는, 나는….

“……우욱.”

C은 먹은 것도 없으면서 헛구역질을 했다. 일순 R 경에게 흡혈 당했던, 지난 모든 시간이 주마등처럼 뇌리에 스쳤다.

R 경은 이렇게 달콤한 피는 맛본 적이 없다며 C을 혈액 주머니 취급했다.

그래서 여느 먹잇감처럼 단번에 피를 빨아 죽이지 않았고, 곁에 오래 두고 마실 것이라며 외려 그녀를 죽음으로부터 멀리 두었다. 오죽하면 행여 그녀가 주변 물건들로 자결이라도 할까 독방에 구속해 둔 적도 있을 정도였다. R 경은 그녀를 ‘아꼈다.’

그리고 그 아낀 시간만큼, 얼마나 잦은 흡혈을 했던지.

C은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흡혈할 때마다 제게 주입한 독의 총량을 구한다면, 필시 밤피르가 되기 위한 조건쯤은 훌쩍 뛰어넘고도 남을 것이었음을.

결국, 원인은 R 경이었다.

C은 이제 제가 죽었다 부활한 건지, 단순히 아파 정신을 잃었던 건지조차 가늠하지 못했다. 실로 반 불멸자가 된 이상, 시간개념은 더 필요 없는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게 진실인가? 정말 내가 밤피르가 되었다고?

…팔라딘이 밤피르라니.

팔라딘이 밤피르라니. 신의 사자가, 신의 뜻에 반하는 괴물이라니. 감히 운명을 거스르고 죽음을 먹는 존재가 되었다니…….

C은 흐느꼈다. 자신을 잃어버린 설움이, 혼란이, 공포가, R 경을 향한 원망이 뺨을 타고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때, 철퍽.

짙은 혈향과 함께 뭔가 묵직한 게 제 무릎에 던져졌다.

피 냄새를 맡자, 쿵. 심장이 뛰며 몸이 먼저 반응했다. 쿵, 쿵, 쿵, 쿵….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며 머리까지 둥둥 울렸다. 누가 머릿속에서 다음 행위를 재촉하듯 북을 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손을 치워, 앞을 봐, C. 어서 먹어. 냄새를 맡아 봐. 아주 향긋하고 좋지 않니….

호흡이 점점 가빠지기 시작했다. C은 밭은 숨을 내쉬며 제 무릎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무릎에 엎어진 것은 갓 목을 베인 시체였다. 얼굴이 없는 목에서 따끈따끈한 피가 울컥대며 쏟아져 나와 이불을 적시고 있었다. 그것을 던진 이는 R 경이었다.

“아… 시끄러워.”

그가 성가시다는 양 한소리를 내뱉었다. C은 제발 치워달라며 빌었다. 하지만 R 경은 첫 식사이니 손수 잡아다 줬건만, 이걸 왜 못 먹냐며 되레 얼굴에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C은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시체를 밀지도, 그렇다고 자신이 피하지도 못하면서 다만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자 R 경이 혀를 차며 직접 시체의 피를 빨아들였다.

C의 눈이 그의 입술로 향했다가, 끔찍한 참상에 놀라 되돌아왔다. 그녀는 잠자코 고개만 숙인 채 그가 내는 질척한 소리를 들었다. 그래도 R 경이 더는 권하지 않고 본인이 혈액을 섭취하는 듯하니 한시름 놓았다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가엾은 그녀의 예상은 아주 보기 좋게 빗나갔다.

R 경의 거미 같은 손이 갑자기 C의 멱살을 쥐고 당겼다. 그는 거칠게 입을 맞추고 강제로 C의 입안에 꿀꺽꿀꺽 피를 넘겨주었다. 이러려고 피를 마신 것이었다.

“읍… 흐극…….”

핏방울들은 C의 입안에서 채 삼켜지지 못하고 역류했다. 알알이 그녀의 턱선을 타고 붉은 구슬이 흘러내렸다.

R 경은 그 작태에 불만족스러운 시선을 표했지만, C은 끝까지 피를 거부했다. 그녀는 하데스의 석류알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자신은 최소한 지상에 나갈 자격만은 박탈당하고 싶지 않았다. 이 핏물을 받아 마시면 정말로 인륜 따윈 저버리고 괴물이 되길 선택하는 것만 같아서, 사람을 먹고 죽음을 먹는 자가 되는 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마음만은 사람으로 남고 싶었다.

그녀는 피를 먹지 않기 위해 막힌 소리를 내며 몸부림쳤다. 존엄성을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밤피르가 되어 강해진 힘으로도, 밤피르들의 시초인 R 경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혀를 밀어내기가 무섭게, 왈칵.

공기가 들어가면서 피가 함께 넘어갔다.

그 순간, C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피가 목구멍으로 넘어오자마자, 그것을 거부하는 이성과 달리 몸이 기쁜 듯 반응했다. 달콤한 풍미와 함께 통증에 가깝던 갈증이 가셨다. 몸의 긴장이 완화되고, 향에 취하고, 좀 더 신선하고 따끈한 것을 마시고 싶어졌다. 이로써 그녀는 자기 몸이 완전히 더럽혀졌음을 깨달았다.

