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카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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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재의 품에 안긴 여율은 홍조를 띄운 채로 발을 살짝 버둥거렸다. 그녀의 허벅지부터 번쩍 안아 올린 은재가 본당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자, 깨어 있던 다른 이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모조리 쏠렸다. 여율은 그마저도 어쩐지 쑥쓰러워 은재의 목을 끌어 당긴 채로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가려보려는 듯이 굴었다. 그런 그녀의 행동조차도 귀엽다는 듯이 은재가 낮은
서율은 때때로 일을 집에 가지고 오고는 했다. 정확히는 일을 집에 가져온다기보다, 재택근무의 형식에 조금 가까웠지만. 대부분의 경우 말리부가 낮에 집에 있는 시간대, 그러니까 ‘오후에 출근 할 때’라는 전제 조건이 붙었지만. 요는 지금은 낮이고 서율은 거실에서 패드를 보고 있었으며 말리부는 부엌에서 늦은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후에 출근
한 여율의 일상은 단조롭다. 아파트를 나서서 아르바이트처를 가고, 일을 하고 점심을 먹는다. 오전의 대부분은 그 시간으로 소모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여름의 볕을 피해 공원에 있는 그늘에서 지금 막, 구입한 핫도그를 입으로 씹어 넘기며 한 여율은 문득 하늘을 올려보았다. 아르바이트에서 잘리는 거야 저에게는 흔한 일이었다만, 때마다 그 핑계가 아주 그냥 차
동네 있는 펍(Pub)은 언제나 사람으로 가득했다. 이 곳에 산다면 누구나 한 번 쯤은 꼭 방문했을 그 장소는 매일 저녁, 제일 소란스러운 장소이기도 했다. 하나뿐인 딸을 재우고 시터에게 맡긴 뒤, 종종 방문하는 것이 요즈음의 서율의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어렸던 10대를 지나, 어쩌지도 못한 첫 사랑의 실패를 경험하고 늦었던 사춘기를 맞았더랬다. 그
새삼스러운 기분으로 서율은 실내를 눈으로 훑어내렸다. 짙은 감정이 베인 눈동자가 한 곳에 머물러 누군가를 덧그리는 듯도 보였다. 콜록, 작은 기침 소리와 함께 짧은 상념을 거두어낸 서율은 조용해진 까맣게 변한 휴대폰을 뒤집어 엎어 놓는다. 구둣소리와 함께 다가온 동료가 한결 걱정스런 표정으로 한서율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다소 부담스러운 상대의 행동
친애하는 말리부에게. 안녕하십니까, 말리부. 새삼스레 서면으로 인사드립니다. 아, 서면이 아니죠. 정확히는 당신에게 쓰는 편지입니다. 그저 어제의 짧은 식사로는 아쉬움이 남는 것만 같아서요. 늘 항상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긴 합니다만, 그래도 1년이라는 시간을 견뎌주신 당신께 꼭 편지를 쓰고 싶었어요. 그리 길지 않은 편지겠지만…. 당신에게 조금이
한서율은 태생부터 혼자가 아니었다. 태어날 때 발현이 확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쌍둥이 형에 의해 부족함을 모르는 편이었다. 정확히는 다른 센티넬들이 겪는 불편함을 태어나면서 한 번도 겪지 않았다는 사실에 조금 더 가까웠다. 자라나면서 자연스레 받아들인 자신의 이능력은 서율에겐 신체의 일부와 다름이 없었다. 이는 서율에게 축복받은 환경이기도 했지만,
작게 울리는 알람음에 서율의 미간이 얕게 찌푸려진다. 무의식 중에 손을 뻗어 협탁 위를 더듬는 손길이 평소와 달리 조급했다. 서율은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배개에 파묻은 고개를 들어올린다. 어깨에서 떨어지는 이불에도 아랑곳않고 손 안에서 진동하는 휴대폰 화면을 반쯤 노려본다. 누구지. 멍하니 잠에서 막 깬 얼굴로 고개가 절로 기울어진다. 이윽고, 손을
Happy Birthday Dear. Maribu 23.12.15 by.카리야 뽀얀 입김이 계절을 알려주는 시기가 돌아왔다. 겨울은 서율에게 크게 특별한 계절이 아니었다. 애당초 출퇴근의 거리가 짧았기 때문에 되려, 겨울을 실감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해가 바뀔수록 나이를 먹을수록 계절을 느끼는 감각과 신호는 늘 둔감해졌다. 그것이
한서율의 휴일은 언제나 비슷비슷했다. 최근에 생긴 연인이 생겼어도 그의 루틴이 크게 바뀌진 않았으며, 되려 상대가 한서율에게 맞춰주고 있는 실정이었다. 서율은 느릿하게 타블렛을 검지로 내렸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올린다. 익숙한 자신의 공간에 있는 타인이 거슬리지 않고 되려 반가움을 자아내는 것은 굉장히 생경한 기분이었다. “말리부.” 저도 모르게
깜빡,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장에 한서율의 눈동자가 느리게 움직였다. 좌로 한 번 우로 한 번 굴러가던 시선이 이윽고 한 곳에 머무른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공간이었다. 애초에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장 오랫동안 머물던 곳이 아니던가. 머리를 받치고 있는 팔걸이에 목이 바짝 뒤로 넘어간다. 창 너머로 보이는 하늘의 색이 다소 다른 탓이었다. 아, 짧게 탄
당신의 말의 귀를 기울여본다. 천천하고 다정한 그 목소리와 음색이 이제는 제법 귀에 착 감긴다고 한 서율은 문득 생각한다. 크루즈 안의 공기는 답답했으며, 때로는 후덥지근 했고 때로는 바다내음이 새삼 강하게 나곤 했다. 그런 공기 중에 섞인 당신의 체향을 찾아낸다. 예민하지 않은 후각은 자연스레 그를 따라갔으며, 기어코 당신을 찾아낸다. “그래요. 기억
찰나의 순간은 참 많은 것을 감내하게 만든다. 한서율은 문득 눈 앞의 사내를 보고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천천히 닿는 자리가 넓어질수록 새겨짐도 계속된다. 그 생소한 기분이 참으로, 어쩔도리 없이 기쁘다는 점이 여러모로 머리 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다. 뺨을 쥐고 매만지며, 천천한 시선을 느긋하게 돌린다. 적막이 가득한 공간은 아까와 사뭇 다른 공기가
집무실의 문이 열리는 일은 드물었다. 제 방을 드나드는 이의 수가 적은 탓도 있지만, 이전에 있던 부관이 유독 바빴기에 문턱이 닳을정도로 문이 열리고 닫힌 탓도 있을 터였다. 늦은 밤, 그것도 꽤 늦은 시간까지 일을 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카딘은 대체적으로 시간 안에 모든 업무를 마무리 했으며 행여 일이 남아 있어도 타인의 손을 빌리는 일은 드문 편이니
브리사바의 아침은 유독 추웠다. 새삼스레 체감한 온도에 카딘은 가볍게 몸을 떨었다. 어느새 흐트러진 머리칼을 길게 늘어 뜨린채, 유독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린다. 틈새로 들어오는 희뿌연 빛이 아직 동이 트기 전임을 암시한다. 옆자리에 있는 이의 체온에 느슨한 숨을 내쉬며 가만히 상대의 낯을 살핀다. 일찌감치 움직이기 시작한 이들의 기척을 느낄 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