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국립국어원에서는 아이돌의 대체어로 돌아이를 제시했습니다 上

만자타입 HL 소설 커미션 작업물

- 약 7일 소요 / 17,434자 / 전문 공개 샘플

- 해리포터 드림: 여캐 C, 남캐 R

- 신청사항: 1만 자, 오마카세, [아이돌 R X 대리로 팬사인회 간 갓반인 C]

- 주의사항: 역스토킹 묘사 (뒷조사, 감시, 사생 고용 등)


국립국어원에서는 아이돌의 대체어로 돌아이를 제시했습니다 上

: 아이돌 R X 대리 팬사 갓반인C

C은 메신저를 들여다봤다. 심장 떨려서 미치겠다는 환호와 눈물의 이모티콘이 도배됐다. 바로 C의 친구, 레이였다. 레이는 C더러 팬사 끝나면 꼭 바로 전화하라며, 이 차가 식기 전에 데리러 가 C에게 묻은 멤버들의 따끈따끈한 온기와 체향을 직접 들이마시고 만지고 느낄 것이라고 말했다.

C은 그렇게 원한다면 역시 여긴 네가 오는 게 좋지 않았겠냐고 물었지만, 레이의 답은 단호했다. 안 돼. 난 절대 안 돼. 못 가. 네가 익스블루전의 향기를 내게 실어다 줘…. 그녀가 이번에는 애원하는 이모티콘을 연달아 보냈다. C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많이 줄어든 팬사 입장줄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랬다. 아이돌이니 팬사인회니 연예계와는 일절 관계도 관심도 없는 C은 지금, 절친한 친구 레이의 부탁으로 대신 남자아이돌 그룹 <익스블루전>의 팬사인회 현장에 와 있었다.

학교를 째고 회사 월차를 내고 선약도 파토 내고 도게자 하며 가는 것이 팬사인 마당에 왜 익스블루전 광팬인 레이가 직접 팬사에 오지 않았냐면, 이유는 단순했다. 레이가 극극극도로 낯을 가리고 바깥 활동을 꺼리는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레이는 너무 소심한 나머지 카페 주문 하나 하기 힘들어해 매번 C이 도와주곤 했는데,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이라 할지언정 팬사인회에 직접 나설 용기는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번에도 레이를 돕는 건 C의 몫이 됐다. C도 마찬가지로 이런 대규모 행사는 처음이라 조금 긴장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아이돌에 관심이 없는지라 레이만큼 떨고 말고 할 것은 없었다. C은 잊지 말고 앨범에 꼭 이름 적어달라는 레이의 메시지를 끝으로, 핸드폰을 넣었다.

오래지 않아 팬사 줄은 줄어 C의 차례가 되었다. 7명의 멤버 중 가장 앞쪽에 있는 멤버의 자리가 비고, C은 그곳으로 안내받았다. C은 친구의 부탁대로 침착하게 몇 가지를 부탁했다. 친구가 적어준 질문도 하고, 메모지로 미리 표시해 둔 책장에 사인도 받고, 이름도 적어달라고 했다.

멤버는 대체로 친절했고, C은 이어 큰 지체 없이 다음 멤버, 또 다음 멤버에게 향했다. 그리고 네 번째, 정중앙의 자리에 앉아 있는 R을 마주했다.

C은 팬보다는 직장 동료에 가까울 만큼 사무적인 태도로 R에게 인사하고, 이번 노래 퇴폐한 컨셉이 정말 좋더라는 칭찬과 함께 조목조목 팬서비스를 부탁했다. R과 어울리는 뱀 모양 목도리도 한 번 둘러달라고 하고, 사인도 적어달라 하고, 이런저런 한마디도 부탁했다. TV에서나 보던 아이돌을 이렇게 직접 대면한다는 게 신기하긴 했지만, 이외의 감상은 딱히 없었다.

이후에는 주어진 시간이 다 되어 별반 문제 될 것 없이 또 다음 멤버에게 넘어갔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R에게 일어났다.

R은 프로 아이돌답게 생글생글 웃으며 C의 팬서비스 요구에 응해 주었지만, 속으로는 약간 의아하기도 하고 기분 나쁘기도 한 상태가 되었다.

그야 익스블루전의 팬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을─특히 멤버 중 가장 잘생겼고 매력 넘치고 노래에도 춤에도 다재다능한 자신을─ 보러 저 땅끝, 아니 멀리 바다 건너에서까지 찾아오곤 했다. 그리고 감히 그 미천한 몸으로 자신을 코앞에서 마주한단 생각에 무척 떨며 황송해했다.

화장도 엄청 공들여서 화려하게 하고 왔고, 머릿속이 새하얘져 무슨 말부터 꺼내면 좋을지 몰라 허둥지둥했고, 제가 무슨 한마디만 해도 무척 영광스레, 아주 황홀하단 듯이 여기면서 종국에는 형식적인 미소 한 번에 껌벅 넘어갔다.

한마디로, 모두가 R 앞에만 서면 과분한 알현 기회에 좋아서 쩔쩔맸다.

그런데 C은 그런 팬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내 팬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담담하고, 떨지도 않고, 이상하게 히죽대거나 좋아 죽겠다는 양 몸을 배배 꼬지도 않고, 화려하게 꾸미지도 않았고. 도리어 너무 차분해서 용감해 보인다는 인상까지 줄 정도였다. 그게 R의 심기를, 동시에 흥미를 건드렸다.