그런 C의 반응을 보며, R 경이 수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혀가 뱀처럼 질꺽거리며 타액 섞인 혈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밀어 넣었다. C의 본능은 처음 교회에서 세례를 받던 날처럼 황홀경에 사로잡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이성은 그런 자신에게 혐오와 모멸감을 느꼈다. C의 몸과 마음이 분리되고 있었다. 그녀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눈꼬리는 분명히 곱게 접혀 있었으나, 얼룩지는 시야를 막을 수는 없었다. R 경이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C은 반강제로 그가 주는 지하 세계의 성수를 받아 마시며 교회를 떠올렸다. 그녀는 이제 신의 얼굴을 바로 올려다볼 수 없었고, 신의 이름으로 휘두르던 은색 창도 휘두를 수 없었다. 이제 그녀에게 돌아갈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날 C은 갓 태어나 먹이를 갈구하는 아기새처럼 아버지 R 경께서 하사하시는 피를 달게 받아 마셨다. 몇 번이고 목구멍으로 넘기고, 역류하고, 삼기고, 뱉고, 네 주제를 알라는 그의 집요한 눈빛에 굴복했다.

R 경이 다음에는 더 잘 먹을 수 있길 바란다며 떠나간 뒤에는, 카타콤 어딘가로 도망쳐 속을 게워냈다. C은 죄스러운 감정을 호소했다. 그러면서도 이런 통각이라면 밤피르도 흡혈은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 합리화했고, 또 그래도 이건 아니라며 부정했고, 소리를 질렀고, 그다음에는 울며 무너져 내렸다.

이제 C은 그녀가 적으로 맞서 싸웠던 이들과 완벽히 같은 존재가 되었다.

햇빛을 보면 피부가 타들어 갔고, 일정 시간 이상 피를 먹지 않으면 극심한 갈증에 시달렸다. 짐승의 피도 마실 수 있었지만 그건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그녀는 R 경이 직접 키운 새끼 뱀에게 쥐를 던져주듯 갓 죽인 인간을 던져줄 때마다 죽고 싶은 심정에 이르렀다.

그녀는 매번 이성을 고집하며 피를 거부했지만, R 경은 그보단 제가 본성의 노예가 되길 바라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R 경에게도 사실이었다.

손수 먹이를 가져다줄 때마다 제 정체성을 부인하는 C을 보며, R 경은 화가 났다. 그래서 부러 C과 더 폭력적인 식사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는 C이 제 앞에 무릎 꿇고, 제게 매달려 피를 받아 마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더욱이, 밤피르가 되고도 폴폴 풍기는 달콤한 향내는 여전히 구미가 당겼고.

사실 R 경에게 C은 꽤 특별한 존재였다.

독점하고 싶을 만큼 다디단 피만 해도 이유는 충분한데, C이 다른 밤피르들처럼 죽었다 부활한 약골들이 아닌, 저와 같은 ‘열병’의 과정을 거쳐 산 채로 태어난 순수한 밤피르였기 때문이다.

C이 고열로 쓰러진 날, R 경은 제법 복잡한 심경을 느꼈다.

그는 C의 증상이 가리키는 바가 무언지 알고 있었다. 그건 이미 300년 전쯤, 그가 직접 겪어 본 적이 있는 병이었으니까.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건 진화.

열등 종인 인간의 몸을 탈피하고 한 걸음 더 신에 가까워지는, 우월종이 되기 위한 변태 과정이었다.

그리하여 제 침대에 누워 괴로워하는 C을 보며, 당시 R 경은 기뻤다. 다른 밤피르들과는 다른 진짜 ‘동족’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른단 생각에 C을 향한 동질감이 피어났다.

그리고 또 역으로는, 그런 C을 보며 혼란과 불쾌감을 느끼기도 했다. 이 세계에서 오직 자신만이 특별한 R 경에게 C의 탄생은 예외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뒤늦게 순수 밤피르로 발현하면서 R 경은 더 이상 유일이 될 수 없었다.

또, 그가 느낀 감정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모처럼 발견한 하나뿐인 먹이가 동족이 되었단 점에서는 다시 분노가 들끓기도 했고, 그녀를 그런 존재로 만든 장본인이 자신이란 점에서는 더욱 못마땅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C의 탄생은 모든 것을 통제하에 두는 R 경에게 전반적으로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는 C이 새 존재로 거듭나는 동안 대체로 기쁨보다는 분노 속에 살았지만, 막상 C이 깨어날 날이 다가오자 그녀를 곁에 두고 직접 기르고 싶어졌다.

성스러운 팔라딘 C은 분명 흡혈을 거부할 테니, 그런 그녀를 제 손으로 직접 무너뜨리고, 강제로 피를 먹이고, 종국에는 먼저 다가와 제게 부탁하는 모습을,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를 갈구하고 피에 복종하는 몸이 되어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어졌다.

