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네트- 레이디가 기사에게

앨버트 오키프 보가트 로그

열람하기에 앞서: 성차별적이라고 느낄 만한 부분이 존재합니다. 다만 캐릭터의 서사 진행에 필요한 비유이기에 작성하였으며, 오너는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 spacebar30 님 커미션

보가트, 즉 두려움은 여러 형태를 가졌다.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동생, 누군가의 형. 차갑게 식은 고양이의 몸, 아주 큰 날개를 펴고 이리저리 활공하는 나방, 얼굴을 찢을 듯 날카로운 가지를 세차게 흔드는 나무. 깡그리 낙제점이 찍힌 성적표, 어제까지만 해도 다정했던 연인의 싸늘한 이별 통보 편지, 너무 아끼고 사랑한 나머지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넝마가 된 곰 인형. 또, 앨버트와 한바탕 싸운 뒤로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는 슬리데린 학생 앞에서는 그의 갈색 머리카락이 우수수 빠지는 모습을.

각자의 두려움은 실로 각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앨버트 오키프라는 이름이 불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까지도, 앨버트는 자신이 무엇을 마주할지 알 수 없었다. 내 두려움은 무엇인가, 인간에게서 두려움만을 수확하는 존재에게 나는 어떤 작물이 될까.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은 것 같은데. 어쩌면 가엾은 보가트는 제 모습을 무엇으로 바꿀지 고민하다 도망쳐 버릴지도 모르지. 그는 생각했다.


앨버트 오키프라는 이름의 할아버지를 두었기에 앨버타라는 이름을 얻은 아기가 100일을 산 무렵, 가족들은 그 아기가 살아갈 100년을 알고 싶어했다. 그들이 찾은 예언가가 붉은 머리의 아기에게 남긴 말은 이랬다. “가장 약한 자를 지키며, 적 앞에서도 결코 후퇴하지 않고, 명예와 영광을 제일로 여기는 투사가 되리라.” 이후로 앨버타는 앨버트가 되었으며, 기사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아이는 아주 오래도록 할아버지를 기사단장님으로 여겼다.


퓔라케의 지도자가 트로이에 첫발을 내딛는 것을 겁냈다면 아카이아 연합군은 승리하지 못했을 것이며, 돈 키호테가 풍차에 달려드는 것을 두려워했다면 그의 모험을 기억하는 이 없을 것이다. 입으로는 용맹을 말하나 심장에는 두려움을 품은 기사란 더없이 한심해 보일 테다. 교실 앞에 선 앨버트는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가엾은 보가트는 제 모습을 무엇으로 바꿀지 고민하다 도망쳐 버릴걸…. 앨버트는 지팡이를 움켜쥐며 제 두려움을 물리치고자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있는 것은 의자에 앉은 한 소녀였다. 우아하게 손짓해 귀 뒤로 쓸어 넘기는 긴 곱슬머리는 붉은색이었으며, 품위 있는 시선을 담은 눈동자는 푸르스름한 은빛이었다. 소녀는 앨버트와 완전히 같은 것을 가졌으나 동시에 앨버트가 한 번도 가져본 적 없는 것을 가지고 있었다. 앨버트는 소녀와 너무도 달랐으나 동시에 전혀 다르지 않았다.

“앨비, 너를 위해 소네트를 지어봤어. 나는 마음에 드는데, 네 마음에도 들었으면 좋겠다.”

쟨 날 언제 봤다고 앨비라고 부르는 거야? 표정을 찡그리는 앨버트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소녀는 가슴에 껴안고 있던 얇은 종이를 손에 들었다. 자그마한 헛기침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녀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네트를 읊기 시작했다.


열네 번의 여름을 보낸 어여쁜 아가씨여,

그대가 따르는 것은 옛 시절의 서사시라.

용맹으로 벼려낸 은빛 검날 날카로우며

따르는 것은 다른 이들의 다정한 찬미라.

다만 아침은 꿈의 광기로부터 깨어날 때,

오늘의 눈부신 광채는 내일 빛바랠 농락.

감미로운 꽃 향에 그대 매일 취해 사는데

꽃이 많은 나무는 즉 떫은 열매를 맺노라.

그대 움직이는 갑옷은 곧 녹슬 금속일 뿐

지금껏 그대의 발은 몇 걸음이나 나아갔나?

갈채 받는 기사마저 낙마하는 것은 일순

손의 검 잃으면 그대 무엇을 지킬 수 있나?

가령 그대 듣지 못해도 나 여기 충언하니,

가련한 기사의 흉내 내는 여인 불행하리.


다소곳하게 앉은 소녀는 낭송을 마치고 앨버트에게 미소를 짓는다. 그녀는 앨버트에게 묻는다.

“앨비. 네가 언제까지 스스로를 기사로 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이제 기사가 아닌 너는 어디에도 없는데. 앨버트 경이 아니게 된 앨버트는 무엇이지? 너는 어떤 이로 기억되지? 너에게는 무엇이 남지?”

기사 돈 키호테는 종자 산초에게 말했다. 두려움이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든다고. 마음속의 두려움이 인간을 올바르게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라고. 앨버트는 자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저 소녀는 내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있다, 나의 두려움을 귀담아들으면 나는 그 무엇도 올바르게 보거나 듣지 못하리라….

“나에게 바치는 찬사를 담은 소네트인 줄 알았는데, 괜히 들었군! 리디큘러스!”

소녀가 앉은 딱딱한 나무 의자는 부드러운 털을 가진 말이 된다. 충실하고 똑똑한 말, 버터플라이는 제 위에 올라탄 것이 주인이 아님을 깨닫고 소녀를 내팽개친다. 조금 전까지 의자 위에 앉아 소네트를 읊던 소녀는 바닥에 쓰러져 높고 짧은 신음을 뱉는다. 다물지 못하는 입술, 유려한 필기체로 소네트를 적어둔 종이를 놓친 손끝, 놀란 눈물이 괸 채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 앨버트는 소녀가 떨어트린 종이를 부러 짓밟으며 소녀에게 손을 뻗는다. 기사는 마땅히 도움이 필요한 레이디를 도와야 하니까. 도움의 손길을 건네는 기사가 없다면 레이디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으니까.

맞잡은 손을 보며 앨버트는 생각한다. 레이디를 도운 나는 진짜 기사야. 나는 틀리지 않았어. 틀린 것은 내 두려움이야. 그러니 내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두려움은 의심을 만들고, 의심은 나를 무엇도 아닌 것으로 망쳐둘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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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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