R은 다음 팬에게 성심성의껏─사실은 대충이다─ 사인해주면서도 곁눈질로 C을 살폈다. 그런데 이게 웬걸. 그는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바로 C의 웃음이었다.

그 웃음을 본 순간, R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옆 멤버와 이 짧은 시간에 무슨 얘길 그렇게 하는지 즐겁다고 쿡쿡 웃는데, 티 없이 맑은 웃음이 빌어먹게… 빌어먹게, 아, 이걸 뭐라 표현하는지 모르겠는데. 어쨌든 빌어먹게……

…….

…하아, 빌어먹게 거슬렸다.

R은 생각했다. 멤버 중에 내 인기가 제일 높은데. 나랑 대화할 땐 저렇게 안 웃었으면서? 빅토르랑은 뭐가 좋다고 웃는 거지? 저 자식 나보다 못생겼잖아. 웃음이 나올 얼굴인가 저게? 무슨 얘길 하는 거야? 그는 묘하게 저기압이 되어서는 눈으로 C의 꽁무니를 좇았다. C은 이후 다음 멤버에게 넘어갔고, 또 다음 멤버에게 넘어갔다.

그 뒤로는 그녀가 시야에 아예 보이지 않게 되었다.

R은 불쾌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를 찾으며 신경 쓰는 본인을 발견한 뒤에는, 원인을 모르게 속이 더욱더 불쾌해졌다. 그렇게 심사가 잔뜩 뒤틀린 상태로 꼬박 시간이 흘렀다. 행사가 끝났다.

팬사인회는 어찌어찌 잘 마쳤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계속 C의 웃음이 아른거렸다.

다음 일정으로 이동하는 밴에서, R은 C이 웃음을 주었던 멤버, 빅토르에게 넌지시 물었다. 아까 이름이 ‘레이’인 여자, 기억하냐고. 막 웃던데 무슨 얘기 했냐고. 그러자 빅토르는 평소의 그 나쁜 기억 머리는 어디 가고 얼굴을 활짝 틔우면서 말했다. ‘아~ 그 웃는 게 예쁜 분!’

빅토르가 이름만 듣고도 바로 그 여자를 떠올렸다는 점에서, 또한 ‘웃는 게 예쁘다’라고 표현한 점에서 왜인지 미간이 구겨진 R이었지만, 그는 선선히 긍정했다. 빅토르가 뭐 대단한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라며, 자기 어머니와 이름이 같아서 신기하다고 웃었더니 같이 웃어 주더라고 대답했다. 과연 별 볼 일 없는 이야기였다. R의 궁금증이 해소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R의 불쾌한 감정에 마침표가 찍혔다면 좋았을 텐데, 그의 거슬림은 당최 사그라들 줄을 몰랐다. 밴의 차창을 보면 그 위로 그 여자의 웃는 얼굴이 비쳤고, 짜증 나서 발을 탁탁 구르며 밖의 행인들을 보면 그들 손에 눈이 갔다. 그 손들에서 여자의 단정한 손이 떠올랐다. 매니큐어니 눈을 사로잡는 장신구니 무엇 하나 없던, 제게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라고는 조금도 생각되지 않는 밋밋한 차림새와 행실. R은 자꾸만 그 여자를 곱씹었다.

이후 그는 CM 촬영지에 도착했고, 분장실에 들어가 섬세한 메이크업도 받았고, 스탭들과 주의를 환기할 만한 대화도 여럿 나누었다.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불편한 감정에 시달렸다.

결국 그는 메이크업 아티스트에게 묻기까지 했다. 낮에 그런 일이 있었는데 말이에요. 그 여자 역시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죠? 어떻게 나를 만나는데 하나도 안 떨 수가 있지?

그러자 아티스트가 아첨을 시작했다. 그 여자분, 대단한 강심장인지도 모른다며, 자신만 해도 이렇게 R을 마주하고 분장해 주는 일이 무척 떨린다며. 같이 일할 수 있게 되어 영광이라고. R은 그 모범적인 답안에 만족했지만, C이 강심장이라 그럴 거란 대목에선 전혀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도 뭐, 아이돌이 얼마나 바쁜데. 온종일 팬사에서 본 희한한 여자 생각만 할 수 있는 한량이랴.

R의 불쾌감은 머릿속에 각인됐지만, 이후 그는 바쁜 일정에 치여 C을 독특한 여자 정도로 치부하고 잊고 지냈다. 안무 연습도 하고, 다음 발매 곡이며 컨셉 회의도 하고, 토크쇼에도 출연하고, 각종 음악방송 녹화와 국내외 콘서트 등도 진행하면서 말이다. 그리고 곧, 대망의 다음 앨범 발매일이 다가왔다.

그런데 이게 무슨 장난질이지?

이번 앨범 팬사인회에도 그 여자가 당첨되어 찾아왔다.

R은 C이 줄에 서 있을 때부터 그녀를 알아봤다. 아는 얼굴이 조금 반가운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을 무시했던─C은 무시한 적 없지만, R은 너무도 자기중심적이라 그렇게 생각한다─ 그녀의 행동이 떠올라 불편하기도 했고, 어디 이번에도 나한텐 안 웃어 보일 테냐 하는 호승심, 궁금증, 불안감 등이 느껴지기도 했다.