…….

그런데 이상했다.

C의 고통과 눈물은 분명 R 경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한데 그녀가 아침마다 미로에 숨어 제가 먹여 준 피를 토해내고 몰래 눈물을 훔치는 모습은, 이상하리만큼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멍청한 C.

도망쳐봤자 카타콤에서 길도 못 찾으면서, 매번 무작정 뛰쳐 나가면 어쩌자는 건지….

R 경은 C이 길을 잃을 때마다 그녀의 체향을 추적했다. 그렇게 달콤한 피 냄새를 따라 몇 걸음 옮기고 나면, 대체 자신을 어떻게 찾았냐는 듯 C이 경계하며 뒷걸음질을 치곤 했다. 그녀는 그때마다 눈물을 삼킨 채 죽어도 약한 면을 보이지 않으려 했다.

그건 R 경에게 꽤 거슬리는 일이었다.

R 경은 C의 무감하게 죽어 있는 홍채에서 여러 감정을 찾는 일을 좋아했는데, 몰래 울면서도 언제 그랬냐는 듯 제 앞에선 울지 않으려는 그녀를 보면 화가 나고, 속이 배배 꼬이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불편한 감정들이 부글거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들에서 솟아오르는 폭력성을 억제하며, R 경은 C에게 다가갔다. 그는 상냥한 손길로 C의 부은 눈두덩이를 쓸어 만지고, 그녀가 미처 훑어내지 못한 눈물방울을 훔쳐 혀끝에 가져갔다. C은 눈물마저 달았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여느 때와 달리, 그는 입을 열었다.

“넌 내가 네가 왜 우는지 모른다고 생각하겠지.”

R 경은 웃으며 C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거미처럼 천천히 뒷덜미를 타 내려가, C의 등허리를 끌어안았다. C이 긴장을 누그러뜨리지 않으면서도 저항 없이 품에 안겼다.

“알아, 네가 왜 우는지. 네가 더는 네가 아니게 돼서 우는 거잖아.”

움찔. 역시 제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C이 반응했다. 그녀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R 경의 시선이 그녀의 입술로 향했다가, 그대로 미끄러져 새하얀 목덜미에 도달했다.

“하지만 걱정 마. 너는 여전히 너니까.”

제가 이런 상냥한 말을 할 줄은 몰랐던 듯, C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흔들리는 두 눈이 오롯이 제게 꽂혔다. R 경은 오싹 전율이 이는 것을 느꼈다. 아마 지금 C은, 그게 무슨 뜻이냐며 제게 속으로 묻고 있을 터였다. 그것을 증명하듯 그녀의 눈빛에 희미한 이채가 깃들었다.

아아, 정말이지….

R 경은 지금처럼 C의 잿빛 눈에 빛바랜 희망이 깃들 때가 좋았다.

“왜인지 알아?”

그야 그 희망은 오직 저로 인해 세워지고,

“네 살냄새는 여전히 제일 달콤하거든.”

─오직 저로 인해 부서졌으니까.

“아……!!”

으득. R 경은 그 말을 끝으로 곧장 C의 목을 깨물었다. 그의 송곳니가 C의 살갗을 꿰뚫었다.

“…아, 아. R, R 경…….”

본디 밤피르는 밤피르의 피를 마시지 않지만, 말했듯 R 경에게 C은 ‘예외’였다.

“흑, 아. 잠깐, 읏…….”

C이 품 안에서 바르작거렸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이 R 경의 팔을 붙잡고 매달렸다. R 경은 C을 더 꽉 끌어안았다. C의 뒤꿈치가 들리고, 허리가 휘고, 목이 뒤로 젖혀졌다. 배가 빈틈없이 맞붙었다. C이 숨을 가쁘게 할딱일 때마다 부푼 가슴이 맞닿았다 떨어지고, 짙게 배어 나오는 피 냄새가 R 경을 유혹했다.

C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이고 게걸스레 피를 빨면서, R 경은 느른하게 웃었다.

그래, 이젠 C이 울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녀도 종국에는 밤피르인 이상, 인간을 사냥하지 않으려면 영원히 이 밤의 도시 카타콤을, 제 곁을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는 오로지 제가 주는 피만 입에 댈 수 있는 존재였다. 그것이면 되었다.

R 경은 입술을 떼었다. 축축한 소리와 함께 핏물로 혼탁한 실이 길게 이어졌다 뚝 끊어지고, C의 피부가 금방 회복되기 시작했다.

그 광경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R 경은 C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겨 주었다.

자신은 C을 배 불리고, C은 자신을 배 불리는 관계.

이만큼 완전한 관계가 또 어디 있을까.

“아아, 가엾고 사랑스러운 C…….”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R 경은, 모순적이게도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제 소유인 C을 보며 사랑을 느꼈다.

본디 아담은 제게서 만들어진 이브를 사랑하는 법.

언젠가 어떤 작가가 말하길,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고 하였으니.

어쩌면 명계의 아담은, 이브를 얻음으로써 더욱 완벽한 영생을 살게 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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