더욱이, 자기 쪽에서 먼저 그녀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이 왠지 자존심 상해서, 다른 팬사 단골들과 달리 아는 체를 해주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냥, 전반적으로 레이 오트밀은 괘씸한 여자였다. 그는 C 차례가 되어 그녀가 다가오자, 펜을 놀리며 당신 따위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양 물었다.

“이름이?”

“아, 레이 오트밀이요. 여기 적어주세요.”

하지만 되레 그 대답에 눈썹을 꿈틀한 것은 R 쪽이었다.

레이 오트밀의 목소리는 자그마치 반년 전과 변함이 없었다. 자길 기억해주지 못해 속상하다거나 아쉬워하는 눈치는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자기 존재를 제 기억 속에 각인시켜 보겠다는, 어떠한 일말의 노력조차 없었다. R은 내가 아이돌이 아니라 그저 그런 병원 접수처 직원이었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는 저번 팬사 때보다 더 그녀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한데 그리 의식하고 있으니 왠지 휘둘리는 기분이라, 그는 또 변덕스레 전략을 바꿔야겠다 싶어졌다. 철저히 모른 체해주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그는 속으로 이를 악물고 겉으론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아~ 이름 들으니 생각난다. 저번 팬사 때도 오셨죠?”

그러자 C의 눈이 토끼처럼 휘둥그레졌다.

“…대체 어떻게 기억하셨어요?”

그 모습이 조금, 아주 쪼끔은 귀여운 것도 같아서, R은 웃으며 자기 자랑을 했다. 원래 자기가 기억력이 좀 좋다는 둥, 옷의 매듭이 독특해서 기억에 남았다는 둥, 사람을 잘 알아본다는 둥….

그러고 있으니 기분이 약간 나아졌음을 느꼈다. 그래, 뭐…. 웃는 것까진 아니라도 이 여자가 놀란 걸 보았으니, 이번에는 제 승리였다. 단번에 짜증이 누그러졌다. 그는 눈꼬리를 곱게 접고 사인을 마쳤다.

“…아. 근데 그, 저….”

그런데 그때, 갑자기 뭔가 시도해 보겠다는 양 여자가 입을 열었다.

간신히 용기를 쥐어 짜낸 듯한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솔직히 R은 ‘역시’ 싶었다.

하, 그럼 그렇지. 날 보고도 아무렇지 않은 여자가 있을 리 없지. 겉으론 괜찮은 척해도, 뭘 말하려는지는 몰라도 속으론 어떻게 서두를 꺼내야 할까 안절부절하고 있었겠지. ‘엄청 팬이에요.’라든가, ‘정말 실물이 훨씬 멋지세요.’라든가, ‘아아, 난 이제 죽어도 좋아…♡’라든가. R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그는 자못 부드럽게 물었다.

“네. 왜요?”

“거기 이름 옆에, 고양이 얼굴도 그려주실 수 있나요…?”

…….

………….

레이 오트밀은 진짜, 최고로 짜증 나는 허접 최악 최저의 여자였다.

***

이후, R은 속으로 스무 번쯤 레이 오트밀을 씹어주는 것으로 팬사인회를 마쳤다. 이번에도 기분을 잡쳤다. 바로 다음 팬에게 사인해주려고 이름을 묻자 ‘오빠 저 ─기억 안 난다─잖아요, 팬사는 다 챙겨 왔는데 어떻게 아직도 기억 못 하실 수가 있어요! 기억력 좋으시다면서요!!’ 하는 가벼운 질책이 날아오긴 했지만, 그 질책 때문에 기분을 잡친 것은 아니었다.

그 소릴 들은 레이 오트밀이 풋 하고 작게 웃어서 또 비겁하게 제 시선을 빼앗기는 했지만, 그 웃음 때문도 아니었다.

그냥 이번에도 원인은 그 모든 상황을 초래한 ‘레이 오트밀’ 그 자체였다.

결국, R은 기숙사로 돌아가는 밴에서 매니저에게 말했다. 오늘 온 그 희뿌연 머리를 한 여자, 내가 저번에도 말한 여자. 뭐 하는 여잔지 알아보라고. 이름은 레이 오트밀이라고.

요즘 세상에 흥신소를 통하면 알아내지 못할 것은 없다. R은 매니저를 통해 몇백을 턱턱 내주고 손쉽게 레이 오트밀과 그녀 친구의 정보를 알아냈다.

그 결과 R은 왜 그 여자가 제게 그토록 관심 없어 보였는지, 시종일관 사무적인 태도를 고수했는지 알게 되었다.

그 여자의 이름은 레이 오트밀이 아닌, ‘C.’

알고 보니 돈 많은 히키코모리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 대신 팬사를 온 것이었다. 본인은 연예인에게 관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데도, 취미라곤 길고양이를 놀아주는 것밖에 없는 하찮은 여자인데도. 고작 그 친구가 대신 가 달란다고, 대신 사인을 받아다 주겠다고.

R은 흥신소 직원이 찍어 온 C의 사진을 바라보았다. 어떤 카페에서 막 걸어 나오며 흩날리는 머리를 정돈하고 있는, 지극히 일상적인 풍경 속의 사진이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째 아이돌인 제가 사생이라도 된 듯한 감상에, R은 약간의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그는 파파라치 컷처럼 찍힌 C의 사진을 구겨 버렸다.

그날 밤, 당연하게도 R은 뭐 같은 C을 신경 쓰느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분하고,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아니, 아무리 대리로 팬사에 왔다 해도 그렇지. 두 번씩이나 날 영접해 놓고선 표정에 변화가 없단 말이야? 이 나를 보고도 느끼는 게 없어? 눈이 삐었니?

그는 부정에 부정에 부정을 거듭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뒤에야, 눈 밑에 다크서클을 달고 이불을 차며 일어났다. 그는 새벽부터 매니저에게 연락해 잔뜩 화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 속에서 그 여자가 갔던 카페, 어디인지 알아내라고.

비몽사몽 일어났던 매니저는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R의 저의를 알아차렸다. 잠이 확 깼다. 그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아니 너 이번엔 또 뭔 난리를 치려 그러냐, 저번에 악플러랑 현피 떠서 파파라치 기사 막기 얼마나 힘들었던 줄 아냐, 나 수습하기 힘들다, 너 또 대표님께 혼나려 그러냐….

하지만 고집 센 R이 발언을 철회할 리가. 매니저는 근본적으로 R을 거부할 수 없었다. 가엾은 그는 결국 한숨 쉬며 R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알겠다고 답한 뒤 제발 엄한 짓은 하지 말라며 전화를 끊었다.

참 나, 내가 뭐 그 여자를 패기라도 할 줄 아나. R은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던졌다. 고작 두 번 본 평범한 여자가 뭐라고 자꾸 신경 쓰이고 이렇게 피로한 건지 모르겠다. 그는 자신이 통제력을 잃는, 다시 말해 쥐뿔만큼도 원치 않았던 감정이 드는 일이, 그리하여 그 감정 때문에 이딴 시간 낭비에 시달리는 일이 짜증 났다.

그래서 이 모든 일련의 ‘사고’를 수습하고자, 나름대로 해결책을 고안한 것이었다.

첫째, 그 여자를 만나 정말 내게 아무 관심도 없는지 탐색해보기.

둘째, 정말 관심이 없다면 손쉽게 꼬셔서 내 팬으로 영입하기.

셋째, 이 귀하신 몸을 알아서 받드는 꼴을 내려다보며 싹 잊고 손 털기.

말하자면 그는 C가 다른 팬들과 다름없이 평이하고, 무엇 하나 눈에 띄는 구석 없고, 무시하기 좋은 존재가 되길 바랐다. 공장에서 찍어낸 로봇처럼 모두와 똑같은, 그래서 눈에 띌 일 하나 없는, ‘역시, 저 여자도 그저 그런 여자였어.’ 하고 홱 하니 넘길 수 있는 존재 말이다. 그야 R은 제 눈에 밟히는 것이 생기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

R은 우아하게 다리를 꼰 채 썬팅 된 차 안에 앉아 있었다. 그는 차창 틀에 턱을 괸 채 바깥을 내다보았다. 그가 지금 와 있는 곳은, 전에는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어느 동네 카페의 맞은편. 그는 괜히 바깥 사람들을 의식해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곤 운전석을 툭툭 쳤다. 매니저가 돌아보았다.

“저 카페 가서 커피 한 잔만 사다 주겠니.”

“핫 아님 아이스?”

“미지근하게.”

“미지근?”

“응, 미지근.”

R은 강조해서 말했다. 매니저가 별 희한한 취향을 다 보겠다며 차 문을 열고 나갔다. R은 손목시계를 내려다보았다. C의 일과쯤은 꿰고 있었다. 십여 분 뒤면 그녀가 등장할 것이었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그녀는 꼭 수요일 이 시간 카페에 가 레이 오트밀과 마실 커피 두 잔을 사서 나오곤 했으니까.

R은 마스크도 다시 고쳐 쓰고, 제 옷매무새도 다듬으며 좀 더 기다렸다. ‘커피’라고만 말했는데도 아메리카노 아니면 안 마시는 걸 아는 매니저가, 찰떡같이 미지근한 아메리카노를 들고 돌아왔다.

“야, 사람 없어서 금방이더라. 여기.”

“고마워.”

R은 그 커피를 받아들곤 조금 더 기다렸다. 평소라면 하등 마실 일 없는 식은 커피지만 한 모금 마셔보기도 하고, 이내는 역시 취향이 아니라 뚜껑을 덮기도 하고. 못내 그 조급증을 못 이겨 발도 탁탁 굴렀다.

곧, 저 멀리 몇 블록이나 떨어진 곳에서 C의 인영이 보였다. 예상대로였다. R은 당장 차 문을 열고 나갔다.

“어, 야! 야, 야!! 너 어디……!!”

쾅. R은 매니저의 당황한 목소리는 가뿐히 무시해준 채 카페로 걸어갔다. 그리고 C이 카페에 가까워질 때까지, 차양 밑에서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기다렸다.

오래지 않아 시야 끄트머리에서 C이 근접한 게 보였다. R은 그제야 막 카페에서 나온 사람처럼 움직였다. 시선은 여전히 핸드폰에 꽂힌 채였다. 결과는 뻔했다.

퍽. R과 C의 어깨가 부딪혔다.

촤악….

커피가 쏟아지고, C이 옅은 신음을 토해냈다. 마치 그녀의 실수인 것처럼 교묘히 부딪힌 R은, ‘아… 어떡하죠. 죄송해요.’ 하는 말과 함께 C을 내려다보았다. 당황한 그녀의 흰옷이 미지근한 커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R은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만족스러운 것 같기도 했고, 조금 찜찜한 것 같기도 했다.

“아, 이걸… 이걸 어쩌면 좋지. 죄송해요. 제가 앞을 못 보고…….”

C은 급히 사과하며 가방을 뒤적여 손수건을 꺼냈다. C의 흰 손이 몸에 닿던 그제야 깨닫건대, 커피를 쏟으며 젖은 건 그녀만이 아니었다. R은 커피로 흥건해진 제 재킷을 내려다보았다. C이 세탁비를 드리겠다며 중얼거렸다. 그녀가 R의 가슴을 가볍게 눌러 닦았다.

얼룩을 없애기 바빠 제 얼굴은 볼 생각도 안 하는 정수리를 응시하며. R은 여유 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보란 듯 속삭였다.

“아, 이거 일반 세탁으론 안 될 텐데….”

C이 가볍게 난감한 소리를 흘렸다. R은 왠지 그녀를 더 놀려주고 싶었다. 전반적으로 이런 상황에서도 차분해 보이는 그녀였으나, R 눈에는 그녀가 눈에 띄게 동요하고 있음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본디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일을 즐기고는 했다. 그는 C의 답을 기다렸다. 어떻게든 얼룩을 지워 보려던 그녀가 희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그, 새 옷을…….”

“이거 되게 비싼 거라 힘들걸요.”

R은 웃음을 죽이며 C의 혼란을 배가시켰다. 지금쯤 매니저가 놀라 뛰쳐나와 연신 사과를 하려 들 것 같아서, 썬팅 된 차량에 눈짓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C이 누가 봐도 패닉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았다.

“저, 그럼 어떻게 해 드리면….”

분명 눈이 마주쳤지만, 아무래도 모자와 마스크 때문에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R은 자존심에 약간 스크래치가 생겼지만, 애써 웃어 보이며 말했다.

“지금은 바빠서 오래 얘기 나눌 수가 없고… 제 잘못도 있으니 혹시 이따 얘기 나누는 건 어떠세요? 세탁비는 그쪽도 필요해 보이는데.”

C은 자신이 젖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떠올린 사람처럼 아, 탄식했다. R은 웃으며 마저 말했다.

“핸드폰 번호 알려주세요.”

***

R은 태연히 차로 돌아왔다. 매니저가 너 미쳤냐, 저분은 괜찮으시냐, 그러게 왜 갑자기 마시지도 않을 미지근한 커피를 사 달래서…! 하고 외치다가 불현듯 뭔가 깨닫고 안색이 창백해졌다. ‘너, 설마….’ 그는 R의 독특한 커피 취향과 바로 그 커피에 젖은 여성을 떠올렸다.

아니나 다를까, R이 팔꿈치로 턱을 괸 채 킥킥 웃었다. 마스크를 내린 그의 얼굴이 발그스름한 홍조를 띠었다. R이 말했다. ‘형, 저 여자가 나한테 언제 연락하나 내기 안 할래?’

매니저는 정말로 기함했다.

세계적인 아이돌 그룹, 익스블루전의 리더 R. 그가 또X이인 것이야 연예계에 알음알음 소문이 퍼져 있었으니 진작 알고 있었다.

그런데 하다 하다 이 정도일 줄이야. 맘에 좀 안 든 여성 곤란하게 만들겠다고 이렇게까지 시간을 투자하고 이상한 커피를 시키고 또 그걸 뒤집어쓰게 만드는 미친놈일 줄이야…!

“야, 야 인마. 연락은 무슨! 너 지금 헌팅 한 게 아냐! 핸드폰은 비밀폰 쓴 거 맞아? 아이고, 정신 차려 인마. 대체 무슨 연락을……!!”

그렇게 매니저의 분통 터지는 일장 연설이 시작됐다.

하지만 이미 기분 좋아진 R에게 그의 처절한 발악이 와닿을 리가 없었다. R은 ‘그 여자, 몇 분 있으면 바로 연락할 거야.’라고 도도하게 제 할 말만 해준 뒤 에어팟을 꽂았다.

답답해 죽으려 하는 매니저를 무시하며, R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손은 C의 번호가 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채였다. 그는 만족스러웠다.

애초부터 그의 오늘 목적은 C의 번호뿐이었다. 어떻게든 눈엣가시인 C을 별 볼 일 없는 여자로 만들긴 해야겠는데, 아이돌 신분인 제가 먼저 그녀에게 접근하기는 어려우니. 이렇게 우연을 가장하면 접근하기도 쉽고 명분도 좋겠다, 싶어서.

“멍청한 여자….”

그는 핸드폰을 톡톡 두드려 발신 기록에 떠 있는 번호를 쳐다보았다.

굳이 이름을 저장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일이 해결되고 나면 더 필요하지도 않을 번호니까. R은 슬슬 움직이는 차 안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그 여자는 무척 꼼꼼하고 조심스러운 편이니, 어쩌면 제 예상보다 몇 분 정도 더 늦게 연락이 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왜지?’

하지만 C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차는 점점 더 멀리 달리고 시간은 10분, 20분, 30분이 다 되어 갔지만 핸드폰에 뜨는 알림이라곤 사내 공지와 멤버들 단톡방의 쓸데없는 이야기들 뿐이었다. 그는 조금씩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 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초조함이라는 감정이었지만, 연말 시상식에서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리는 때도 아니고 고작 이 여자의 연락 하나 기다리는 데 초조함이라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 그는 그 감정을 답답함 정도로 여겼다. 제가 잘못해서 빌어 마땅해야 할 때도 이리 느려 터졌다니, 참 한결같은 여자로구나, 하고.

…….

결국, C의 연락이 온 것은 저녁이 다 되어서였다. 오후 안무 연습을 하고 씻고 나왔더니, 메시지 아이콘에 ‘1’이 떠 있었다. R은 거칠게─조급함에서 나온 행동이지만, R도 그를 지켜본 멤버들도 이를 알지 못한다. 저 미친개 또 저기압이네, 핸드폰 던지는 거 아냐, 했을 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쾅 소리 나게 문을 닫고 방에 들어갔다.

알림 바를 내려 메시지를 확인하자, 그곳에는 참 그녀답게 담백한 문자가 와 있었다.

[안녕하세요. 낮에 카페 앞에서 부딪힌 사람입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옷이 많이 젖어서, 어떻게...더보기]

R은 머리를 쓸어넘기며 피식 웃었다. 문자의 타이밍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그 내용은 충분히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는 통제력이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그는 이대로 메시지 앱에 들어가 ‘1’을 ‘읽음’으로 바꾸고 바로 답장해 줄까, 아니면 조금 더 애태울까 고민했다.

그리고 제 성격을 못 이겨, 몇 분 되지 않아 바로 답장했다.

[안녕하세요. 말씀드렸듯 제 잘못도 있으니, 다른 것은 됐습니다. 시간 되실 때 커피나 한잔 사 주세요.]

R의 메시지에 바로 읽음이 사라졌다. 역시 C은 제 연락만 기다리며 전전긍긍하고 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는 C의 답이 오면, 이번엔 자신도 바로 답해줄 심산으로 답장을 기다렸다.

하지만 무슨 이야길 그리 길게 쓰는지 답장은 5분이 넘도록 오지 않았다.

…….

…띠롱.

기다림이 7분에 이르러서야 답이 왔다.

[커피요?]

R은 헛웃음을 흘렸다. 7분 동안 저 세 글자를 쓰기 위해 부단히도 머리를 굴렸을 C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는 답장했다.

[네. 옷은 각자 세탁하는 걸로 해요. 대신 저만 커피를 버렸으니, 그건 받아야겠습니다.]

이후로도 R은 C과 문자를 몇 번 더 주고받았다. C은 쩔쩔매며 어떻게든 옷값을 지불 해 주려 했다. 하지만 R은 반복해 관대함을 연기하며 커피를 고집했고, 그의 황소고집에 져버린 것은 C 쪽이었다. 두 사람은 일주일 뒤 같은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

R은 이번에도 사생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개인 차량을 운전해 카페에 도착했다. 다만 저번과 달리 매니저는 대동하지 않은 채였다.

그는 대신 가짜 파파라치를 둘 고용했는데, 이 역시도 C을 협박하기 위해서일 뿐 진짜로 사진을 찍혀 헤드라인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거리에 두 파파라치를 대기 시켜 두고, 자신은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약속 시간을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C은 당연하게도 이미 자리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질끈 묶은 머리, 수수한 옷차림, 화장기라곤 하나 없는 얼굴. 팬사인회 때와 하나 다를 게 없는 모습이었다. R은 그녀의 앞자리에 가 앉았다.

“미안해요. 좀 늦었죠? 길이 막혀서.”

“아… 안녕하세요.”

C이 움찔 놀라더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어……!”

C의 눈이 또 토끼 같이 커졌다.

“저, 저, 그. 아니, 혹시….”

반응을 보아 이번에는 제가 누구인지 알아본 듯했다. R은 피식 웃으며 눈짓했다.

“누군지 알아보겠어요?”

C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이런 데 오시면 안 되는 것 아니냐고 속삭였다. 그녀의 눈이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아마 ‘그럼 내가 ‘그’ R에게 커피를 쏟았던 거야?’, ‘어떻게 이런 우연이?’, ‘아니, R이 왜 이런 동네에?’ 따위의 생각을 떠올리고 있을 게 뻔했다. R의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로, 둘은 혹시 모를 시선을 피해 2층으로 자리를 옮겼다. 약속대로 C이 커피를 사겠다는 것을 당연히 농담이지 그걸 믿으셨냐며 R이 계산했고, 대화 주제는 자연히 아이돌인 R과 관련된 방향으로 흘러갔다.

C은 사람을 의식해 가까이 상체를 숙여 소곤거리곤 했는데, R은 그 어리숙한 배려가 꽤 마음에 들었다. 귓가에 스치는 숨소리도 나쁘지 않았고, 그녀가 그처럼 배려한답시고 상체를 숙여주면 이쪽에서도 숙이는 수고를 해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멍청함도 꽤 웃겼고.

중간에는 C의 속을 떠보기 위해 멤버 중 누가 제일 잘생겼냐는 물음을 해 보기도, 그녀 스스로 대리 팬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도록 유도 질문을 해 보기도 했다.

C은 입에 발린 말일지언정 번번이 꽤 흡족한 답을 들려주었다. 다른 멤버분들께는 비밀이라면서 R 씨가 가장 잘생기신 것 같다고─R이 너무 기대에 차 보여서 사회성을 짜내 말한 것이다─ 말해주기도 하고, 자신은 앨범을 한가득 사들이거나 콘서트를 다닐 만큼 음악 쪽에 깊은 취미를 가진 적은 없지만 팬사 후 익스블루전의 노래는 계속 듣고 있다며 말해주기도 했다.

두 사람은 멀리서 보면 연인인가, 싶을 만큼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장장 두 시간이 흐른 뒤에야, 슬슬 R이 일어나야겠다며 귀가 의사를 비쳤다. C도 레이 외에 누군가와 이렇게 대화를 나눠 본 것은 오랜만인지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R을 따라 나갔다.

하지만 R의 계략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그는 카페를 나서자마자, C을 제 재킷 품에 숨겼다. 영문을 모르는 C이 품 안에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R은 말했다.

“파파라치 뜬 것 같아요.”

C이 눈에 띄게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좋죠?’ 이런 일은 처음이라는 양, C이 R의 품에서 나가지도, 그렇다고 파고들지도 못하고 양 주먹을 가슴 앞에 꼭 말아 쥐었다.

R은 자신은 괜찮아도 일반인인 C의 신분만은 가능한 보호 해주겠다는 양, 몸으로 C을 더 가리며 중얼거렸다. 아, 이거 곤란한데….

그는 제 믿음직한 행동이 상대의 호감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정작 내뱉는 말은 불안을 부추길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실로 여유로웠지만, C이 더 초조해지도록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뛸까요.

파파라치 따돌리는 법을 아이돌인 R이 잘 알까, 일반인인 C이 잘 알까.

종국에 C은 R의 재킷을 덮은 채 그와 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아이돌과 숨 차는 레이스를 찍게 될 줄은 몰랐다. 그녀는 당연히 혼란스러웠지만, 그렇다 해서 다른 묘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단지 어떡하지, 벌써 사진 찍힌 거 아닐까, 레이가 사생팬들 엄청 무섭다던데 해코지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들에 정신없이 뛰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게 거리 한복판을 얼마나 내달렸을까.

심장이 터질 듯 뜀박질한 끝에, 그들은 파파라치를 따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녀는 지금 R과 찰싹 맞붙은 채 비좁은 건물 틈에 끼어 있었다. 지쳐 할딱이는 자신과 달리, 매일 춤 연습을 해서 그런지 비교적 호흡이 안정된 R의 몸이 느껴졌다. C은 숨도 차고 무섭기도 해서 거의 바들바들 떨다시피 숨을 골랐다. 머리 위에서 R의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자, R이 마스크를 내리며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아마 C 씨 얼굴은 못 찍었겠지만, 같이 있는 거 두세 장은 찍혔을 것 같은데. 어떡할 거예요?”

그걸 저더러 어떻게 할 거냐니…. C은 그의 웃음으로 빌어 그가 반쯤 장난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실로 파파라치가 한 컷도 촬영 못하지는 않았을 것 같아서 불안해졌다. 쉬이 답할 수 없는 그녀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 심장 소리가 맞붙은 몸을 타고 전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R이 느른하게 웃었다.

“더 찍지 못하게 도망친 거지, 한참 전부터 대기 탔으면 이미 찍긴 찍었을 텐데. 나 이제 어떡하지.”

“…….”

“사생들 꽤 집요해요. 동네 찾고 C 씨 찾아내는 것도 금방일 텐데….”

겉으로는 걱정하는 말을 흘리면서, 묘하게 즐거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C은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R의 가스라이팅 아닌 가스라이팅은 계속되었다. 다른 파파라치도 와 있진 않았을까요, 언제 나가면 좋을지 모르겠네, 아이돌은 이미지가 생명인데, 설마 카페 안에도 위장해 있던 건 아니겠지….

결국, C이 띄엄띄엄 끊어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게 있긴 하냐는 듯, 도통 해결책을 찾기 어려워하는 듯한 목소리였다. R은 어디 고민해 보자는 양 콧소리만 흘렸다. 그는 바깥을 살피는 척하며 곁눈질로 C을 내려다보았다. 그토록 거슬리던 여자가 이렇게 꼼짝도 못 하는 모습이라니, 묘한 충족감이 들었다.

기실 평소라면 누가 몸을 건드리는 것만으로 눈썹을 치켜세웠을 그였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이 계획 범위 내였기 때문일까. R은 C의 접촉만은 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뭐 뾰족한 수 있냐는 듯 C에게 까딱 고갯짓해 보였다.

“제가 커피 사달라고 나온 걸 어쩌겠어요. 기사 터지는 건 제 쪽에서 최대한 막아보겠지만, 사생은 늘 어떻게든 알고 찾아오더라고요. 당분간 밖에 나갈 때 조심해요. 문 잘 잠그시고요.”

“…….”

C은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각자도생하자는 듯한 그의 반응에 말문이 막혔다. 그야 애초 그에게 커피를 쏟은 제 잘못이긴 했지만, 문 잠그기 외에 사생을 막을 다른 방법은 없는 건지, 또 역으로 제가 그를 도울 일은 없는 건지, 고작 이게 다인지 아연해졌기 때문이었다.

짧은 순간, C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정말 사생이 찾아오나? 그럼 어떡하지. 미리 경찰을 불러야 하나. 아냐, 경찰은 꼭 사후에만 찾아와. 불안하다는 이유로 순찰이나 대기를 부탁할 수도 없어. 그들은 개인 경호원이 아니잖아. 아, 그럼 정말 경호원이라면…. 아냐, 어떻게 경호원을 고용해. 비용도 비용이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어떡하지, 레이에게 신세 지기도 미안하고….

C은 저도 모르게 끄응 앓는 소리를 냈다. 곧, R이 슬슬 나가도 되겠다며 마스크를 썼다. 그가 먼저 움직였다. 폭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남은 기분이 되어, C도 삐걱삐걱 그를 따라 나갔다.

주변을 살핀 R이 오늘 자기 때문에 고생 많았다며, 경호원을 붙여줄 순 없지만 다른 방안을 모색해 볼 테니 집 주변에 이상한 사람은 없나 꼬박꼬박 연락하라고 했다. 이미 R의 밀당으로 멍해진 C은 그게 어떤 의미인지도 모르고 졸지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헤어졌다.

원래의 R이라면 C의 귀가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그는 이미지가 생명인 아이돌 된 도리로 그녀가 골목 사이로 접어드는 것까지는 지켜봐 주었다. 이렇게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잠재적 팬인 그녀에게 감동을 주고, 호감을 형성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나서 본인은 편리하게 매니저를 불러 차를 타고 돌아갔다.

가는 내내 일을 좀 귀찮게 만들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이미 벌인 일은 별수 없었다. C이 앞으로도 친구 대신 행사장에 온다고 할지라도, 자발적 노예, 아니 팬이 될 가능성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데 그것은 그의 높디높은 프라이드가 가만두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R은 제 친절함에 C이 폭 빠져 넘어오면, 시시하니 이제 더는 필요 없다며 그녀를 버릴 예정이었다. 사적인 연락 따위 일절 하지 않고, 폰 번호도 바꾸고, 이 구린 동네에도 오지 않고.

너와 내 신분 격차를 알라며, 너는 저 밑바닥에서 무대에 선 위대한 나를 잠자코 올려다보기나 하라고. 어디 한번 애타 보라고. 마치 그게 원래의 위치였어야 하는 것처럼.

‘이 동네는 왜 또 왔냐’며 소리치는 매니저를 어김없이 노이즈캔슬링으로 차단해 주며, R은 ‘잠시 눈 좀 붙일게.’라는 말을 끝으로 눈을 감았다.

***

최근, R에게는 취미라기에는 뭐하고 심심풀이라기에는 꽤 규칙적인 일과가 생겼다.

그는 제가 명령한 대로 꼬박꼬박 보내오는 C의 문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느 날은 저녁 7시에 귀가했고, 어느 날은 낮 3시에 귀가했으며, 어느 날은 아침 7시에 밖을 나가기도 했다. 또 어느 날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귀가하기도 했다.

이른 아침에 문자를 보내는 날은 ‘이른 아침 실례합니다.’라는 서두가 붙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C의 문자는 매크로처럼 매일 똑같았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상한 사람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상한 사람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은 이상한 사람 없습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이상한 사람 없습니다.]

와중에 매크로가 아니라는 걸 티 내기라도 하는 건지, 한 번쯤은 오늘‘도’라고 약간 변화를 주는 점이 우습기도 했다. 실로 그즈음 R은 이거 나랑 문자 하는 것도 귀찮아서 복붙하나 싶은 생각에 슬그머니 화가 나기도 했으므로, C의 소심한 시도는 꽤 성공적이었다.

‘주인 닮아서 문자까지 뻣뻣하기는.’

하지만 R의 계획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대로 평생 문자만 할 일 있나. C을 보다 ‘별 볼 일 없는 여자’로 만들기 위해 약간의 극적인 효과는 필요했다. R은 일찍이 사생팬으로 위장한 인력도 고용했다.

뭐 거창히 C에게 해코지를 하려는 것은 아니고, 약간의 겁만 줄 예정이었다. 다른 팬들과 다름없이 제게 매달리도록, 이 의미 없는 문자에 의미가 생기도록.

그리고 그 사생은 바로, 내일 C의 현관 뒤에 배송될 예정이었다. 그는 내일 C이 제게 어떤 방식으로 매달려 올지 상상했다.

‘안 그래도 요즘 심심했는데. 토끼 키우는 기분으로 별장 하나쯤은 내어 주도록 할까….’

C의 늘 똑같은 문자에 덩달아 똑같은 답을 보내며, R은 침대에 풀썩 누웠다.

[다행입니다.]

아마 내일은, 스케쥴을 조금 일찍 마무리해야 할 것 같았다.



ⓒ 2023.11.20. @MOCO_cms All rights reserved. 

카테고리
#기타
페어
#HL

댓글 0



추천 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